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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78화 (78/338)

# 78 < 잉큼잉큼 (4) >

***

항상 인간을 경계해야 하는 야생 짐승들이 선천적으로 지병처럼 지닌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인간의 발소리만 들어도 도망치고, 인간 냄새가 나는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이유였다. 그래서 산짐승들은 인간과 접촉 후 면역 없는 병에 걸린 것처럼 시름시름 앓거나 식음을 전폐하다 죽기도 했다.

그런데 환각 버섯 과식으로 약발이 올라 인간과 진하게 부대꼈으니. 탈진하며 정신을 차린 멧돼지는 저를 껴안은 게 인간이라는 사실에 천지가 뒤집히는 충격을 받았다. 질식은 질식이고 충격은 충격이었다.

질식이 겹친 쇼크사라고나 할까.

‘죽은 거 확실하지?’

진혁은 멧돼지의 호흡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때였다.

으르르-.

장군이가 멧돼지에게 다가와 킁킁거렸다.

“장군이 뭐하니?”

예민한 장군이가 뭔가 감지한 줄 알았는데······.

장군이는 뭐에 홀린 듯 멧돼지의 코와 주둥이를 핥았다.

개가 뭘 핥는 모습은 하루 24시간 중 24시간 동안 볼 수 있는 흔한 광경, 진혁은 안도했다.

‘휴, 긴장했네.’

장군이도 확실히 사망 선고를 내린 듯 보였다. 게걸스럽게 멧돼지 콧구멍과 입에서 흐르는 허여멀건 거품도 핥았는데, 인상을 쓰고 지켜보던 진혁이 떼어내도 계속 덤벼들었다.

“장군아, 지지야.”

으르르-.

이 새끼가 미쳤나. 과거로 온 후 짖은 적은 있어도 이렇게 맹렬히 이빨을 드러내지는 않았는데.

으르르-딱딱딱-!

이빨 부딪는 소리가 무서워 진혁은 더이상 말리지 않았다.

아무튼.

‘동생이 먹고 싶다는데 별 수 있나.’

진혁은 유진이를 안아 들고 튼튼한 팔로 동생을 든든하게 받쳤다. 다른 손으로는 멧돼지 뒷다리를 잡았다. 제법 무거운 녀석이지만 등과 광배근, 팔에 힘을 주어 용을 쓰니 끌려왔다. 들쳐 메고 갈까 생각도 했다가 위생 때문에 참기로 했다.

헤헤헥-.

돼지 입거품을 핥고 눈이 충혈된 장군이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꼬리를 흔들었다.

이 순간, 무거운 멧돼지를 들 수 있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거지꼴이 따로 없네.’

남방과 티셔츠는 돼지 송곳니에 찢기고, 운동화 한쪽은 밑창이 뜯어져 자꾸 발이 삐져나왔다. 걸을 때마다 신발이 털벅댔다.

처참한 몰골에 심기가 불편한 것도 잠시, 신경 거슬리게 만드는 건 또 있었다.

헤헤헷-.

장군이는 어느새 멧돼지 위에 올라타 기분 좋은 표정으로 꼬리를 흔들었다. 한껏 들뜬 개선장군의 모습이 저럴까. 개선장군이라, 개에다 장군까지 들어가니 장군이에게 이보다 딱 맞는 말은 없을 듯했다.

“흡-!”

화풀이하듯 근력을 뽑아냈다. 진혁의 힘을 감당하느라 전완근이 덜덜 떨렸다. 나무뿌리나 돌에 돼지가 걸려도 낑낑 힘을 주면 멧돼지가 끌려왔다. 그렇게 어찌어찌 버스 길까지 끌고 나왔다.

그늘진 숲을 벗어나자 초가을 오후의 눈부신 볕이 오누이를 반겼다.

‘하, 이걸 어쩌나?’

하자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돼지 손질은 해본 역사가 없다. 닭 손질은 엄마가 도와주셔서 어떻게든 했었는데. 아, 닭이라고 하니 닭 존슨이 생각난다. 진혁의 스타트 능력 향상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아빠들의 원기보충에도 기여한 녀석.

그해 여름, 아빠와 홍기준이 동시에 골골대서 보신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잡았더랬다. 엄마가 잡겠다고 하셨지만 엄마가 험한 일 하는 게 싫어 진혁이 직접 했다.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마당에 가마솥을 걸고 여섯 시간을 푹 삶았었지.

‘맛은 좋았다.’

만능 농부 최장환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래. 최 씨 아저씨라면 돼지도 가능할 거야.’

진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최미경의 집으로 향했다. 동네 친목회나 잔치 때면 돼지를 자루에 담아 경운기로 싣고 와서는 직접 손질을 하던 분이니 멧돼지도 가능하시겠지. 어디까지나 시골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오전부터 주차되어 있던 세단은 그대로였는데, 뒷좌석에서 남자 두 명이 잠을 자고 있었다. 추석 연휴에 여기까지 와서 차 안에서 낮잠이라······. 그리고 가까운 바위에 남자 두 명이 올라 있었다.

‘계속 우리 집 보고 있네?’

