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 수호의 대운 (6) >
천길룡이 곰방대를 손바닥에 털며 웃었다.
노인 같지 않고 진혁과 또래로 보일 만큼 맑은 웃음이었다.
“운명이 바뀌면 그런 마음이 들곤 하지. 너도 운명을 바꾸지 않았더냐. 이 늙은이가 하는 소리를 들었으니 그런 생각 정도는 해봤을 터인데?”
천길룡이 아니더라도 아홉 살의 그날 운명을 바꾸는 경험을 하고 그 기분을 느낀 터였다. 그러나 감동은 있었을지언정 죽었다 살아났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긴 잠을 자다가 깬 기분은 들었지만.
진혁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선뜻 생각나지 않았다. 이런 경우가 많지 않았고 이런 사람을 만나 본 일도 없었기에.
오르막길을 오르며 천길룡이 푸욱- 한숨을 쉬었다.
“고민이란 뇌를 가진 동물의 특권일 것이나, 복잡할수록 단순할 필요도 있느니. 사람이란 그저 잘 먹고 잘살면 되는 게야. 아이고 숨차다.”
“힘드시면 업어드릴까요?”
“이놈이 누굴 골탁골탁한 늙은이로 아나? 아침밥 두 번 먹어서 숨찬 거여 이놈아.”
한유영의 간절한 눈빛이 아니었으면 먹지도 않았을 터인데. 이 집 사람들은 귀신보다 무섭다. 사람 마음 약해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지 않나. 닳고 닳은 노인네, 세상에 설렐 것 없다 자신했거늘. 이 가족의 눈빛을 대하면 앙큼한 심장이 두근댔다.
“또 찾아봬도 될까요?”
“그러시든지. 전화해도 된다만.”
“아······?”
전화도 있어요? 진혁이 기어드는 소리로 웅얼거렸다.
“지금이 어느 시댄데 이놈아. 전화기도 없을까 보냐? 이래 봬도 최첨단 버튼식이여!”
무선전화기 세트라 마루에서도 돼 이눔아. 진혁의 반응이 못마땅한 듯 천길룡이 투덜거렸다.
혹시 ARS가 받는 건 아닐까. 진혁은 머릿속으로만 의문을 표했다.
“티리비랑 비디오두 있어. 뻐쓰 타고 나가서 프레데터 일, 이탄 다 빌려다 본 사람여, 내가.”
천길룡은 삿갓을 고쳐 쓰고 느릿느릿 걸었다.
“선문답이라고 아느냐?”
“예, 뭐······.”
“좋아하느냐?”
“아뇨.”
단호하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물음이었다.
진혁은 직관적이고 효율적인 대화를 선호한다. 구렁이 담 넘듯 둘러대거나, 조심조심 에둘러 표현하는 사람과 대화하면 명치에 암세포가 자라는 듯 답답했다. 감성 따위에 휘둘리지 않고 세상만사를 사무적으로 대하던 닳고 닳은 사내의 태도란 으레 그랬으므로.
“다행이구나. 나는 좋아하는데. 여기 좀 앉아 보거라.”
“무슨······.”
“앉아 봐 인마!”
좋은 할아버지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괴상하고 괴팍하다.
천길룡을 따라 길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어차피 막걸리 트럭이 올 때까지 시간이 남았다.
“토끼라는 놈은 산에서도 요리조리 잘 뛰지. 그러다 나무에 대가리를 곧잘 박아. 헌데 노루라는 놈은 토끼보다 덩치도 큰데 부딪히는 법이 없어.”
“예. 그렇군요.”
뜬금없는 우화였으나 그래도 어르신이라고 성의껏 리액션을 취했다.
“그 차이를 아느냐?”
“아뇨.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천길룡이 껄껄 웃었다.
“토끼는 나무를 보고 달리지. 부딪치지 않기 위해, 또 언제든 몸을 숨기기 위해서 말이여. 그런데 나무를 보며 달리면 제 놈도 모르게 들이박게 되는 거란 말이여.”
“노루는요?”
“길만 보고 뛰지. 제 살길만 눈에 담고 달리는 게여. 숨는 것보다 더 빨리, 멀리, 힘을 다해서 도망치는 게 살길이라는 걸 아는 까닭이여. 길만 보고 달리니 나무에 긁히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어.”
“예······.”
천길룡이 우화를 꺼내든 이유를 나름대로 추측해보며 진혁이 고개를 주억였다.
“꿈보다 해몽이여 이놈아. 점쟁이 찾는 것들도 다 지들 멋대로 해석햐. 그게 틀린 것도 아니고······.”
천길룡이 곰방대로 읍내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십자가 믿는 것들도 경전을 지들 좆대로 해석하지 않더냐······.”
“아······.”
교회 다니는 사람이 화를 낼까, 진혁은 아무도 없는 들판을 괜히 두리번거렸다.
“인생이 길더냐? 너 뜀박질 잘하지?”
