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 악인을 위한 서사 (2) >
사내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갈 뿐, 진혁에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외면에도 불구하고 진혁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억눌렀다.
무시당하는 일에는 익숙했고 사실관계 확인이 우선이니까.
- “일종의 반간계지만 조금은 다르지. 반간계는 깔끔하지 못해. 박쥐는 이쪽저쪽 모두에게 병을 옮길 뿐이야. 차라리 정보만 빼내는 게 좋지. 그다음에 죽이든 살리든······.”
사내들의 한숨 섞인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노출된 이상 계획대로 움직이기는 틀렸다. 받은 돈이 너무 크다, 가족 병원비로 쓴 돈은 어떻게 마련하냐, 따위의 말이 들렸다. 소리를 낮춘다고 낮추었으나 장군이만큼이나 귀가 밝은 진혁이 듣지 못할 리 없다.
- “공포와 자비. 절대적인 충성을 끌어내는 방법이지. 한 가지만 써도 좋지만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게 가장 확실해. 둘 중 하나만 쓰면 부작용이 나타나더라고.”
실제로 죽이라는 말은 아닐 것이나, 홍기준은 죽음보다 더한 공포를 안기지 못하면 그건 공포가 아니라고 했다. 그 순간을 벗어나면 안도와 삶의 희열이 공포를 순식간에 지워버린다는 거다.
홍기준은 명백한 적이라면 어떻게든 숨통을 끊어야 한다는 말도 했다.
‘살인 한 번이면 참을 인 세 번을 면한다지만 그건 나쁜 짓이지.’
진혁은 살인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 재확인했다. 천길룡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가족 앞에 떳떳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무슨 수를 써서든 이들을 죽이지 않고 제압해야 한다.
- “이제 다 틀렸구나, 죽었구나. 그런 상황에서 살길을 열어주는 거야. 대신, 상대가 살려달라 애원하게 만드는 게 먼저지. 죽이라며 목 들이대고 바락바락 대드는 놈은 애초에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끝장을 봐야 하니까.”
얼음판처럼 단단한 심경 위에 홍기준의 말을 얹으니 금세 생각이 정리되었다. 고마운 일이다. 모호하던 홍기준 회장에 대한 존경심이 형체를 갖추고, 경계하던 홍기준 아저씨가 한 걸음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잔뜩 각오하고 왔는데 긴장감이 너무 없잖아.’
오랜만에 왕따 당하는 기분이다. 과거의 암울한 기억이 떠올라 명치에서 뭔가 울컥 올라왔다. 차분하게 가라앉던 분노가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얼른 가서 밥도 먹어야 하는데, 유진이 깰지도 모르는데.
예전에는 몰랐던 사실인데, 배가 고프면 이성의 끈이 가늘어지고 감정의 통제가 비합리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걸 깨달았다. 열 받는다는 뜻이다.
진혁이 한숨을 내쉴 때였다.
맨 뒤에 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를 지그시 물고 입술만 달싹였으나 그 방향이 정확히 진혁을 향해 있었다.
“타협이 안 되면······ 제압한다.”
사내들이 진혁을 중심에 두고 일제히 발을 움직였다.
약속된 위치를 점하려는 듯 정교하게 계산된 움직임이었으나 진혁의 긴장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부족했다.
누가 봐도 불리하고 긴박한 상황임에도, 진혁의 관심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사이 사내들에게 배운 뚱딴지같은 여유였다.
‘도대체 우리 아빠는 정체가 뭐지?’
말하기를 꺼린다는 걸 알았기에 캐묻지 않았지만 이쯤 되면 호기심이 인내심을 초과한다. 그 땅꾼들도 아빠가 집을 비우니 약속한 듯 사라졌다. 엄마도, 홍기준도 말을 아낀다.
이제 보니 너도나도 자기들끼리만 쑥덕거리고 진혁의 편이 없다.
‘아빠한테 서운해지려고 하네.’
······사람은 참 괜찮은데.
대상이 명확하지 않은 분노에 진혁이 턱을 치켰다.
아빠에게 화풀이할 순 없는 마당에 적당한 대체재가 나타났다.
“보자 보자 하니까 제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사아아-.
씨익 웃은 진혁의 발끝에서 퍼지는 한기가 한층 짙어졌다.
사내들의 몸에 두른 긴장이 진혁의 뺨을 할퀴었다.
