# 87 < 오해가 낳은 이해 (2) >
청년처럼 박력 있게 식사를 하는 천길룡을 최장환이 흐뭇한 눈으로 보았다. 그의 성품을 아는 진혁이 속내를 짐작할 때, 최장환이 은근하고 느릿한 어투로 말했다.
“으르신, 혼자 사시기 적적허구, 또 여러 가지로 뭣허실 텐디 즈이 집서 같이 사슈-.”
“허허허-. 그래서야 쓰나. 내 집에 식객도 있고······. 대신 아주머니가 내치지만 않으면 내 자주 놀러 오겠소-.”
“암만, 괜찮죠. 말해 뭐해요오-. 잡숫고 싶으신 거 있으시걸랑 말씀만 하셔요.”
진혁은 김순복의 저 말이 진심임을 안다.
저리 다정한 사람들이니 전생에도 진혁을 자식처럼 품었겠지.
김순복은 진혁을 위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엄마 올 때까졍 울 집이 와서 밥 먹어. 동생 챙기느라 고생 말구.”
“네. 감사합니다.”
동생과 둘이 있는 것도 즐거웠지만 진혁은 은근히 말 상대가 그립던 참이다. 어릴 때는 장군이에게 속내를 털어내는 게 낙이었는데, 학교에 다니고 친구를 사귀며 사람과 대화하는 즐거움을 알아버렸다.
사실 문석일을 심문하면서도 느낀 것인데, 정신연령이 비슷한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런 대화 상대로 부모님이나 이웃 어른들만 한 사람도 없지만, 가족이나 이웃은 진혁을 아직 아이로 보기에 뭔가 대등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사회적 관계에 의한 대화의 제약이랄까. 왜 있지 않은가. 직장 동료에게는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말도 가족에게는 할 수 없는······.
이제야 사회적 동물로 다시 태어나는 기분, 다시 태어나서야 인간의 말뜻을 이해하게 된 듯했다.
식사를 마치고 최장환의 더블캡 트럭을 이용해 구봉산으로 향했다. 진혁은 유진이를 최미경에게 부탁해 안전벨트를 채우고, 저는 장군이와 함께 짐칸에 탔다. 시원한 바람이 호흡은 물론 정신까지 상쾌하게 만들었다. 최태양이 있었다면 함께 탔겠지만, 최태양은 추석 당일에도 시합이 잡혀있어 서울에서 오지 않았다.
선녀바위에 도착해 돗자리를 깔고 함께 절을 올렸다. 마치 어제의 일인 듯, 진혁은 할머니가 떠나시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족을 지키라는 말씀과 동생들을 챙기라는 말씀, 장난스레 웃으시던 모습까지.
그동안 제사나 차례 때마다 따라오기는 했으나 이번에는 천길룡이 함께 하니 뭔가 색다른 기분도 들었다.
천길룡은 바위에 손을 얹고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진혁이 아무리 청각을 곤두세워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언어가 다르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말이 빠르고 억양이 특이했다. 교회에 한 번 다녀오셨다더니 방언 익히셨나.
산소에 들러 성묘까지 마치고 왔을 때, 최미경의 집과 가까운 마을회관에서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소리가 넘어왔다. 명절을 맞아 이웃 간에 정을 나누는 웃음소리였다.
“유진아, 마을회관에서 뭐 하나 보다. 오빠랑 구경 갈까?”
“녜, 에헤헤-. 가요. 구경 재밌지요?”
마을회관에서는 우승 상품으로 최신형 TV가 걸린 윷놀이가 진행 중이었다.
“윷놀이는 설날에 하는 거 아닌가······.”
“이웃들 간이 어울리기는 허야거꾸, 이 많은 인원이 고스톱 치기는 뭐허니께 만만헌 눔으루 윷가락이나 던지는 거여어-.”
어느새 다가온 조일헌이 진혁의 등을 두드렸다.
그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목청을 돋웠다.
“여-, 여기 지넥이 왔네! 지넥이네 여행 가구 웁스니께 지넥이더러 대신 허라겨-.”
친목회 회비로 진행하는 대회였는데, 조일헌의 참견 덕에 진혁도 아빠 대신 자격을 얻어 당당히 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회전에서 김은정네 아버지를 상대로 비벼보지도 못하고 탈락했다.
김은정 청소년의 아버지는 윷을 던지기 전 막걸리를 한 잔씩 걸치는 루틴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비틀거리면서도 절대 거르지 않는 모습으로 미루어 진정 윷프로라 칭할만했다.
아무튼 아빠는 종종 상품을 타 오시던데, 손진혁은 완전 똥손이었다.
‘헤헤, 그래도 재밌다.’
진혁은 참가상인 식용유 선물세트를 들고 멋쩍게 웃으며 퇴장했다.
“까하하-! 오빠 졌지요? 상 받았지요?”
식혜와 떡, 부침개 따위를 먹으며 구경하던 유진이는 오빠가 패배했음에도 환호성을 질렀다. 승패를 떠나 오빠가 웃는 모습을 좋아하는 동생이었다.
“아이고-, 우리 유진이 얼굴이 이게 뭐야-. 느허허-.”
