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 수호의 대운 (5) >
“수정아, 할아버지 진지 드시게 저기 가서 유진이랑 놀아.”
뜻밖에 홍기준이 천길룡의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나 하다부지 좋은데. 우리 하다버지 닮았더.”
“오호호-. 그려. 여기 있거라.”
어쩔 수 없이 천길룡은 햄을 모두 먹어야 했다.
어르신 진지 드신다고 합석한 손광연과 홍기준이 지켜보는 곳에서 밥을 먹으려니 불편할 뻔했는데, 그래도 홍수정 덕분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천길룡은 홍수정과 손유진, 그리고 발바리가 뛰어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며 식사를 마쳤다.
“고맙소. 뜻하지 않게 귀한 대접을 받았구랴.”
손광연과 홍기준이 상을 치웠고, 유세라가 후식으로 참외를 내왔다.
천길룡은 평상에 걸터앉아 사내들의 면면을 살폈다. 그러면서 웃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세라를 보면서는 저도 모르게 허허-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쟁반에 수정과를 받쳐 내오며 한유영이 말했다.
“좋은 말씀 있으시면 해주세요. 참지 마시구요.”
한유영의 말에 천길룡이 눈을 빛냈다.
이 어린 부인이 어찌 내 속을 들여다봤누?
이제까지 천길룡이 지켜본 바, 요즘 사람들은 더이상 신기를 신뢰하지 않았다. 이 외진 시골에도 교회가 들어오더니 모두 그리로 몰려가지 않던가. 이장들도 이제 마을 대소사를 물으러 오지 않는다. 물론,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해주고 사람들을 등쳐먹는 사기꾼 무당들 때문에 신뢰를 잃은 이유도 있겠지만.
아무튼 누가 덕담이랍시고 면전에서 주제넘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저어하는 세상이 왔다. 뒷방 늙은이로 물러앉을 때가 된 것이다.
“오래 살았다고 지혜로운 거 아니고, 나이 적다고 어리석은 거 아닙디다. 내 무슨 할 말이 있게소. 허허-.”
“그래도요. 저 그런 얘기 듣는 거 좋아해요.”
교회에 다니지도 않으면서 목사가 찾아오면 차를 대접하며 좋은 이야기를 해달라 청하는 한유영이다.
귀염둥이 막내딸처럼 갯마을 간달프의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었다.
그렇다면 밥을 얻어먹었으니 조금만 해주도록 할까. 천길룡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별일이오. 내가 뭐 아는 게 있겠나. 여기 손 사장만 해도 그렇지. 옛날에는 농사꾼들 사이에서 노인네들 말이 곧 하늘이었어. 그렇지 않나?”
손광연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손을 앞에 모아 공손한 자세를 유지한 채였다.
“하늘을 보고 주름에 새긴 기억을 더듬어 땅은 언제 갈 것인지, 씨는 언제 뿌리고 덮을지, 가을걷이는 언제 할지 늙은이들이 가르쳐줘야 했지. 그런데 이 집 사장은 하늘도, 땅도 아닌 사람을 보고 농사를 지어. 인간 세상을 읽는단 말이야. 지혜가 있어. 그러니 잘 될 수밖에. 미래가 지식의 시대라고 하는데 지식이 있다 한들 써먹지 못하면 개똥만도 못하지. 다 뛰어넘어 지식을 지혜로 만드는 사람이 성공하는 지혜의 시대가 올 거요. 그런 의미에서 손 사장은 몇 세대는 앞서가는 사람이지.”
내색하지 않았지만 손광연은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갯벌에 둘러싸인 높은 언덕에 사는 늙은이로 알았는데, 마치 세상을 굽어보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나도 팔십이 되기 전에는 여기저기 참견하고 아는 체 많이 했지.”
느티나무 그늘에 시원한 바람이 지나갔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두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쉽게 누릴 수 없는 청량함이었다.
천길룡이 수정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아 좋다’ 하며 탄성을 내었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니 고집 센 늙은이가 있더이다. 그때 알았지. 아, 거울을 보고 얘기했어야 하는구나. 남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말을 거울에 대고 했어야 하는구나.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는 말도, 겸손해야 한다는 말도 거울에 대고 했어야 하는 게로구나.”
손광연도, 홍기준도 겸손한 자세로 천길룡의 가르침을 들었다.
남을 가르치려 들거나 흠을 보려 하지 말고 자신을 닦는 데 신경 쓰라는 말로 들렸다.
천길룡이 시선을 돌렸다.
버스 길에서 집으로 내려오는 길에 진혁이 걸어오고 있었다.
천길룡이 슬그머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재밌지 않소? 젊은 날 읽었던 심경이라는 놈을 나이 팔십에 깨달은 게요. 그러고 보면 경전經이라고 부를 게 아니라 거울鏡이라고 부르는 게 맞아.”
