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 홍기준 >
***
시골의 시간은 느린 듯 빠르게 흘러간다.
그 이유에 대해 누구도 논리적 분석을 내놓지 못했다.
어두운 저녁이 되어 진혁은 장군이를 위해 모깃불을 지폈다.
솔가리와 나뭇가지에 불을 붙인 후 왕겨와 쑥을 섞어 얹는 것이다. 이리 하면 모기가 사람이나 짐승에게 덤비지 않고 연기를 따라 하늘로 솟는다고 했다. 냄새도 괜찮아서 옆에 앉아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유세라가 커피를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진혁아, 어머님이랑 데이트 좀 할까?”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더니, 자기 입으로 어머님이라 칭하는 사람도 있다.
여러모로 신기하고 재밌는 여인이다.
“네.”
데이트라고 해서 어디 가는 것도 아니요, 평상에 앉아 모깃불을 보며 나누는 대화가 전부였다.
“육상 대회는 나가고 싶다고 했다며?”
“네. 따로 운동부 들지 않아도 된대요.”
대회 때마다 선수 등록을 하면 그만이다. 이병세에게 확인받은 내용이다.
유세라가 수첩을 노려보며 말을 받았다.
“응. 나도 알아봤는데 그렇더라.”
진혁이 흘끗 보니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하게 채워진 수첩이었다.
뭔가 열심히 노력한 흔적, 핏자국 비슷한 것도 보였다.
“2년 뒤에나 나가는 거야?”
“네. 3학년 때 나가려고요.”
“훈련은?”
“매일 하기는 하는데 제대로 된 훈련장이라고 해봐야 학교 운동장이 전부예요.”
유세라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트랙도 없고 모래땅이 전부인데 거기서 육상 훈련이 제대로 될 수 있을까.
타이어나 끌고 파트너 훈련이나 하겠지. 기초체육 재단 세우는 김에 스타플레이어를 영입하고 싶은데 이 녀석이 잘만 커 준다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훈련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
“서울로 전학 올래?”
“서울요?”
“응. 실내체육관이 있어서 비 오는 날도 훈련할 수 있고, 트랙 있는 학교도 있으니까.”
진혁은 잠시 머뭇거렸다.
유세라의 진지한 표정과 음성 때문에 거절하기 조심스러웠던 까닭이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여기 사는 게 좋아요. 가족이랑.”
천길룡도 진혁이 이 동네에 사는 게 여러모로 좋다고 일러둔 터였다.
터와 궁합이 맞는다나?
예상한 답이라는 듯 유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의 어깨를 짚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훈련장을 여기로 가져와야겠네.”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언제까지 할지도 모르는 육상이다.
좋아하기는 하지만 사람 마음이 한결같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조용히 살기로 한 터에 이목을 모으지 않는 비인기 종목이라서 즐기는 것뿐이다.
“아시안게임 나가고 싶지 않아? 육상 아닌 다른 종목이라도 금메달 따면 좋잖아.”
“거기까지는 생각 안 해봤는데요.”
“군대 면제인데?”
아아?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래도 가야 할 상황에서는 가면 그만이다. 과거의 진혁은 군에 있을 때 가장 마음이 편했다. 지금은 가족이 있으니 그때와 다르겠지만.
“남자는 나이가 차면 군대 가야죠. 의무니까요.”
아직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멀뚱한 진혁의 얼굴을 보며 유세라가 한숨을 푹 쉬었다.
어떤 놈들은 안 가려고 별 지랄을 다 떠는데.
‘아오, 이 시끼 영감님 같네.’
서울에 있는 아빠나 오빠들도 이 정도는 아닌데.
어디서 이런 꼰대 같은 녀석이 나왔을까. 스스로에게 엄격한 셀프 꼰대라서 나무랄 수도 없다.
“즈느그, 있쯔느······.”
지그시 이를 물었던 유세라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가족과 함께 사는 게 좋다며. 군대 가면 떨어져 있어야 하잖아.”
“아······.”
그건 또 그렇네.
