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 오해가 낳은 이해 >
마당에서 솔가리와 나뭇가지를 태워 밑불을 만든 다음 장작을 태웠다. 저녁에 돼지고기를 먹게 해주겠다는 유진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야생동물을 먹는다는 게 꺼림칙하지만 완전히 잘 익히면 괜찮겠지. 그리 생각하며 장작이 완전히 숯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조일헌이 준 갈빗대를 준비했다. 말린 식물을 빻은 것으로 보이는 녹색 가루와 라면스프 비슷한 분말 따위가 묻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잡내 제거를 위해 뿌린 듯했다. 사회 생활할 때 먹었던 갈비는 짧았는데, 자르지 않아서인지 이건 길쭉하다. 화석 전시장의 공룡 뼈를 연상케 하는 아치형이다.
버섯뽕 효과가 모두 떨어진 장군이도 유진이 옆에 얌전히 앉아 곁불을 쬐었다.
“에헤헤-, 데지 맛있겠다.”
헤헤헥-.
유진이와 장군이가 나란히 쪼그려 앉아 침을 흘렸다. 그 모습이 어딘가 닮아서 진혁은 웃음이 터졌다. 두 생명의 작은 머리통을 한 번씩 쓰다듬어 주고 오랜만에 석쇠를 들었다.
“오우야, 살점이 많기도 하다.”
“오와, 많아요. 데지 오빠가 때찌했지요?”
“으응, 유진아.”
유진이는 뒷산에서 만난 그 돼지가 맞는지 계속 물어보았다. 다른 돼지라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집념이 엿보였다.
‘겁나 뜨겁구먼.’
목장갑을 두 겹이나 꼈음에도 숯의 열기가 심상치 않다. 이쪽저쪽 손을 바꿔 잡으며 고기를 구웠다. 그리 고군분투하자니 어두운 저편 구석에서 유진이가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다.
쟤 또 응가하나? 설마, 장군이도 아닌데 교양있는 유진이가 마당에 똥쓰를 전시할 리 없는데.
“유진아. 뭐하니?”
“오빠 뜨겁지요? 힘드러워요. 부로꼬 써요.”
아, 오빠가 고생하니 벽돌을 괴어 석쇠를 올리자는 뜻이었구나. 나도 저 나이 때 저렇게 똑똑했을까, 진혁은 고민해 봤지만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후다닥 달려가 동생 대신 벽돌을 챙겼다.
어른들이 사용하는 말을 배워서 그런 것일 테니 벽돌을 부로꼬라 부르는 건 그렇다 치고, 힘드러워요는 드럽게 힘들다는 뜻인가. 역시 유진이는 언어의 마술사다.
방학 때 진혁이 운동할 때의 일이다.
아프던 허리가 나아 신난 진혁은 소파 밑에 발을 넣고 윗몸일으키기를 했었다. 그 옆에서는 당연히 손진혁 껌딱지 홍수정이 용을 썼고.
-“흐냐냐- 이이익-.”
-“오빠는 윗몸일으키기, 언니는 잇몸일으키기지요?”
잇몸을 악문 이빨 없는 홍수정의 입술을 들추며 유진이가 던진 말이었다. 온 가족이 배를 잡고 웃었지.
진혁은 잘 구워지는 갈빗대 위에 천일염을 뿌렸다.
따다다다닥-.
“까하하-!”
그 소리가 신기했는지 유진이가 박수를 치며 웃었다. 즐거워하는 동생을 보며 마음이 푸근해졌다. 그러면서도 문석일 일행을 떠올리며 마음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최대한 빨리 조사해서 전화하라고 일러두었다. 누가 사주한 일인지 알아내는 대로 연락이 올 테고, 당분간 경호팀이라는 땅꾼들이 도움이 되겠지만, 어쨌든 대책을 세우기 전까지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살아야 한다.
‘아빠와, 홍기준 아저씨한테도 말해야 할 테고.’
