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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74화 (74/338)

# 74 < 홍기준 (3) >

쌍코화차를 급히 수습하는 유준식의 귀에 평온한 목소리가 들어왔다. 삼강오륜을 받드는 한국인의 간명한 대답이었다.

“예.”

홍기준의 반응은 차남 유준식의 충격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세인그룹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악할 일이건만, 출석 불린 학생보다 담담했다.

‘하아-. 이게 박탈감이란 건가.’

유준식은 뒤통수를 맞은 듯 머리가 띵했다. 유세라의 남편이니 한자리 줄 거라는 예상은 했었지만 벌써 전기를 비롯한 몇 개 계열사를 총괄하고 있지 않나. 그런데 화학까지 넘긴다니.

매년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지만 세인케미컬은 세인그룹의 상징과도 같은 회사였다. 재계 1위 대정그룹의 대정물산이 그러했고, 3위 수영그룹의 수영유통산업이 그랬다. 다른 두 그룹과의 차이를 꼽자면, 대정과 수영의 기반이 된 모태 기업은 구멍가게 신세로 전락한 반면, 세인케미컬은 그 규모에 있어 여느 계열사에도 밀리지 않는 점이랄까.

창업주가 세운 최초의 기업이라는 왕관을 넘긴다?

유준식은 유명선의 의도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후계자 확정.’

파격적인 건 차치하더라도 일러도 너무 이른 결정이었다. 홍기준은 이제 겨우 서른아홉. 마흔둘인 유준식도 아직 젊다며 중공업 부사장에 머물고 있을 뿐이었다.

유준식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대정전자에 근무하던 매제가 갑자기 사표를 던지고 나와 아버지를 찾아갔다는 말을 들은 게 불과 5년도 되지 않았다.

여동생 유세라에게 넘어간 호텔도 불만이었는데 굵직한 계열사를 딸도 아닌 사위에게 뚝뚝 떼어주다니.

“크흠-.”

충격이 지배하는 침묵을 즐겼던 것일까.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줬다는 듯,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유명선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스스로 만족스러운 발표였는지 노인의 입가에 쾌감 버무린 미소가 얹혔다. 유준식 입장에서는 얄미운 미소다.

“준식이도 홍 서방이 한 일이 어떤지 알지 않느냐.”

“예, 그야······.”

연일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있는 매제인데 모른다고 하면 형처럼 당장 쫓겨나겠지.

그래도 사위는 남 아니던가.

“그래도 아버지, 세인은 우리 유 씨-.”

“그래. 유 씨가 만들었지. 허나, 더욱 영화롭게 만드는 건 홍 씨가 될 터.”

아이 씨. 가뜩이나 당황해서 말도 안 나오는데 끊기까지 하니 유준식은 피눈물 쏟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잊지 말거라. 세라도 유씨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새끼란 소리다.”

결정타였다.

어릴 때부터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던 아버지다. 다른 천박한 재벌 가문과 정략혼인도 추진하지 않겠다며 자식들 연애도 간섭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찌감치 다른 길을 걷던 연꽃 같은 재벌이 유명선이다.

“정신없이 굴려 보니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얼마나 아까운 사람인지 알겠더구나. 홍 서방이 3년간 이룬 업적은 세인 30년의 업적보다 위대해. 믿고 맡길 수 있어. 그리고 그 정도 수완이면 적자투성이인 세인케미컬을 정상궤도로 올릴 수 있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원천기술도 털리고 제품개발도 실패한 계열사의 말로는 정리뿐인데, 그 회사를 정상으로 돌려놓으라니. 그만큼 케미컬이 차지하는 위상을 인정하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이건 차라리 읍소 아닌가.’

힘 못쓰는 화학을 살려달라며 사위에게 무릎을 꿇은 꼴이다. 부친 유명선이 창업주인 할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고 그리워하는지 알기에, 유준식은 행간을 정확히 읽어냈다. 그리고 제 입장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노선도 확실히 정했다.

매제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자, 잘 부탁합니다. 매제.”

“많이 도와주십시오, 형님.”

홍기준이 경계하지 않는다. 그제야 유준식은 조심스럽게 폐에 갇혔던 공기를 밀어냈다.

무능한 형은 언제든 제칠 자신이 있었다. 하여, 매제를 견제하기 위해 못난 형과 손이라도 잡으려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손을 잡을 것이 아니라 연을 끊어야 살아남게 생기지 않았나.

‘설마 다른 성씨한테 회사 물려주시진 않겠지?’ 그런 생각으로 지나치게 방심했다. 다른 재벌 누굴 봐도 그런 오너는 없었으니 그리 생각할 법도 했으나, 아버지는 달리 생각해야 할 사람임을 망각하고 있던 불찰이었다.

