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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83화 (83/338)

# 83 < 악인을 위한 서사 (4) >

조일헌의 날카로운 지적에 갈빗대를 발라내던 최장환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게, 미갱이 이년이 어뜨케 알었으까. 최장환의 눈은 그리 말하는 듯 보였다.

외진 곳 많은 시골이니 어린 녀석들이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를 일이다.

당장 최장환만 보더라도 일찌감치 김순복을 꼬드겨······.

‘글구 보니 나두 마누라랑 열니 살 때 눈이 맞었구먼.’

솔가리 긁는다고 지게 지고 산에 가서는 나물 캐러 나온 김순복과 정분을 나눴더랬다. 그러나 그건 아주 먼 옛날이야기다. 지금처럼 소달구지가 사라지고 버스와 트럭이 다니는 세상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녀석들이 벌일 짓은 아니란 말이다!

최장환은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해 눈만 껌벅였다.

그렇게, 상처받은 사춘기 소녀의 한마디에 오해의 골은 깊어져 갔다.

커흠! 최장환을 곤란한 지경에서 구원하기 위해 조일헌이 부러 크게 헛기침했다.

“그러먼, 그 뭐여-. 걔는 불알이 가벼워서 뜀박질을 글케 잘하는 걸 수두 있겄네-.”

“말혀 뭐혀. 그려서 까지두 않었을지 물르지. 쓸디두 웁스니께!”

최장환이 화난 사람처럼 괜스레 소리를 질렀다.

정신을 차린 최장환은 다시 슥삭슥삭 갈빗대를 발라내기 시작했다.

아들처럼 여겨 금지옥엽을 주기 아깝지 않은 녀석인데, 사내구실에 심각한 결격사유가 있다면 인정에 휘둘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딴 건 줘도 내 딸은 못준다! 그리 생각한 최장환의 칼질이 더욱 매서워졌다.

최장환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일헌이 혀를 내둘렀다.

“허이구-, 우리 성님 칼질은 알어주야 혀. 뒷골목 칼잽이 했어두 잘했을 겨.”

***

단검술의 달인으로 정평이 난 문석일의 칼은 허공을 갈랐다.

‘젠장! 내가 이게 무슨 꼴이냐!’

피잇-!

대기를 가르는 소리는 제법 날카로웠지만 피육을 베지 못하는 격투술은 그저 몸부림에 불과했다. 칼 하나만 있으면 세상에 적수가 없을 거라는 소리를 듣던 몸인데. 단검 한 자루로 노동당 간부 목을 따고 무사 귀환한 몸인데. 문석일의 군더더기 없는 단검술은 진혁의 터럭도 건드리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칼을 휘둘렀을까······.

잠시 기억을 잃은 것처럼 어찌 된 일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문석일이 정신을 차렸을 때, 단검은 땅바닥에 뒹굴었고 흉기를 쥐었던 손은 진혁의 손아귀에 잡혀 손가락뼈가 부러져 있었다.

쩍-!

힘겹게 눈동자를 굴려 그 상대의 얼굴을 찾기 무섭게 별이 번쩍였다.

가중처벌이라는 말이 들렸다. 노안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 같았다.

입안이 터졌는지 피맛이 강하게 났다.

“나쁜 손.”

뻐억-! 한 번 더 애송이의 주먹이 문석일의 얼굴에 꽂혔다.

가중처벌이라는 말이 한 번 더 웅웅거렸다. 위험한 물건이라는 말도 들렸다.

고통은 익숙하다고, 어떤 고통에도 굴복하지 않을 만큼 단련되었다고 자부했다. 그것이 자만임을 깨닫는 데에는 두 번의 주먹질이면 충분했다.

“끄어흐-.”

의도하지 않은 신음성이 제 입에서 흘러나오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통이 지나쳤다.

광대와 눈두덩이 급히 부어오르며 한쪽 시야를 방해했다. 골이 흔들리며 빈속에서 욕지기가 올라왔다.

‘세상은 넓다더니.’

이런 괴물을 만날 줄이야.

그때였다. 진혁이 으르렁거리듯 경고했다.

“묻는 말에 사실대로 답하지 않으면 모두 입막음을 하는 수밖에 없어.”

쓰디쓴 말을 뱉고 진혁은 이를 악물었다. 어울리지 않고 원치 않는 협박이었으나 필요한 과정이었다.

문석일은 사태가 벌어지기 전의 이질감을 떠올렸다.

역시, 애송이의 말투가 아니다.

‘이러다 정말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

진혁은 잠시 머물렀다.

이들을 포섭하기 위한 최초의 노력으로 일격에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압도적 차이를 보인 터였다. 이 상황에서 상대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니 홍기준이 조언한 대로 공포를 선사할 뿐이다.

