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 수호의 대운 (3) >
***
“아빠, 동네에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가 계세요.”
진혁은 집에 도착해 아빠에게 천길룡에 대해 말했다.
천길룡의 집을 나서며 눈치껏 살펴보니 어렵게 사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처마에 마늘과 북어를 매달았고, 반쯤 열린 광문 틈으로 귀한 식재료도 얼핏 보였다. 그래도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땅덩이만 넓고 인구가 많지 않은 동네, 손광연도 천길룡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런 분들은 자존심이 강하니까 이장님한테 부탁해서 뭐 도와드릴 거 있나 알아볼게. 필요한 걸 보태드리는 게 정말 돕는 거니까. 끄으흐으응-.”
손광연이 거실 바닥에 누워 등을 비볐다. 진중한 어투와 어울리지 않는 방정맞은 몸놀림이었으나, 불에 덴 듯 아파 죽겠는데 통 손이 닿질 않으니 별수 있나.
아빠가 요가를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진혁은 감탄했다.
깔끔하다. 이런 군더더기 없는 의사결정이라니. 그리고 아빠는 한 번 뱉은 말을 반드시 지킨다. 이제 진혁만 약속을 지키면 된다. 올가을엔 망둥어를 더 많이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면 신상 릴낚싯대를 사는 게 좋겠지.’
신난다. 비싼 걸로 사야지. 대나무 낚싯대는 사나이의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지만 감성이 물고기를 낚아주는 건 아니더라. 설레는 마음으로 지름신을 영접하는 진혁의 흥을 홍기준이 깨고 들어왔다.
“진혁이는 왜 아빠라고 부르는 거니?”
어른들은 이게 문제다. 별 대수롭지 않은 것도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거침없이 묻더라. 뭐, 궁금해할 만한 이슈이기도 했다. 또래 시골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아버지라고 불렀으니까.
평소였다면 ‘그냥’이라고 답했을 테지만, 이제 홍기준은 진혁의 4천만 원을 굴리게 된 사람이다. 조금 더 친절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역시 돈이 최고다.
“그렇게 부르는 게 좋아서요.”
부르지 못해 아쉽던 날들에 대한 보상심리랄까.
무슨 말로도 설명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 홍기준이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나는 뭐라고 부를래?”
그러고 보니 그동안 따로 뭐라 호칭을 정하고 부른 일이 없었다.
보통 이럴 땐 뭐라고 부르더라? 저기요? 홍 씨? 동네 어른들은 보통, ‘좀 봐유’ 이러던데.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게 내 입맛에는 맞는데.’
아홉 살 아이에서 사교성 성장이 멈춰버린 진혁이다. 몸은 아이였으나 정신이 중년이었으니 과거로 돌아온 후에도 거기에서 발전하지 못했고. 동네 친구들의 부모님은 아저씨, 아주머니라 부르는 걸로 충분했다.
‘다르게 불리길 원한다는 뜻 같은데.’
아저씨? 아니야 내 돈 4천만 원. 삼촌? 보통 그렇게 부르지?
그러나 진혁은 홍기준의 성향을 알고 있다. 대놓고 아부하는 것보다는 소소하게 특별대우 받는 것을 즐기는 사람.
진혁이 어렵게 해답을 내놓았다.
“아버님······.”
“으하하하하하하!”
정답인 모양이었다.
홍기준이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다.
다시 태어나도 세상살이가 참 어렵다. 그리고 사람 일 모르는 거라던 말이 진리다. 천하의 손진혁이 사바사바를 하게 될 줄이야.
주방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세라가 다듬던 콩나물을 던지고 우다다- 달려왔다. 꼬맹이 홍수정과 똑 닮은 행동이었다.
“진혁아! 나는? 나는?”
왜들 이래 진짜.
***
보름이 가까워 달이 밝았다.
이른 새벽, 잠에서 깬 진혁은 침대에 앉아 방안을 훤히 비추는 둥근달을 감상했다. 시리도록 푸른빛이 망막과 시신경을 거쳐 마음마저 아리게 만들었다.
‘그래도 예쁘다.’
홀가분함이 지나쳐서였을까, 힘이 넘쳐 일찍 잠들기 어려웠다. 엊저녁에는 평소보다 더 많이 달리고, 턱걸이와 줄넘기도 두 배로 했다.
어머님 소리를 듣고 신이 난 유세라가 자꾸 막걸리를 권하는 통에 집안에 머물기 불편한 탓도 있었다. 홍기준과 유세라는 연신 건배를 외치며 막걸리를 모두 해치웠다.
‘음악이나 들을까?’
딸칵-.
