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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75화 (75/338)

# 75 < 잉큼잉큼 >

***

유준식이 떠나고 응접실에 세 사람만 남았다.

상석에 앉은 유명선이 뭔가 물을 때마다 홍기준이 막힘 없이 설명했다.

유명선은 젊은 선생에게 배우는 노인처럼 홍기준 쪽으로 몸을 숙여 경청했는데, 가끔 크게 놀라거나 웃기도 했다.

대화의 마무리에는 사위의 등을 탕탕 소리가 나도록 두드리며 만족감을 표했다.

“잠시 일어나겠네.”

유명선이 화장실로 향했다. 건강 챙긴다고 챙기는데도 나이가 드니 고약한 녀석이 움찔거리며 말썽이다.

와삭와삭-.

응접실에 다시 침묵이 찾아오자, 유세라가 쿠키를 욱여넣고 씹는 소리만 들렸다.

오빠가 웬일로 남편에게 고개를 숙이며 존대를 하고, 세상 발랄한 남편은 마치 장군처럼 진중하게 인사를 받는 모습이 신기했다.

요즘 아빠는 사위만 보면 좋다고 헤실헤실 웃으신다. 요즘은 달러가 어쩌고, 금이 어쩌고 하는 얘기를 하면서 좋아하시더라. 남편이 금덩이로 보이시는 걸까?

근데 그게 뭐 어쨌다고.

유세라는 아빠 집에 있는 쿠키가 너무 맛있다. 홍콩에 있는 세인무역에서 매달 보내오는 수제 쿠키인데 물량이 부족해 별로 오지 않는다며 자식들에게는 나눠주지도 않으신다.

그 맛있는 걸 앞에 두고도 남자들은 손도 안 대더라. 역시 남자들은 멍청이야.

‘헤헷-, 나 혼자 다 먹어야지.’

목이 막히면 우유도 마셨다.

와삭와삭-.

사방으로 쿠키 부스러기가 튀었다.

그 모습을 홍기준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딸은 서재에서 쫄쫄 굶고 있는데, 엄마라는 사람은 딸을 먹이 경쟁자로 여기는 걸까. 네가 그러고도 암사자냐, 이 돼지야. 그러고도 고고한 난초냐고, 이 돼지야. 뭐, 이쁘니 용서가 되긴 한다.

유세라와 눈이 마주쳤다. 거의 반사적으로 유세라가 턱을 치켜들었다. 입가에 잔뜩 묻은 부스러기가 후두둑 떨어졌다.

“뭐.”

서른다섯 살 먹은 아내에게 한소리 하려던 홍기준은 오래 두고 별러 온 말을 꺼냈다. 아랫배에 힘을 준 채였다. 암사자에게 직언을 하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한 까닭이다.

“많이 먹어······.”

최대한 어색하게 웃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최선을 다한 썩소였다.

홍기준의 가슴이 사자 앞의 쥐처럼 두근거렸다.

이 돼지는 그렇다 치고······.

집에 돌아가는 대로 유문식에게 격려 전화 한 통 해야겠다.

영화배우를 꿈꿨다더니 직접 보니 배우를 했어도 잘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 “매제, 정말 나 이제 회사일 안 해도 되는 거야?”

- “몇 가지 시키는 일만 해주세요.”

- “영악한 준식이 놈이 눈치채지 않을까?”

- “형님 연기력만 믿겠습니다. 배우가 꿈이었다면서요? 원 없이 연기 한 번 해보세요. 후일은 제가 확실히 보장합니다.”

- “돈은 지금도 많아. 아버지가 자식 버릴 사람도 아니고. 난 정말 회사 일이 싫어.”

여자를 밝힌다는 단점이 있지만 홍기준에게 우호적인 사람이었다. 그룹 일에 관심도, 욕심도 없는 장남. 어차피 낙오될 패였으니 홍기준이 활용하던 차였다. 이른 경영 은퇴를 보상으로.

아마 유문식은 얼마간 휴식 후 대정전자 사장을 만나겠지.

‘너무 빨리 달려온 건 아닐까.’

노리기는 했으나 솔직히 이토록 빨리 인정받게 되리란 예상은 못한 터였다. 하나 장인은 홍기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사람이었다. 인재라고 생각되면 출신과 학벌을 고려하지 않고 등용했다. 그런 의미에서 홍기준이 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인재이기도 했고.

‘이제 다음 단계는 민용락 대리 통해 둘째 처남에게 반도체 제조 설비 설계도를 넘기고, 케미컬 사업구조를 개편할 차례인가.’

유준식은 유명선 회장을 닮아 감각도 있고 제법 시야도 넓다. 일 욕심 많은 유준식을 쳐내기보다 한 편으로 끌어들이는 편이 좋다는 것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내 오른팔처럼 일할 작은 처남을 내칠 순 없지.’

욕심 없다면서도 똑똑한 동생 유준식을 경계하던 유문식을 떠올리니 절로 헛웃음이 지어진다.

머릿속으로 다음 플랜을 정리하자니 유명선이 후련한 얼굴로 나타났다.

