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 잉큼잉큼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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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광연과 홍기준은 각각 오픈카를 빌려 오하우섬을 일주했다.
시간과 코스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여행이었다. 해안도로에는 두내리만큼이나 차가 없어 눈치 보지 않고 저속으로 주행할 수 있었다.
“와-! 오빠, 우리 옛날 생각난다 그치?”
드라이브를 좋아하는 유세라가 기분이 좋아져서 재잘재잘 떠들자 홍기준도 덩달아 신이 났다. 그 옛날 연애할 때의 설렘이 다시금 살아나니 젊은 시절로 돌아간 기분도 들었다.
‘좋았지. 미행하는 놈들 따돌리느라 스릴 넘쳤어.’
손광연도 처음 하는 해외여행이 아내와 함께여서 행복했다.
물이 투명해서 뭐가 잡힐까 싶은 곳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 수영을 하거나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 어라, 저 여자 위에 아무것도 안 입었네. 선베드에 엎드려 있어 아쉬웠지만 운전하면서도 볼 건 다 봤다. 그래도 조수석에 앉은 아내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 손광연에게는 최고의 행복이었다.
“아, 너무 좋아요. 천국은 이렇게 생겼나 봐요.”
“하와이에 땅 좀 사둘까요?”
“그럴 수 있어요?”
“그럼요. 안 돼도 다 돼요.”
그렇지 않아도 어젯밤 홍기준과 저녁을 먹으며 노년을 하와이에서 함께 보내는 게 어떨지 상의를 한 터였다. 여행을 가면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누구나 한 번쯤 하기 마련인 모양이다. 해외여행이 처음인 손광연도, 출장이 잦아 여권에 도장 찍을 공간이 없는 홍기준도 하와이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상속도 된대요?”
“당연히 되겠죠?”
안 되면 방법을 찾으면 그만이다.
벌써부터 상속을 생각하다니, 이 순간에도 아내는 집에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는구나. 이럴 땐 좀 자신을 위해서만 즐기는 것도 괜찮으련만. 하긴, 손광연도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니 그런 아내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아예 진혁이 이름으로 살까 봐요.”
“어머,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네요.”
손광연은 귀국하는 대로 홍기준을 통해 하와이에 땅을 사겠노라 다짐했다.
그런데 하와이에서는 무슨 농사를 지어야 하나?
오전에 먹은 파인애플이 너무 맛있었다.
저녁이 되어 홍기준이 미국 본토에서 날아온 사업관계자를 만나러 간 사이에도 손광연과 한유영은 땅 얘기를 계속했다.
와이키키 해변을 거닐면서도.
“땅!”
“땅!”
저녁을 먹으면서도.
“땅!”
“따당!”
유세라는 눈앞의 손광연 부부가 신기했다.
‘하루 종일 땅땅거리네.’
지치지도 않을까. 마치 땅에 미친 사람들 같지 않은가. 그런데 이게 또 듣고 있으려니 아이들 노는 모습 지켜보는 것처럼 재미가 있었다.
“기준이랑 붙여 사는 게 좋겠어요.”
“그럼 수정 아빠하고 더 상의해 보세요. 서로 마음에 드는 지역이 다를 수 있잖아요.”
그리 나눈 대화를 미팅에서 돌아온 홍기준이 듣고는 한마디 붙였다.
“뭘 따로 사? 그냥 진혁이 이름으로 붙여 사면 되지. 크게.”
자연스러웠다. 함께 사는 가족인 양 스스럼없이 나온 말이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손광연과 한유영도 좋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였고, 역시 남편의 의사결정 능력 어디 안 간다고 유세라는 물개처럼 박수까지 쳤다.
참으로 자연스러운 사람들이었다.
다시 아이들이 생각난 한유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우리 유진이, 엄마 찾지는 않으려나?”
“오빠가 품에 꼭 끌어안고 살 텐데 휴가에 집중해요. 우리 수정이는 형제도 없이 할아버지 집에 있는데.”
뭐, 그런다고 위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유세라 덕분에 자기만 나쁜 엄마가 된 건 아닌듯해 다행이었다.
***
그 시각, 졸지에 하와이에 땅을 갖게 된 손진혁은 멧돼지를 끌어안고 사투를 벌였다.
‘으으으-, 기분 찝찝해.’
누군가를 이렇게 진하게 끌어안고 뒹군 경험이 있었던가. 이 실력으로 연애를 했다면 스토커가 되었겠지. 진혁이 기억하기로 체육대회 때 씨름에 출전해 샅바를 잡았을 때가 유일했던 것 같았다. 유도할 때야 뭐, 누르기나 조르기는 애용하지 않았으니.
아무튼, 이놈의 멧돼지가 돌진하더니 진혁을 지나쳐 유진이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야생의 순리대로 약자를 공격하려던 멧돼지의 패착이었다.
낯선 괴수와 조우한 탓에 두려움에 빠졌던 것도 잠시, 진혁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손진혁이라는 크레모아 지뢰의 인계철선인 가족을 멧돼지가 건드렸으니.
“이게 감히!”
누굴 넘봐!