책상 옆 협탁의 카세트 플레이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세인전자에서 출시한 최신형, 최고급 미니 컴포넌트라는 제품이라며 홍기준이 가져왔는데, 카세트테이프 슬롯이 두 개나 되고 CD플레이어도 결합되어 있었다.
당연히 오토 리버스라서 테이프를 바꿔 낄 필요도 없다.
‘내 팔자에 음악 들으며 릴랙스라니.’
에어 서플라이라는 호주 밴드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맑은 하늘에 구름 위를 나는 듯한 기분이 드는 피아노 전주가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곡이었다.
침대에 앉아 음악을 들으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생각할수록 신기해.’
전생에는 군 제대 후에 구매한 MP3 플레이어가 진혁의 첫 미디어 플레이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흙집에 살 때도 엄마 다리를 베고 누워 라디오를 듣고, 카세트로 노래도 들었다.
게다가 미니 콤포넌트라니. 진혁으로서는 처음 사용해보는 물건이다.
‘씨뿔뿔이나 만질까?’
잠이 오지 않으니 이것저것 놀이가 궁금했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세인전자의 최신형 제품이라며 홍기준이 386 컴퓨터와 함께 프로그래밍 서적을 선물했는데, 재미는 있었으나 앉아있으려니 좀이 쑤셨다. 예전에는 온종일 앉아있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활동적인 일에 몸을 맞춘 부작용인 듯했다.
“But I don't know how to leave you-.”
작은 소리로 노래를 따라부르다 창밖으로 눈을 돌렸을 때였다.
진혁의 눈이 크게 떠지며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저건 뭐냐!’
그림자였다.
인간의 눈으로 식별이 불가능한 거리, 진혁은 매서운 눈으로 시커먼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개도 짖지 않는 달밤, 민가도 없는 곳에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한치의 망설임 없는 움직임, 주위를 살피지도 않는다. 그림자는 왔던 곳으로 다시 사라졌다.
진혁의 눈에는 약속된 행동으로 보였다.
눈으로 좇으니 그림자가 사라진 곳에 어두운 숲이 보였다.
이 순간 진혁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하나였다.
‘간첩!’
보름달이 뜨는 사리 때면 만조를 맞은 갯벌은 수심 깊은 바다로 변한다. 육군에서 초소를 짓고 야간 감시 목적으로 TOD를 운용했지만, 구불구불한 서해안의 해안선을 대대병력으로 감시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진혁이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가 있다.
먼 마을에서 발생한 일인데, 자고 일어나니 마을 이장의 머리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동네에 유명하다.
지주 밑에서 머슴 생활을 하던 이의 아들이 6·25 전쟁이 휴전협정을 맺은 직후 북으로 넘어갔는데, 아버지가 머슴 생활을 하며 겪은 수모와 고생을 잊지 못하고 보름 밀물 때 고성능 보트를 몰고 내려와 다 늙은 지주의 목을 낫으로 끊어갔다는 것이었다.
- “그런데 그 사람 소행인지는 어떻게 알았대요?”
- “워치케 알기는유-. 보름이라 훤헌디 영감 아들이 친목회 댕겨오다가 봤대유. 20년 전인가 사라졌던 눔이 피 뚝뚝 떨어지는 보자기를 들고 가니께 이상허다, 술 취해서 잘못 봤나 하고 넘어갔대유. 담날 일어나서 영감 머리가 없어졌으니께 아차 했던 거쥬-.”
아직 흙집에 살던 시절, 조일헌이 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엄마와 함께 껴안고 떨었던 기억이 난다. 간첩이 찾아올 일도 없는데도 말이다. 그 정도로 간첩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귀신보다 무서운 존재였다.
‘우리 마을에 간첩은 어림없다!’
때가 어느 때인데 간첩이냐 할 수 있겠으나 아직도 읍내 광장과 진입로에는 ‘자수하여 광명 찾자’는 문구가 탑처럼 세워져 있다.
게다가 가족이 사는 집이 훤히 보이는 곳에서 활동한다면 불안한 노릇이다.
간단히 옷을 갈아입었다.
불확실한 정보만으로 무턱대고 간첩 신고를 할 수는 없는 노릇, 최소한의 단서라도 찾으려는 계산이었다.
달칵-.
“헤익-!”
방문 앞에서 개구리 자세로 잠든 유진이를 발로 찰 뻔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급히 움직이려던 생각을 고쳐먹고 냉정함을 찾았다.
신기한 동생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새벽에 자다 깨서 나와 봐도 여기서 자고 있다.
진혁은 늘 그랬듯 동생부터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날다람쥐처럼 날아 계단을 내려왔다.
