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 잉큼잉큼 (2) >
유진이는 다섯 살짜리가 요즘 잘 먹더니 냄새가 심각하게 어른스럽다. 그래도 진혁은 찡그리는 법 없이, 마치 제 딸인 양 유진이를 챙겼다. 처음엔 서툴렀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늘며 제법 육아에 익숙해져 있었다.
‘우리 엄마, 아빠도 날 이렇게 키우셨겠지.’
주책 맞게 코끝이 찡해졌다.
동생에게도 고마웠다.
‘유진이 정도만 돼도 더 바랄 게 없지.’
감기 한 번 걸리는 일 없이 건강하고 씩씩하게 크는 것으로 유진이는 제 몫을 다하는 중이다.
“유진아, 이리 와. 물로 씻어야 깨끗해.”
“녜에-. 헤헤.”
유아용 변기에서 내려온 손유진이 세숫대야를 향해 엉거주춤 뒷걸음질 쳤다. 강아지처럼 오빠를 향해 엉덩이를 들이밀며.
“어이쿠-, 냄새야.”
“아쿠- 냄새나지요? 에헤헤.”
온 가족이 존댓말을 사용하니 다섯 살 손유진은 말을 존댓말로 배웠다. 그런 걸 보면 성장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가. 유진이는 장군이에게도 존댓말을 한다.
‘그나저나 비데는 언제 상용화될까.’
숨을 참고 유진이를 씻기며 든 생각이었다. 물론, 유진이가 아닌 저를 위한 고민이었다. 중동 쪽에서 들어온 비데가 국내에 있는데 판매되는 제품도 많지 않고 온수 기능이 없다. 아무래도 따뜻한 나라는 수온이 차갑지 않으니 상온수를 그대로 사용하는 거겠지.
‘비데나 만들어서 팔까?’
비데나 정수기, 공기청정기 등 간단한 생활가전의 작동원리는 세인전자에 근무한 계기로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도 인지 중이었다.
‘지금은 부품 생산 회사를 찾는 게 쉽지 않겠지.’
어찌어찌 설계를 한다 해도 부품별 금형을 뜨는 것만으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다. 결국 자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홍기준 아저씨한테 부탁해봐야겠다.’
청결과 개운함을 위해 매번 물로 씻어야 하는 회귀자 손진혁의 푸념이었다. 이전 생에는 비데가 있어 편했거늘. 취향은 21세기인데 몸이 20세기에 살고 있으니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오빠, 밖에 가요. 나가 놀아요.”
“우리 유진이 답답해? 오빠랑 밤 주우러 갈까?”
“녜, 밤 가요. 주워요.”
아직 9월이라 이른 감이 있지만, 진혁은 밤을 수확할만한 곳을 알고 있다. 버섯을 따는 뒷산의 볕 잘 들고 썩은 나무와 낙엽이 많은 곳인데, 거름진 덕분인지 밤이 빨리 떨어지는 편이다. 너무 늦게 가면 벌레 때문에 재미 보기가 힘들다. 오히려 지금이 낫다.
진혁은 유진의 머리에 대바구니를 덮어씌웠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밤송이로부터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대바구니를 쓰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동생의 볼을 살짝 집었다.
“아이구-, 귀여워라.”
“까르륵-.”
아이들의 볼은 어쩜 이리도 부드럽고 탄력 있을까. 걸음마를 하고, 옹알이를 하는 아이들을 보며 더 자라지 않기를 바라던 친구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장군아, 산책 가자.”
“장군이, 가요. 쭈쭈쭈-.”
헤헤헥-.
경호견 장군이가 오누이를 따랐다.
“참새-.”
“짹짹!”
“오리-.”
“꽥꽥!”
“개구리-.”
“개굴개굴!”
“비둘기-.”
“비둘비둘!”
“······아?”
아, 유진이는 진정 천재구나!
“느허허-.”
동생 바보가 여동생 손을 잡고 뒷산으로 향했다.
경사로를 올라 버스 길을 건너는데, 저 멀리 길 한편에 버스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차한 고급 세단이 보였다.
‘오래 있네?’
괜스레 찝찝하다. 아침에 왔는데 늦은 오후가 되도록 떠나지 않고 있다니. 차를 세워둔 곳에는 집도 없고 콩밭뿐이다. 콩 서리를 하러 온 건 아닐 테고, 얼마 전 일제히 퇴근하던 땅꾼들과도 다른 부류로 보였다.
‘땅꾼들은 연휴 되니까 약속한 것처럼 안 나타나던데.’
그래서 그들을 조사하지 못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만 봐도 그들과 많이 달라 보였다. 갈색 선글라스에 줄무늬 정장도 뭔가 이질적이다.
‘수상하다.’
살얼음처럼 투명하고 눈부신 평화에 실금이 가는 느낌,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직감을 넘어 칼날처럼 벼려진 예지의 반응이었다.
“오빠, 가요. 가요.”