진혁은 본능적으로 멧돼지의 목에 팔을 감았다. 마치 바윗덩이를 끌어안은 듯, 멧돼지는 산짐승답게 힘이 넘쳤다. 진혁은 멧돼지가 이끄는 대로 잠시 끌려갔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끌려다니면 동생을 보호할 수 없다. 두 발을 땅에 대고 힘을 줬다. 땅 위로 튀어나온 굵은 나무뿌리에 두 발을 딛고 몸을 눕혀 버텼다. 발목과 무릎 관절을 잠그고 다리를 통나무처럼 만드니 허벅지가 터질 듯 부풀었다.
팔이 긴 진혁이었지만 멧돼지의 목이 굵어 한 팔로 감을 수 없었다. 목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애매한 굵기였다. 손목에 다른 손목을 걸어 굳게 걸어 잠갔다.
꾸이이-! 쿠에에-!
멧돼지는 멧돼지대로.
“우욱! 훅!”
진혁은 진혁대로 사력을 다했다.
‘죽어! 죽어!’ 유진이가 듣고 놀랠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몸부림치는 멧돼지 송곳니에 옆구리와 배를 찔렸다. 상처나 출혈 없이 옷이 찢어지는 데 그쳐 다행이었다.
***
멧돼지는 당황스럽다.
독립할 때가 되어 바람 냄새, 버섯 냄새를 따라 처음 보는 땅에 들어선 게 오늘 오전이었다. 구봉산 밖은 위험하다고 다른 돼지들이 알려줬지만. 산을 벗어나도, 꿀꿀거리며 길을 따라 걸어도 위험은커녕 재미난 모험도 만나지 못했다.
습성을 좇아 어느 어둡고 썩은 나무 냄새 가득한 숲에 들어섰다. 제 놈이 좋아하는 버섯이 엄청나게 많은 숲이었다. 이름은 알지 못한다. 다만,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버섯이라는 것쯤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노르스름하고 동그란 버섯, 샛노랗고 넓적해서 먹을거리가 많은 버섯, 흰색과 연한 갈색이 어우러진 버섯 등등.
인간들이 환각 버섯이라 부르며 기피한다는 사실을 짐승이 알리 없었다.
어떤 노루가 그 버섯을 너무 많이 먹고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도 돌았지만, 먹새를 조절할 인내심이 있다면 그건 이미 돼지가 아니지. 언제 또 먹을 수 있을지 모르는 야생에서 식사량 조절이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너무 많이 먹은 탓일까, 머리가 어지럽고 몸에 피가 빨리 도는 느낌이 들었다. 숨이 가쁘고 돼지 염통도 쿵쿵 뛰었다. 그래도 계속 먹었다. 그리 닥치는 대로 뜯어먹다가 두 발로 걷는 사람을 만났다.
크고, 어둡고, 강해 보였다.
피가 끓고 숨이 거칠게 나왔지만 싸우고 싶었다. 힘을 증명해 버섯이 풍부한 이 땅의 주인이 멧돼지임을 온 천하에 알리고, 이 숲에 살리라 다짐한 터였다. 그래서 물러설 수 없었다.
이 순간, 눈에 보이는 인간들과 개는 침입자일 뿐이었다. 그리 전의를 불사르니 침이 뚝뚝 떨어지고 나무뿌리를 긁는 듯한 굵직한 소리가 목구멍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피할 수 없는 싸움, 큰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등을 보인 작은 사람이 보였다. 저 작은 사람은 약해서 한 번만 들이받으면 쓰러지리라. 멧돼지는 본능을 따라 작은 인간을 향해 돌진했다. 일직선상에 있었기에 힘들이지 않고 목표를 변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큰 사람이 멧돼지의 기습을 허용하지 않았다. 청설모보다 잽싸게 멧돼지의 목을 끌어안은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싸웠다. 싸웠다기보다는 목이 졸려 버둥거리는 게 전부였지만.
점점 숨이 막혀왔다.
멧돼지가 사람에게 애원했다.
꾸이이-, 나 이제 정신이 돌아오는 거 같은데 이만 놔주면 안 될까?
돼지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다. 아니면, 놓아줄 생각이 없거나.
꾸이이-! 멧돼지는 사자후와 함께 모든 힘을 끌어모았다. 봄부터 체내에 축적한 기운이 한 점으로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 힘이면 큰 사람의 억센 앞다리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그대로 힘을 분출했다.
뿌지직-.
***
꾸이이-! 멧돼지가 갑자기 괴성을 질렀다.
그 소리에 덜컥 겁이 난 진혁은 팔이 부러져라 힘을 주고 멧돼지의 목을 더욱 조였다.
그리 사투를 벌이는 와중, 진혁은 갑자기 진하고 역한 똥 냄새를 맡았다.
목숨이 위태로운 짐승은 생으로 똥을 싼다고 했던가. 천길룡 할아버지가 해준 말이 떠올라 진혁은 용기를 얻었다. 버티고 또 버티길 얼마나 지났을까.
구이이-.
드디어 멧돼지가 널브러졌다.
‘하얗게 불태웠다.’