“예, 뭐······.”
“지켜보는 사람 눈에는 경기가 금방 끝나지. 직접 뛰어보니 어떻더냐?”
“······.”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준비 구령부터 총소리까지는 의외로 길게 느껴진다. 그런데 결승선을 지난 후 생각하기에는 레이스는 매우 짧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막상 경기에 임할 때는 이상하게 조바심이 나며 그 시간이 길게 여겨졌었다.
“뜀박질이 길더냐, 인생이 길더냐?”
뚱한 표정을 지으며 경청하는 진혁을 보며 천길룡이 웃었다.
“달릴 때는 앞만 보고 잘만 뛰는 녀석이, 멍청한 짐승처럼 제 그림자 보고 신기하다고 빙빙 돌면 못 쓰는 게다.”
“예, 빙빙 돌지 않겠습니다.”
무슨 소린지는 차차 생각하기로 했다. 긍정만이 잔소리 폭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멀리서 보니 생각이 너무 많다더라.”
희한한 화법이다. 누군가에게 전해 듣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지 않나.
“제갈무후가 뛰어날 수 있던 건 생각이 많아서가 아녀. 제 생각 안으로 만물을 끌어들여 그런 게지. 연애도 하고, 돈도 벌고, 재미나게 살어. 흘러간 어제보다 빠른 건 없는 벱이여.”
끙차-. 천길룡이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죽 늘어놓은 말을 곱씹어보기도 전이었다.
진혁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럼 내가 할아버지지 할머니더냐? 멀쩡하게 생긴 놈이 싱겁기는-.”
투덜거리는 듯했지만 웃음이 함께 들려왔다.
진혁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 천길룡을 마음으로 배웅했다.
고마운 한편으로는 답답했다.
‘속 터져.’
예, 아니오로 시원하게 대답해주시면 좋으련만.
저 할아버지 말대로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계산하는 데에만 익숙해져서 머리가 나빠진 걸까.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고민하고 갈등했던 걸까. 보고서 따위에 익숙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근데 선문답이나 하자고 오신 건가?’
진혁이 보기에는 저 할아버지야말로 싱겁기 짝이 없다.
아무리 선문답이라지만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다가 가시지 않았나.
***
진혁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다다랐을 때, 천길룡이 후아- 하며 긴 숨을 뱉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시부랄 것. 나도 수련이 부족한게벼. 분명 뭔가 냄새가 나는데.’
명아주 지팡이가 서늘하게 보내는 반응 외에는,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숨이 컥 막혔다.
잠시 걸음을 멈춘 천길룡이 명아주 지팡이를 노려보았다.
‘대신보다 쎈 놈이 붙어있는 건가?’
그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소년의 기백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그토록 기묘한 힘을 인간이 품을 리 없다.
형이 있었다면 뭔지 알려줬을 텐데.
삿갓을 젖히고 뭉게구름 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형이 주먹 감자를 날리며 놀리는 것 같았다. 못난 놈이라고 비웃으며.
“빌어먹을 늙은이. 내가 당신보다 오래 살 거여.”
하늘을 향해 중지를 치켜세웠다.
“엿이나 잡솨!”
얼마 전 비디오를 대여해서 본 〈프레데터2〉에서 보니 갱들이 경찰을 향해 이렇게 욕을 하더라.
천길룡의 다리가 휙휙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이제부터 즐기면서 살겠노라 뇌까리는 몸을 싣고.
교회나 나가 볼까······. 점심 때마다 국수 준다던데.
요즘은 피로연도 읍내에서 하는 통에 국수 얻어먹기가 쉽지 않다.
***
진혁은 천길룡이 떠난 후에도 뚱한 얼굴로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었다.
못마땅할 것은 없었다. 그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
‘무슨 말이 하고 싶으셨던 걸까나.’
다다닥- 뒤늦게 따라온 장군이를 쓰다듬자니 천길룡이 한 말은 모두 사라지고 입가에 웃음만 남았다.
역시 진혁에게 장군이보다 더한 힐링은 없다.
헤헤헥-.
“오구오구, 우리 장군이-.”
앵앵앵- 커거걱-쿨럭쿨럭-!
드디어 늙은이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막걸리 트럭이 나타났다. 따로 손을 들지 않아도 주전자나 말통을 들고 길가에 있으면 알아서 멈춘다. 운전사가 차창에 팔을 내밀고 인사를 건넸다.
“저 큰 집 삼촌이신가? 안녕하슈?”
“예, 안녕하세요.”
구봉산 입구를 지나면 있는 면소재지의 양조장에서 운행하는 트럭인데, 매일 이 시간에 안마을 이해원네 구멍가게로 간다.
“살뀨?”
“예. 가득 주세요.”
서른쯤 되었을까, 운전석에서 내린 까무잡잡한 남자가 호스를 잡았다.