챙겨주는 이 없이 혼자 와구와구 집어먹느라 온 얼굴에 기름으로 떡칠을 했다.
진혁과 유진이, 장군이는 남은 연휴 기간을 최미경 청소년의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김순복과 최장환이 적극 권했기 때문에 거절하기 어려웠다. 잠만 집으로 돌아와 자는 식이었는데, 유진이를 좋아하는 최태양과 최미경도 반겼고, 사람이 많으니 유진이와 장군이도 좋아하는 듯 보였다.
놀거리가 많지 않아 낮에는 함께 동네 마실을 다니거나, 책을 읽는 일이 연휴 행사였다. 동생을 맡기고 혼자 운동을 나서는 것도 경우가 아닌 것 같았기에, 좀이 쑤셨지만 진혁도 이 기회에 빈둥거리고 낮잠도 자며 시간을 보냈다.
어른들은 이집 저집 다니며 먹고 마셨고, 미성년자들은 식혜로 건배하며 윷놀이를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농약회사 이름이 크게 박힌 벽걸이 달력 뒷면에 윷놀이판을 그리고, 장기알과 단추를 말 삼아 최 씨 남매 대 손 씨 남매 대결을 벌였다. 집안의 명예가 걸린 경기, 최미경의 집에 영문 모를 긴장이 감돌았다.
그러나 까닭 없는 긴장감이었다.
“에헤헤-, 또 졌지요? 형이 이겼지요?”
오빠처럼 손유진도 똥손이었다.
던질 때마다 ‘도’가 나왔는데, 역시 돼지를 좋아하는 동생이라서 그런 것 같다고 진혁은 진지한 얼굴로 분석했다. 뭐, 같은 논리라면 진혁은 장군이를 좋아해서 매번 ‘개’를 던진 셈이려나.
“야, 안 되겠다. 편 다시 먹자.”
최태양의 제안으로 남자 대 여자로 나누었다.
제법 박빙으로 흘렀으나 주로 남자팀이 승리했다.
아무래도 ‘도’보다는 ‘개’가 유리한 법이었으니.
“에헤헤-. 오빠랑 형이 이겼지요?”
역시 유진이는 누가 이기든 제 녀석이 이긴 것처럼 좋아했다.
진혁은 최미경의 가족 덕분에, 최미경의 가족은 진혁과 유진이 덕분에 더 화목한 연휴를 보낼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해도 다음날 학교에 가지 않으니 연휴는 학생들에게도 얼마나 반가운 시간인가.
늦은 밤, 소꿉친구 집에서 연휴의 한가로움을 누리고 있을 때였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유진이를 안고 어르는데 최미경이 심각한 얼굴로 다가왔다.
“진혁아, 너 유관순 언니 비밀 알아?”
뜬금없이 뭔 소리냐 이건. 일기 대필 요구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최미경 청소년은 엉뚱한 구석이 있다.
“아니? 무슨 비밀이 있으시대?”
“읍내 사는 친구들은 다 알더라.”
심각한 얼굴의 최미경 청소년이 진혁에게 안긴 유진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동자에는 공포가 어른거렸다.
“어으-, 이거 무서운데 말해도 되나 몰라.”
지금 네 눈이 더 무서워. 진혁은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밤 열두 시에 창문 열고 유관순 노래 부른 다음에 유관순 언니 비밀 열두 개를 말하면 죽는대. 어으으-!”
정말 무서운지 최미경은 진저리를 쳤다.
이제 진혁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런가 보다 하며 가만히 있으면 말을 꺼낸 사람만 뻘쭘해진다는 걸 알기에.
“저런······. 그렇구나.”
정말 놀라워. 진혁이 로봇처럼 중얼거렸다.
공감 표현이 효과가 있었나 보다. 웬일인지 최미경 청소년은 한숨을 쉬지 않았다. 대신 신기한 눈으로 진혁을 바라보았다.
“넌 안 무서워?”
“무서울 게 뭐 있지? 난 유관순 누나 비밀 하나도 모른다.”
알지도 못하는 비밀을 어떻게 말한단 말이냐. 진혁이 어깨를 으쓱였다.
“미경이 넌 아니? 난 노래밖에 모른다.”
“아, 그러네?”
밤 열두 시에 창밖으로 머리 내밀고 노래 부르는 짓 자체가 멀쩡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진혁도 전생에 황가영 자매가 저를 겁주기 위해 하는 무서운 이야기를 많이도 들었다. 덕분에 한때는 저를 숨겨주는 고마운 어둠을 무서워할 때가 있었다. 어둠이란 그 자체로 무한한 상상과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었으므로.
아무튼 상남자 손진혁은 그런 아이들 장난에 놀아나지 않는다.
최미경은 연휴에 친구와 함께 있어 신난 듯했다. 어른들은 밤늦게까지 떠들썩하게 고스톱을 치는데, 아이들은 추석 특선영화나 보는 것 외에 즐길 거리가 없었으니까.
“옛날에 우리 할머니가 해주신 얘긴데, 안 마을 끝에 가면 옛날에 군인들 쓰던 초소 있는 거 알지?”
