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 홍기준 (2) >
***
“내년이면 벌써 서른아홉이네요.”
“그럼 저는 서른넷 되겠어요.”
그래, 살다 보니 나이를 많이도 먹었다.
낮잠 자는 딸을 멀찍이 눕히고 대낮부터 뜨거운 눈빛을 주고받는 부부의 대화였다.
“어머나, 이것 좀 보세요. 고추가 크고 단단한 게 정말 실해요. 약이 제대로 올랐는지 거뭇거뭇한 게-.”
아내의 애매하고 은근한 말에 점잖은 서울 사나이가 슬쩍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서도 손은 쉬지 않았으니. 부부는 밭에서 따온 고추를 씻고 손질하는 중이었다. 진혁이 좋아하는 고추전과 튀김을 할 참이다. 다진고기와 양념으로 속을 채워 튀겨내는 음식인데, 깻잎튀김과 더불어 진혁이 좋아하는 간식이다.
“고추도 작년보다 두 배 이상 비싸요.”
“그럴 줄 알고 고추를 그렇게 많이 심으신 거예요?”
“그러기를 바랐다는 게 정확할 거예요. 예측이 항상 맞는 건 아니니까.”
어쨌거나 또 떼돈을 벌게 생겼다.
작년 장마철에는 비가 많이 왔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진혁과 수정이 비료부대를 깔고 하루 종일 눈썰매를 타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엔 강수량이 적어 고추 농사가 잘되지 않을까 생각한 것뿐인데.
“참깨랑 들깨도 올해 가격 폭등이 예상된대요. 작년에 재미를 못 봤다고 올해에 깨 농사를 지은 집이 없거든요.”
손을 대는 일마다 결과가 좋다.
온 우주가 나서서 손광연의 축재를 돕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땅 사시려고요?”
“땅이야 남는 돈으로 사면 되는 거고요. 우리 추석 때 비행기 한 번 탑시다. 자기 옷이랑 화장품도 사고 서울에 백화점 구경도 가고요.”
“비행기요? 백화점요?”
한유영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진혁이 어릴 때는 가난해서 어디 다니지 못했고, 읍내 장터에는 보기 싫은 의붓언니를 마주칠까 선뜻 나서지 못했다. 경치 좋은 곳에 크게 집을 짓고 살며 힘든 일도 하지 않으니 더이상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싶지만, 여행이라는 말을 들으니 심장이 잉큼잉큼 뛰었다.
“어어어어-, 어, 어디로 가요? 정말 비행기 타요?”
“하하하!”
말을 더듬는 아내가 귀여워 손광연이 배를 잡고 웃었다. 아이를 둘이나 낳고도 어쩜 이렇게 아직 시골 처녀 같을 수 있을까? 그 옛날 고생하며 구애를 한 보람이 느껴졌다.
“하와이 어때요?”
한유영의 눈이 더 동그랗게 떠졌다.
“하와와-.”
“하하하하하하하!”
하와이. 한유영은 TV에서 봤던 하와이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렸다. 보석처럼 푸른 바다, 뜨거운 태양과 파도 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끈적하고 흐느적거리는 음악 소리.
뭐가 유명한 곳인지는 몰라도 음식도 맛있겠지. 맛이 없으면 어때? 멋부리는 재미로 다니면 되지. 한유영은 챙 넓은 모자를 쓰고 나풀나풀한 원피스를 펄럭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헤- 벌어진 입에 침이 고였다.
그렇게 눈동자를 위로 올려 상상하다가 갑자기 남편을 째려보았으니.
‘여자들 다 벗고 다니던데!’
마지막 이미지로 비키니 여인들이 떠오른 탓이다.
손광연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아내의 매서운 눈빛에 영문도 모른 채 목을 움츠리고 고추만 만졌다.
아내의 말대로 약이 제대로 올라 크고 단단한 고추였다.
이거 맵겠는데.
기준이가 세운 계획을 서울 사나이 손광연의 계획으로 포장했다가 아내에게 따가운 눈총만 받았다.
***
그해 추석은 9월이었다.
평년보다 한 달 이상 빠른 편이었다.
“잘하셨네요. 하와이는 9월이 좋죠.”
“진혁이가 그걸 어떻게 아니?”
아이고.
이전 생에 세 번이나 갔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이걸 어쩌나.
이럴 때를 위해 학생의 필살기가 존재하는 거다.
“책에 나와요.”
세인그룹 우수사원 해외연수.
말이 연수지 패키지 관광이었다. 실적과 평가가 좋은 사원들에게 당근처럼 주어지던 것이었는데, 진혁은 한 차례도 누락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부터 시드니, 하와이, 체코, 파리, 스페인 등 먼 나라까지, 유명한 관광지는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대마법사가 그때마다 인솔자로 갔었지.’
인솔 책임자. 해외연수마다 임원급 인솔자가 동행했는데, 진혁이 속한 본부가 우수했기에 홍수정이 늘 책임자로 나섰다. 그래서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같은 호텔에 묵었었다.