“그 김가 놈이 통신을 내놓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하여간 우리 기준이가 대단한 사람이야. 그런 인재를 과장 나부랭이로 썩힌 박가 놈도 멍청하고.”

장남을 내치고도 유명선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사위를 ‘우리 기준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증거였다. 박가라면 대정그룹 박운철 회장을 의미하는 것일 터. 유명선과 박운철이 친구 사이라는 건 재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세라는 이번 추석 때도 시댁부터 들렀다가 올 거지?”

바둑판에 눈을 둔 유명선이 물었다.

어찌 보면 친정에 먼저 오라는 말로 들릴 수 있는 물음이지만 세상 해맑은 유세라에게 옆구리 찌르기는 통하지 않는다.

“아빠, 우리는 추석 때 여행 가기로 했어요.”

“여행?”

“응, 광연 오빠네랑-.”

아차.

유세라가 입을 다물고 눈을 굴렸다. 이놈의 주둥이가 늘 말썽이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광연이? 손광연 말이냐?”

유명선이 바둑돌을 내리고 딸을 바라봤다.

초집중 상태였던 바둑판에서 눈을 뗄 만큼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렇다고 딸에게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그놈이 살아있었다고?’

죽었다는 소식도 없었지만 천애고아나 다름없이 버려진 처지니 죽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친우이며 대한민국 재계 영향력 1위인 대정그룹 박운철 회장이 몇 년간 사람을 풀어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으니까.

유세라가 유명선의 눈치를 살폈다.

“아빠, 우연히 만났어요. 일부러 말씀 안 드린 건 아냐-.”

“후우-. 홍서방, 오늘은 여기까지만 두세나.”

유명선이 긴 한숨을 내쉬며 바둑돌을 던졌다.

“예, 장인어른.”

아내의 실언에 바짝 긴장했던 홍기준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기준이라고 부를 때는 아버님, 홍서방이라고 부를 때는 장인어른이다.

***

“하다버지, 추섣 때 올게-.”

“오호호-. 그래, 우리 강아지.”

유명선 회장은 정원을 나서는 딸 유세라의 가족을 뒷짐지고 바라봤다.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끊었던 담배가 생각나는구먼.’

어미를 따라 배우를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손광연 말이다. 모친을 쏙 빼닮아 남자아이임에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머리가 또 비상했다.

‘아니면, 어미를 잃고 공부만 했던 것일 수도 있겠지.’

국내 최고대학의 경영학과에 수석 입학을 하는 모습에, 유명선은 그의 행보에 관심을 두었다.

생활이 궁핍하지 않도록 박운철이 암암리에 지원을 했지만. 박 씨 집안을 증오하던 손광연이 필요 없다며 박운철의 비서가 건넨 돈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름다운 여인. 유명선은 박운철 등과 어울리던 서울 상인조합에서 접수계원으로 일하던 손문예를 처음 보았다. 달의 여신이 떨군 한 방울 눈물이 생명으로 잉태한다면 그런 모습 아니었을까. 박운철은 사업이 번창하며 손문예의 배우활동을 후원하기로 했다며 뿌듯해했다.

‘벌써 40년이나 됐구만.’

쯥-. 선명한 기억에 입맛이 썼다.

손문예가 죽은 후, 박운철은 손광연을 호적에 올리고자 했었다. 그러나 열여덟 살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본처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고 있던 박운철은 끝내 손광연을 호적에 올리지 못했다. 아니, 세상에 내보이지도 못했다. 그것은 처자식과의 의리 문제가 아니었다. 처가의 힘을 빌려 사업을 하던 당시의 박운철이 힘이 없던 탓이었다.

“권 집사.”

“예, 회장님.”

“이 여사에게 얘기해서 술 한 잔 내오게. 독한 술로.”

“알겠습니다.”

손문예가 죽었을 때, 끝내 손광연을 찾지 못했을 때. 박운철은 술에 취해 유명선에게 전화해 술주정을 부렸다. 박운철에게 손 씨 모자가 어떤 의미인지를 짐작하는 이는 친우 유명선이 유일했기에.

‘못난 놈. 책임지지 못할 거라면 마음에 담지도 말았어야지.’

처가의 도움으로 성공한 박운철이었기에 손광연을 당당히 내보일 수 없었을 터였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유명선이 암암리에 손광연을 후원했다. 박운철 때문이 아니었다. 손문예를 위한 일이었다. 전쟁통에 형제를 모두 잃은 유명선을 친오빠처럼 따른 여인이었기에.

‘그 소도둑 같은 박가 놈에게 문예가 가당키나 한가.’

몇 번이고 추궁하다시피 했으나 끝내 말해주지 않는 박운철이었다.

유명선은 손문예를 항상 흐트러짐 없이 대했다. 여동생처럼 생각했고, 누구처럼 엉큼한 마음을 먹은 건 아니었기에.

응접실에 가정부 이 여사가 고량주와 간단한 안주를 내왔다.

“크으-.”

단숨에 한 잔을 비우고 볼이 움푹 패도록 입술을 쥐어짰다. 안주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내 아들놈들보다 나았지.’

