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 악인을 위한 서사 (3) >
문석일의 턱관절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와 떠올리니 재수 없는 년이다. 의뢰를 맡긴 이름 모를 여자 말이다. 자신을 그저 ‘백사장’으로 알렸을 뿐이다. 아무튼 자신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꼴 아닌가.
차라리 죽이라는 의뢰였지만 맹세코 민간인을 해칠 마음은 없었다. 악인도 아닌 평범한 민간인이 표적이었기에.
시골에 사는 촌부일 거라 생각하고 방심한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보이지는 않았으나 서로 무전으로 상황을 공유하는 자들이 존재했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이상하다 여겨 포기할까 생각도 했으나 착수금으로 받은 돈이 너무 컸고, 급전이 필요한 동료들을 위해 사용한 터였다.
‘그래, 쉬운 의뢰였다면 거액을 줘가며 우리에게 맡길 이유가 없었겠지.’
문석일이 이를 아득 물고 소매 단추를 풀었다.
철수하기엔 너무 멀리 왔고, 이제 와 대화로 풀기에는 정상태만 억울하게 맞은 꼴이다.
김인랑이 오른손 훅을 날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묵중했다.
예측할 수 없는 펀치였음에도 진혁의 가드는 이미 올라와 있었다. 가드라기보다 주먹을 잡으려 손을 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김인랑의 페이크였다.
그 빠른 정상태가 근거리 타격을 염두에 두고 들어갔다가 험한 꼴을 당한 것이 불과 한 호흡 전인데, 김인랑으로서는 모험을 할 이유가 없었다.
“잡았다.”
오른손을 회수한 김인랑이 왼손으로 진혁의 오른쪽 어깨를 잡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일견 선량해 보이는 얼굴이다. 하나 유지할 수 없는 미소였다. 성공의 환희도 잠시, 손에 잡힌 것은 사람의 어깨가 아니라 차라리 바위라는 깨달음에 김인랑의 머리가 차게 식었다.
진혁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는 모습을 본 것과 동시였다.
“뭐······.”
진혁은 어이없다는 듯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진혁이 김인랑의 전완을 오른팔로 감아 구속하는 동시에 왼팔을 뻗었다.
그저 뻗었을 뿐이다.
‘잡아서 어쨌다고.’
빠악-!
김인랑이 피하기에는 너무나 전광석화와 같은 일장이었다. 정상태에게 가한 것과 동일한 공격이다.
하늘을 향해 가볍게 쳐올린 진혁의 손바닥에 그대로 턱을 강타당한 김인랑이 풀썩 무릎을 꿇으며 힘없이 고꾸라졌다.
의식을 잃으며 김인랑은 깨달았다. 정상태는 턱이나 뒤통수의 충격 때문에 기절한 것이 아니다. 앳된 남자가 가한 충격은 턱을 거쳐 비강과 뇌를 통타하고 정수리로 빠져나갔다. 김인랑의 콧속이 맵고 뭔가 주르륵 흘렀다. 머리가 곤죽이 된듯한 착각 속에서 의식에 어둠이 찾아왔다.
고된 훈련으로 단련한 몸이 이토록 무력하게 스러질 줄이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허무하도록 짧은 시간이 너무 길다. 체감시간에 비례한 고통이 넋을 괴롭혔다.
‘둘 처치했으니 둘 남았나?’
진혁은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먼저의 두 명은 방심하고 있었기에 수월하게 처리한 편이었으나 이들은 집단 전투가 몸에 밴 사람들. 수적으로 불리한 건 여전한 사실이다.
‘저 둘도 이제 제대로 하겠지. 조금 긴장을 해볼까.’
그렇다고 위축되거나 겁을 먹지도 않았다. 여느 청소년이었다면 눈이 부리부리하고 체격도 좋은 어른들을 상대로 오줌을 지렸겠지만, 손진혁에게는 이들을 상대해야 하는 뚜렷한 이유가 있기에.
오히려 육상경기에 출전했을 때보다도 흥분감이 덜했다.
‘이 사람들 분명 괴물인데.’
달려드는 2번과 3번을 보며 진혁이 의문을 품었다. 이들은 진혁이 보기에도 빠르고 강하다. 인간이 이렇게 날렵할 수 있을까 생각될 정도로.
뻗었다가도 잡기 기술을 피해 재빨리 회수하는 손, 부러 강하게 딛는 허보, 판단보다 빠를 것이 분명한 위빙. 실로 유령이라 칭할만한 움직임이었다.
‘근데 느려.’
동체 시력이 좋아졌나?
절박한 상황에 놓여서일까, 뇌가 두개골 안에서 맹렬히 회전하는 느낌이다. 정수리가 뜨겁다고 느꼈다.
진혁은 공격을 흘리는 와중 머리 위에 슬쩍 손을 얹었다. 하나도 안 뜨겁다.
차착-.
둘이서 진혁의 팔을 하나씩 제압하겠다는 듯 협공을 펼쳐왔다.