재빨리 현관으로 이동해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나서기까지 몇 초 걸리지 않았다.
월-.
“쉿-. 따라오지 마.”
반갑게 일어섰던 장군이가 아쉽다는 듯 다시 앞발을 베고 엎드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장군이가 있으면 추적에 도움이 되겠으나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사사삭-.
발바닥에 힘을 집중해 체중을 최대한 줄였다. 소리도, 발자국도 남지 않도록 발끝으로 달렸다. 야간침투 훈련에서 익힌 대로 몸을 한껏 웅크리고.
‘드보크라고 부르던가?’
군 시절 분명 그렇게 교육받았다.
간첩이 필요한 물품을 숨기거나, 다른 간첩과 연락수단으로 이용하는 장소.
내륙 깊숙한 곳까지 보트 운용에 필요한 바다가 만들어지는 때이니 접선하기에 안성맞춤이리라. 야심한 시각에 거동수상자가 마치 사전에 약속하고 훈련받은 것처럼 움직였다면 드보크가 확실하리라는 판단이었다.
‘뒤지면 증거가 나오겠지.’
포상금이 얼마더라?
세속적으로 재탄생한 진혁의 심장이 뜬금없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음영진 고랑만을 골라 바람처럼 이동했다. 혹시라도 지켜보는 눈이 있을지 모르고, 실제로 누군가 지켜보는 기분도 들었다.
그림자가 머물다 재빨리 사라진 곳에 도착했다.
작은 항아리만 한 바위가 있었다.
크으-,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진혁이 보기에도 기가막힌 위치선정이었다.
두 개의 밭과 두 개의 논이 만나는 곳에 작은 둠벙이 있는데, 둠벙에서 동쪽 밭을 향해 정확히 다섯 걸음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바위였다.
‘놈들만의 법칙이겠지. 드보크를 선정하는.’
이제 이 바위를 치우면 작은 구덩이가 나오고, 그 안에 네모난 깡통이 나오리라. 진혁은 포상금과 국가안보를 떠올리며 호흡을 골랐다.
‘수정이가 유명해지랬지.’
가장 유명한 중학생이 될 기회였다.
드륵-. 힘을 주니 무거운 바위가 진동과 함께 밀려났다.
‘옴마? 왜 아무것도 없어?’
바위를 치우자 지렁이 두 마리가 꿈틀거리고 꼬리 끝이 집게처럼 갈라진 작은 검은색 벌레 세 마리가 후다닥 도망쳤다. 햇빛을 받지 못해 희다 못해 뽀얀 풀뿌리 몇 가닥이 갈색 흙에 의지해 힘겹게 사는 세계였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손진혁이 아니다.
진혁은 그림자가 사라진 곳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최대한 몸을 엄폐하고 그림자가 사라진 곳을 따라 이동했다.
‘전투화 비슷하네.’
간첩이 전투화를 신고 다니는지는 모르겠는데, 논둑에 새겨진 발자국은 구두나 운동화 자국이 아니었다.
실망했던 가슴이 다시 빠르게 뛰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도록 신중을 기하며 발자국을 쫓아 얼마나 이동했을까.
‘하아-, 망했네.’
그림자가 사라진 숲에 낙엽이 너무 많았다.
달빛이 들지 않아 낙엽이 눌린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무턱대고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총알이라도 날아온다면 곤란하다. 아무리 격투에 자신 있다고 해도, 고도로 훈련받은 요원이 총으로 무장한 상태라면 승산을 장담할 수 없었다.
‘눈을 가리고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표적을 맞히는 놈들이다.’
숲속에 간첩이 숨어 있다는 보장도 없다.
풀벌레 소리가 청각을 방해하지만, 숲에 사람이 숨었다면 뭔가 소요가 있어야 하고 충분히 탐지가 될 터였다. 그런데 숲은 고요했다. 그 고요에 담력의 그릇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현실적으로 판단하자.’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간첩을 잡을 수 있을지 고민하며 진혁은 어둠을 따라 돌아갔다. 사방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착각에 귀를 쫑긋거리며.
도둑고양이처럼 방에 돌아가니 유진이는 곤히 잠들어 있었고, 미니 컴포넌트에서는 마이클 볼튼 노래가 흘러나왔다.
‘밤 운동만 잘했네.’
쩝-.
진혁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하고 드보크를 노려보았다.
커튼 사이로 눈만 내민 채.
‘아빠한테 망원경 사달라고 해야지.’
밤에도 잘 보이는 망원경은 비싸겠지.
두근두근-.
간첩을 앞에 두고 비싼 망원경을 가질 생각에 설레다니.
날이 갈수록 어려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