“알지.”
6·25 직후 간첩선을 감시한다고 육군에서 구축한 초소가 많기도 했다. 초소와 초소는 협소한 교통호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아직까지도 그 형체가 온전히 남아있다.
“그 근처에서 나물 캐시다가 이무기를 보셨다는 거야.”
세상에, 드래곤도 아니고 이무기가 어딨니. 신난 친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진혁은 송아지처럼 눈만 끔뻑였다.
“엄청 엄청- 황소보다 큰 항아리가 있길래 가까이 가보니까 항아리가 아니라 뱀이 똬리를 틀고 있던 거래. 근데 이 뱀이 스르르- 풀더니 할머니를 빤히 노려봤대. 근데 뱀에 귀가 달려있더라는 거야.”
최미경 청소년은 팔을 활짝 벌려 큰 항아리를 강조했다.
진혁은 잠시 귀 달린 커다란 뱀을 상상해 보았다. 그런데 부족한 창의력을 증명하듯 사람 귀가 달린 뱀을 상상한 게 문제였다.
큭-!
“야, 손진혁. 웃어? 우리 할머니 뻥치시는 분 아니거든?”
“아, 믿는다. 할머니.”
진혁만큼 할머니를 믿는 사람도 없을 거다. 가시는 혼령도 뵈었으니까.
좀 그럴듯한 귀를 상상했어야 하는데, 코웃음 쳤다가 핀잔만 들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초소에 다다다- 달려가서 군인 아저씨한테 저기 엄청 큰 뱀 있다고 막-. 그래서 군인 아저씨가 이무기한테 총을 막 빠바바방- 갈겼대.”
달리기하는 시늉, 총 쏘는 동작을 흉내 내는 친구를 보며 진혁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설명에 동작이 더해지니 몰입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무기는 어떻게 됐지?”
“죽었지. 총을 갈겼는데 당연한 거 아냐?”
아, 그런가. 좀 싱거운 이야기로 끝났다. 귀 달린 거대한 뱀이 총을 맞고 죽었다. 끝. 역시 최미경은 마무리가 문제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군인 아저씨가 밤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잠도 못 자고 며칠 동안 헛소리를 하다가 바다로 들어가서 실종됐대.”
오, 이무기의 저주였을까.
싱겁던 이야기에 흥미라는 것이 첨가됐다. 내러티브가 주는 재미였다.
“그 후로 할머니도 며칠 악몽 꾸시고 가위눌리고 고생하셨대. 밭에 나가면 누가 지켜보는 것처럼 뒷골이 오싹하고-.”
그 이야기를 하며 최미경은 뒤를 돌아보았다.
진혁도 동생을 안은 팔에 힘을 주고 창을 외면했다. 창밖 어둠 속 어딘가에서 이무기가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이야기가 현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판타지와 리얼리티의 경계는 예고 없이 허물어지기 마련이었다.
“진혁아, 유진이 잠들었다.”
“응. 오늘은 여기서 자야겠다.”
“집에 안 가고? 잠은 집에서 잔다며.”
“응. 유진이도 잠들었는데 오랜만에 네 방에서 자는 게 좋을 것 같다.”
“오랜만에? 너 우리 집에서 잔 적 없잖아.”
······그랬나. 전생에는 읍내로 끌려가기 전까지 미경이 방에서 지냈는데. 아마도 외롭지 말라고 이 댁에서 배려한 것이었겠지.
“아무튼 네 침대 옆에 이불이나 하나 펴주련?”
진혁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최미경 청소년은 신난 얼굴로 척척 이불을 폈다. 친구가 있다고는 해도 늦은 시간까지 한 공간에 머물려 어울리기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집도 멀고, 남녀도 유별했으니까.
아무튼 상남자 진혁은 어둠이 무서워 그런 것이 아니다.
최미경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뒤통수가 따갑고 등골이 오싹한 느낌이 들었지만 무섭지 않았다. 동생을 끌어안고 이불을 머리까지 덮었다.
‘무섭진 않아. 무서운 얘기가 싫을 뿐이야.’
과거로 돌아온 후로 이야기가 그저 만들어낸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 진혁이었다. 친구들에게 듣기로 연휴엔 사촌들이 모여 무서운 이야기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번 추석은 친척 없이 가족과만 어울렸던 진혁에게 새로운 경험을 많이도 선사했다. 그나저나 오늘 오줌 싸는 건 아니겠지.
최미경은 침대에 걸터앉아 진혁을 내려다보았다. 이불 속에서 오들오들 떨며 덩치값도 못하는 쫄보 소꿉친구를. 얘는 그게 부실해서 이렇게 겁이 많은 걸까.
소리 없이 혀를 차고는 불을 껐다.
갑작스레 찾아온 어둠에 이불이 한 번 흠칫했다.
쟤는 인화 단결의 기본도 모르나. 이불이 중얼거렸다.
‘미경아, 등화관제할 땐 말하고 꺼야지.’
낮잠을 잔 탓에 잠이 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유진이 잠꼬대에 저절로 귀가 기울여지며 눈이 스르르 감겼다.
무섭지는 않지만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