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 악인을 위한 서사 (5) >
문석일의 설명으로 미루어 진혁은 땅꾼들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부릴 정도의 재력이라면 배후에 홍기준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유추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이들이다.
이들은 도대체 누가 보냈단 말인가.
생각할 시간도 없이 문석일이 설명을 이어갔다.
“어디 사시는지 훤히 알고 있으니 우리가 포기해도 다른 놈들을 붙일 겁니다.”
진혁은 문석일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저었다.
머릿속이 차가워지며 그간 제쳐두었던 모든 의심스러운 정보를 다시 끄집어냈다.
‘다른 놈들도 이미 붙였었겠지.’
땅꾼들 손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터였다. 생사는 알 수 없으나 홍기준의 성정상 누굴 해치지는 않았다 해도 말이다.
머리가 맑아지며 왜 자신이 전생에 그렇게 살아야 했는지 인과가 그려졌다. 마치 기획안을 작성하듯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건의 발생과 경과를 머릿속에 도식화했다.
그리고 아홉 살의 그날에도 의심 가는 사람이 있음을 짚어냈다.
‘갯벌 사고가 아니었어.’
진혁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검은 실루엣이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는 모습이 문석일의 눈동자에 비쳤다. 덜컥 겁이 난 문석일이 급히 덧붙였다.
“우리 전에도 시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증거는 없지만 우리에게까지 의뢰가 온 걸 볼 때······.”
진혁은 듣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그 생각을 하던 중이었으니.
진혁은 제가 서 있는 세상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탐욕과 야만의 시대.
21세기에도 자유와 정의라는 가면을 쓴 탐욕이 불을 뿜었으니 비단 이 시대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당사자, 관계자라는 무게감이 흔하디흔한 시대의 소음에도 다리를 휘청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가족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신 건가?’
할머니도, 천길룡 할아버지도.
아빠와 홍기준이 그토록 자주 연락을 취하고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까닭도 알 것 같았다. 아빠에게 서운했던 감정이 다소나마 사그라들었다. 아빠는 가족이 걱정할까 봐 말을 더욱 아낀 거야.
간첩으로 오인한 그림자와 땅꾼들은 홍기준 아저씨가 붙인 사람들이 분명할 것이었다. 아빠를 보호하기 위해서.
엉뚱한 삼촌들을 조질 뻔했다.
진혁은 문석일을 향해 팔을 뻗었다. 손을 잡고 일어서는 문석일을 보며 혹시나 하는 마음을 담아 물었다.
“더 공유할만한 정보는요?”
【더 공유할만한 정보는?】
“아, 그게 잠시······.”
문석일이 재킷 안주머니를 뒤져 고이 접힌 종이를 건넸다.
진작 이렇게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퉁퉁 부은 문석일의 얼굴을 보며 진혁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애초 천성에 측은지심이 강하게 자리 잡은 까닭이다.
문석일이 건넨 종이를 펼친 진혁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나 아홉 살 때 지금 주소로 전입을 하셨어?’
수기로 작성된 조사 보고서와 지도에 의하면 손광연의 이전 주소지는 20km가량 남서쪽에 위치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자동차로 이동한다 해도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가자면 40분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
지금은 당연히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지만 진혁은 어딘지 알고 있는 주소였다.
‘엄마 사시던 집.’
이동수단 없는 그 옛날, 부모님은 꼬박 하루가 걸려 걸어오셨겠지.
부모님은 진혁이 아홉 살 되던 해에 현재의 주소로 전입을 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혼인신고와 함께 처가로 전입 신고를 한 것이었구나.
‘그래서 어릴 땐 우편물이 미경이네로 왔을 테고.’
수취인도 최장환으로 되어 있었다. 집을 짓기 전에 임시로 전입 신고를 하느라 그랬다고 둘러대던 아빠였다. 차명 계좌까지 사용하던 시절이었으니 주소지 허위등록 등은 고의에 의한 위법이라기보다 오류로 치부했을 터였다. 고위 공직 후보자가 아니니 신경 쓸 사람도 없었겠지만.
진혁이 마침내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저씨한테 고마워해야겠네.’
턱턱-!
문석일은 멀쩡한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연거푸 때렸다. 살벌한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와 함께였다. 진혁에게서 은은하게 느껴지던 투기가 가라앉았음을 눈치챈 까닭이다.
조금씩 눈의 초점이 돌아왔다. 정신이 또렷해지며 애송이를 에워싼 실루엣도 사라졌다.
“우리 아빠에 대한 정보는? 어떤 사람이라는 말은 없었어요?”
“에? 아빠?”
이번에는 문석일의 눈이 커졌다.
스무 살에 낳은 아들인가? 그럼 얘도 스무 살인가?
빤히 들여다보는 진혁의 시선에 문석일은 되묻지도 못하고 침을 삼켰다.