진혁은 멋쩍게 뒤통수를 매만졌다. 아무리 가족이 좋아도 대학이나 군대에 가면 떨어져 살아야 할 텐데. 현재가 너무 행복해 앞날에 대한 고민이 너무 없었다.
“여기에 훈련장 짓는 게 부담되면 중학교 3학년 때 경기 기록 보고 판단할까? 더 할지 어떨지.”
“네.”
덤벙대고 어리숙해 보이는 유세라지만 이럴 때는 홍수정 전무를 떠올리게 만든다. 기분에 취해 저지르지 않고 냉정하게 판단하지 않나. 믿고 함께 일을 해도 좋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운동 잘했다고 성장하면서도 계속 폼이 유지되는 건 아니라고 하더라고. 그렇게 묻히는 선수가 세계에 99%가 넘는다더라. 지도자나 관련 기관에 취직하는 사람을 다 합쳐도 몇 안 되고.”
재능에 노력을 더하지 않으면 어떤 분야에서도 성공하기 힘들다는 뜻이렷다.
진혁은 그녀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하나 더하자면.
‘운.’
진혁은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이제까지는 그랬다. 주위에 온통 능력자들 아닌가. 그저 묻어가며 평범하게 살면 되는 그림을 그렸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도 노력을 기울일 목표가 생겼다.
“혹시요. 아즘-어머님.”
“응? 살짝 기분 나쁠 뻔했네? 오호홍, 뭔데?”
“성적이 잘 나오면 그 후에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때 말해줄게.”
이 사람이고 저 사람이고 속 터지게 만든다.
그러나 진혁은 예상하는 바가 있었다.
작년 대구 시합이 끝나고 아빠와 나눴던 대화. 그 내용이 아빠에게서 홍기준에게로, 다시 유세라에게로 흘러들어 갔을 거라는 사실은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두 아저씨의 입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가벼웠으니까.
‘흐음-, 운동 잘하면 소속사가 생기는 거지? 군대도 생각해야겠고.’
진혁의 머릿속에 처음으로 장래희망이라는 단어가 자리 잡았다.
농부는 이곳에 사는 한 하기 싫어도 되는 거였으니 장래희망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유세라가 구상하는 사업이 시대와 나라에 맞지 않는 시스템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관련 지식이 없으니 뭐가 맞는지도 모르겠고 누구든 먼저 도입하면 자리 잡는 게 시스템이니까.
“에이전시 설립하시면 직접 매니징 하시는 건가요?”
“직접은 무슨. 일 잘하는 사람 뽑아서 서포트를-.”
아차, 말하다 말고 유세라가 토끼 눈을 떴다. 비밀이라고 했는데 이놈의 주둥이는 너무 활기차다.
진혁의 얼굴에 승자의 미소가 퍼졌다.
‘숨기지 못하는 것도 수정이랑 똑같네.’
다행이다. 만약 소속하게 되면 함께 다녀야 했을 테고. 여러모로 불편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
***
방학이 끝나고 며칠이 흘렀다.
오늘도 아침 운동을 마치고 가장 먼저 교실에 들어와 신문을 펼쳤다.
「서경, 이동통신 반납키로. 노-김 갈등 수습 국면.」
「서경 포기 제2이동통신 사업권 세인통신으로.」
「세인통신 사장에 홍기준 세인전자 사장 내정, 겸임.」
「세인전자, 대오통신 인수 발표. 세인그룹 재계 2위 우뚝.」
불과 한 달 전이었다면 기절했을 진혁이지만, 차분하게 헤드라인을 다시 훑었다.
서경이 인맥으로 획득한 이동통신 사업권으로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은 21세기의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그런데 그 사업을 포기한 것으로 모자라 뜬금없이 세인에 넘겼다.
그뿐 아니다. 세인이 전자기업 3위 대오통신까지 인수하며 재계 서열 2위로 수직 상승했다.
‘이건 뭔가 많이 이상······.’
아무리 미래 정보가 없는 진혁이라지만 굵직한 기업의 히스토리까지 모를까.
