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 잉큼잉큼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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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을 쓴 탓에 눈이 쑥 들어갔지만 그대로 쓰러져 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책임질 입이 많아.’
가장의 노고란 이런 것이구나. 책임감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니 어깨가 무거웠으나 늘 그렇듯 기꺼운 짐이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 감동스러워 진혁의 하루하루는 여전히 새롭고 행복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장군이 먹을 물을 갈았다. 헥헥대는 소리에 갈증이 나는 모양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인데, 아니나 다를까 장군이는 미친 듯이 물을 들이켰다. 혓바닥을 낼름거리는 게 아니라 주둥이를 물그릇에 담그고 쭉쭉 빨아들이는 모습, 소가 물을 마실 때와 흡사했다.
“장군이 고생했다.”
“장군이 고생했지요? 에헤헤-.”
낮잠 잘 때가 지난 유진이도 반쯤 감긴 눈으로 장군이를 쓰다듬었다.
진혁은 집으로 들어가 유진이를 씻기고 옷도 세탁기에 넣어 빨았다. 야생 짐승에게서 어떤 수인성 질병을 옮아왔을지 몰라 불안했다. 동생이 거실에서 노는 동안 진혁도 박박 씻었다. 따뜻한 물에 근육의 경직이 사라지고, 향긋한 비누 냄새에 마음이 풀어졌다.
“오빠, 유진이 맘마 주세요오-.”
“우리 애기 배고파? 어디 보자. 뭘 먹어야 하나?”
“데지요.”
아이쿠, 이 녀석 집념 보소.
아기의 집중력을 우습게 여긴 진혁은 냉장고 문을 열다가 균형을 잃을 뻔했다.
“돼지는 밤에 먹자. 오빠가 구워줄게.”
“녜, 에헤헤.”
유진이는 정말 착하다. 고집을 부리지도, 생떼를 쓰지도 않는다. 따로 조건을 걸지 않아도 오빠 말이라면 곧이 받아들여서 고맙기도 했다.
“우리 애기, 계란 맘마 해주까?”
“녜, 에헤헤-. 계란 맘마 맛있지요?”
먹는 것을 가리지도 않는다. 오빠가 먹지 않는 메기매운탕을 맛있게 먹는 것만 보더라도 유진이가 오빠보다 낫다.
진혁은 밥 위에 반숙한 달걀프라이를 올리고 참기름 한 숟가락, 진간장 반 숟가락을 넣고 비볐다. 고소한 냄새가 진동하자 침이 절로 꿀꺽 넘어간다. 힘을 너무 써서 허기진 것도 몰랐을까, 저도 모르게 흐른 침을 스윽 닦았다.
쩝.
‘수족구병인가.’
그래도 동생이 먼저다.
깨끗한 물에 씻은 김치를 잘게 찢어 유진이 숟가락에 하나씩 올렸다.
“울애기, 맛있어?”
“녜, 에헤헤.”
오물오물 예쁘게도 먹는다. 아이들은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보고 있자면 눈물이 핑 돌만큼 감동적이다. 내 동생이라 예쁜 걸까, 아니면 모든 아이가 이런 걸까. 또 모르지. 속에 아저씨 영혼이 들어있어서 그런 걸지도.
“다 먹었어요, 에헤헤-.”
“물로 오글오글하자.”
밥을 다 먹은 유진이에게 물을 먹이고 잠시 거실에서 놀게 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오니 유진이는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오빠와 뒷산 대모험을 했으니 많이 피곤했겠지. 어린 녀석이 잠투정도 하지 않고 혼자 졸다니, 어디서 이런 순둥이가 나왔을까. 물론, 엄마 뱃속에서 나왔지만.
“자장-, 자장-.”
진혁은 혹시나 먹은 것이 얹힐까, 속이 답답하지 않을까 동생을 안고 등을 다독이며 거실을 서성였다. 아기 때도 종종 하던 일이라 익숙했다. 그러다 귓가에 그어억- 트림 소리가 들리기에 안방 침대에 눕혔다.
