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 악인을 위한 서사 >
***
조용히 이동하는 중 거푸 한숨이 나왔다.
읍내 파출소에 순찰 요청을 했으나 사람이 없다고 했다.
두 개의 파출소 중 정해진 관할도 없다는 말만 들었다. 업무상 자세한 사정을 밝히지는 못해도 읍내의 취객만으로 경찰들은 바쁠 때이리라.
어차피 진혁은 경찰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았다. 얼마나 근무여건이 열악한지 알고 경찰이 어찌할 수 없는 상대라는 걸 아는 까닭이다.
‘땅덩이는 넓고 경찰은 부족하고.’
이런 시골에 순찰차가 올 일은 불발탄이나 탄피를 발견했을 때 형식적인 출동이 전부다. 정말 귀신이나 저승사자라면 경찰이 아니라 해병대가 와도 잡지 못할 테고.
사락-사락-따각-딱-.
아직 제대로 여물지 않아 수확하지 않은 껑뚱한 콩이 가을바람에 서로 부대끼며 울부짖었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발소리를 허공에 흩었다. 가을 밭의 법석에 숨어든 진혁이 잠시 발길을 세웠다. 뜻밖의 인물이 시선을 강탈한 탓이다.
“이놈아. 도둑고양이처럼 어딜 가느냐? 쥐 잡으러 가느냐?”
히죽-, 천길룡이 나이에 걸맞지 않은 천진난만한 웃음을 던졌다. 복장은 전과 같았는데, 특이하게도 가죽 재질 반장갑 낀 손에 전투화를 받쳐 들고 있었다. 전투화를 받친 책은 찬송가인 듯했고 반대 손에는 올리브색 민무늬 군복이 들려 있다.
너무도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모습에 진혁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안녕하세요.”
“오냐. 내 그놈들 기를 죽여 놓고 단단히 일러두기도 했으니 죽이지는 말거라. 장개도 못간 늙은이들이 쌔빠지게 밝혀둔 뜨락인데 젊은 놈 혈기 때문에 그늘지면 존나게 아깝지 않겠느냐.”
“예······?”
뭐라 대답도 없이 천길룡은 진혁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나쳐갔다. 언제 봐도 노인답지 않은 장쾌한 걸음이었는데, 거룩 거룩 흥얼거리는 소리가 꼬리처럼 뒤를 따랐다.
‘무슨 말씀이시지?’
죽이지 말라니.
젊은 놈이 자신을 의미한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아들었다.
***
쾅-!
문석일이 허망한 눈으로 트렁크를 닫았다.
이상한 날이다. 젊은 남자가 힘들이지 않고 멧돼지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지 않나, 갑자기 나타난 할아버지가 차를 털어가질 않나.
- “잡스러운 놈들아! 뭘 훔쳐먹겠다고 이 촌구석까지 기어들어왔느냐!”
위압감이 엄청난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차 안을 뒤져 사탕과 껌을 빼앗았다. 학창시절 한때 불량학생으로 낙인찍혔던 문석일조차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날강도의 현신이었다.
- “야, 거기 자네는 이것 좀 열어 보거라.”
트렁크까지 열게 했는데, 영감님의 패기에 눌린 후배가 얼떨결에 트렁크를 개방했다. 마땅히 반항할 마음이 들지 않았던 탓에 문석일도 후배를 나무라지 못했다.
- “호오-, 좋은 물건이로고. 사이쓰가 몇인고?”
문석일이 전역할 때 챙겨나온 A급 전투화였는데, 노인이 신고 있던 고무신을 벗어 사이즈를 비교하는 통에 맞지 않을 거라는 거짓말도 할 수 없었다.
전투화를 빼앗긴 것에서 나아가 민무늬 전투복도 상납했다. 밑단을 접거나 말아 입는 옷이기에 키가 큰 할아버지도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훤히 아는 듯했다.
날강도 할아버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눈썰미까지 빼어났다.
- “야, 너 주머니에 뭐 있냐?”
문석일의 친구 정상태는 재킷 주머니에 있던 가죽 반장갑까지 빼앗겼다. 고공 침투 훈련 때 친해진 미군 대원이 선물한 거라며 아끼던 물건이다.
- “선물도 받았고, 명절에 타지에서 배회하는 놈들 불쌍해서 내 덕담 한마디 하마. 무조건 살려 달라고 빌거라. 모진 놈이 아니니 사정하면 인정으로 통할 게야. 단명할 관상들이 아니라서 내 친히 알려주는 게다.”
수수께끼 같은 할아버지는 그렇게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하고 사라졌다.
전투화와 가죽장갑, 전투복과 주전부리까지 챙겨서.