홍기준의 회귀를 의심하던 중이었으나 이렇게 공격적으로 덩치를 불릴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이내 턱을 쥐고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게 된 거였구먼······.”
무슨 수를 썼는지 홍기준은 제법 선명한 미래 정보를 쥐고 있다. 그런데 회귀자인가 하는 판단에는 부정적이다. 그 사람의 인격이 돌아왔다면 이런 행보를 보이지는 않았을 테니.
그게 진혁의 결론이었다.
당장 진혁 본인만 하더라도 예전의 성격을 그대로 갖고 있지 않은가.
사람의 됨됨이도 그렇지만 정보의 정밀도에서도 진혁과 차이를 보인다. 진혁은 정보가 전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 치열하게 공부와 일을 했는데도 말이다.
‘어떻게 아는지 대놓고 물을 순 없고.’
어린아이가 재벌 회장이나 CEO와 경영 관련 대화를 하는 건 가상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혈연으로 이어져 있고 자주 보는 사람들 아니던가. 진혁은 홍기준과 일상 대화 자체도 어려워 쭈뼛거리는 사람이다.
‘아무튼 회장님은 이럴 분이 아니야.’
진혁이 알던 홍기준 회장은 사전적 의미로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안전. 그런 회장을 설득하기 위해, 과거 얼마나 많은 임원들이 진혁에게 지원요청을 했던가.
그런데 지금은 모험을 넘어 도박을 하는 듯 보인다. 어떻게 구슬렸는지는 몰라도 아이 입속의 사탕이었을 서경의 이동통신 사업권을 빼앗은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목에 칼이라도 들이댔나? 그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돈을 주고 샀을까?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젊은 혈기에 미래 정보가 더해진 과단성으로 협박을 실행에 옮겼을까. 진혁이 몸에 밴 습관대로 현상을 역추적해 가설을 세웠다. 순수하게 궁금했다. 학문적 호기심에 가까울 정도로.
‘협박 외에는 방법이 없겠지.’
하나 지금 시대에 누가 군부 출신 대통령 일가를 협박할까.
이동통신 사업이 썩은 달걀이라고 세뇌해서 스스로 버리도록 만드는 일이 쉬울 터였다.
그리고 대오통신.
‘그럴 돈이 있었나.’
그룹 계열사이자 대기업이다. 그런 회사를 인수 합병하고, 사업권을 따내고, 계열사를 늘리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을 것이다. 세인이 재무구조가 탄탄한 회사라고는 하나, 그것은 부채가 적다는 뜻이었지 캐시가 많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인수에 들어간 막대한 자금은 모두 빚일 터.
‘당장 5년 뒤에 어쩌려고 이러는 거지? 미래를 안다면 무리하지 않을 텐데.’
지금이야 행정부와 금융권이 기업 친화적이지만 머지않아 닥칠 위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 돈줄이 마르고 달러가 없으면 어쩌려고 그럴까.
분명 배경에 홍기준이 있다는 전제를 지울 수 없었다. 휴가 때 유세라도 남편 자랑을 입이 닳도록 하지 않던가. 아마, 부장 승진한 지 1년 만에 사장이 됐다고 했던 것 같은데. 회장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어 저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겠지.
‘세인에서 PC 나왔을 때도 수상쩍긴 했다. 그런데 이동통신까지.’
삐삐도 만들고, 휴대폰도 발표하고?
진혁의 눈에는 세인그룹에서 다 해 먹겠다는 의지로 비쳤다.
‘왜? 하는 김에 자동차도 만들지?’
그리 생각하며 눈동자는 계속 신문을 훑었다.
「아세아모터스, 세인그룹에 매각키로.」
켁-. 쿵-.
진혁은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냉정을 유지하던 심장이 급속 해동되고 말았다.
‘제정신인가?’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느낌이 이런 걸까. 정상이라고 생각되는 세상,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완전히 사라졌다. 울렁거리는 속에서 욕지기가 올라오는 것을 겨우 억눌렀다.