‘잘 자라, 우리 아가.’
동생의 뺨과 이마에 입을 맞추고 조용히 현관을 열고 나왔다.
장군이는 헤롱거리는 것 같더니 네 발을 쳐든 채 벌러덩 자빠져 자고 있었다.
‘저 새끼 웃는 거 같은데?’
죽은 게 아닐까 의심도 되었지만 배와 가슴이 아주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니 숨은 붙어있는 게 분명했다. 길게 빼 늘어뜨린 혀가 땅에 닿아 흙이 잔뜩 묻었다.
진혁이 조심스레 안아 들었지만 장군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장군이를 개집 안에 옮기고 은밀하게 옥상으로 이동했다. 평소에는 드넓은 들판과 산, 멀리 보이는 바다를 보며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엄마를 위해 아빠와 진혁이 함께 화단을 꾸미고 키작은 과실수도 심었는데, 뜻밖에도 몸을 숨기기 용이한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돈가스의 공포로부터 몸을 숨기거나, 지금처럼 진혁이 수상한 사내들을 관찰할 때가 대표적이다.
‘뭐하는 사람들이지?’
아까 확인하기로, 남자들이 타고 온 세단에는 서울 번호판이 달려있었다.
홍기준과 유세라는 진혁의 부모님과 함께 하와이로 떠났고, 홍수정은 외할아버지와 시간을 보낸다고 했으니 그 사람들과 관련된 사람들은 아닐 터였다. 그들과 관련된 사람들이라면 진혁의 집으로 차를 몰고 왔겠지.
‘비범해.’
나도 평범하진 않지. 듣는 이도 없는데 조용히 뇌까렸다.
멀리서 남자 둘이 대화를 나누며 진혁이 사는 집을 가리키는 모습에 등골이 서늘했다. 그들이 풍기는 기운은 평범한 부동산 사업자나, 자산가의 것이 아니었다.
‘멀리서도 이렇게 느껴질 정도면 뭔가 있는데.’
느끼는 나도 이상하고. 진혁의 미간이 오므려졌다.
아까 가까이 지나치며 느꼈던 불길한 기운이 남아서 그런 것일까,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기척을 자신이 어떻게 느낄 수 있는지 설명할 도리는 없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사안도 아니고.
‘속속들이 짚어야겠고 알아야겠다.’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면 장군이만도 못한 사람이다. 진혁은 그리 생각했다. 더이상 소극적으로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현대식 저승사자에 대해 동네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당연히 주된 화자는 조일헌이었다. 검은 복장 차림의 남자 둘이 집을 가리키면 누군가 죽어 나간다고. 죽어야 할 대상으로 찍힌 자는 집 안에 누워서도 그 저승사자들이 보인다고 했다. 동네에서 그런 일이 생긴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소문도 돌았다.
신경 쓸 가치 없는 말이었고, 낯선 사람을 조심하라는 뜻에서 아이들을 겁주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허황된 미신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었다.
‘내가 과거로 돌아온 게 더 허무맹랑하잖아.’
진혁은 한시도 제 존재를 예사롭게 여긴 적이 없고, 세상을 만만히 여기지 않았다. 방만하게, 혹은 맹목적으로 살지 않기 위한 제 나름의 금제였다.
아무튼, 저들을 그냥 두자니 부모님과 어린 동생이 마음 쓰였다. 진혁이 없을 때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르는 일이다.
그때였다.
“진혁아-. 집에 있니?”
넓은 마당에서 최미경 청소년의 옥구슬 같은 목소리가 올라왔다.
멧돼지 손질이 벌써 끝났나?
꼬르륵-.
아, 그러고 보니 밥을 못 먹었네.
***
“거룩 거룩 거어룩- 은혜로운 주님-.”