알맞게 펼쳐 포위하려는 걸음이었다. 대화가 틀어질 때를 대비한.
보폭은 세밀하고 선글라스 너머 눈빛은 넋을 벨 만큼 날카롭다.
진혁은 뒤를 내주지 않으려 사내들의 움직임에 보조를 맞췄다. 몸이 먼저 반응하며 움직였기에 역산 따위는 불필요했다.
왼쪽 사내부터 번호를 매겼다.
너는 1번, 너는 2번, 맨 뒤의 쟤는 3번. 그리고 가장 젊어 보이는 삼촌은 4번.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혼자 뇌까리듯 뱉는 말이었다.
진혁의 입이 열림과 동시에 사내들이 우뚝 멈춰 섰다.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목숨 아까운 줄 알면 묻는 말에 답하는 게 좋을 거야.”
진심 어린 경고였다.
허세로 여긴 사내들이 자신을 비웃거나 무시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도, 평화를 위해서라면 저를 향한 비웃음쯤 감내할 생각이었다.
한데 사내들의 반응은 윤성동 같은 애송이 양아치와 달랐다.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선글라스를 벗어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표정을 굳힌 채였는데 눈매가 하나 같이 매섭다. 진혁의 경고가 허세가 아님을 인정하는 반응이었다.
“음······. 저 댁 동생분이신가?”
홀로 선글라스를 벗지 않은 3번이 물었다. 그가 리더인 듯했다. 조심스럽고 사무적인 어투에 상대를 얕보지 않는 신중함이 녹아들었다.
진혁은 상대를 노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썩 기분 좋은 오해는 아니지만 좋을 대로 생각하라지. 어쨌거나 저놈은 가중처벌을 예약했다. 제멋대로 남의 집 족보를 개족보로 만들었어. 그리고 나이 들어 보인다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내가 먼저 물었을 텐데.”
“음, 모셔오라는 의뢰를 받았다.”
3번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경우가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누가. 왜.”
“우리가 알 필요는 없지. 그쪽에게 보고할 이유도 없고.”
3번이 진혁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진혁이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받았다.
“보고하도록 만들면 된다는 얘기로 들리는군.”
방금 전까지 수군거리던 자들의 여유는 간데없었다. 초가을 오후의 훈풍이 사라지고 까닭 모를 냉기가 느껴졌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뺨에 느껴지는 칼날 같은 긴장감에 일제히 태세를 벼렸다.
3번 문석일이 나직이 말했다.
“약속하지. 해치지 않겠다.”
진지하고 차분한 음성, 진혁의 감각도 진실임을 판별했다. 스스로 유리하다 여길 저들로서도 거짓을 말할 이유는 많지 않을 테니.
하나 그뿐.
“당신들은 그렇다 쳐도 의뢰한 사람이 해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문석일은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실제로 대답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고, 아는 게 없었던 까닭이다. 해결사란 그런 사람들이었다. 의뢰인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된 해결사는 완료 후 다른 해결사의 손에 처리되는 일이 다반사였으므로.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다.
그리고 눈앞의 젊은 사내의 지적도 타당하다.
무엇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저건 뭐냐.’
젊은 남자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같은 것.
단순히 체온이 올라가면 발생하는, 배경을 일그러뜨리는 아지랑이 따위와 달랐다. 몸에서 독이라도 스며 나오듯 검푸른 기운이 넘실댄다. 요기를 뽐내듯 어둠과 빛으로 이루어진 촉수가 의지를 가지고 줄기줄기 흐느적거렸다. 홀로 선 남자를 보호하듯 에워싼 채.
문석일은 눈동자만 굴려 동료들의 반응을 살폈다.
‘이상한 동네 같더니 괴상한 놈들투성이다. 저건 내 눈에만 보이는 건가.’
동료들의 태세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선글라스 때문에 보이는 걸까, 노안이 온 사람처럼 턱을 당겨 눈을 치켜떴으나 괴이한 기운은 여전했다.
문석일의 관찰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우스울 수도 있겠지.”
자연체로 선 진혁이 양팔을 가볍게 벌려 손바닥을 앞으로 향했다.
신세 한탄하는 사람으로 비칠 수 있는 자세였으나 문석일의 눈에는 묘하게 기괴했다. 무결점 전투준비태세를 갖춘 남자의 최후통첩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약속하지. 내 가족을 건드리면 내 손에 반드시 죽는다.”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린 듯했다. 팽팽히 당겨진 고무줄이 터지듯 공기가 따갑게 느껴졌다. 숨 막히는 긴장이 사내들을 에워쌌다.