잡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재빨리 백스텝을 밟았다. 유도의 잡기 싸움처럼 팔을 흔들면서였다. 연이어 날아온 공격도 가벼운 발놀림으로 흘렸다. 진혁조차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몸이 알아서 움직이는 듯한 동작이었다.
‘분명 예전 같았으면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최태양 같은 운동선수보다 훨씬 감각적인 움직임이었다. 성장통을 겪기 전이었다면 자신이 두들겨 맞았으리라. 그 정도로 이들은 고수였다.
그러나 호흡마저 읽는 진혁의 기예 앞에서 평범한 사람들로 전락해버렸다.
유령 따위로 오해했으니 이들에게는 과찬이라 할 것이었다.
뿌극-.
진혁의 오른팔을 제압하려던 2번 강헌창의 오른쪽 옆구리에 팔꿈치가 꽂혔다. 진혁이 몸을 숙여 전진하며 팔꿈치로 지른 것이다. 상대와의 거리가 짧아 펀치를 날릴 수 없어 선택한 공격이 번개처럼 번뜩였다.
“꺼욱-!”
강헌창은 숨이 막히는 고통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아차, 힘 조절 못했다. 진혁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강헌창은 알 수 있었다. 갈비뼈가 부러지며 내부를 찔렀다. 숨이 쉬어지는 걸 보니 폐는 무사한 것 같지만 서둘러 병원에 가지 않는다면 죽을 수도 있는 중상이다. 문석일에게 욕을 먹더라도 포기하자고 우겼어야 해. 후회가 밀려왔다. 앳된 사내가 걸음을 옮기며 시멘트 포장도로를 긁는 운동화 소리가 끔찍이도 소름 끼치게 들린다.
“그만하지? 동료들 다 죽일 건가?”
3번 문석일과 거리를 벌린 진혁이 말했다.
문석일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쓰러져 미동도 없는 일행을 살폈다. 김인랑은 앞으로 넘어져서 괜찮겠지만 뒤통수를 찧은 정상태와 갈비뼈가 부러진 강헌창은 위험하다.
제압하라는 말을 뱉은 지 몇 초 지나지도 않았다. 그 사실이 더 괴롭다.
진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길게 숨을 뱉으며.
“후우-, 마음 같아서는 당신들 다 죽이는 게 나는 편해. 이유는 알지?”
진혁은 분명 부모님을 어떻게 하겠다는 이들의 대화를 들었다. 그런 놈들이라면 차라리 죽여서 묻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러나 이들을 어찌 처리한다 해도 그다음이 문제다.
다음엔 어떤 훼방꾼이 평화를 흔들지 모르는 일이니까.
“순순히 말하면 보내주지. 누가, 왜 보냈고 뭘 하라고 시켰는지만 말해. 당신들 절대 좋은 목적으로 온 거 아니잖아.”
“크음-.”
문석일이 진혁을 노려보며 침음을 삼켰다.
그러나 얼마 버티지 못한 눈동자가 제멋대로 스르르 떨어졌다.
‘내가······, 겁을 먹었어?’
말이 통하면 조용히 데려갈 생각이었다. 하나 서로의 입장이 달라 대화가 통하리란 기대는 보잘것없었음을 안다.
동료들이 당했다는 사실이 충격이지만, 어차피 셋이 덤벼도 문석일 하나를 당하지 못하는 친구들이다.
문석일은 선택을 해야 한다. 동료들을 무사히 챙겨가려면 한 가지 방법뿐이다.
뒤춤으로 손을 뻗었다. 모든 무술에 능했지만 누구보다 자신 있어 하는 것이 단검술이다.
납작하고 단단한 칼자루를 쥐자 용기라는 놈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그거 안 쓰는 게 좋을 텐데.”
진혁의 경고보다 문석일의 손이 더 빨랐다.
***
“바위서흠- 너느흔 내가 미이워도호- 나아-는 너를 너무 사아랑혀-”
집 위쪽 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조일헌은 신이 나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모든 가요를 타령처럼 불러 듣는 이들로 하여금 피식피식 웃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귀한 멧돼지가 생겼으니 절로 노래가 나오는 심정도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칼질을 하던 최장환이 핀잔을 던졌다.
“에라, 이놈아. 니열 모리 쉰인 눔이 장개두 뭇가먼서 좋다고 노래가 나온다니?”
“어러? 노래랑 장개랑 뭔 상관이래유?”
팩트 폭력은 시대를 타지 않는 것이어서, 조일헌은 최장환의 손에 쥔 칼이 제 가슴을 찌르는듯한 통증을 느꼈다. 지금도 멧돼지를 손질하는 저 섬세한 칼질이 마치 제 갈빗대를 도려내는 듯하지 않은가.
“성님은 도야지 칼질두 잘허구-, 동상 가심빡이다가 칼질두 잘허구-. 하여간에 난 늠이라니께에-.”
“뭐여 인마? 난 늠? 내가 늠이여?”