“의뢰인이 그런 걸 알려줄 리 없고, 따로 조사도 해봤지만 신분에 특이사항은 없었습······.”
침착하게 다시 보니 아무래도 성인은 아닌 것 같은데. 말꼬리를 흐린 문석일이 갸웃거렸다.
“그런데 말이에요.”
진혁이 헛숨 쉬듯 가볍게 내뱉었다.
“아저씨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결정을 못 내리겠단 말이죠.”
“책임은 내게 물으시고 부디 이 친구들에게는 관용을······.”
광대가 함몰되었는지 한쪽 얼굴이 심하게 뭉개지고 눈이 퉁퉁 부은 문석일이 애처롭게 고개를 떨궜다.
‘이런 씁-.’
진혁이 쓴 입맛을 다셨다.
이들을 포섭하고 싶은 마음을 떠나, 일단 악인으로 규정한 상대인데도 왜 이리 딱해 보일까. 홀로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는 남자에게 일말의 호의를 느낀 탓도 있으렷다.
쓰러진 사내들을 살폈다. 목을 더듬어 맥을 짚고, 눈을 까뒤집어 동공을 살폈다. 멧돼지처럼 배변을 하지 않았는지도 확인했다.
‘이대로 둬도 죽진 않겠네.’
어차피 죽을 사람들도 아니다. 타격 순간 돌아온 단단한 바위를 치는 듯한 반발력이 이들의 견고함을 역설했다. 이들을 활용할 방법을 찾으려 적당히 기절만 시키기도 했고.
후우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동료를 살리고자 돌변한 문석일과 널브러진 사내들을 보자니 진혁은 이들이 불쌍했다.
‘멧돼지보다 느리고 맷집도 약한 사람들······.’
비록 첫 단추를 잘못 꿰어 이 지경까지 오긴 했으나 이들은 부모님에게 아직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가족을 보호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들에게도 참작할만한 사정이 있는 건 아닐까.
‘가족이 우선이긴 한데······.’
숨만 꼴딱거리는 모습에 마음이 좋지 않다.
악인을 위한 서사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었다.
악행을 일삼는 자에게 자칫 면죄부가 될 수 있는 서사를 부여한다면 누군가는 살인마에게도 동정표를 던질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살인마에게 희생된 사람은 무슨 죄란 말인가. 하여 진혁은 본디 악인의 속사정 따위 알고 싶지 않았다.
뉴스에서 주취 감경이니 심신미약이니 하는 말만 나와도 저도 모르게 판사를 욕하던 진혁이다.
‘상황을 내가 통제할 수 있다면 악인을 구제해도 되는 거 아닐까.’
진혁은 턱을 쥐고 서성였다. 어떻게 하면 이들을 묶어둘 수 있을까, 무슨 방법을 써야 홍기준이 알려준 대로 포섭할 수 있을까.
문석일의 눈동자를 달고 다니며 잠시 고민하던 진혁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들의 차에서 종이와 볼펜을 찾아 문석일 앞에 던졌다.
문석일이 영문을 몰라 고개를 들자 진혁이 차갑게 말했다.
“아저씨들 목숨값을 적어요.”
아직 공포가 부족하다. 다혈질보다 냉혈한이 공포주입에 효과적이라고 했다. 진혁은 홍기준이 가르친 이론대로 착실히 수행했다.
그 이론에 자신의 임기응변을 더했다.
이들의 이야기 정도는 들어줘도 되지 않을까.
살길을 찾아줘도 되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면서도 딴마음을 품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진혁은 기꺼이 스스로 더한 악인이 되어 이들의 서사를 들어주기로 결정했다.
“개인 정보, 가족 인적사항, 주소와 연락처. 다 적어요. 긴말은 필요 없겠죠.”
문석일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볼펜을 들자 진혁은 혼절한 이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엄지로 인중을 누르며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 누르니 정상태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
“오빠, 한국은 몇 시일까요?”
“아마 저녁때쯤 됐을 거예요. 시차가 열아홉 시간 정도, 그러니까 거꾸로 생각하면 다섯 시간 정도 차이나요.”
손광연이 손유진처럼 손가락을 꼽아가며 설명했다.
와이키키 해변과 도로 하나를 두고 위치한 핫도그 가게인데, 하와이에서 유명한 곳이라고 했다. 손광연도 첫 하와이 여행이지만 아내 한유영이 하나도 놓치지 않고 즐기길 바라는 마음에 늦은 시각 찾아왔다.
여행은 사람의 마음을 붕 뜨게 만드는 것이어서, 홍기준이 없을 땐 술을 즐기지 않는 손광연조차도 시원한 생맥주가 목젖을 때리는 청량감에 흠뻑 빠져 있었다.
“유진이 걱정돼서 그래요? 우리 아들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미경이네랑 은정이네서 챙겨주신다고도 했잖아요.”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해요.”