그 여유가 문석일에게는 죽음의 유예로 비쳤다.

“누가 시켰나.”

“누군지는 모른다. 정말이다.”

꽈득-. 진혁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며 사내의 손이 비명을 질렀다.

“끄으으-.”

진혁은 내심 감탄했다.

역시 프로였나, 손가락이 부러져 역방향으로 꺾이는데도 비명은커녕 앓는 소리로 끝이다. 이들이 위험한 존재라는 걸 진혁의 본능과 경험이 말해주고 있었다. 과거 군 복무 시에도 고문에 대비한 훈련을 받았더랬다. 하나, 이들처럼 고통을 참는 별도의 기술이나 교육은 말뿐이었다. 고통을 이겨내는 수단이 정신력 외에는 없었으니.

당시 교관이 그리 말했다. 옛 선배들은 정신력도, 전투력도 더 뛰어났다고. 이들이 고강도 훈련을 받은 특수부대 출신인 것은 이전의 격투로 이미 경험한 바, 제압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정말 모른다. 우리는 돈만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다. 여의치 않으면 죽이라는 뜻도 내비쳤지만 우리는 정말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었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저항할 법한데, 제법 상세하게 말하니 이 또한 신기한 노릇이었다. 진혁은 쓰러진 사내들과, 제 손에 잡힌 사내를 살폈다.

‘아직 현역이라 해도 믿을 실력자들.’

결혼반지로 보이는 액세서리를 낀 사람이 둘이나 되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결혼예물을 지니고 다니지는 않을 터, 그저 데려가려 했다는 이들의 말을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그렇다고 이들을 무조건 용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가 시켰는지도 모르는 더러운 짓을 하는 놈들이라면 죽어도 변명할 말이 없겠지.”

진혁이 걸음을 옮김에, 문석일의 눈동자가 그 발길을 좇았다. 그리고 쓰러진 동료들을 살폈다. 정상태는 여전히 동공이 풀린 채 자빠져 있었고, 김인랑은 고꾸라졌으며, 강헌창은 옆구리를 쥐고 무릎 꿇은 자세로 푹 숙이고 있었다.

진혁이 강헌창에게 다가갔다. 문석일을 노려보며.

문석일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정말 죽이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눈에는 직접적인 충격이 없었는데, 주먹에 광대뼈를 강타당하며 머리가 심하게 울렸던 걸까. 문석일은 제 눈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다.

‘저건······또 뭐냐.’

괴상한 동네에 왔더니 기이한 일들이 자꾸 벌어진다.

괴물 남자의 머리 위에 집채만 한 검은 그림자가 일렁였다. 거적을 덮어쓴 형태가 허공에 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온 세상이 어두웠다. 어두운 세상에서 그보다 어두운 실루엣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이 있어야 할 곳은 공허로 채워진 채.

텅 빈 동공이 신화적 위압감으로 온 세상을 허무하게 아우르고 있었다.

들어본 일이 있다.

비무장지대에서 지뢰를 밟은 동료로부터였다.

- “그때 딱 죽는 줄 알았지. 온 세상이 까맣고 저승사자 같은 게 눈앞에 떠있더라고. 근데 그게 내 머릿속에 대고 말을 하는 거야.”

머리가 흔들리는 것 같더니······. 나는 너무 강하게 맞아서 죽으려는 것이로구나. 그리 생각하며 문석일은 허공의 실루엣을 응시했다.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존재였다.

그때 묵빛 실루엣이 입을 열었다. 인간 같지 않은 젊은 괴물과 함께.

“말하지 않으면 나도 곱게 보내줄 수 없어.”

【말하지 않으면 나도 곱게 보내줄 수 없어.】

애송이의 말은 고막을 쳤고, 실루엣의 음성은 감지하기 어려운 시간차를 두고 머릿속에서 울렸다. 괴이할 줄 알았으나 의외로 낭랑하고 맑은 음성이었다.

어둠의 음성을 따라 멀리서 흐르는 개울물 소리처럼, 나뭇잎끼리 비벼지는 소리처럼 뭔가 사락거렸다.

“살리고 싶으면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살리고 싶으면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진혁은 강헌창의 목에 손을 얹었다.

위급해 보였기에 맥을 짚으려던 것인데 문석일의 눈에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문석일의 멀쩡한 한쪽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진혁이 아닌 저승사자를 향해 외쳤다.

“살려주십시오! 그 친구 마누라가 곧 출산합니다!”

문석일 인생 최초의 굴종이었다.

제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초자연적인 현상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것이 인간이었다.

문석일은 저도 모르는 새 저승사자 앞에 고분고분 응하고 있었다.

진혁은 얼굴을 험상궂게 일그러뜨리며 아득- 소리가 나도록 일부러 이를 악물었다. 스스로 놀랄 만큼 뛰어난 연기력이다.