그를 신호로 사내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협상의 여지가 없는 사이에 대화는 필요 없으니.
자기들 머리 위에 번호가 매겨져 있는 것도 모르고 좌우의 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더니 진혁을 제압하기 위해 다가섰다. 보폭을 잡는 발놀림은 매끄러웠고, 완력을 사용하기 위한 자세는 흠잡을 데 없었다.
그럼에도 동료들에 대한 문석일의 믿음은 절대성을 상실한 후였다. 동료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안 돼. 저놈은 뭔가 이상하다.’
문석일이 만류할 틈도 없이, 어깨를 잡으려던 친구의 손목이 젊은 사내의 겨드랑이에 갇혔다. 손놀림이 빠르고 근접전투에 능하기로 유명한 정상태인데, 단번에 잡힌 것이다.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어릴 때 다른 의미로 진혁의 얼굴도 경악으로 물들었다.
‘뭐냐, 이 느려터진 고양이 펀치는.’
*
문석일은 정보사 소속 북파부대를 거쳐 특채로 안기부까지 거친 공작원 출신이다. 유령이라 불리며 무수히 임무를 완수해낸 베테랑이었다. 흑룡성이라 불리는 평양 모처에도 침투했던 일화는 요원들 사이에서도 전설로 통했다.
어느 날 서울 거리를 걷다가 공작원 생활에 회의를 느꼈다. 여느 선배들처럼 낭인 따위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은퇴 후 심부름센터와 다를 바 없는 해결사 노릇을 하고 있지만 유도와 태권도, 검도 같은 대중적인 무술은 물론이고 맨손으로 사람의 목숨까지 끊는 격투술을 익힌 인간 병기 그 자체다. 동행한 이들도 그와 다르지 않았기에 문석일은 지금의 상황을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인기척도 없이 등 뒤에 나타난 건 둘째 치고······.
‘무슨 사람 몸놀림이······.’
쩍-빠각-!
직각으로 접은 진혁의 손바닥이 정상태의 턱에 정확히 꽂혔다. 저걸 공격이라고 볼 수 있을까. 강직함을 배제하고 그저 부드럽게 미는 듯한 일격이었다.
체화된 격투술과 본능에 의해 이미 이를 다물고 있었고, 타격 순간 더 강하게 악물었음에도 정상태의 턱이 섬뜩한 소리를 냈다.
차착-.
정상태의 뒤통수가 시멘트 도로에 닿기도 전에 진혁은 발을 옮겨 다음 공격에 대비했다.
꾸웅-. 친구가 쓰러지자 문석일도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냥 갔어야 해······.’
짧은 시간, 문석일의 뇌리에 냉기가 스며들었다.
누구라도 앳된 군인이라고 추측할 외모였다. 떡 벌어진 어깨와, 펑퍼짐한 옷이 바람에 날리며 드러낸 실루엣이 그러했고. 신중한 듯 당당한 야인의 말투가 그러했다.
그래도 온갖 실전 격투술로 단련된 성인 남성 네 명과 혼자서 싸우는 건 다른 문제다. 그런데 저 젊은 남자는 그걸 해내고 있었다. 해낸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너무 빨라.’
크게 움직이지도 않는다. 피할 수 있을 만큼만 관절을 움직이고, 타점에 이른 공격은 손바닥으로 가볍게 쳐낸다.
저건 무술이 아니다.
벌새와 나비의 날갯짓 정도 차이일까. 그저 우월한 빠르기를 앞세워 툭툭 쳐내는 거다. 먼지 털 듯.
강헌창과 김인랑이 동시에 뻗은 손을 피한 진혁을 일견 후, 문석일은 자빠진 정상태를 힐끗 바라봤다. 동공은 풀렸고 입에는 거품을 물었다. 위험해 보였다. 죽진 않더라도 백치가 될 수 있다.
‘멧돼지 끌고 갈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처맞기 전까지는 누구나 계획이 있고,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고 했던가.
몰려오는 후회와 함께 의뢰를 떠올렸다.
- “둘 다 데려오세요. 저항하면 힘을 써도 좋습니다. 죽으면 어쩔 수 없지요. 그 사람들 팔자 아니겠어요?”
거액에 멀었던 눈이 이제야 현실로 돌아왔다.
잔인한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