“우리끼리만 여행 와서 미안한 건 아니에요?”
“그런 것도 있고요.”
“우리 신혼여행도 못 갔고 그동안 바쁘다고 비행기도 못 타봤잖아요. 이럴 땐 근심 같은 거 털어버리고 즐겨요.”
“네. 우리 진혁이가 있으니까 괜찮겠죠.”
그제야 한유영이 어렵사리 웃음을 보였다.
본디 엄마의 마음이 그런 것인지, 아이들만 두고 집을 떠난 게 처음이어서 그런 것인지. 불안한 마음 때문에 함께 있는 남편마저도 불편해지는 것은 원치 않았기에 여행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걱정한다고 여기서 내가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마침 호텔에서 씻고 오겠다던 홍기준과 유세라가 합류했기에 한유영은 근심을 가슴 한편으로 접어두었다.
흰색 바탕에 오렌지색과 초록색 꽃이 그려진 하와이언 셔츠에 흰색 반바지 차림의 홍기준이 손광연의 옆에 자리를 잡았고, 홍기준의 셔츠와 비슷한 디자인의 원피스를 입은 유세라가 홍기준을 마주 보며 앉았다.
“야, 광연이. 먼저 한 잔 마신 거야?”
“니들 뭐야? 저리 가서 따로 앉아. 우린 데이트 좀 할 테니까. 저녁도 같이 먹었는데 이 야심한 시간까지 같이 있어야겠냐?”
손광연의 너스레에 유세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체-, 광연 오빠네 셋째 생기려나?”
“아이, 참. 그런 거 아니에요, 언니.”
“광연 오빠가 진짜 능력자야. 이렇게 부끄러움 많이 타는 유영 씨랑 아이를 둘이나 낳고.”
“아-, 정말.”
한유영은 끝내 두 손으로 뺨을 감싸 쥐었다.
하하하-!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얼굴이 빨갛게 익은 한유영을 유세라가 놀렸고, 남자들이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못됐어 정말.”
함께 웃는 모습이 얄미웠을까, 남편을 째려본 한유영이 맥주잔을 빼앗아 쭈욱 들이켰다. 분명 시원한 생맥주인데, 뜨겁고 짜릿하게 식도를 훑는다. 걱정과 긴장을 단박에 풀어헤치는 청량감이 놀라웠다.
***
진혁은 다소나마 남아있던 긴장감을 바람결에 실어 보냈다.
남자들을 차에 태우고 운전석에 앉았다.
“아저씨들, 내가 왜 이렇게 했는지 알죠?”
허튼짓하면 당신들 가족도 무사하지 못해. 진혁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속마음은 달랐다.
‘아, 못해 먹겠네. 강도들은 원한관계도 아닌 사람을 어떻게 해치는 거지?’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나쁜 길로 빠지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차에 구겨져 앉은 문석일과 김인랑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조수석에 앉은 정상태는 멍한 눈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갈비뼈가 부러진 강헌창은 창백해진 얼굴로 눈을 감고 겨우 숨만 쉬었다.
손가락이 부러지고 얼굴이 퉁퉁 부은 문석일이 강헌창의 와이셔츠를 걷어 올렸다. 오른쪽 복부와 흉부까지 거무죽죽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저-, 이 친구가 위험한 거 같은데-.”
“그 정도로 안 죽어요.”
운전석에 앉은 진혁이 룸미러를 통해 문석일을 쏘아봤다. 뭐라 하고픈 말이 있었지만 참기로 했다. 어차피 봐주기로 한 마당에 더 몰아붙이는 것은 분풀이밖에 되지 않는다.
“절대 오지 않-겠다.”
동료들이 깨어나서였는지 납작 엎드려 존칭을 쓰던 문석일의 모습은 간데없었다. 두 손을 맞대고 비는 건 여전했지만.
턱을 움직일 수 없는 정상태와와 김인랑은 입을 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저 운전석에 앉은 저 괴물의 손아귀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누가 시켰는지는 모른다 이거죠?”
“정말이다. 우린 돈만 받으면 되니까.”
“흐음-, 이상하네요.”
눈을 가늘게 뜬 진혁이 손가락으로 차문을 두드렸다.
토도독- 두드리는 소리는 점점 커졌고 리듬은 조금씩 빨라졌다.
이들의 말이 사실임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진혁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강요보다 자원하도록 만드는 것이 이행을 강제하기 쉽다. 운신을 구속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걸 아는 까닭에 팀원들에게 업무를 배분할 때도 지명하지 않고 지원자를 받던 진혁이다.
토도독-.
“흐음-. 모르면 군 생활 끝나나······.”
뭐, 이들은 모두 예비역들임을 알지만 그냥 생각나서 중얼거려 본 말이다.
진혁의 읊조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안 되면 되게 하라······.”
군복무 시절 매일같이 외치던 구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