어린 시절 딸 유세라를 다정하게 살피는 손광연의 모습을 보며 유문식, 유준식과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가르쳐 변화시킬 수도 있겠으나, 인성만큼은 타고 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유명선이었다.

‘세라보다 서너 살 많았으니 지금 마흔쯤 되었으려나?’

아, 기준이와 대학 동창이지.

결혼은 했을까, 자식은 두었을까.

갑작스레 튀어나온 손광연이라는 이름에 당황감이 커서였을까. 그 안부를 제대로 묻지도 못했다. 한때 자식처럼 뒤를 봐주던 녀석인데, 살아있으면서도 찾아오지 않았다니 서운하기도 했다.

‘그 능력에, 그 얼굴이면 결혼도 하고 자식도 두었겠지.’

아들일까, 딸일까.

몇 살이나 됐으려나.

노 회장의 눈빛이 아련하게 물들었다.

***

열네 살 손진혁은 연휴를 맞아 동생 손유진과 시간을 보냈다.

찾아갈 친척도 없고, 부모님은 하와이로 여행을 떠나셨으니 명절 때마다 찾아오던 군수와 정치인들, 은행장들, 무슨무슨 조합장들도 보이지 않아 좋았다.

“어이고-, 집 참 좋다.”

경찰서장은 별일 없는지 보러 왔다며 담배를 피우며 집을 한 바퀴 돌고 갔다.

지가 무슨 무당인가. 그냥, 누가 봐도 집 구경하는 아저씨였다.

경찰서장을 태운 차량이 떠나며 오누이의 평화로운 한가위 시작을 알렸다.

“아 좋다-.”

시끄럽지 않고, 걸핏하면 쪽쪽거리는 닭살 커플도 보이지 않으니 진혁은 마음이 평화롭다. 그리고 예전처럼 할 일 없고 만날 사람 없어서 혼자 보내는 것도 아니다. 아, 혼자는 아니지.

“유진이 어디 갔니?”

“-흐응가요.”

끄으응-.

화장실 안에서 귀여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쩜 아기들은 학문에 힘쓰는 소리조차 사랑스러울까.

피식 웃고는 TV를 켰다. 귀여운 동생의 똥쓰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기 위해.

[-제7회 체급별 장사씨름대회를 겸한 추석장사씨름대회, 씨름의 성지 장충체육관에서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도움말씀에 엄기탁 대한씨름연맹 이사께서 해설위원으로 자리해 주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킁-. 예, 안녕하십니까.]

[드디어 체급별 장사결정전입니다. 자! 위원님, 선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최태양 선수는 어떤 선수입니까?]

[킁. 예, 올해 모든 대회에서 킁- 고교 용사급을 제패한 선수고요. 아직 고교생인데도 킁-. 선배들에게 도전장을 내민 미래가 아주 킁-, 예. 촉망받는다 그러죠? 킁-. 예, 그런 선수입니다.]

[어떻습니까, 고교 선수가 민속씨름대회에 출전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습니까?]

[킁-, 금년도부터 협회에 등록된 선수라면 체급과 입상 성적만 뒷받침이 된다면 킁-. 예, 그 초청이라 그러죠? 킁-. 예, 그렇습니다.]

[예, 그렇군요. 말씀드린 순간 두 선수 일어섰습니다. 주심의 신호와 함께 한라장사 결정전 제 1경기 시작하겠습니다.]

호오-, 진혁의 눈과 입이 유진이처럼 동그랗게 변했다.

최미경 청소년네 집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것 같더니 최태양 때문이었구나. 여름방학 내내 웨이트를 했다더니 최태양의 근육은 굵으면서도 올올이 갈라져 보디빌더처럼 보였다. 강철 같은 몸에 어울리지 않는 유연한 허리가 돋보인다.

욕실에서 솔솔 풍기는 냄새에 진혁은 코를 막고 화면에 집중했다.

TV 속 캐스터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잡치기! 최태야아아앙! 전년도와 설날대회 한라장사를 지낸 선배 엄성탁을 노련한 잡치기로 제압합니다! 와- 고교 선수라고 하기에는 실력이 너무 좋지 않습니까? 제가 알기로 엄성탁 선수도 대단한 선수라고 알고 있는데요. 위원님, 어떻습니까? 엄성탁 선수에 대해서도 소개를-.]

[킁-, 제 동생입니다.]

[예······.]

경기를 더 지켜보고 싶었지만 욕실에서 요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아-, 유진이 응가 다 했어요-.”

“아이고-, 우리 유진이 응가 다했어요?”

“녜에-. 에헤헤.”

진혁은 더 미련을 두지 않고 TV를 껐다.

흐읍-. 깊이 숨을 들이쉰 후 멈췄다. 욕실에서 향기로 화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나오는 착각 때문이었다. 얼굴과 목소리는 요정인데 냄새는 왜 그러니.

요즘 엄마 음식의 간이 세진 것 같더니, 유진이 때문에 후각을 잃으셔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동생과 함께하는 두근두근 한가위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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