진혁도 속이 울렁거리며 아랫배가 묵직해지며 배변감을 느꼈다.
탈진 직전까지 힘을 쏟았다는 뜻, 결코 짧지 않은 시간 온몸의 힘을 쥐어짠 후폭풍이었다.
‘똥쓰······, 똥쓰가 마렵다.’
똥쓰고 뭐고, 바지에 싸거나 말거나 진혁은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고오-, 놀래라. 우리 애기, 이리 와. 괜찮아?”
“녜에, 헤헤.”
팔을 벌리자 유진이가 와서 안겼다.
포근했다.
위로하듯 등을 다독이는 동생의 손길에 진혁은 마음마저 풀어져 눈시울이 뜨거웠다.
‘놀라지도 않았나, 유진이가 나보다 씩씩하네.’
당연히 무서웠을 텐데, 유진이는 방긋방긋 웃었다.
그밖에도 놀라운 일은 또 있었다. 유진이가 안아주니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은 물론 체력까지 돌아오는 느낌. 지금도 호흡이 금세 차분해지지 않았나. 금방이라도 지릴 것처럼 널널했던 동군영이 옴팡지게 수축된 건 덤이었다.
‘오오, 이게 가족의 힘인가.’
새삼스레 동생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진혁은 감개무량한 눈으로 하늘을 보았다. 멧돼지 송곳니에 긁힌 배를 더듬으며.
손유진은 오빠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배에 손을 올리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 오빠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인 탓이다. 밤중에 엄마 므야므야 더듬는 아빠가 저런 표정이던데. 오빠는 뀍뀍이를 끌어안고 뒹굴어서 그렇지요?
오빠의 긁힌 배에 손을 올렸다.
“오빠, 여기 아야 했지요?”
“아하하, 괜찮아. 조금 따끔거리는 정도야.”
“유진이가 안 아프게 해주지요?”
“어떻게?”
설마 유진이 너······. 진혁의 눈에 이채가 어린 것도 잠시.
투-, 유진이는 손에 침을 뱉어 진혁의 배를 문질렀다.
야, 이······. 진혁은 황당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장난기 없이 진지한 표정의 동생이었기에.
‘뭐야, 할머니들 방법이잖아.’
유진이가 하는 것을 지켜본 진혁의 눈에 금세 실망감이 어렸다. 상처에 아기 침이 묻어 번들거릴 뿐 환부도, 통증도 그대로였으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대했다가 긁힌 곳에 침이 묻어 쓰라림만 얻었다.
유진이의 관심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오빠, 이거 무에요?”
“돼지. 멧돼지.”
“데지?”
유진이가 돼지를 연상하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올려 떴다.
그러다가 드디어 생각났는지 환하게 웃었다.
“데지 맛있지요? 엄마, 데지, 지지지 했지요?”
유진이가 손을 휘적이며 요리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아하하, 그래. 돼지 맛있지.”
멧돼지 맛은 모르지만 돼지가 맛있는 건 사실이니까.
어떤 요리를 떠올렸는지는 몰라도 침까지 흘리는 걸 보면 정말 맛있었나 보다.
“우리 애기 많이 놀랬지?”
“오빠가 데지 때찌 했지요?”
충격이 컸을 텐데도 유진이는 싱글벙글이다.
그런데 이 멧돼지를 어쩌면 좋을까.
커다란 산짐승을 잡다니. 동생이 위험하다는 생각에 눈이 돌아버려 겁도 없이 달려든 것인데 이제 사후 처리가 고민이다.
‘죽었나?’
진혁은 손가락으로 두툼한 멧돼지의 목덜미를 더듬어 맥을 찾았다. 여기가 목이 맞나, 하는 마음으로. 고슴도치도 아닌데 까슬한 털이 바늘처럼 진혁의 피부를 찔렀다.
확실히 죽은 것 같았다.
‘어디 보자. 처리 방법이······.’
아직 더운 날, 이대로 두면 구더기와 파리가 들끓을 것이다. 양식과 거름이 될 터이니 숲에 사는 여러 생명에게는 좋은 일일지 모르나, 인간인 진혁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이 숲은 어린 시절부터 뛰어놀던 진혁의 아지트가 아닌가.
‘묻어줘야겠다.’
미관과 위생상의 이유에서도 그렇지만, 사생결단으로 싸운 상대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라도 그게 옳은 일이라 생각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삽을 들고 오리라, 그리 생각하고 진혁은 몸을 일으켰다.
“유진아, 가자. 유진아······?”
그러나 멧돼지를 묻어주겠다던 진혁의 기사도 정신은 끝내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무섭지도 않은지 멧돼지 앞에 쪼그려 앉아 막대기로 돼지코를 쿡쿡 쑤시던 유진이 때문이었다.
중얼중얼-.
“아-, 맛.있.겠.다.”
아, 유진아······.
중얼거림이라기엔 너무나 또렷한 발음이었다.
또롱한 눈으로 오빠를 올려다보며 동의까지 구한다.
“오빠도 데지 맛있지요?”
번뜩이는 눈을 보니 허락이 아닌 선명한 강요였다.
맛없다고 하면 때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