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 악인을 위한 서사 (6) >
진혁은 짐짓 여유를 부리며 운전석 차창 밖으로 팔을 걸쳤다.
누군가 거액을 주며 남자와 여자를 납치하라는 사주를 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차라리 죽이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 정도의 일을 시킬 사람이라면 의뢰인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을 거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한다는 게 참 저는 이해가 안 가네요.”
이들을 구속해두기 위해 압박할 필요를 느꼈다.
문석일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몸만 날랜 것이 아니라 머리까지 만만치 않다. 저 나이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성인군자라도 흥분해서 이성을 잃을 것 같은데. 하긴, 인간 병기 넷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킨 괴물이니 여기서 더 이상한 일이 생겨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그래도 지금은 이리저리 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알아 올게! 누가 시켰는지!”
문석일이 스스로 다짐하듯, 동료들에게 다짐받듯 차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병원을 찾아 친구들을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진혁의 굳었던 얼굴이 슬며시 풀었다. 드디어 듣고 싶은 말이 나왔다.
“그래야겠죠. 잊지 마세요. 저한테 목숨 빚졌어요.”
“그, 그래. 그러니까 차 좀······.”
“우웩-!”
쿨럭-! 강헌창이 피를 토했다. 하얀 와이셔츠 위에 검붉은 핏덩이가 왈칵 쏟아졌다. 매캐한 탄 내 비슷한 냄새 섞인 피비린내가 차 안에 진동했다.
“끄으으-.”
고통에 사로잡힌 강헌창이 흰자위를 까뒤집었다.
‘생각보다 심각해 보이네.’
진혁은 강헌창의 복부와 흉부를 손으로 더듬었다. 의학지식 따위 있을 리 없다. 그저 감으로 살피는 것일 뿐. 기회를 주기로 했으니 누구도 죽지 않는 게 나았다. 누군가 더 상한다면 이들이 악감정을 품고 폭주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런 마음을 담아 조심조심 강헌창의 상태를 점검했다.
‘이 정도면 죽지는 않겠어.’
강헌창의 심장은 튼튼하게 맥동했고 꾀병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혈색도 좋았다.
진혁이 강헌창에게서 손을 떼고 문석일에게 팔을 뻗었다.
“손 줘요.”
멀쩡한 손도 부러뜨리려나 싶어 의심스러운 눈으로 문석일이 손을 내밀었다.
“부러진 손.”
문석일이 미간을 찡그리며 손가락이 부러진 오른손을 내밀자 진혁이 지체 없이 움켜쥐었다.
아드득-.
“크윽!”
부러져 기형적으로 꺾였던 손가락이 원래의 형체로 돌아왔다.
“운전은 아저씨가 해야 할 거 같아서요.”
“아, 그래.”
정상태와 김인랑은 뱃멀미하는 사람처럼 안색이 창백했다.
어차피 살인적인 훈련을 거친 문석일에게 부러진 손가락의 통증 따위는 익숙한 감각 중 하나, 진혁이 운전석을 내어주자 문석일이 운전대를 잡았다.
서둘러 시동을 걸고 1단 기어를 넣었다. 손의 통증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잠이 들었는지 호흡이 차분해진 강헌창을 보며 마음이 급해졌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혁이 허리를 숙여 차 안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딴 맘 품지 말고요.”
진혁의 손에서 종이가 팔락거렸다.
문석일 일행의 목숨값이 적힌 백지수표였다.
***
부우웅-. 떠나는 차를 보며 진혁은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세히 알아보는 게 먼저겠으나, 좋지 않은 일에 휘말린 기분이었다. 분명 저들의 배후에 있는 인물이 진혁의 전생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육감의 판단이었다.
‘저런 프로들을 보낼 정도의 인물이라면 한 번으로 끝내지 않을 거야.’
홍기준도 뭔가 알고 있었으니 조치를 취한 것일 테고. 어쩌면 미래는 물론 과거의 정보까지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번 일을 계기로 홍기준과 대화를 트는 일도 쉬워질 거다.
후우-, 한숨이 나왔다.
인생이 이상하게 흘러간다.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그래서 부모님이 살아계신 것으로 만족했고 충분히 행복했는데.
‘아직 바뀐 건 없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고 해야 할 일을 알게 됐으니 좋은 거지.’
그래도 평범하게 살겠다는 진혁의 목표는 아직 유효하다.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종이를 펼쳤다.
‘이름이 특이하네.’
종이에는 연락처, 주소, 가족관계 따위의 정보가 기재되어 있었다.
진혁은 종이에 적힌 사내들의 이름을 나직이 읊었다.
문석일, 정상태, 강헌창, 김인랑······. 왠지 낯익은 이름이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종이를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허위 기재했으면 어쩔 수 없고.’
진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악인 흉내를 내고자 한 것이지, 진짜 악마가 될 생각은 없다.