삿갓을 쓰고 고무신을 신은 베옷 차림의 장신 늙은이가 찬송가를 흥얼거렸다. 제대로 불러본 적이 없어 음정과 박자가 제멋대로지만 낭랑한 음성만은 들어줄 만했다.
“학이시습지면 불역 여호와라-. 암만-.”
구도자로서 종교라는 것을 탐구할 목적이었다. 물론, 세속적인 이유가 더 컸다. 명절이라고 교회에서 음식을 대접한다기에 먼길을 걸어갔던 것인데, 성경책과 찬송가도 얻었다.
“아주 제대로 배워먹은 것덜이 왔어. 거룩 거룩- 스읍-.”
예의 바른 목사였다. 어르신 오셨냐며 넙죽 허리를 숙이고 다음에는 승합차를 보낼 테니 타고 오라는 호의도 보였다.
“더는 안 간다. 이놈아. 스읍-. 거룩 거룩 거어룩-.”
예배당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곳이었다. 당연히 내킬 리 없다. 하늘을 향해서도 무릎을 꿇거나 고개를 조아리는 법 없는 선인이라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나는 무릎이 쑤셔요오-. 거룩 거룩 스읍- 거어룩-.”
교인들이 찬송가 부르던 모습을 자꾸 흉내 내게 된다. 호흡 조절이 어려워 그런 것인지, 입에 침이 고여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간에 자꾸 습습 거리더라. 매운 음식 먹은 사람처럼.
천길룡의 거룩한 걸음이 어느새 최장환의 집 근처에 닿았다.
“으르신. 워디 다녀오신대유? 시방 진지는 잡수셨대유?”
너른 마당에서 왁자지껄 떠들던 청년 중 하나가 천길룡을 불렀다. 천길룡과 죽이 척척 맞는 조일헌이었다.
천길룡은 펼쳤던 찬송가를 덮어 뒤로 숨겼다.
“뭣들 허시는고?”
“지넥이가 뒤야지를 가져왔슈-.”
“우리 태양이 장사 됐다고 동네잔치 허라구 주구 간규, 이게.”
지넥이? 그게 누구지?
천길룡이 삿갓을 올려 시야를 틔웠다. 넓게 펼친 비닐 위, 얌전히 뻗어 있는 멧돼지 자태가 눈부시다.
“허허-, 그 돼지 참 실허다.”
“한 점 잡숫구 가슈-. 추석인디 오늘일랑 여서 주무시구 가시먼 좋겄네.”
최근 들어 천길룡의 행차가 부쩍 늘었음을 아는 최장환이었다.
최장환의 사람 좋은 웃음이 아니더라도 천길룡은 내심 동하던 중이었다. 수호신 놀이 은퇴하고 즐기며 살기로 했으니까.
‘여기가 이복수 여사가 살던 집이구먼.’
삼신의 사주를 한 몸에 지녔던, 형 최기륭의 꼬임에 넘어가 젊을 때부터 산파 노릇을 하고 다니던 여인.
형제는 터의 음기를 누르느라 마을 밖을 자주 다니지 못했다. 가끔 나온다 해도 이복수는 타지의 자식들을 챙기느라 없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노고를 치하하지도 못했는데 하늘로 가버렸다.
‘차례상에 술 한 잔 올려야겠구먼.’
부채감이었다.
그리 마음먹은 천길룡이 최장환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저 위에 다녀옴세.”
“예. 꼭 오슈. 방은 많으니께유-.”
“그려, 그려.”
흡족하게 웃은 천길룡이 발길을 옮겼다.
교회 가다가 눈여겨 봐둔 놈들에게 볼일이 있지. 잡것들.
***
최미경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부모님이 여행 중이라 혼자 동생을 돌볼 진혁에게 송편과 추석 음식을 전해주러 온 것인데. 진혁이 최미경의 어깨에 손을 얹고 함께 최미경의 집으로 가는 중이다.
‘뽀뽀하자고 하면 어쩌지? 한 번쯤 거절해야겠지······?’