잠시 머뭇거리는 오빠를 유진이가 보챘다. 제 손에 쥔 오빠의 손을 부드럽게 흔들며.
“응. 그래.”
눈에 거슬리는 외지인을 감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생이 우선이다.
제법 길이 난 곳은 유진이가 직접 걷게 하고, 잡목이 우거진 곳은 동생을 안아 이동했다. 장군이는 개니까 알아서 잘 따랐고.
아직 이르긴 일렀던 모양, 떨어진 밤은 많지 않았다.
“우와-, 여기 밤 떨어졌다.”
“우와-. 밤 있지요?”
“아야, 밤 가시에 찔렸네.”
“아야-. 아프지요.”
“유진아, 저기 다람쥐다.”
“오와-. 귀여워요-.”
아이들은 감탄을 잘한다. 별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어른을 흉내 내며 감탄을 한다. 진혁은 동생 유진의 감성 발달을 위해, 다양한 표현을 돕기 위해 다소 과장된 언행을 취했다.
그런 목적이 아니더라도 어린아이와 함께 있자면 어른들도 아기처럼 말하는 것이 인간 세상의 불문율이다. 아기 있는 집에서는 온 가족이 옹알이하듯 혀짧은 소리를 내는 것처럼.
싱그러운 초록색 가시 옷 속에서 광택을 뽐내는 알밤을 몇 개 주웠다. 아직 이른 수확이라고는 해도 주머니에 다 넣기에는 많은 양이어서 비닐봉지에 담았다.
“유진아, 이제 집에 갈까?”
“가요-, 이제 가요.”
아, 맞다. 진혁이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유진아, 버섯 보러 가자.”
“녜, 가요. 버섯 봐요.”
추석이라고 이집저집에서 보내온 기름진 음식만 먹었더니 구수한 된장찌개가 생각나던 참이다. 꾀꼬리버섯과 두부, 애호박을 넣고 된장찌개를 끓일 생각에 입에 군침이 돌았다.
버섯이 나는 곳에 가려면 억세고 긴 잡목과 수풀을 헤치고 가야 한다. 잡목은 대부분 진달래나 청미래덩굴, 도토리나무 따위인데 이놈들은 생명력이 좋아 오솔길을 만드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다니는 사람이 진혁뿐이니 길이 생겨날 리도 만무하고.
진혁은 동생을 번쩍 안아 들고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헤헤헥-.
장군이가 혀를 빼물고 그 뒤를 따랐다.
“저건 무예요?”
“청설모.”
“저건 무에요?”
“딱따구리.”
“저건 무에요?”
“머루.”
유진이는 시야가 넓어서 나무 위에 있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배우려는 듯 가리켜 물었다.
“이건 무에요?”
“헤이즐너-, 아니 개암.”
“저건 무에요?”
“살쾡이······.”
삵이라는 놈이 높은 나무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일헌에게 듣기로, 고공 강습을 하듯 지나가는 사람을 덮쳐 목덜미를 물기도 하는 놈들이라고. 특히 몸집 작고 연약한 노약자를 노린다고 했다.
‘어우-, 괭이 새끼. 덤비면 확 씨!’
진혁도 살쾡이 같은 눈으로 마주 노려보며 재빨리 놈이 있는 나무 근처를 벗어났다. 유혈 사태가 벌어져도 진혁이 이기겠으나 동생에게 아름답지 못한 꼴을 보이기는 싫었다.
아직 파릇한 수풀을 헤치고, 드디어 버섯이 나는 깊은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저건 무에요?”
“멧-?”
유진이가 가리킨 곳을 본 진혁이 급히 숨을 들이쉬었다.
‘저건······.’
얘가 왜 여기서 나와?
두근두근-.
***
아들 진혁의 말대로 9월의 하와이는 진정 좋았다.
다른 시기에는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좋은 곳이었다.
바람산에 오른 한유영이 펄럭이는 옷자락을 쥐고 감탄했다. 한 손으로는 날아가지 않도록 모자를 꾹 눌렀다.
‘너무 멋지다. 다음엔 우리 아들이랑 딸도 같이 오자고 해야지.’
팔자에 없을 줄 알았던 비행기도 타고 하와이라는 관광 명소에 오니 감개가 무량했다. 집에 있을 아이들 생각이 나지 않을 리 없다.
손광연은 아내 옆을 철벽 마크했다.
“우와! 바람이 엄청 강해요. 숨 막힐 것 같아요.”
“자기야, 자기야! 여기가 바람산이라고도 불리는 언덕인데 무역풍이 불어서 그렇대요.”
“아, 그렇구나.”
“여기는 묘지를 공원처럼 꾸며놨네요.”
“자기야, 왜 그러냐면 미국인들 문화와 정서상-.”
“아, 그래요? 평화롭고 좋네요.”
“산이 달력에서나 보던 그림처럼 생겼어요.”
“자기야, 저기가 다이아몬드 헤드라고 불리는 산인데요-,”
“아, 보석이 나온대요?”
누가 맨스플레인의 선두주자를 묻거든 눈을 들어 손광연을 보게 하라.