한유영도 진지한 얼굴로 경청했다. 미간을 찡그린 유세라는 ‘이게 무슨 소리야?’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유세라를 보며 천길룡이 웃었다.
“늙은이 말이라고 옳은 것 아니니 거르고 걸러 새겨듣고, 아무리 옳고 좋은 말이라도 잔소리는 자기한테 먼저 하라는 소리요, 서울 마님.”
“아, 예······.”
그제야 유세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한국말이었구나, 중얼거리며.
“이 사람은 이렇게,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인데, 남을 녹여 내 거푸집 안에 부으려니 싸움이 나는 게요. 차라리 서로 안 보는 게 편할 노릇인데 굳이 한마디 얹어서 척을 치지. 각자 자기를 수양하고 지혜를 터득하기 나름인 게요. 저놈 좀 보시오. 얼마나 대단한가.”
천길룡의 곰방대가 가리킨 방향에 마당으로 들어서는 진혁이 있었다.
대운을 바꿨고, 여러 생명을 구했으며, 앞으로 세상을 바꿀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욕심 부리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사는.
허리 숙여 인사하는 진혁에게 물었다.
“버섯은 많이 났더냐? 아직 때가 안 되었을 텐데?”
“발 닿지 않는 곳에는 많이 있어요.”
버섯을 따러 갔던 건지 어떻게 알았을까, 모두 속으로 놀랐지만 진혁만은 태연했다. 저 할아버지는 그 정도는 아시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진혁이 검은색 비닐봉지를 열자 그 안에 샛노란 버섯이 한가득이다. 집 뒷산, 썩은 나무에서 자라는 버섯인데 쫄깃하고 향긋한 것이 일품인 꾀꼬리버섯이었다. 가을에나 수확이 가능한데, 홍기준의 가족도 좋아했기에 아껴두었다가 내려올 때마다 진혁이 따오곤 했다.
천길룡이 입을 동그랗게 만들어 웃었다.
“이것 보시오. 각자 하기 나름이지. 사는 것도, 뭘 하는 것도.”
뜬구름 잡는 말은 그만하겠다며 천길룡이 일어섰다. 진혁의 어깨와 머리, 발치를 유심히 보면서였다. 이내 미간을 찡그리고 쩝 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셨다.
“어르신! 그러지 마시고-.”
유세라가 다급히 불렀다.
“왜 그러시오?”
“저 관상이나 뭐 그런 거 봐주시면 안 돼요?”
점이니, 궁합이니 하는 건 미신이라며 관심도 두지 않던 유세라였다. 분위기 탓이었을까, 천길룡을 보니 묘하게 끌리는 데가 있었다. 그런 걸 신기라고 하던가.
천길룡이 다시 앉았다. 뜬금없이 관상을 봐달라고 보채는 서울 마님이 늦둥이 딸처럼 귀여워 거절하기 어려웠다.
“어디 봅시다.”
천길룡은 유세라의 얼굴과 손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특히,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새까맣고 커다란 눈동자에 하얀 수염의 노인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웃는 모습이 비쳤다.
진혁도 천길룡의 옆에 앉아 유세라를 뚫어지게 보았다. 뭐, 본다고 아는 건 아니지만 보고 있자면 기분 좋은 얼굴이다. 홍수정과 다른 점도 찾았다. 홍수정은 붉은빛 도는 갈색 눈동자인데, 유세라는 완벽히 검다.
진혁과 눈이 마주친 유세라가 피식 웃고는 공손한 어조로 천길룡에게 물었다.
“생년월일 알려드릴까요?”
“그런 건 하수나 사기꾼들이 보는 게야. 그걸 보고 글귀에 끼워 맞추는 게지. 그게 맞는다면 사주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겠냐고.”
유세라는 그런가 보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반론할 이유도 없었고, 그럴만한 지식도 없으니.
천길룡이 홍수정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마님하고 똑같이 생긴 공주가 딸일 테고, 아들은 어딨어?”
“네?”
유세라의 큰 눈이 더 크게 떠지고 감전된 사람처럼 두 손도 바르르 떨었다.
‘아들이라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유세라가 동그랗던 눈을 가늘게 만들었다. 이 늙은이야말로 사이비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아무리 어른이라지만 초면에 너무 편하게 마구 던지는 거 아닐까 하는 불쾌감도 함께였다.
“서울 마님 관상이 변했어. 얼음장 같던 사람이 봄바람처럼 변했단 말이야. 서방은 무슨 말인지 알 테지.”
그에 홍기준의 입모양이 저절로 동그랗게 말아졌다.