문석일은 장갑을 빼앗기고 울상 지은 정상태의 어깨를 다독였다.
“하, 이상한 날이다. 그러려니 하자.”
“날이 이상한 게 아니라 동네가 이상한 거 아닐까?”
“맞아요. 귀신 들린 기분이에요.”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
한 후배는 혹한기 훈련 중 소변을 본 놈처럼 진저리를 쳤다. 한마디 말대꾸라도 했다면 덜 억울할 텐데, 삿갓 쓰고 베옷 입은 장승 할아버지 앞에서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아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불가해한 현상임은 분명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유령을 본 사람들처럼 얼어붙었으니까.
“형, 이번 의뢰 그냥 포기하면 안 돼요?”
“네 마누라는 어쩌려고 그러냐? 인랑이 어머님은 어쩌고?”
약한 소리를 하는 후배를 문석일이 타일렀다.
현실을 떠올린 후배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찝찝함을 털어버리려는 듯 문석일이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애초에 찝찝한 것은 할아버지뿐만이 아닌 탓이다.
그 사이에도 평정심 잃은 동료들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아무리 큰돈을 받았어도 좀 껄끄럽긴 해.”
“그렇긴 한데, 부부만 데려오라는 의뢰였으니까.”
“그런데 저 집 맞아?”
“확실해. 몇 번을 확인했어.”
애써 태연한 척 분위기를 전환했으나 얼굴이 밝은 이는 없었다.
“추석에 이게 뭔 꼴이냐?”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어.”
우연히 잡힌 무전 신호를 도청한 결과, 경호팀이 자리를 비운 지금이 유일한 기회라고 판단한 터였다.
“형, 저 집 들어가서 음식이나 꺼내 먹을까?”
“미친놈. 우리가 강도냐?”
“명절에 딸래미 내버려 두고 어딜 간 거야?”
“삼촌한테 맡기고 마실이라도 갔나 보지 뭐. 기왕 날 잡아 온 거니까 기다려 보자고.”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는 말이 오갔다. 그만큼 불안감이 커 보였다. 담력 높은 이들이 그러니 문석일이 참지 못하고 나섰다.
“그만.”
주의를 환기할 필요를 느꼈다. 이대로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임무에 앞서 각오를 다져도 부족할 판에 흔들리는 모습이라니.
“안기부까지 몇 년이냐. 그동안 먹은 짬밥이 똥통에서 울겠다, 이놈들아. 마음 독하게 먹어라.”
*
‘안기부면 국정원 말하는 거 맞지?’
자신이 가까이 온 것도 모르고 대화를 나누는 그들을 보며 진혁은 잠시 숨을 골랐다. 성장통 덕분인지 이제 무턱대고 주먹부터 뻗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들은 그리 만만한 상대도 아닌 것 같고.
‘돈을 받고 어딜 데려가?’
남자들이 께름칙하게 느껴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긴, 좋은 의도로 왔다면 집으로 찾아왔겠지.
천길룡이 왜 그리 경고했는지도 헤아릴 수 있었다.
‘내가 폭주할까 봐 걱정하신 거였구나.’
누가 조용히 죽어서 사라져도 찾지 못하는 동네, 방범용 CCTV조차 없는 시절이고 장소는 겨우 자동차 한 대 지나갈 수 있는 시멘트 도로다. 분명 불순한 의도를 품고 여기까지 온 자들, 진혁으로서는 살인멸구의 동기가 충분했다. 포악한 성정의 소유자라면 말이다.
분노하는 한편으론 안도했다.
‘사람이네.’
확인하러 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데, 진혁이 없을 때 이들이 들이닥쳤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강도가 아니면 뭐죠?”
남자들의 말소리가 일시에 잦아들었다. 갑자기 들린 진혁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는 것도 잠시, 남자들이 천천히 돌아섰다. 당황한 기색 없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이다.
남자들의 태세를 겨눈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제대로 훈련받은 요원들.’
이들의 눈동자는 반투명한 갈색 선글라스 뒤에 숨었지만 진혁은 남자들의 생각을 훤히 읽었다. 이놈이 언제 왔을까, 우리 대화를 들었을까.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
남자들이 대답이 없자 진혁이 으르릉거리듯 재차 물었다.
“다 들었어. 그래서 조용히 돌려보내지는 못하겠다. 당신들 누구야?”
진혁에게는 가족이 전부다.
가족을 해치는 놈은 가만두지 않는다.
진혁은 제 심장을 간질이며 끓어오르는 투기를 서서히 개방했다.
사아아-.
훈풍을 밀어낸 한기가 들판을 야금야금 잠식했다.
