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 수호의 대운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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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제 형을 죽게 만든 원수라 여길만하거늘, 천길룡은 그저 친근한 시골 아저씨 같은 태도로 일관했다. 그 마음이 기꺼워 진혁은 넙죽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찾아온 원래 목적이 생각나 천길룡을 보았다.
형형한 눈빛 너머 이채가 담긴 맑은 눈동자. 어찌 노인의 눈빛이 아이처럼 이럴 수 있을까. 잠시 신비로운 감상에 빠졌다.
“내 하소연이나 듣자고 온 건 아닐 테고. 어린놈이 뭐가 얼마나 궁금했기에 미신쟁이를 찾아온 게냐?”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다는 눈빛, 진혁은 그제야 방문 목적을 밝혔다.
“그게······, 저한테 이상한 일이 너무 많이 생겨서요.”
천길룡은 지그시 눈을 감고 경청했다.
덕분에 진혁은 차근차근 시간순으로 사건을 설명할 수 있었다.
부동산 뚱보부터 윤성동 패거리에게 무력을 사용한 일, 아프던 허리가 갑자기 나은 일, 동생이 뱀에 물린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 않았던 일까지 모두.
진혁의 설명을 들은 천길룡이 혀를 끌끌 찼다.
“야, 인마아-.”
운을 뗀 천길룡이 시동 걸듯 두어 번 큰 숨을 쉬었다. 그 호흡을 따라 움직이는 흉곽이 특별했다. 긴 세월 잠들었던 용이 잠에서 깨어나는 듯, 묘한 긴장이 진혁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잠시 뜸을 들인 건 정말로 시동을 걸기 위함이었을까, 천길룡이 드디어 경운기처럼 투타타타 쏟아내기 시작했다.
“세상에 귀신이 어딨어 이놈아! 뭐? 갑자기 주먹을 썼어? 그럼 주먹을 갑자기 쓰지, 계획하고 쓴다더냐? 그랬으면 자객이게? 지 애미 애비 욕하는 놈을 때렸는데, 네 마음이 동해서가 아니라 귀신이 장난질이라도 쳐서 그렇게 한 것 같다는 거냐? 돈 몇 푼 때문에 칼로 찔러 죽이는 게 사람 새낀데! 부모 욕하는 놈 앞에 두고 가만히 있으면 병신이고 호로새끼지 이놈아! 내 형 죽이고 살린 부모인데 아들이란 놈이 그 정도는 해야 우리 형도 죽은 보람이 있지 않겄냐? 뭐? 뱀? 짐승이란 자고로 생명에 위협을 느끼면 쌩으로 똥도 싸고 온갖 지랄을 다 떠는 거예요! 뱀은 꼬리를 물리면 생명에 위협을 느껴요, 이 사람아. 그럼 독도 뱉고 피도 토하는 거야. 급사를 맞아 여물지 않은 알을 까는 놈도 있어! 귀신이 있다 쳐도 귀신이 뱀한테 물린 니 동생 피 빨아주고 갔을까 봐? 귀신이 그렇게 한가해 보여? 누구 죽으면 동무 생겼다고 좋아하는 게 귀신이여! 귀신이 소방수도 아닌데 누굴 살려? 뭐? 허리를 고쳐줬어? 귀신이 허준이여?”
아, 그런가? 진혁이 목을 움츠렸다. 뱀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 가만히 있는 유진이에게 독을 쏘았겠느냐는 반문은 차마 할 수 없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돌직구가 너무 매서웠다.
김은정 청소년네 놀러 갔다가 소변 보는 암소를 본 적이 있다. 촤촤촤-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줄기는 배설이라기보다 방광 대방출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천길룡이 말을 쏟아내는 모습이 그와 닮았다. 그럼에도 흐트러짐 없이 차분한 호흡과 맑은 테너의 성대를 가졌다. 복식 호흡하시나.
감탄은 잠시 접어두고.
‘그럼 뱀은 장군이 보고 놀라서 독을 뿜은 건가?’
진혁의 표정이 바보처럼 변했다. 진혁에게는 천길룡의 말이 너무나 그럴듯하게 들렸다. 과거에 너무 바보같이 살아서 정상적인 인간의 감정을 아직 갖지 못했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그럼에도 위축되거나 평정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수박 서리 때 경험한 현상의 효과인듯했다.
“허어-! 고놈 참.”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홀로 고민하는 소년을 보며 천길룡은 속에 천불이 나는 사람처럼 부채를 부쳤다.