‘나도 참 놀랍도록 침착하네.’
우발적 상황에 놓일 때마다 느낀 것이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심각함에도 그렇지 않은가. 폭력을 휘두르고, 칼을 들고 덤비는 프로 격투가를 상대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흥분도 되지 않았고 혼돈감에도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심장이 늦게 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차분하고 냉정했다.
‘아빠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사고로 위장할만한 사람.’
일단 마을에 의심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문석일이 알아오지 못한다면 그 사람을 조사해야 하는데 몇 년 전 야반도주를 했다.
최장환과 조일헌이 집에 찾아와 한숨 쉬며 나눈 대화를 기억한다.
- “이눔 섀끼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가꾸 냅다 텼댜-.”
- “에헤이-. 이 성님 또 까닭 웁는 소리 해싼네. 대순이는 지 옴니 편찮을 때두 기도 한 번을 않는 눔이었슈-. 무조건 병원 모시구 갔지. 그런 눔이 사이비에 빠져?”
모친 병원비 때문에 땅과 소를 모두 팔고 빚까지 졌다며 조일헌이 속상해했었다.
‘그 삼촌들 연락 오면 박대순 아저씨 찾아달라고 해야겠다.’
공포는 충분히 심어주었으니 이제 자비를 베풀 차례인데, 병원비라도 보태면 좋으련만 돈은 없고. 학생이라는 신분이 이럴 땐 아쉽다. 학생은 학교에 가야 하니까.
그래도 학교와 가정의 일원이라는 소속감은 내심 위안이 된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아빠랑 홍기준 아저씨하고도 이제 진지하게 대화를 할 때가 된 것 같고.’
이제 가족이 늘었으니 아빠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토록 집요한 적인데, 정공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다른 방식으로 도발해 오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약한 엄마와 어린 유진이가 더 걱정이다.
‘땅꾼들이 멀리서 지켜보는 걸로는 부족할 수 있어. 내가 옆에 없으면 불안하기도 하고.’
진혁은 최미경 청소년의 집에 먼저 들렀다.
조일헌이 주는 갈빗대와 앞다리를 챙기고, 온 길을 되짚어 집으로 향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놓칠까,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계획을 세웠다.
손진혁의 머릿속에는 수 페이지의 계획서가 작성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진혁의 심장을 10배속으로 뛰게 만드는 소리가 들렸다.
빼애애애액-!
“오빠아-! 으아아아아앙-.”
“아이고오! 유진이 깼구나!”
어린 녀석이 어찌나 목청이 좋은지 동네가 떠나갈 듯 들썩였다.
진혁의 다리가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느려지고 귓가를 어지럽히던 바람 소리조차 숨을 죽였다. 금세 시야에 집이 들어왔다.
“으애애애앵-! 오빠아아아-!”
잠에서 깨어 오빠를 찾으러 마당에 나온 유진이가 장군이를 끌어안은 채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장군이도 자다가 깼는지 흐리멍텅한 눈으로 유진이의 뺨을 핥았다. 그런 장군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진이의 울음은 좀처럼 그칠 줄 몰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동생이 자신을 찾아 울다니. 따가운 가을 햇살이 심장에 직접 내리쬐기라도 하는 듯, 밤 가시에 찔린 듯. 진혁의 가슴이 콕콕 쑤셨다.
“오구구구- 울지마. 울지마 울애기-. 오빠가 미안해-.”
“녜, 에헤헤-.”
손유진은 오빠가 번쩍 안아 들자 거짓말처럼 울음을 그쳤다.
전생의 아홉 살 때. 해루질을 나간 뒤 아침이 되어도 오지 않는 부모님을 찾으며 얼마나 울었던가. 이 어린 유진이도 자다 깼는데 의지할 오빠가 보이지 않으니 그 심정으로 우는 거 아닐까.
가슴이 격렬하게 두방망이질을 하고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미안해, 유진아. 이제 괜찮아.”
“에헤헤-, 오빠 왔지요?”
유진이가 진혁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 손길에 맹수의 심장이 녹아내렸다.
“그래, 오빠 여깄어.”
꼭 끌어안은 오누이가 서로 등을 다독였다.
***
태양군 읍내에는 의료원이 없다.
문석일은 10킬로미터를 운전해 나갔다가 소규모 개인의원만 있다는 사실을 확인 후 허탈감에 빠졌다.
“아이 씹! 헌창이 죽겠네.”
가속 페달을 거칠게 밟으며 욕설을 뱉었다. 동고동락하던 군 동기이며 사회에 나와서도 함께 일하는 몇 안 되는 친구였다.
“석일 형, 나 괜찮아. 죽을 것 같지는 않네.”
“뭐? 헌창이 너 진짜 괜찮아?”