홍기준은 진혁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진혁으로서는 의지할 수 있는 힘 있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었다. 이미 대한민국에 내로라하는 경영인이 된 사람이고, 아빠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친구이니 도움이 될 터였다.
조용하고 평범하게 살기 참 어렵구나.
“오빠, 불났어요.”
“응?”
깊이 고민하는 사이 갈비에 불이 붙어 하나가 시커멓게 탔다. 진혁은 후후 불어 갈빗대에 붙은 불을 끄고 탄 부분을 벽돌에 비벼 긁어냈다. 고민 없이 장군이에게 던져주었다.
식으면 먹겠지.
헤헷- 깽!
“식으면 먹으라고 인마.”
데었는지 주둥이를 땅에 비비던 장군이는 화장실 급한 사람처럼 급히 물을 마시러 갔다.
그 모습에 진혁과 유진이가 함께 웃었다. 심신이 고단한 하루였지만 동생과 더불어 보내는 행복한 시간이 근심을 희석시켰다.
“오아-, 마이떠오-.”
뜨거운데도 제 손으로 잡고 갈비를 뜯는 유진이를 보며 진혁은 다시금 행복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행복, 그거 별거 아니었다. 아빠는 지역 최고 부자에, 아빠의 절친은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기업인이라는 치트키가 있긴 했지만. 제 옆의 생명이 행복해하는 모습이야말로 최고의 보상이었다.
‘훼방꾼들만 없으면 이대로 살아도 되는 일이었는데. 다 텄네.’
구운 등갈비를 한입 베어 물었다.
척척박사 조일헌이 잡내를 기가 막히게 처리했다더니 과연 사실이었다. 숙성할 시간이 없어 조금 질겼지만 노린내도 나지 않고 맛이 괜찮았다. 묘사하기 힘든 불맛과 육즙의 향연이 입안에 펼쳐지며 아련한 향수를 되새겼다.
‘소맥 땡긴다.’
맥주보다 목 넘김 좋고 짜릿하지만 미성년자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음료. 그러나 몰래 마시면 끝내주겠지. 과거였으며 미래가 될 경험에 대한 향수였다.
쩝. 눈치 보지 않고 혼술 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참 긴 하루였다.
멧돼지와 사투를 벌이고, 그다음에는 인간과 신경전을 벌이고······. 문석일 일행은 진혁과 다르게 생각할 것 같지만 아무튼.
마당에 쪼그려 앉은 오누이를 감싸듯 멀리 바다에서 훈풍이 불어왔다.
짠내 품은 바람이 진혁의 눈물샘을 희롱한다. 그날만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시리고 쿵쾅거리는 탓이다.
‘엄마랑 아빠 보고 싶다.’
아무 근심 없는 유진이는 쫍쫍 소리를 내며 등갈비를 뜯었다.
그러다가 오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유진이, 왜? 오빠한테 할 말 있어?”
“히이-.”
유진이가 입가에 번질번질 육즙을 묻히고 오랜만에 못난이 웃음을 선보였다. 기분 좋을 때 하는 짓이지만 꺼내기 어려운 말이 있을 때도 보여주는 미소다.
“······냉장고에 간장 없지요?”
아, 유진아.
없다고 하면 울 듯한 눈동자와 말투였지만, 실제로도 없다는 걸 알고 있는지 얼굴은 슬퍼 보였다.
“지금은 없어요. 오빠가 다음에 사줄게.”
“녜, 에헤헤-.”
진혁은 내심 의아했다.
언젠가 유진이에게 콜라를 주기로 약속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기억하기로 그런 약속을 한 적은 없는데.
아무튼 동생이 서운해하지 않아 다행이다. 잘 때가 되어 칭얼거릴만한데도 유진이는 조르는 법이 없다. 고기 먹고 싶을 때는 빼고.
이제 유진이 양치시키고 자면 파란만장했던 하루가 끝난다.