팽팽하게 당긴 고무줄처럼 진혁의 감각이 불청객을 조준했다.
이제 어떤 놈부터 조질ㄲ-.
“선생, 잠깐.”
사내 하나가 진혁을 향해 손바닥을 보였다. 만물을 정지하게 만드는 멈춰 시그널이었다.
그런데 선생이라니, 날 두고 하는 소린가? 진혁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며 뺨을 긁었다.
남자는 곧이어 동료들을 불러모았다.
‘뭐야······.’
예측불허의 상황에서 예측불허의 전개로 흘러간다. 진혁은 멀뚱히 사내들을 응시했다. 기다리란다고 기다리는 꼴도 우습지만, 진혁은 진혁대로 빠르고 의뭉스럽게 두뇌를 회전시키고 있었다. 그럴 필요가 있었으니까.
사내들이 모여 수군거리는 사이, 진혁은 홍기준과 나눴던 대화를 되새겼다.
학교 운동장에서였지.
- “누군가를 동경하기보다는 시기하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이지. 어차피 그렇게 생겨 먹은 인간 세상이라면 당당하게 나 잘났소-, 드러내고 사는 것도 방법이야. 그래야 적을 줄일 수 있어.”
처세술 없는 사춘기 소년을 위한 조언이었을 거다. 언제 어디서 다른 사고를 칠까 걱정도 되었을 테고. 소년의 아버지라는 친구는 아들과 어울려 노는 것에만 혈안이 되었고, 함께 있으면 아들보다 더 어리게 구는 까닭에 자신이라도 나서서 사춘기 방황을 예방하려는 뜻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 “적이 줄어요?”
- “진혁이가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사람은, 특히 남자는 잘난 사람을 보면 일단 견적을 낸다. 이 새끼 나보다 얼마나 똑똑할까, 돈은 얼마나 많을까, 싸움은 얼마나 잘할까. 그런데 죽었다 깨어나도 못 당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하는지 아니? 바로 꼬리를 내려. 덤빌 생각을 않는 거야. 그런 사람을 넘어서려는 사람은 둘 중 하나야. 원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거나, 그냥 미친놈이거나.”
홍기준과의 대화, 어쩌면 일방적이었을 가르침을 떠올리며 진혁은 사내들을 살폈다. 저들끼리 작은 소리로 수군거리는데도 예민한 청각이 모조리 잡아냈다.
의외였다. 내용도, 차분한 음성에서도 별다른 적의가 보이지 않았으니. 애송이 윤성동 패거리에게서도 적대의 기운을 느꼈건만, 불순한 목적의 불청객 치고 온건하다 할만했다.
- “숙이고 들어와 아부하는 놈들은 가까이 두지 마라. 언제든 등 돌리고 떠날 놈들이야.”
진혁이 사내들을 향해 한 걸음 떼었다. 그 몸짓에 명백한 적의를 실었다. 사내들과 다른 점이었으며 일말의 빈틈도 주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사내들 중 하나가 한번 더 손바닥을 펴 보이며 회의 중임을 알렸다.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뜻이겠지만······. 이 상황에 회의도 모자라 대치한 상대에게 시간을 구하다니 정말 골 때리는 놈들이다. 어쩌면 인원이 많은 자신들이 유리하다 판단하고 여유를 부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공기가 우스웠다. 기껏 뿜어낸 투기가 민망해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뭐야, 사람 뻘쭘하게.’
진혁은 꿀밤을 쥐어박고 싶은 걸 참았다. 그래도 액면은 저들이 한참 어른이니까.
- “가장 믿을만한 사람을 만드는 방법은 적의 밑에서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을 포섭하는 거다. 간단해. 더 많이 주면 되는 거야. 한 번 약점이 잡힌 녀석들이라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하지. 무턱대고 퍼주면 안 되고 사전작업이 필요하지만 말이야. 그네들의 속사정을 들어준다든가······.”
마흔이 넘도록 일만 했던 진혁에게는 낯선 세상의 처세법이었다. 하나 처남들을 제치고 그룹을 넘겨받아 회장 자리에까지 오르는 인물의 처세술이니 아쉬운 대로 베껴도 되지 않을까.
한데 진혁은 이들을 살 돈이 없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쓰는 것이 옳다.
- “돈보다 확실한 건 그들 목숨을 사는 거지. 뱀을 쫓고 제비 다리를 고쳐준 흥부처럼 말이야. 실제로 이 나라 재벌들이 많이 쓰는 방법이다. 그런데 놀부처럼 일부러 부러뜨리면 안 되는 건 알지?”
아니, 근데 이 인간들. 사람을 너무 왕따 시키는 거 아닌가?
“저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