“어, 아까는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찔리는 느낌도 없어.”
비록 작은 목소리였지만 강헌창은 힘들이지 않고 자신의 상태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강타당했던 부위를 슬쩍 쓰다듬었다. 아프지 않았다. 조직이 괴사해서 감각이 무뎌진 것과는 다른 느낌. 멀쩡한 신체의 감각이었다.
“나 진짜 멀쩡한 거 같은데? 갈빗대는 몇 개 나간 거 같지만.”
문석일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내심 안도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 칼을 피해?’
허공에 칼을 휘두르는 느낌이었다.
검술은 어떻고? 콩줄기였을 거다. 콩밭 근처였으니까. 손진혁은 콩 줄기처럼 약하고 가느다란 막대기를 주워들더니 매섭게 휘둘렀다.
일격에 손목을 맞아 단검을 떨구고, 두 번째 공격에 이마를 맞아 피가 흘렀다. 세 번째 오른쪽 공격은 옆구리에 꽂혔고, 네 번째 공격은 목 앞에서 멈췄다.
문석일은 직감했다.
더 덤볐다가는 콩줄기가 자신의 목을 꿰뚫었을 거라는 것을. 비겁한 손이라며 손가락을 꺾고 주먹이 얼굴로 날아들었다. 그러니까, 문석일은 나쁜 짓하면 안 된다며 애송이에게 혼난 거였다.
어쩌다 손이 잡혔는지는 기억도 없다. 뭔가에 홀려 정신이 나갔다가 손가락이 부러지며 정신을 차린 느낌이었으니.
‘하-, 쪽팔리지도 않어.’
쪽팔릴 틈도 없었다. 다행이라면, 친구들은 모두 실신한 상태였기에 문석일이 당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거랄까.
그 괴상한 검은 그림자도 기억에 생생하다. 문석일은 친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비겁한 핑계라는 말이 돌아올까 걱정해서만은 아니다.
- 【······이로써 계약을 맺는다. 입이 얼마나 무거운지, 심지가 얼마나 굳은지 지켜볼 것이다.】
분명 머릿속으로 그리 말했다. 진혁과 한 몸처럼 움직이고 동일한 인격체로 여겼던 실루엣이 개별행동을 보인 것이다. 과연 저승사자다운 위엄이었다.
살만한지 강헌창이 후우- 숨을 뱉는 소리가 뒷좌석에서 들렸다.
“석일 형, 우리 어쩌지?”
“어쩌긴. 약속대로 해야지. 목숨 빚진 거 잊었어?”
“우리 괜찮을까?”
사주한 놈이 가만둘까? 착수금으로 받은 돈도 적지 않았는데. 분명 거물일 거야. 턱을 움직이기가 여의치 않은 두 사람은 문석일과 강헌창의 대화를 들으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입술을 비집고 흐르는 검붉은 피를 훔치면서였다.
왼손으로 운전대를 꽉 쥔 문석일이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다. 그런데 다른 생각은 안 드네.”
“크큭-.”
문석일의 말에 강헌창이 쓰게 웃었다.
공포.
힘없는 토끼가 거대한 호랑이를 마주치면 그렇게 될까. 아마 그럴 거라고 강헌창은 생각했다. 딴생각 품지 말라며 차 안의 일행을 노려보던 진혁의 눈. 그 눈에서 강헌창은 거부할 수 없고 도전할 수 없는 공포를 체험했다.
“석일 형, 우리 은퇴할까?”
강헌창이 나직이 말했다. 안정을 찾은 강헌창을 보며 주행 속도를 낮춘 문석일이 다시 한번 한숨을 토했다.
“그게 좋겠다.”
사주한 놈이 누군지만 확인하고. 어차피 실패했으니 어느 쪽에서든 가만두려 하지 않을 거다. 오늘 마주친 놈이 자비를 베푼 것이 행운이었다.
다른 두 사람도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콩줄기로 검도하는 놈을 무슨 수로 당해.’
콩줄기가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던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듯했다. 순간 목을 옴츠린 문석일이 진저리를 쳤다.
***
해가 지고 어두워진 후에도 진혁은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했다.
마당에서 뛰노는 유진이와 장군이를 멍한 눈으로 쫓으며.
숨차도록 달린 유진이가 혀를 빼물고 다가왔다. 장군이와 친하게 지내더니 하는 짓이 여러모로 닮아간다.
“오빠, 데지 구워 먹지요?”
아, 맞다. 진혁은 화들짝 놀란 사람처럼 땅을 박차고 일어섰다.
너무 몰입한 나머지 점심부터 굶은 것도 잊고 있었다.
‘어쩐지.’
너무 배가 고파서 불청객들에게도 난폭하게 굴었던 거야.
진혁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대표적인 종 특이성 행동인 자기변호를 실시한 진혁, 마당에 땔감을 모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