- “팀장님, 호텔 바에서 칵테일 한잔 하실래요?”
- “저는 다른 팀원들 챙겨야 해서요.”
- “아, 네······.”
바보 같은 놈! 진혁은 속으로 제 머리를 쿵쿵 때렸다. 그때는 마음의 문을 완벽하게 걸어 닫고 혼자만 생각하며 살던 때였다. 이제 와 떠올릴수록 홍수정의 마음을 너무 몰라준 것 같다.
회장 딸. 누구 하나 쉽사리 다가갈 수 없고, 홍수정이 먼저 손을 내밀기도 어려운 입장이었을 거다. 그래서 군중 속에서 외로워지고 말수도 줄었겠지. 대마법사라는 별명도 그런 과정에서 생겼을 테고. 그런 홍수정이 유일하게 대화하는 사람이 손진혁이었는데.
‘미안하다, 수정아.’
이번 생에는 잘해줄게. 이미 충분히 잘해주고 있는 것 같지만, 앞으로도 외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담았다.
일단 숙제부터 해야지. 내일 한문 쪽지 시험도 본다고 했다. 다 아는 쉬운 한자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익혀 두는 게 좋은 법이니.
“엄마, 우유 잘 마셨습니다.”
“응? 어디 가니? 하와이 얘기하다 말고?”
부모님이 가만히 지켜보시는 것도 모르고 혼자 멍하니 너무 오래 생각했다.
“저도 가요?”
두 분만 오붓하게 다녀오시는 게 좋지 않을까.
방해하고 싶지 않은데. 닭살 커플 지켜보자니 눈꼴도 시릴 것 같고.
‘별일 없겠지.’
비행기는 통계적으로 가장 안전한 교통수단이라고 클라크 켄트가 그랬다. 그리고 지난 기억을 뒤져봐도 하와이와 관련된 대형 사건 사고나 항공기 사고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유진이도 그렇다. 보나 마나 진혁이 챙겨야 할 텐데 하와이 가서 챙기느니 집에서 챙기는 편이 훨씬 편하지 않겠나.
“두 분이서 다녀오세요. 신문에 보니 엄마에게도 휴가가 필요하대요. 유진이는 제가 보면 돼요. 학교도 가야 하고-.”
“그, 그래도 같이 가는 게 조, 좋지 않을까아-?”
본인 입으로 같이 가자시던 엄마가 왜 이리 말을 더듬으실까.
크음- 헛기침하며 관심 없는 척 수첩만 뒤적이는 아빠도 수상하다. 아무것도 없는 공백 페이지인데.
“근데 비행기 표가 있대요?”
“응. 수정이네랑 가기로 했지.”
아하, 못해도 비즈니스 클래스 타고 가시겠구나.
“수정이는요?”
“외할아버지랑 논다던데?”
이 양반들이 이미 부부동반으로 계획을 다 짰구만!
세상에 믿을 부모가 없다. 어차피 진혁은 가지 않을 생각이었으니 잘 되었다.
‘수상한 놈들 조사하기 좋은 때다.’
연휴는 길고, 학교에 가는 날에 유진이는 최미경 청소년네 어머니가 봐주실 거다. 아니면 진혁이 하루 이틀 결석하면 그만이다. 개근상을 받지 못하면 아쉽겠지만.
가방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가며 진혁은 부모님의 반응을 힐끗 살폈다.
“이히-.”
젊은 아빠의 입이 귀에 걸렸다.
얼마나 좋으면 저러실까.
‘이상하게 배신감 드네.’
비나 와버려라.
***
서울, 세인그룹 회장 유명선의 집.
부드러운 천이 지나갈 때마다 짙은 초록빛 이파리에 광택이 돌았다. 섬세한 손끝과 호흡마저 조심스러운 모습에서 노년의 회장이 난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엿볼 수 있었다.
“아버지.”
장남 유문식이 불렀으나 회장 유명선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난에 두었던 애정 어린 시선을 한층 농밀하게 만들었으니. 유문식은 난보다도 못한 제 처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뿐이었다.
‘못난 놈.’
일찌감치 유학에 경영수업까지 시켰더니 외도하다가 처에게 들켜, 투자 사기까지 당해, 화학 사업 일으키랬더니 원천기술 도둑맞아. 그게 유명선의 장남 유문식이었다.
차남 유준식은 아버지와 형의 묘한 기류에 마른침만 삼킬 뿐 말을 아꼈다. 이럴 때는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최고의 처세술이기에.
똑똑-.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박자로 서재를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회장님, 아가씨 들어왔습니다.”
저택 고용인들의 총책임자, 권제학 집사였다.
“수정이는?”
유명선이 여전히 난을 닦으며 물었다.
자칫 호흡이 흐트러질까 숨조차 아끼는 모습이었다.