홍기준의 가족이 왔을 때나 막걸리를 받으니 진혁과 데면데면한 사내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반말하시더니.’
역시 키가 크면 어른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주유기처럼 생긴 총에서 향긋한 막걸리가 콸콸 쏟아져 말통을 금세 채웠다.
‘쩝. 맛있겠다.’
아홉 살 때 6리터 들이 양은 주전자에 가득 채우고 2천 원이었던 것이 5년이 지난 지금 5천 원을 받는다. 재미있는 건, 주전자에 비해 세 배가 넘는 말통에 받으면 만 원이다. 대중없다는 소리다.
집으로 돌아가다가 말통 겉뚜껑에 막걸리를 조금 받았다.
먹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실로 엄청난 자제력이다.
“장군이 이거 먹고 싶어서 따라왔지?”
헤헤헥-.
꼬리가 떨어져라 흔드는 걸 보니 그런 듯했다. 장군이는 막걸리를 얻어먹을 수 있어서 홍기준 가족의 방문을 기다리는 녀석이다.
진혁은 막걸리를 핥는 장군이를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셨다.
진혁이 집에 돌아오니 마당에 한 편의 영화가 펼쳐지고 있었다.
‘해피엔딩 장면 같다.’
홍수정은 벚나무 밑에 앉아 유진이 손에 봉숭아물을 들였다. 봉숭아꽃과 이파리, 백반을 함께 짓이겨 비닐로 감싸는 꼬맹이 손놀림이 야무지다.
“유디니 다음에 당구니도 물들이자.”
“녜, 에헤헤-.”
어른들은 평상에 둘러앉아 열띤 토론을 벌였다.
“내 사주가 제일 좋지 않았어?”
“그래요, 언니 사주 좋더라.”
“에이, 내 사주가 더 좋지. 풀이대로라면 대통령감 아니야?”
“그래. 기준이 대통령 해라. 내가 찍어줄게.”
그냥······. 천길룡의 덕담 꿀단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유세라와 홍기준의 머리를 엄마와 아빠가 꾹꾹 눌러 담그는 장면이었지만. 행복하면 된 거지.
“당신은 물러 터져서 대통령 하면 안 돼!”
“그래요, 예쁘고 성깔 있는 언니가 해야죠.”
“그럼 난 쿠데타 일으킬 거야.”
“그래. 기준이 쿠데타 해라. 내가 화염병 만들어줄게.”
역시 우쭈쭈는 생각 없이 하는 게 최고다. 부모님은 일찍이 그걸 깨닫고 계셨구나. 무조건적인 공감이라니, 정말 훌륭한 분들 아닌가. 수박을 먹으면서도 한마디도 놓치지 않는 타이밍 포착이 특히 발군이었다.
진혁은 자두나무에 올라 어른들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욕망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에너지가 아닐까.
꿈을 이루고 싶어 하는 간절한 바람. 현재 어디에, 누구와 있든 잊지 않고 항상 추구하는 삶의 이유.
‘개똥철학자 된 기분이네.’
아마도 천길룡은 어떤 가르침을 주고자 찾아온 게 아니었을까. 헷갈리지 말고, 혼란스러워하지 말고, 앞만 보고 똑바로 살라고.
내 형이 대신 죽어 지킨 가족이니 너도 똑바로 지키라는 말도 했지. 최미경의 할머니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바 있다.
천길룡이 방문 목적을 따로 밝히지 않았으니 그리 미루어 짐작했다. 꿈보다 해몽이라더니,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유리하고 위안이 되는 방향으로 생각을 이끌었다.
‘귀신 좀 있으면 어때. 우리 가족에게 해코지만 안 하면 되지.’
팔베개를 하고 굵은 가지에 기댔다.
명상 때문에 혹시나 제 안에서 귀신이라도 나오는 건가 이상한 생각을 했었는데, 역시나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난 이름을 드높일 사람이라고 했어.”
“그래요. 언니는 이름도 예쁘니까 괜찮네.”
“나는 세상을 호령한다고 했다니까?”
“그래. 기준이 호령해라. 내가 확성기 사줄게.”
저 어린 어른들 언제 철드나.
홍수정과 유진이가 더 진중해 보일 지경이다.
“당군아-! 이리 와 봐!”
“까하하-!”
헤헤헥-.
꼬맹이들은 장군이 발톱에 봉숭아물을 들이겠다며 뛰어다니다가 지쳐서 퍼져버렸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 한들 꼬맹이들 손에 잡힐 장군이가 아니다.
“유디니는 누구랑 겨런하꺼야?”
“우리 오빠랑 할 거지요?”
“야! 소뉴딘! 언니 말뜸 멀로 드든 거아?”
에휴, 역시 철없는 사람보다는 장군이가······.
어느새 자두나무 밑으로 와 진혁을 지키듯 누운 장군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로롱-끼잉-.
이 새끼 처자고 있네.
장군이 입에서 술냄새가 폴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