‘아니, 아직 아니지.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진혁은 물끄러미 발치를 바라보았다.
추석을 맞아 휘영청 밝은 달빛을 받아 짙게 그려진 그림자가, 숯불까지 받아 너울거리고 있었다.
‘너······, 누구야?’
사춘기에 접어들며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성장통을 겪으며 몸도, 정신도 한층 성장했다. 단순 추측이 아닌 여러 증거를 종합하고 분석한 자의 당연한 의심이었다.
스스로 둔하다, 둔하다 해도, 눈치가 없을지언정 진혁은 멍청한 사람이 아니다. 정면에서 받는 시선이 하나같이 제 눈이 아닌 머리 위를 보는 데 모르는 게 바보지. 그것도 진지한 상황에서.
진혁은 확인할 방법을 알고 있다.
*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이 많은 세상이다. 혹은 그 반대일 때도 있고.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하는 일은 또 얼마나 많던가.
진혁은 늦은 밤이 되어 유진이가 잠든 틈에 옥상을 찾았다. 개집에서 돼지 뼈를 갉던 감별견 장군이도 아닌 밤중에 불려왔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꽝이었다.
명상으로 심신의 모든 잡스러움을 몰아내도 장군이는 으르렁거리지 않았다. 그저 진혁의 발치에 앉아 꼬리를 흔들 뿐. 보름달만 떠도 짖는 녀석이 얌전하니 달리 도리가 없었다.
“장군아, 아무것도 없니?”
헤헤헥-. 갸웃거리지도 않고 빤히 쳐다보는데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방법을 달리 해볼까 싶어 진혁은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
발치의 그림자를 빤히 노려보며.
“나와라.”
불러도.
“이십세기야.”
욕을 해도.
“너 아이큐 두 자리지?”
인신공격을 해도 진혁이 의심하는 존재는 나타나지 않았다.
너 아빠랑 발가락만 닮았지? 라고 하려다 패드립은 경우가 아닌 것 같아 참기로 했다. 가족에게 해코지할지도 모르니까.
최미경의 할머니가 등선하시던 날에도, 천길룡 할아버지가 찾아왔던 날에도 그들의 예사롭지 않은 시선을 느꼈다.
급변한 문석일의 태도를 접했을 때가 결정적이었다. 동공이 흔들렸다 한들 상대의 시선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할 이유가 없을 터. 분명 문석일의 시선은 진혁이 아닌 그 뒤의 뭔가를 보는 눈치였다.
“흠. 지금 난 혼란스럽지 않은데.”
괜한 의심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춘기 방황이나 망상도 아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는 동생 곁을 지켜야 하니까.
스스로 설정한 시간이 길지 않다는 뜻이다. 상담하거나 속내를 털어놓을 사람이 없으니 혼자서라도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안 나오면 나 밥 굶는다? 3층에서 뛰어내리는 수가 있어. 무당 불러서 굿하면 나올래? 매일 생마늘 열 통씩 먹을까? 은수저로 밥 먹는다? 5분 동안 잠수하는 수도 있어.”
근본 없는 온갖 퇴마 지식을 동원, 숨도 쉬지 않고 협박했음에도 그림자는 잠잠했다.
“안방에 있는 비디오 보여줄게.”
아, 이 말은 괜히 꺼냈나.
회유책을 썼다가 진혁은 괜히 제 마음만 싱숭생숭해졌다.
“안 나올 거야? 관음증이냐?”
중얼거리는 진혁을 보며 장군이가 갸웃거렸지만 개의치 않고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한 번 의심한 사안은 끝까지 파헤치는 성격 탓이다.
“거기 있는 거 알아. 전생에도 나와 함께였나? 그래서 내가 돌아온 건가? 홍기준 아저씨 정체도 알고 있나?”
애써 봤지만 보이는 것은 달빛이 만들어낸 그림자요, 들리는 것은 때 이른 귀뚜라미 소리뿐이었다. 주위 사방에 움직이는 물체는 보이지 않았다.