땅을 보러 온 사람들이라 생각했거늘, 어떤 까닭인지 한 곳만 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유심히 보는 곳에는 진혁이 사는 3층 집만 있다.

드드드드드-.

둔중한 소리를 내며 멧돼지를 끌고 가자 차 안에서 자던 남자들이 화들짝 놀라 밖을 내다보았다. 딴청을 피우던 남자들도 진혁을 유심히 살폈다.

진혁은 평범한 시골 중학생답게 남자들을 본체만체하며 걸었다. 옷은 너덜너덜, 한 팔에는 어린 동생, 한 손에는 멧돼지. 그야말로 참으로 평범해 보일 시골 청소년 모습 아닌가.

남자들을 곁눈질한 진혁의 포커페이스가 일순 흔들렸다.

‘유령 같다.’

흔히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와 달랐다. 그걸 어찌 아느냐 묻는다면 진혁으로서는 마땅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저 온몸의 솜털이 일어서고 모공이 벌렁거리며 정수리가 뜨겁노라, 그냥 몸으로 느껴진다는 말 외에는.

눈이 시뻘건 멧돼지와 맞닥뜨렸을 때는 목덜미와 귀가 찌르르했다면, 이들을 보면서는 뒷골이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달밤에 귀신 보면 이런 느낌이려나?’

저 무심한 눈빛들만 봐도 그렇다. 태연하게 어린아이를 안고 멧돼지를 끌고 가는데도 전혀 동요하거나 신기한 기색 없이 쳐다보지 않는가. 동요하기는커녕 평온하고 나른한 눈빛이다. 그 무심한 눈빛이 오히려 진혁을 긴장시켰다.

‘아무래도 수상하고 이상해.’

알아봐야겠다. 부모님 오시기 전에.

대개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으니.

“안녕하졔어-.”

유진이가 해맑게 웃으며 수상한 아저씨들에게 인사를 했다. 오빠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

문석일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넋이 나갔다. 함께 있던 친구도 마찬가지였고, 차 안에서 휴식을 취하던 두 동생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저건······, 뭐지?’

멧돼지가 사람 바짓가랑이를 물어 끌고 가는 광경을 실제로 목격한 바 있다. 강원도 철원에서 훈련할 때였지 아마. 기도비닉을 유지해야 했기에 대검을 멧돼지 목에 적중시켜 남자를 구했었다.

그런데 웬 젊은 남자가 멧돼지를 질질 끌고 간다.

‘군인인가?’

화천에서 훈련할 때는 멧돼지를 사냥해 부족한 열량을 보충하기도 했다. 멧돼지를 운반할 때는 보통 쇠파이프에 다리를 묶은 후 네 명이 어깨에 지고, 트럭 짐칸에······.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저 정도 크기 멧돼지라면 200kg 가까이 되지 않을까.

저 젊은 사내는 헤어스타일로 보아 휴가 나온 군인일지도 모르겠다. 키가 크고 몸이 다부지다. 하여간 젊다 못해 어려 보이는 남자는 용쓰는 기색도 없이 저 무거운 멧돼지를 너무나 쉽게 운반하고 있다.

드드드드-.

멧돼지가 멀어질 때까지 입을 다물지 못하던 문석일이 입을 열었다.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음성에는 힘이 없었고 눈빛은 환각에 빠진 듯 여전히 몽롱했다.

“상태야······.”

“왜······.”

“저 친구 저 집에서 나온 거 맞지?”

“맞지.”

“근데 왜 저쪽으로 가냐?”

“낸들 아냐······.”

“그 집 동생일까?”

“얼굴 봐서는 닮은 것 같기는 한데······.”

지금 정신상태가 천치 같기로는 친구도 마찬가지여서, 문석일의 물음에 겨우 대답하는 수준이었다. 금방이라도 잠에 빠질 듯 나른한 목소리였다.

문석일은 입술이 마르고 목이 타들어 갔다.

“우리 후배일까?”

“······후배님이시겠지.”

하대하는 짓은 불경이야. 상태라 불린 친구가 입술을 달싹였다.

저런 괴력을 보이는 요원이 있다면 아무리 까마득한 후배라도 존칭을 사용함이 마땅하다.

그가 문석일의 팔을 조심스레 툭 쳤다.

“우리 이번 일 잘못 맡은 거 같지 않냐?”

“그런 거 같기는 한데, 저 친구가 목표는 아니니까.”

“저 후배님한테 잘못 걸리면 우리 뼈도 못 추리는 거 아냐? 힘이 장산데?”

“우린 네 명이야. 작전을 힘으로 하냐?”

그리 말하면서도 문석일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무력감이 배어 있었다.

문석일은 머리를 세게 저어 정신을 차린 후 길게 호흡을 뺐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임무를 떠올렸다. 동료들의 면면도 다시 살폈다. 정예 중에서도 정예로 불리던 요원들이었다.

“어디 갔는지는 모르지만 집을 오래 비우지는 않겠지?”

“그럼. 촌닭들은 해 떨어지면 안 돌아다녀. 곧 올 거야.”

그때 작업 치면 된다.

***

“꺄아아아악-!”