“고민이 많아도 못 쓰는 게야, 이놈아. 세상을 모두 마음에 담으려다가는 개뿔도 못 건지고-.”
다시 투타타타 쏟아내는 천길룡의 말이 진혁의 심장에 콕콕 박혔다.
무형문화재 같은 사람이라더니, 차라리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속사포 래퍼 같잖아. 두내리 아웃사이더라 부르고 싶은 할아버지다. 무당이 아니라 기이한 문구로 짜인 비서를 읽고 구순술을 터득한 은거기인은 아닐까.
“그럼 귀신은 없는 건가요? 제 몸에 뭐가 붙었다거나-.”
“하-! 뭐여 이놈아! 고 새끼 고거. 멀쩡하게 생겨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얼굴이 시뻘게진 천길룡이 곰방대를 휘두르며 방방 뛰었다.
큭, 진혁이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제 편을 들어준 것 같아 고마웠다. 전부는 아니어도 속앓이하던 것도 털어놓았고, 나름대로 원하는 대답도 얻었다. 눈과 입가에 연한 미소가 걸렸다.
빳빳한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공손히 두 손으로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여기-.”
“돈은 지미-, 망댕이나 잊지 마 인석아! 우리 형 제상에도 몇 마리 올릴 테니.”
“예, 어르신.”
과거 부모님의 기일이 천기륭 어르신 승천일이 되었겠구나 생각하며 진혁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아무튼 찝찝해할 필요 없는 거지?’
진혁은 기분이 좋아져서 집으로 향했다. 의구심 때문에 방문했다가 뜻밖의 위로를 접한 심정이었다.
날은 덥고 매미 소리는 귀청을 때렸지만 마음만은 천국을 걸었다. 복잡하던 생각이 일시에 정리되고 찝찝한 기분도 털어낸 까닭이었다.
장군이와 함께 경치를 구경하며 산책하듯 천천히 걸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였다. 진정 열네 살 철부지가 된 듯 설레기도 했다. 이 또한 신기한 일이다.
“아침 먹고 땡- 집을 나서려는데-. 새로 산 짚신이 맘에 쏙 들어-.”
잠시 노래를 멈추고 천길룡의 집을 돌아보았다.
언덕배기 집 툇마루에서 천길룡의 시선이 느껴졌다. 꽤나 먼 거리였으나 그 눈빛을 받아내는 데에 무리가 없었다.
진혁이 한 번 더 허리 숙여 묵례하자, 천길룡이 곰방대를 내둘러 인사를 받았다.
그때, 얌전히 축 처져있던 색색깔 깃발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신기한 정경이다. 그와 동시에 진혁의 오랜 의문도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태극기는 왜 거는 걸까?’
그래도 국기라고 최상단에 걸었어.
***
펄럭이는 깃발에 천길룡의 미간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시끄럽기만 하고 손님도 없는데 깃발 다 떼 버릴까?”
천길룡은 마루 기둥에 기대 멀어지는 진혁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나이에 맞지 않게 벌써 장정이 된 모습. 장정이 뭔가. 그 옛날 단옷날마다 황소를 타던 장사보다도 단단해 보이는 놈이다.
‘설마 저놈이 제 발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
진혁과 마주 앉았을 때, 천길룡은 소년에게 압도되어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소년의 외양 때문이었다. 일부러 몸을 가리려는 사람처럼 헐렁한 긴 팔 남방셔츠를 입었으나 그 안에 숨겨진 몸을 보지 못할 리 없다.
‘뭔 수를 쓴 겐지, 고약한 힘이로세.’
그저 단단하기만 한 몸이 아니었다. 기백으로 짜여진 근육과 힘줄이 여실히 느껴졌으나 소년은 무슨 재주인지 그 대단한 힘을 예사롭게 가두고 있었다. 기예하기 짝이 없는 기운이라 여느 사람이었다면 미쳐버렸을 힘이다. 한데 소년은 숨 쉬듯 거느리니 신기라 칭함이 마땅했다.
‘돼지 오줌보 같은 놈일세.’
눈빛은 어떻고. 양기 가득 머금고 반짝이는 눈동자였다. 다재다능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가한 기운을 타고났다. 이런 이들은 재능과 달리 대개 보잘것없는 삶을 산다. 그 성정이 괴팍한 이가 많거니와, 하나에 집중하기가 여의치 않은 까닭이다. 차라리 도시에서 태어났다면 한가지라도 제대로 꽃피울 수 있을까. 그래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는 것일 터.