“늠이지 그름 년이유?”
“이이-, 맞네이.”
조일헌 이 허풍쟁이는 이상하게 말을 참 잘한다. 최장환은 한 번도 말로써 이겨보지 못했기에 그쯤에서 수긍하기로 했다. 보나 마나 연장자에게 놈이라는 소리를 했다는 이유로 타박을 하면, 장가 안 간 놈 서러워 살겠냐며 철퍼덕 엉덩이를 깔고 앉아 신세 한탄을 늘어놓을 놈이다.
‘지미럴 새끼, 그러기 면사무소 곽향림이랑 중매 들어왔을 때 눈 딱 감고 갈 일이지.’
이상형이 아니라며 조일헌이 손사래를 쳤다. 손광연이네 마누라 정도는 못 되어도 한유영과 함께 섰을 때 사람처럼 보였으면 좋겠다나?
곽향림이 정도면 근방에서 보기 드문 미색인디, 똥물에 튀길 새끼가 쓸데없이 눈만 높다. 눈으로 욕을 뱉은 최장환이 묵묵히 갈빗대를 발라냈다.
“워째 갈빗대에 살점을 글케 많이 냄긴대유?”
“우리 지넥이 주야지. 한창 클쩍인디 잘 먹어야 허는 겨.”
“성님, 지넥이가 우덜보다 크유-. 우덜이 뭐여, 에지간헌 으른들보담두 클 텐디? 아마 동네이서 지넥이보다 큰 사람은 태양이빼끼 웁슬뀨-.”
“크니께 더 많이 먹으야지!”
이번엔 조일헌이 졌다.
승리를 맛본 최장환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근디 워째 넘의 아들 가꾸 우리 지넥이, 우리 지넥이 헌대유? 형수두 그러더먼.”
“지넥이 내가 받었어 이눔아. 내 아들이나 마찬가징겨.”
“어이구 넘사스럽게 그게 뭐랴?”
다 아는 사실이지만 조일헌은 괜히 지기 싫어 되물었다.
“워쩌겄냐! 엄니는 막내 누나 살피러 대전 가시구 일은 급헌디 나빼끼 웁구. 마누라는 우리 미갱이 낳구 얼마 안 뒤야서 몸푸는 중이구. 나두 손 벌벌 떨먼서 받었어.”
그리 말한 최장환이 옛일을 회상하는지 칼질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제 딸조차 직접 받지 않았거늘. 당시 마흔도 되지 않았던 최장환은 찬 새벽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 찾아온 손광연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갓 세상에 나온 핏덩이 손진혁을 벌벌 떠는 손으로 그렇게 받아냈다.
‘이맘때보담 늦은 시절이었을 겨.’
이른 가을에 달빛 없는 그믐이었다. 밝은 별빛에 의지해 총총히 밭둑 길을 걸어 손광연의 집에 닿았을 때, 초산임에도 한유영은 씩씩하게 홀로 아기를 세상에 내어놓고 있었다.
세상에 너무 일찍 나왔던 걸까, 핏덩이는 아주 작았고 핏기없는 몸으로 파르라니 떨었다. 그래도 살겠다고, 그 자그마한 녀석이 꽉 쥐고 있던 작은 주먹이 최장환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다.
“받기만 혔어, 받기만. 희한허게 추운 날이라 애기가 고생혔지.”
울지도 않았다. 끼잉끼잉 앓는 소리만 내는 것을 엄마가 젖을 물리니 순둥이 강아지처럼 젖을 빨았다. 울지 않는 아기는 말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래서 저렇게 과묵한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이고오-, 그때만 생각허먼 내가 아주 지금도 염통이 벌렁벌렁혀-. 그래두 말은 허니께 다행이지.”
“근디, 지넥이는 커서 뭐가 될라나? 등치두 좋아, 힘두 좋아, 달리기 잘혀, 공부두 잘혀. 거기다 인물은 어떻구? 얼굴값 헌다고 여자애들두 따르겄지?”
“물러어-. 우리 미갱이 고년 말로는 고재 같다던디.”
쩝-!
최장환이 한탄을 담아 강하게 입맛을 다셨다.
“이이? 고재?”
술을 마셔 핏줄이 선 조일헌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랗게 떠졌다. 고재라니.
그 어린 것이 고재라니, 아이고 불쌍해라. 하늘은 공평하다더니 모든 재능을 다 주고 그걸 홀라당 빼앗은 걸까?
깨 털 듯 씨를 탈탈 털어버린 겨?
고재라면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 혹은 키가 큰 사람을 뜻하니 진혁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겠으나 이 동네에서 고재라는 말은 생식기가 불완전한 남자, 고자로 통했다.
“그런디 미갱이는 그걸 워치게 알었다나?”
미갱이 아직 어릴 텐디? 조일헌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이? 갸웃하는 최장환의 표정도 바보처럼 변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고, 최미경이 실망하면 상남자도 고자가 되는 곳이 촌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