손광연을 찾고, 자신이 세인그룹에 투신한 후로 아내 유세라도 부드럽게 변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숨겨둔 아들은 없는데······.
홍기준은 째려보는 유세라를 향해 말없이 손을 내둘렀다.
가정에 풍파를 일으킬만한 발언을 하고도 천길룡은 태연했다. 남의 일이라는 듯.
“어디 보자······.”
천길룡은 길게 설명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무뚝뚝하지도 않았다.
그런 면도 도시의 점술가와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어떤 이들은 돈까지 받으며 호통을 치지 않던가. 그들에 비하면 천길룡은 자상한 할아버지 같았다.
“상이 너무 좋으셔. 그냥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
언제 불쾌했냐는 듯 유세라가 헤벌쭉 웃었다. 맞히는 건 없어도 상이 좋다는데 다른 게 대수랴. 이미 하고 싶은 일을 할 준비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속 시원한 답을 듣고 싶었다.
“저는 무슨 일을 하는 게 좋을까요?”
“이름을 드높이는 일을 해야지. 누구 밑에 있어서도 안 되고 사람을 너무 많이 거느려도 안 돼. 가지 많은 나무는 바람에 찢어지고 쉴 수가 없는데, 마님 관상은 난초거든. 난초는 제 줄기나 챙기며 고고해야 하는 법이지. 홀로 빛나는 게 최고야.”
크으-.
유세라가 구성진 감탄사를 뱉었다. 고고한 난초라니. 명예욕을 품은 사람을 이보다 만족시키는 미사여구가 있을까. 대한민국 기초 체육사에 홀로 길이 빛나리라. 유세라의 눈이 반짝였다.
역시 꿈보다 해몽이었다.
“이 사람도 봐주세요!”
이번에는 유세라가 남편 홍기준을 가리켰다.
천길룡이 홍기준을 보며 눈웃음을 그리고는 간단한 평을 남겼다.
“선한 사람이야. 의리가 있어.”
그리 말을 남기고 천길룡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설 유세라가 아니었다.
“좀 자세히······.”
피식 웃은 천길룡이 다시 자리에 앉아 홍기준을 응시했다. ‘찰거머리 같네’라고 중얼거리면서였다. 서울 찰거머리 때문에 벌써 몇 번을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더니 무릎이 쑤셨다.
“어디 보자······. 덕이 있으나 욕심이 없으니-.”
나라를 다스리고, 세계를 정복하고, 앞날을 개척하는······. 유세라에게는 나오지 않던 풀이가 쏟아졌다.
홍기준은 그저 허허 웃어넘겼다. 마나님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라는 걸 아는 까닭이다.
“그저 흥으로나 들어두시오. 점괘 따위나 믿고 살아간다면 모든 책임을 운세나 세상 탓으로 돌리지 않겠나? 젊은이들이 그럼 못쓰지. 여기 서방님은 그걸 알기에 그저 웃기나 하는 걸 테고.”
천길룡이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끙차- 하는 소리를 내면서였다.
“이제 잡지 마시오. 내 집에 빈객이 많아 오래 비울 수 없어서 말이야.”
유세라가 복채를 드리겠다며 발을 굴렀지만 밥값이라며 그는 끝내 복채를 받지 않았다.
배웅하고자 하는 한유영의 성의도 천길룡은 극구 사양했다.
“자네는 나 좀 보자.”
대신 진혁에게 손을 뻗어 길동무를 청했다.
진혁은 막걸리 받을 말통을 챙겨 천길룡을 따랐다.
*
천길룡과 진혁이 언덕을 절반쯤 올라 작아졌을 때 유세라가 물었다.
“오빠, 저 할아버지 누구야? 되게 용하시다.”
“옛날에 우리 집 지을 때 터 안 좋다고 하신 분.”
그분 아닌데. 손광연은 끝내 형제를 구분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조차 천길룡이나 천기륭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닮았으니 그 사람인 모양이라고 여길 뿐이었다.
“그 말씀 생각나서 이 집 새로 지을 때 터도 높이고 방위도 좀 틀었지. 저 흙집도 새로 짓고.”
“점쟁이라는데 점쟁이 같지가 않아.”
“예전 이장님한테 들었는데 점쟁이 같은 거 아니래.”
“그럼?”
신선.
손광연은 대답 없이 피식 웃었다.
바보처럼 들릴 대답이었기에.
***
묵묵히 걷던 진혁이 우물우물하다가 운을 뗐다.
“저······.”
“뭘 그리 뜸을 들이느냐? 왜, 죽었다 살아난 기분이라도 들더냐?”
진혁을 향해 천길룡이 고개를 꺾는데, 그 자세가 기이하게 부드러웠다.
웃음 섞인 음성이었으나 매서운 눈빛, 진혁은 반사적으로 헛숨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