‘별빛 드는 집에 온갖 재주를 쥐고 태어난 관상이었는데······.’
그래서 재주를 살리지 못하고 그냥저냥 살 팔자인데. 재주는 그대로이되, 별빛은커녕 달빛도 스며들지 못하는 넉넉한 집으로 팔자가 바뀌었다. 제 부모가 살아있는 까닭이겠으나 제 몸에 깃든 힘이 범상치 않은 탓도 있겠지.
배움에 끝이 없다 하더니 신선한 연구대상을 찾은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허어-, 고새끼 고거. 나까지 죽이려고 찾아온 줄 알았네.”
100세까지 살려면 아직 18년을 더 살아야 하거늘.
곰방대에서 빨아들였던 연기를 뱉으며 천길룡이 가슴을 쓸었다.
“어찌 천기대운을 틀었나 했더니.”
몇 년째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동네의 기운이 저놈 때문에 바뀐 건 맞는데 어떻게 바꿀 수 있었는지가 의문이었다. 훌훌하게 풍기는 양기를 보니 납득이 되었다.
‘어디 보자······. 언제 적 일인고.’
천길룡은 70년도 더 된 옛 기억을 더듬었다.
*
흉살이 뻗치는 동네였다.
볕이 잘 들었으나, 밤낮으로 마을 깊숙한 곳까지 음기를 실어나르는 바닷물 때문에 기운 자체는 음습했다.
함경도에서 태어난 어린 천길룡은 형의 손에 이끌려 아주 오래전에 이 마을에 흘러들어왔다. 그의 나이 열 살도 되지 않은 때였으니 3·1 운동이 있었던 기미년이었으리라.
- “형님, 사람도 없는 곳에서 어찌 사시려 예까지 온 것입니까? 이 아우는 저 늑대 소리도, 여우 울음도 무섭습니다.”
- “멀리서 보니 터가 흉하다. 양기로 누르지 못하면 언젠가 물이 땅을 삼킬 게야.”
- “본디 땅은 물에 녹고, 물은 땅을 옮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 “이 작은 땅이 없어지는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땅이 나라가 될 수도 있고, 대륙이 될 수도 있다. 수도 없이 죽는단 말이다. 하늘의 기운이 그렇다.”
뻘물 가득한 회색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에 올랐을 때, 천길룡은 형이 지었던 비장한 표정을 잊지 못한다.
- “여기가 배꼽이구나. 우리 형제 평생의 업으로 삼을 것이다.”
약관의 천기륭이었으나 신묘한 데가 있어 토박이들이 따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천기륭은 바다와 맞닿은 산에 공동묘지를 틀게 하고 스스로 그 입구에 집을 지어 동생과 살았다.
*
‘X나게 무서웠지······.’
도깨비불에, 귀곡성에, 무덤을 파헤치는 여우의 가르릉거리는 소리까지. 담력 드센 형이 없었다면 천길룡은 미쳐버렸을 지도 모른다. 형의 등선 후 천길룡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민원을 넣어 공동묘지를 파한 것이었다. 이제 무서울 것 없으나 쫄보였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 탓이었다.
아련하게 어린 시절을 회상한 천길룡이 눈을 떴다.
개미처럼 작아진 소년의 뒷모습을 보니 어렴풋이 감이 잡혔다.
그저 어렴풋할 뿐이었다.
‘몸에 붙은 귀신은 없는데.’
마치 두 사람인 것처럼 영이 강하지 않은가.
선인으로 여기던 제 형조차 소년에게 비할 것이 아니었다.
외양에 홀려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믐날 불깡통에서 솟아오르는 달을 보며 형 천기륭이 말했다.
- “아우야, 저것 좀 보거라. 이제 우리는 수호신 놀이 관두고 등선해도 되겄다. 저 아해가 아주 제법이구나.”
가까이에서 소년을 직접 본 터라 형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였으나 천길룡은 등선할 마음이 없다.
이승이 좋다.
방정맞게 곰방대를 뻑뻑 빨던 천길룡이 뒤쪽에 대고 툴툴거렸다.
“나와 이것들아. 갔어.”
귀신이라는 것들이 쪽팔린 것도 모르고 겁먹고 숨냐.
그리 중얼거리는 천길룡의 손도 덜덜 떨렸다.
천길룡은 떨리는 곰방대를 물끄러미 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형이 사용하던 곰방대다.
‘이놈의 담뱃대가 왜 이제야 지럴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