중얼중얼-.
보름달이 서쪽으로 기울도록, 하품이 나올 때까지 진혁은 옥상을 서성였다.
혼자 떠드는 적막을 이기지 못하고 진혁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무슨 이유로 붙어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사람 해코지하지 마. 날 억지로 도울 필요도 없어. 사람 사이에서 살아야 인간이지만, 인간은 혼자 두 발로 설 수도 있어야 하는 거랬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진혁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림자를 곁눈질했다.
협박도, 회유도 먹히지 않으니 감동을 주면 자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반응 없는 그림자가 괜스레 민망함만 더했다.
“음. 내가 또 오버했나?”
오해한 걸지도 모르겠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1층으로 발길을 돌렸다. 터덜터덜 걷는 걸음에 힘이 없었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면 마는 거지 뭐.
헤헤헥-.
장군이는 따르지 않고 혀를 빼고 보름달을 구경하고 있었다. 한 달에 두 번 이상 볼 수 있는 모습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동생이 깰까, 조심스레 현관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섰을 때.
“히익-.”
유진이는 현관 앞까지 기어와 개구리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분명 안방 침대에 눕혔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걸까. 평소에는 2층 계단을 올라 오빠 방 앞에서 자는데 아무도 납득할만한 이론을 제시하지 못했다.
신기한 녀석이다.
***
남은 연휴는 멧돼지도 만나지 않고, 멧돼지보다 약한 해결사들과의 조우도 없이 평화롭게 보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동생을 씻기고 색동저고리를 입혔다.
더 크면 맞지 않을 테니 그냥 있으니 입히는 거다. 모든 일에 때가 있다던데 색동저고리를 입는 것도 그중 하나겠지.
“아이고, 이뻐라 우리 애기.”
동생 손을 잡고, 아빠가 사둔 배 상자를 어깨에 메고 최미경 청소년의 집으로 향했다. 아침 먹으러 오라는 최미경의 전화를 받아서인데, 집에는 최장환의 가족 외에 천길룡도 있었다.
김순복이 모락모락 김이 나는 갈비찜을 상에 올렸다. 멧돼지가 아닐까 살짝 긴장했는데 모양새를 보니 돼지가 아닌 소갈비였다.
“지넥이랑 유진이도 많이 먹어이-?”
“잘 먹겠습니다.”
“녜-, 에헤헤.”
천길룡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오, 자네가 지넥이였구나?”
“네.”
뭔가 발견한 듯한 어린아이 같은 천길룡의 눈을 보며 진혁은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천길룡은 지난밤 맛있게 먹은 멧돼지를 떠올리며 기분 좋게 웃는 것이 전부였다.
“에흠. 난 천가 길룡이다.”
“예······.”
아무렴, 추석 밥상머리에서는 통성명도 하고 그러는 거지.
이미 아는 이름이었지만 진혁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진혁의 기대와 달리 천길룡은 끝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소고기뭇국에 밥을 말아 김치를 얹어 먹는 일에 집중할 뿐이었다.
‘분명 뭔가 있는데. 할아버지 눈에도 안 보이시는 건가. 나 혼자서라도 어떻게든 알아내야지······.’
뭐,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언제고 밝혀내리라 다짐했다.
이젠 무엇이든 확실히 확인하고 넘어가기로 했으니까.
“냠냠-, 맛있어요-.”
유진이는 최미경이 떠먹여 주는 밥을 받아먹고 있었다.
천길룡의 먹성에 시장기가 동한 진혁도 하얀 쌀밥을 크게 떠 입에 욱여넣었다.
역시 밥이 최고다.
“진혁아, 오늘도 선녀바위 같이 갈 거야?”
“우웅-.”
햄스터 같은 볼따구니를 어쩌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미갱이 얘는 왜 밥 먹을 때 묻고 그러냐. 볼에 묻은 밥풀이나 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