“세 식구 모두 왔습니다.”
노년 회장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유심히 살펴보던 차남 유준식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는 친손자도 많은데 외손녀딸만 예뻐하신다.
“응접실로 가자.”
*
홍수정이 외할아버지 유명선을 향해 달려갔다.
“하다버지-!”
“어이구구- 오구구-. 우리 강아지 이렇게나 무거워졌네. 우리 수정이 잘 지냈누? 학교는 어떤고?”
“어휴, 마도 마. 학교에, 학원에, 털없는 남자애들에, 내가 피곤해더 는든다니까?”
“어허허허허-!”
유명선이 손녀딸을 안아 들고 산타클로스처럼 웃었다.
“조그만 게 못하는 소리가 없네. 할아버지께는 존댓말 써야지!”
유세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홍수정을 타박했다.
그 새를 놓칠세라 유문식이 빈정거렸다.
“엄마 닮아서 버릇이 없나 보지.”
“너 지금 애비 앞에서 기어이 꼬인 심성을 보이겠다는 거지?”
유명선이 손녀딸을 안은 채 유문식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차게 식은 공기에 모두 숨조차 조심스럽게 쉴 때, 유명선이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현관을 손으로 가리켰다.
만국공통어, 나가라는 소리였다.
“아, 아버지.”
“회사에 끼친 해악만도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인데 내 집에서도 해충처럼 굴려 드는구나. 너 같은 놈 필요 없다. 나가라.”
다분히 분노에 찬 음성이었으나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작게 으르렁거리듯 말하니 더 무섭게 들렸다.
“아버지이-! 제가 그동안 어떻게 했는데요!”
유쾌할 수 없는 분위기가 이어지자 유명선이 홍수정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우리 강아지, 할애비 서재에 가서 놀고 있거라.”
“응, 하다버디.”
서재로 향하는 딸을 보며 홍기준이 눈을 빛냈다.
유문식을 보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홍기준은 유문식의 팔을 슬쩍 힘주어 잡았다가 놓았다.
*
가정부가 다과를 내왔지만 입에 대는 사람은 유세라뿐이었다.
유문식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했고, 유준식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홍기준은 추석 전에 인사드리러 왔다가 불편한 자리에 앉게 됐다. 겉보기에는 그렇다는 뜻이다. 명절 전 인사라고 했는데 처남들은 그게 아니겠구나. 처남들은 처나 자식들 누구도 대동하지 않았다. 장인이 필시 뭔가 할 말이 있으신 것일 터.
‘이런 자리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장인의 입에서 나올 내용은 알지 못한다. 뭔가 아는 게 있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유세라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아내는 걸신들린 사람처럼 쿠키만 입에 욱여넣었다.
유명선 회장이 입을 열었다.
“문식아.”
“예, 아버지.”
“그동안 네놈이 어떻게 했느냐?”
“예?”
“그동안 네놈이 어떻게 했는데 쫓아내려 하냐며 따지지 않았느냐?”
“그게······.”
“애비가 말해 보랴?”
장남 유문식이 우물쭈물하자 회장 유명선이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쓰게 웃었다.
“아, 아닙니다.”
“네 놈이 한 일! 회삿돈 빼돌리고! 회삿돈으로 여배우 사서 놀아나고! 여직원들 희롱하고! 케미컬 원천기술 왜놈들한테 도둑맞고!”
“죄송합니다!”
유문식이 소파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잽싼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유명선의 말은 끝나지 않은 듯했다.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정치권에 로비까지 했지! 하지 말라는 짓은 다 하면서 이 늙은이 언제 죽나 내 눈치만 봤지! 그게 네놈이 그동안 한 일이다!”
“하, 한 번만 용서를-.”
“용서? 당장 나가라! 내일부터 회사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
장남 유문식은 끝내 회장이 부른 건장한 비서와 경호원에 의해 끌려나갔다.
아버지를 목놓아 외치는 그의 목소리는 방음 좋은 중문에 막혀 응접실에 닿지 못했다.
“준식아, 세라야.”
“네, 아버지.”
“응, 아빠.”
유세라의 대답에 유명선이 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노인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딸이 최고다. 출가해서 아이까지 낳아 살면서도 아직도 어릴 때처럼 아빠를 불러주지 않나. 그러면서 제 딸에게는 존대하라고 하는 것도 재미있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현상 유지만 해도 훌륭한 경영인이라고 할 수 있지. 획기적으로 사업을 성장시킨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좋겠지만, 오너의 자식이라 해서 당연히 대접받을 거라 생각한다면 곤란해. 그리고 문식이 책상은 치웠다.”
어느 누가 장남을 이렇게 쳐낼 수 있을까. 모자라고 성질 더러워도 장남이라는 이유로 우대하는 나라인데.
유명선의 파격 행보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홍서방 내일부터 케미컬도 맡게.”
푸확-!
차남 유준식의 코에서 쌍화차가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