알 거 다 아는 나이다. 여자아이들은 조숙했고, 남자아이들 못지않게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였다. 좋아하는 사람을 보며 로맨스를 꿈꾸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최미경이 둘째 딸 영어학원을 읍내 종로학원으로 할지, 대성학원으로 할지 고민할 때 진혁이 입을 열었다.
“음식 주셨는데 감사 인사는 드려야지.”
최미경의 빨간 입술이 안쪽으로 강하게 포개졌다. 사춘기 여자아이의 환상과 설렘, 두려움이 가을바람에 실려 날아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진혁의 손에는 최미경이 들고 왔던 그릇이 들려 있었고, 그릇 위에는 진혁이 냉장고에서 챙긴 사과 따위의 과일이 담겨 있었다.
‘에휴-.’
최미경은 속으로 한숨을 뱉었다. 손진혁은 어릴 때부터 어른스럽던 친구다. 아니, 어른스럽다기보다 늙은이 같다는 말이 더 어울릴 터였다.
아이들이 장난을 쳐도 화내는 법이 없이 형처럼, 때론 정말 아저씨처럼 털털하게 웃는 아이였다. 그래서였을까, 친근함 그 이상까지는 접근할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이성 간에도 장난치듯 서로 희롱도 하는데, 진혁은 아이들이 다칠까 걱정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어도, 적당히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마음의 벽 같은 것이 느껴지는 친구.
‘내가 들이밀어도 거절할 놈이야.’
뭘?
아무튼 가장 가까이 사는 친구 미경이 보는 진혁은 그런 사람이었다.
영감님 같은 놈.
‘혹시 그거에 문제 있나? 영감님 같아서?’
뭐가?
어깨에 손이나 두르지 말든가. 나쁜 새끼.
까지도 않은 게. 동네에 소문 다 났다.
긴장을 늦추지 않던 진혁의 관심이 잠시 최미경 청소년에게 향했다.
당연히 그 사람들이 지켜보는 중일 거다. 그런 생각에 자연스러운 연출을 한 것인데, 최미경 청소년에게서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진혁은 최미경 청소년 기분이 좋지 않은가 보다 생각하며 뺨을 긁을 뿐이었다. 특유의 눈치 없는 성격이 이럴 땐 어떤 갑옷보다 훌륭하다.
최미경 청소년의 집 마당에서는 돼지 손질이 한창이었다. 김장할 때 사용하는 두꺼운 비닐을 넓게 깔고 조일헌과 최장환이 작업 중이었는데, 시뻘건 생육을 봤음에도 진혁은 의외로 마음이 차분했다. 차마 보지 못하고 집으로 들어가 버린 최미경과 대조적이었다.
주위를 서성거리며 손에 소주잔을 들고 뭘 씹는 아저씨들도 있었다. 설마 멧돼지 날고기를 씹는 건 아니겠지? 야생동물 날로 드시면 클 나요오-. 진혁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살피니 그들의 손에는 육포가 들려 있었다.
“어머니, 보내주신 음식 잘 먹겠습니다.”
“아이구-, 우덜끼리 뭐 답례를 들구와싸-.”
미경의 어머니는 진혁의 답례에 헤벌쭉 웃음으로 답했다. 과묵하지만 여느 아이들 같지 않게 예의를 알지 않는가. 참으로 제집 아들이었으면 하고 바랐으니. 남편 최장환과 한결같이 나누는 얘기가 그것이었다. ‘쟤도 우리 아들이었으면.’
미경의 집에 인사를 드리고 진혁은 집으로 가지 않았다. 왔던 길과 다른 길을 택해 사내들이 있던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멧돼지를 끌고 왔던 길이다. 일부러 몸을 숙이지 않아도 구릉처럼 볼록한 콩밭이 몸을 숨겨주었다.
‘유진이는 한 번 잠들면 세 시간 이상 자니까.’
확인해야겠다.
저놈들이 왜 이 한적한 시골에 와서 온종일 우리 집을 감시하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