최미경의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명절을 맞아 최태양이 출전한 씨름 대회를 함께 시청할 겸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최미경이 멧돼지를 보고 비명을 지른 탓이었다. 모두 현관으로 나와 진혁을 위아래로 훑었다.

“아이고! 우리 지넥이 꼴이 이게 뭐여! 산이서 굴른 겨?”

“아뇨.”

멧돼지가 찢었어요. 그치만 유진이와 장군이는 무사하답니다.

구르긴 굴렀는데 그 구르기는 아니니까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버님, 이것 좀······.”

“이이? 이게 뭐여? 어서 숴온 겨?”

그제야 멧돼지를 발견한 최장환이 까무라칠 듯 놀랐다. 최장환의 기겁하는 소리에 보이지 않던 다른 주민들도 우르르 몰려나와 멧돼지를 구경했다.

“뒷산에 밤 주우러 갔다가요.”

“죽은 지 오래된 거 먹으먼 클 나는디?”

죽은 지 15분도 안 됐다.

최장환은 멧돼지를 이리저리 살폈다. 척척박사 조일헌도 담배를 삐뚜름히 물고 가늘게 뜬 눈으로 검사에 돌입했다. 코와 입이 젖어 있는 데다 체온도 남아있고, 사후 경직도 오지 않아 라이터로 여기저기 누르자 꾹꾹 들어갔다.

“성님, 이거 죽은 지 얼마 안 됐슈-. 피두 안 굳었구먼-?”

조일헌의 말에 동의한 최장환이 턱을 받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이-. 신신허구먼. 상태가 아주 흐뭇혀. 이걸 우리 지넥이 혼자 메고 온 겨?”

“아니, 뭐 그냥······.”

메고 온 것은 아니지만 혼자 가져오긴 했는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마땅히 설명할 길이 없어 진혁은 산도 가리켰다가 콩밭도 가리켰다 하며 공허하게 손을 휘저었다. 박자 놓친 마에스트로 같다.

“동네분들끼리 나눠 드세요. 안녕히 계세요.”

“지넥이 뭐 주까?”

인사하고 급히 발길을 옮기는 진혁의 등에 최장환의 목소리가 꽂혔다.

먹고 싶다는 동생의 말에 가져오기는 했지만, 굳이 야생동물을 먹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쩌지?

잠시 고민하다가 오빠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유진이와 눈이 마주쳤다.

지켜보는 어른들이 많으니 유진이도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손에 힘을 주어 오빠 손을 살살 흔드는 걸 볼 때 유진이는 멧돼지를 포기할 마음이 없는듯했다.

“으응- 으응-.”

유진이는 손을 흔들며 평소 하지 않던 조르기 소리까지 냈다. 오빠에게만 들리도록 나지막이.

아, 유진이는 고기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이 애처로운 눈동자를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갈비나 몇 대 주시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진혁이 대답하자, 조일헌이 펄쩍 뛰었다.

“갈비가 다 뭐여어-! 지넥이 껀디 뒷다리 하나는 주야지이-.”

“뒷다리는 무슨! 앞다리랑 뱃살이 맛있는 겨어-.”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진짜 조금만 주세요. 저 갈게요!”

“그려! 이 성이 잡내 안나게 기가 멕히게 손질해둘텡께 저녁 나절이 다시 오너!”

아빠보다 나이 많은데도 스스로 형이라 칭하는 조일헌을 뒤로 한 채 진혁은 유진이를 들어 안고 집으로 향했다.

최장환과 조일헌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먹을 수 있나?”

“노루두 먹는디 뒤야지는 훨 낫쥬-.”

“근디 이눔이 왜 죽은 겨?”

“독버섯 처먹은 거 같은디이-. 주댕이에 가루가 잔뜩 묻었네이-. 왜 이쪽 주댕이는 싸악- 딲은 거 같댜, 누가 핥은 것마냥?”

“뒤야지가 독버섯 먹었다고 죽나?”

“죽겄쥬-. 독인디. 여기 이렇게 딱- 죽어 있잖유?”

우스갯소리로 들릴 말이었으나 불콰하게 술이 오른 조일헌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우덜두 이거 먹으먼 죽는 거 아녀?”

“하! 참. 이 성님이 또 까닭 웁는 소리 허네이-. 이게 월매나 귀헌 건디이-. 내장만 싹 걷어내먼 나머지는 다 먹는 거유-.”

“근디 이 근방서 멧돼지가 나오던가?”

“알게 뭐유우-. 지 발로 와서 디졌는디. 사람은 사는 곳이 고향이구 짐승은 디진 곳이 고향이여어-.”

진혁은 조일헌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부모님 산소가 없었다면 절대 찾지 않았을 이곳 대신 서울을 고향으로 여기고 살았었으니.

“어허허, 이런 시상이-. 우리 태양이 한라장사 됐다구 하늘이서 떨어졌나?”

최장환의 말에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천하장사에 오르면 한우 떨어지겠네요.

변싼체가 될 뻔하며 개고생해서 잡았는데 하늘에서 거저 줬다는 가설에는 절대 동의 못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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