가이드가 다 설명해주는 내용인데 왜 저럴까.
홍기준은 한유영의 곁에 찰싹 붙어서 조잘대는 손광연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손을 잡고 다니는 모습도 못마땅했다. 대학 시절 그리도 과묵하던 친구였는데 변해도 너무 변하지 않았나. 가족끼리 저게 뭐하는 짓-.
‘아, 저 친구들은 신혼여행이나 다름없지.’
그러다 혼자 팔짱을 끼고 경관을 구경하는 유세라를 발견했다. 표정이 밝지 못하다. 얼마 전 손광연에 대해 부친 앞에서 말실수한 것을 내내 괴로워하더니 여전히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해맑게 웃는 한유영과 대조적인 유세라를 보며 뭔가 느낀 홍기준, 가만히 다가가 유세라에게 팔짱을 꼈다.
“여브옹-?”
“아, 뭐야. 더워.”
“어, 그치? 여기 좀 더운 거 같네. 하와이는 여름인가 봐.”
까였다.
경호팀 휴가도 줄 겸 바쁜 회사 업무 다 제쳐두고 온 여행인데.
홍기준은 슬펐다.
***
당황감이 지나치면 슬픔으로 화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동생과 보내는 행복한 연휴 드라마가 공포물로 변했다.
구익구익-. 괴상한 소리를 내며 주둥이로 땅을 파헤치는 커다란 짐승이 보였다.
으르르-, 장군이가 재빨리 이를 드러냈으나 진혁이 내두른 손에 급히 입을 닫았다.
‘멧돼지가 여기 왜 있어?’
노루와 오소리, 산토끼는 흔한 동네였지만 멧돼지가 나온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그리고 뒷산은 저수지와 논, 절벽으로 포위된 숲이라 산짐승 종류도 다양하지 않다. 결정적으로 멧돼지는 인적이 드문 깊은 산에 사는 녀석들 아니던가. 아직 9월이라 구봉산에 먹을 것도 많을 텐데 왜 여기 있을까.
진혁은 멧돼지라는 녀석들이 먹이에 홀려 땅을 훑으며 여기저기 다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정보도 아니고.
‘그냥 돌아가자.’
발길을 돌릴 때였다.
귀익-!
진혁을 발견한 멧돼지가 흠칫 놀라며 네 다리에 힘을 바짝 줬다. 멧돼지도 진혁과 생각이 같았는지 ‘사람이 왜 있냐’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것 같았다. 빨갛게 충혈된 눈이 괴기했다.
바람에 실어나른 산 냄새를 따라 여기까지 왔을 뿐인데 사람을 마주치니 놀랄 만했겠지. 구봉산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사람 구경은 전혀 못했으니.
끄르르-꺽꺽꺽, 이 소리는 영 좋지 못하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멧돼지가 보내는 예고음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경고음이 아닌 공격 예고음.
멧돼지가 뒷다리에 힘을 바짝 넣어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덩치가 멧돼지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장군이가 반사적으로 앞을 막았다.
‘온다.’
진혁은 왼팔에 유진이를 안고 있다.
도망치자면 칠 수 있지만, 함께 피하기에는 숲길이 너무 험하다. 동생과 장군이를 두고 혼자 내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선을 멧돼지에게 고정한 채 조심스럽게 유진이를 내려놓았다.
유진이도 어떤 상황인지 짐작한 듯 얌전히 발을 딛고 뒤로 물러섰다.
“장군아, 유진이랑 먼저 집으로 가.”
알아들었을까.
끼잉-, 장군이는 귀를 접어 진혁을 올려다본 후 유진이의 원피스 자락을 물고 당겼다. 유진이가 움직이지 않자 낑낑거리며 머리로 정강이를 밀기도 했다.
처음 보는 멧돼지가 무섭지도 않은지 유진이는 울지도 않고 입만 뻐끔거렸다. 아니면 얼이 빠져서 그런 걸지도.
장군이가 이끄는 대로 조금씩 끌려가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진혁은 주위를 살핀 후 나지막이 침음을 삼켰다.
‘젠장.’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작은 숲이라지만 빽빽이 들어찬 나무 때문에 사람이 오지 않는 산. 쇠붙이 따위 있을 리 만무했다.
낭패감을 잊으려 주먹을 꽉 쥐었다.
오른손에 쥔 검은색 비닐봉지가 애처롭게 울었다.
‘멧돼지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그런 속담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나 교양과 자비 따위 있을 리 없는 빨간 눈 멧돼지는 우리말 나들이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꾸이익-!
멧돼지가 달려들었다.
두두두- 땅이 울리고 낙엽이 떨며 육중한 체중을 짐작케 했다.
후우웁-, 숨을 들이쉰 진혁은 급히 레슬링 선수처럼 몸을 구부려 충격에 대비했다.
꺼르륵-!
찰나였다.
진혁 앞에서 방향을 튼 멧돼지가 유진이에게 달려든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