유준식은 내일 신문의 헤드라인을 상상하며 분루를 삼켰다.

「세인그룹 후계자로 유명선 회장의 사위 홍기준 세인전자 사장 파격 선정.」

대충 이런 그림 아닐까.

유명선이 슬그머니 홍기준의 손을 쥐었다.

걱정 마시라는 듯 홍기준이 장인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 모습에 유준식이 다시 한번 쓴 입맛을 다셨다.

어릴 때부터 부족함 없이 살았다. 아니, 누구보다 부유하게 자랐다. 아버지의 것은 곧 형 유문식과 유준식의 것이었다. 회사도 그렇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기업이 성장하고 그룹으로 자리 잡으며 가시거리가 혼탁해졌다.

아버지 유명선 회장이 동생 유세라를 유학 보내더니 회사 경영에 참여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일을 잘한다며 백화점과 호텔 사업까지 넘겼다.

그런데 뭐?

‘사위라니.’

다 끝났다.

바짝 마른 입술을 식어버린 쌍화차로 달랬다.

유준식의 상념을 아버지 유명선 회장이 깨웠다.

“준식아.”

“예, 아버지.”

“조만간 기계와 유통도 세인 간판을 달 거다.”

그룹사를 확대, 재편하겠다는 뜻.

유준식이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먹을 게 많아진다. 입에 음식을 가득 물고 더 떠 넣으려다가는 이미 물고 있는 것까지 뱉어내야 할 수 있다.

“경영을 시켰으면 경영을 해. 허튼짓들 하지 말고. 너도 기계에 가서 사장 달아야지?”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추석 때 올 거냐?”

“당연하죠, 아버지.”

“오냐. 그만 가보거라. 오늘은 홍서방이랑 바둑 두기로 했다.”

*

유준식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유명선 회장의 집을 나섰다.

아들을 박대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피붙이를 끔찍이 여기는 아버지로서는 알게 모르게 유문식을 챙길 것이 뻔했다. 회사에서의 자리만 뺐다는 뜻이다. 일 똑바로 하라는 뜻으로 다른 형제들 앞에서 무섭게 굴었을 뿐이다. 어릴 때부터 봐온 아버지의 성정은 저렇듯 유별났다.

‘자신을 증명하는 사람만 곁에 두시지.’

세인기계라······.

뭘 어떻게 하면 될까.

유준식은 정원에 멈춰 서서 응접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 앉아있을 매제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존재만으로 움츠러들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할아버지가 그랬고, 아버지가 그랬다.

그리고······.

‘홍기준.’

평소 행실을 보면 그저 샌님이나 다름없던 사람이었다. 유세라 품에서 골골거리는 고양이나 다름없었는데. 어느새 그룹을 집어삼킬 호랑이가 되어 있지 않은가.

유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빼어난 실력은 없어도 여태 잘 살아남은 비결이 있지.

눈치와 처세.

호랑이에게 덤비지 않고 눈 밖에 날 짓을 하지 않는 것.

자존심?

먹여 살릴 입 많아 봐라. 갖고 싶은 거 많아 봐라.

‘기계로 가서 매제를 도우라는 말씀이시겠지.’

유준식은 세인기계의 사업방향을 어떻게 잡을지 매제와 상의하기로 결심했다.

따지고 보면 앞으로 그렇게 꾸려나가라는 말씀을 하신 자린데 괜히 생각이 많았다.

***

해가 기울며 들녘에 자색 망토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서서히 변하는 정경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한유영의 눈동자에 순진한 아이의 감동이 어렸다.

그녀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머무는 주방에서는 집 앞의 수로와 자동차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녁을 준비하던 한유영이 달뜬 소리를 냈다.

“오빠, 저기 좀 보세요.”

“왜요? 기러기 떼라도 날아가요?”

손광연의 시선이 아내의 손끝을 좇았다. 신사적인 서울 사나이답게 아내의 허리 어디쯤을 은근슬쩍 더듬으면서.

일렬로 줄지어 이동하는 차량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검은색 세단이었다.

“땅 본다고 왔던 사람들 차 아닐까요?”

“그래요? 요즘 거의 매일 보여요.”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동네다. 여러 대의 차량이 경주라도 하듯 일제히 달리는 모습은 당연히 낯설다. 그것도 며칠째 계속.

손광연이 구레나룻을 긁적였다. 그저 그런가 보다 하는 모습이었다.

“에이 뭐, 해지니 돌아가는 거겠죠.”

“그럴까요?”