“제, 제가. 내가 오야입니다. 나만 벌-하시고 다른 친구들은 살려주-십시오······.”

문석일은 장승 할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무조건 살려달라고 빌랬지. 빌면 살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빌었다. 저 죄 없는 놈들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허어-.”

【허어-.】

진혁은 기가 차서 한숨마저 나왔다. 조폭도 아닌 것들이 오야가 어쩌고 하며 인정에 호소하지 않는가. 갑자기 존댓말을 쓰며 말끝을 이상하게 흐리는 것도 영 못마땅했다.

머리를 다친 걸까. 하지만 그렇게 나오길 바라던 터였다.

이제 협상을 시작할 차례니까.

‘그런데 어딜 보고 얘기하는 거야?’

문석일의 시선은 혼미하게 허공을 헤맸다. 마치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진혁의 머리보다 위쪽이었다.

진혁은 묘한 기시감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최미경의 할머니가, 천길룡이 진혁을 살필 때 그러지 않던가.

문석일의 멍한 눈이 두어 차례 깜빡였다.

‘저승사자가 아닌가?’

손진혁이 두리번거리자 실루엣도 함께 움직였다. 완벽히 일치한 동작이었다.

뒤통수를 긁적이는 행동까지 똑같다.

‘내 머리가 이상해진 건가.’

공포에 의한 환각은 아닐까. 주책맞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한때 자타공인 최고로 여겨졌으나 나약한 인간임을 확인하고 초라해진 남자의 소리 없는 넋두리였다.

“어이, 아저씨. 당신들 그냥 보내면 다시 올 거잖아.”

【어이, 아저씨. 당신들 그냥 보내면 다시 올 거잖아.】

“절대!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이들도 오지 못하도록······.”

일말의 생환 가능성을 엿본 문석일이 다급히 외쳤다.

진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앞의 사내가 믿기 어려운 말을 한 까닭이다.

진혁은 엎드린 문석일의 앞에 다가와 무릎을 땅에 대고 물었다.

“오지 못하도록?”

【오지 못하도록?】

“뭔가 도움 될만한 조치를······.”

진혁이 문석일의 어깨에 손을 올려 먼지를 털었다. 드디어 협상을 제 쪽으로 가져왔다는 만족감의 표시였다.

공격 의사가 없음을 표한 것이었으나 문석일은 움찔 떨고 말았다. 기정사실이었지만 한 번 더 완벽한 패배를 자인하는 셈이었다.

이들이 돕는다면 도움이 되겠으나 지금 중요한 것은 의뢰인이 누구인지 밝히는 것이다.

“내 첫 질문에 대답부터 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설명하기 어려우면 작전 보고한다고 생각하고 시간순으로 차근차근.”

【내 첫 질문에 대답부터 해줬으면 좋겠-.】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를 떨치려 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기다렸다는 듯 문석일이 말문을 열었다. 시선은 여전히 실루엣에 고정한 채.

“봄이었습니다. 정체를 밝히지 않은 여자가 백제호텔로 저를 불러 의뢰했습니다. 거액의 선수금과 손광연 선생님 정보를 주며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수상한 의뢰였으나 문석일에게는 드문 일도 아니었다. 대개 해결사를 찾는 경우는 떳떳하지 않은 게 정상이었으니. 떳떳했다면 공권력을 이용했겠지.

급전이 필요한 동생들을 위해 착수금에 혹해 수락한 면도 있으나 표적 인물 조사는 필수였다.

주변인 정보가 필요해 동료들을 풀어 정보를 수집했고, 기관에 근무하는 지인에게까지 손을 썼지만 수상한 정보는 없었다. 대개 정보가 확실치 않아 해결사를 찾는 경우가 많은데, 약간의 오차가 있었지만 의뢰인이 들이민 정보는 그대로 쓸만했다.

홍기준에게 미행으로 붙인 김인랑이 휴가철 미행을 통해 주소와 거주지에 큰 오차가 없는 것 또한 확인했다.

그렇게, 올여름 어렵지 않게 손광연이 사는 곳을 알아냈다.

“-우연히 수상한 자들이 매복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사전답사를 왔을 때, 무전기 신호가 잡혔다. 간첩인가 생각했으나 말투나 사용하는 포네틱 코드로 보아 국군 출신으로 보였다. 그들의 정체를 특정할 수는 없어도, 모종의 이유로 일대를 감시하는 중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문석일은 교신을 도청해 추석 연휴에 그자들이 자리를 비운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보안에 철저한 자들이었기에 표적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해 결과적으로 똥볼을 차게 됐지만.

‘그렇게 된 일이었구나.’

진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그동안 발생한 불가해한 일들의 실마리가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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