진혁은 아주 오랜만에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지면에 세인이라는 글자가 절반은 되는듯했다.
솔직히,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홍기준이 잘 된다면 질투할 진혁이 아니다. 이 중학생이 이러는 데에는 사실 다른 이유가 있었다.
‘에이 씨, 혹시 몰라서 나중에 돈 많이도 아니고 조금만 어떻게 벌어보려고 내가······.’
어른이 되어 종잣돈을 모으면, 그······ 뭘 좀 어떻게 해볼 생각이었다.
원래는 그럴 마음이 없었지만 유진이가 태어나면서 조금은 멋지고 부자 오빠 노릇을 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더랬다. 한때 미래 지식을 사용해 돈을 버는 건 타인의 운명을 빼앗는 비겁한 일이라고 여겼던 진혁이었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아주 세속적이고 볼품없는 이유라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만큼 솔직한 욕망이 어디 있겠나. 그만큼 진혁에게는 동생이 소중하다는 방증이기도 했고.
전생의 홍수정을 떠올리면 무쇠처럼 단단한 심경에 파문이 이는 탓도 있었다. 꼴에 남자라고.
‘다 망했어 십라.’
그런데 이제 어렴풋이나마 알던 과거의 주가 흐름 정보가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세인이라는 이름 때문에. 한 그룹이 이제 웬만한 종목은 다 보유하게 되었으니 주식시장에 미칠 영향력은 상상할 수도 없게 되었다.
아직 반도체와 신소재에 손대지 않아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아무튼.
‘흠······. 근데 돌아오지 않고 정보를 얻을 방법이 있나?’
나름의 결론을 얻은 진혁이 가늘게 뜬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돌아왔다면 저럴 수는 없다. 다른 뭔가 있다.
그로 인해 이제 세상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변했는지 가늠하기 어려워졌다.
‘당연히 내가 돌아왔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고.’
그와 별개로 홍기준이 미래를 알고 있을 거라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다만 크게 우려하는 것이 있었으니, 시골의 중학생과 대기업 사장의 몸짓은 그 반향과 후폭풍의 규모가 다를 수밖에 없다.
홍기준쯤 되는 거물이 날갯짓을 했다면 미래는 더욱 크게 틀어지고, 다음 단계를 예측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뜻이다.
진혁이 알기로 홍기준은 수 싸움에 능한 사람이 아니다. 성실했으나 두뇌가 뛰어난 지략가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의심할 구석은 한가지.
‘아마, 내가 아빠를 살리고, 아빠가 기준 아저씨한테 이것저것 조언을 했을 거야.’
진혁이 알기로 홍기준 곁에 있는 인물 중 가장 뛰어난 전략가는 손광연이었다.
매일같이 통화를 하고, 휴가 때도 24시간 붙어있는 사람들이다. 주제는 사업 관련 대화가 대부분이었고. 진혁의 추측이 맞다면 지금의 변화는 결국 진혁이 불러온 것이 된다.
‘세상 재밌게 돌아가네.’
진혁의 눈이 그 옛날 손진혁 팀장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다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시골의 중학생 신분이라는 것이 이토록 발목을 잡을 줄이야.
그렇다면 다른 할 일을 찾아야지.
할 수 있는 일.
쿵-, 쿵-.
생각을 정리하며 책상에 머리를 마구 박았다. 이런 괴상한 버릇은 없었는데, 과거로 돌아온 후 집중할 때마다 하는 행동이었다.
교실에 들어서던 채규호가 흠칫 놀라 복도로 백스텝했다.
한참이나 머리를 박던 진혁은 생각을 정리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이빨 빠진 대마법사의 주문이 새겨진 심장 어림을 쓰다듬으면서였다.
‘그 재밌는 세상에서 유명한 부자가 되려면 뭘 하면 되려나.’
신문을 고이 접어 서랍에 넣었다.
마음 같아선 찢어버리고 싶지만 오늘은 진혁이 속한 분단이 유리창 닦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