한유영의 눈에는 신기한 광경이었다. 시골이 넓다고는 해도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던 차가 매일 비슷한 시간에 내달리잖아. 근처에 회사 같은 곳도 없는데.

“마치 월급쟁이들 퇴근하는 거 같아요.”

그리 말하며 한유영은 찝찝함을 털어냈다.

그 시각 진혁은 유진이를 안고 옥상을 서성였다.

학교를 마치면 동생과 꽃밭을 구경하는 일도 하나의 일상이다.

“유진아, 저기 빠방 봐.”

“우와아- 빠방 많지요?”

유진이는 오빠에게 안긴 채 엉덩이를 들썩였다. 동생이 떨어질까, 팔에 힘을 준 진혁의 미간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러게······.”

너무 많네. 일시에 빠지니 수상쩍기도 하고.

낮에는 학교에 있으니 뭐하는 사람들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엄마도 모른다고 하셨다. 그저 땅 보러 온 사람들이겠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엄마에게 듣기로 거의 매일 보인다고. 같은 차량인지 알 순 없지만 무슨 땅을 매일 본단 말인가. 땅뽕이라는 마약에라도 중독된 걸까.

‘네 대.’

아무래도 수상하다.

거리가 있어 번호판까지 보이지는 않지만 같은 차종이다.

경운기나 트랙터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여기저기 보이지 않는 곳에 주차를 하는 모양인데. 진혁이 달리기를 하는 구간에는 차가 보이지 않았다.

‘내일은 수로 쪽으로 달리기를 해볼까?’

불길한 예감이 드는 탓에 무시할 수 없었다. 대개 불길한 예감은 들어맞지 않던가. 만약 가족에게 위해라도 가한다면 그 후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조사해 보기로 결심했다.

‘만약 그런 놈들이라면 내 눈에 띈 건 실수다.’

마침 부모님도 여행을 가실 테니 이보다 좋은 때는 없으리라.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나 보다.

유진이가 오빠의 뺨을 쓰다듬었다.

“웃어요. 오빠, 웃어요.”

“느허허허-, 그래. 이렇게 웃을까? 이렇게? 느허허-.”

웃는 게 어색한 진혁인데, 동생만 보면 바보처럼 웃음이 나온다.

익숙지 않은 근육을 움직여서일까, 광대가 볼썽사납게 경련했다.

“녜, 에헤헤-.”

“느허허-.”

“에헤헤-.”

아홉 살 차이 나는 오빠와 동생은 한참을 빙구처럼 웃다가 옥상에서 내려갔다.

“아빠, 요즘 동네에 이상한 차들이 너무 많이 보이는 것 같아요.”

“냅둬라. 땅꾼들이 저러다 말겠지. 어제오늘 일도 아니라더라. 자-, 바둑이나 한판 둡시다!”

“······.”

근심은 남 일이라는 듯 자연스럽게 바둑판을 꺼내는 아빠였다.

땅꾼이라는 말이 거기에 쓰이는 말이 아닐 텐데. 아빠가 사용하니 이상할 정도로 그럴듯하다.

그나저나 이 아빠도 수상하다.

‘뭔가 아시는 눈치인데. 이 아빠 비밀이 너무 많은 거 아닌가?’

진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에도 밝은 아빠지만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을 땐 유독 과장스레 행동한다.

‘그래서 더 궁금해지네. 조용히 알아봐야겠다.’

이제 그러려니 하고 사는 것도 끝이다.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일은 짚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슬슬 아빠의 비밀을 벗겨도 되지 않을까 하는 발칙한 상상도 되었고.

“진혁아, 엄마가 미경이네에 말해뒀으니까-. 아, 이것 참 미안해서 어쩌니.”

“괜찮아요. 신혼여행이라고 생각하고 다녀오세요.”

정말 미안한지 두 손을 어쩌지 못하고 연신 파리처럼 비벼대는 엄마에게 진혁이 헤벌쭉 웃어 보였다. 집에서 가장 속 깊으면서도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엄마가 제일 좋다.

전에 말했듯 엄마에게도 휴가를 주고 싶었고.

“애기랑 둘이 지내는 것도 재밌을 거 같아요.”

“재밌지요? 두근두근-.”

유진이도 오빠와 생각이 같은 듯했다.

팔을 머리 위로 흔들며 거실을 넓게 돌았다. 폴짝폴짝 뛰는 모습이 왈라비를 닮았다.

“잉큼잉큼! 잉큼잉큼!”

저건 무슨 말이지? 뭐, 행동을 보니 신난다는 뜻 같았다. 아기를 보는 부모와 오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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