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 기꺼운 사명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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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과 홍수정은 고기는 잡지 못하고 물놀이만 하다가 귀가했다. 한숨 푹 자고 제법 부기가 가라앉은 장군이도 함께였다.
서울 꼬맹이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전을 때리는 듯했다.
‘아이고오- 애들이랑 노는 게 제일 힘들어. 어죽 재료도 못 잡고.’
집에 먹을거리가 가득했기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빠들이 포획한 낙지를 야들하게 삶아 초장 찍어 먹는 맛이 훌륭했다. 여름에만 맛볼 수 있는 싱싱한 낙지였다. 닭백숙도 있었지만 낙지를 모두 먹은 후에나 손을 댈 기세였다.
늘 그렇듯 식사 자리의 주인공은 유진이였다. 삶은 낙지를 통째로 들고 뜯어먹는 야성미에 모두가 웃음꽃을 피웠다.
“맛있어요.”
유진이는 홍수정과 어울리더니 특유의 말투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역시 인간은 학습과 적응의 동물인가. 짧은 시간에 보인 놀라운 변화였다.
‘유진이가 관심을 독차지하니 너무 편해.’
이것저것 묻지 않으니 이 얼마나 홀가분한가.
방학 때마다 꿈이 뭔지 물어보던 홍기준조차 유진이를 보며 아빠 미소만 짓는다.
“오빠도 맛있지요?”
“으응-.”
다만 유진이의 관심은 오빠를 향해 있었고, 말투도 아직 완전히 바뀌지는 않은 듯했다. 그건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니 진혁은 이 정도로도 감지덕지했다.
“크어어-, 시원하다!”
손광연이 서울 사나이다운 감탄을 토했다.
해장하듯 연신 국물을 들이켜는 아빠를 보며 진혁도 연포탕 국물을 한 모금 목으로 넘겼다.
커어-.
‘뭘 넣으신 거지?’
낙지를 건진 국물에 들어간 재료를 살폈다. 엄마가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궁금했다.
박, 양파, 다진 마늘, 안 다진 마늘, 무, 배추, 미나리, 쑥갓······.
‘색깔이 이런 건 간장 때문인가? 아니면 낙지 먹물인가.’
아무튼 식도와 명치를 훑고 들어가는 국물이 일품이었다. 맵지도 않은데 한 모금 마신 것만으로 땀구멍이 열리며 몸의 열기가 빠져나갔다.
다른 반찬은 깍두기와 김치뿐인데, 밥을 말아 다섯 공기나 먹었다.
평소에도 소식가였으나 몸이 커진 후 식욕이 들불처럼 일어난 탓이다.
네가 무슨 소식이냐 따질 사람이 많겠으나 진혁으로서도 할 말은 있다.
- “지넥이는 월매나 클라구 소만큼 먹는 겨?”
척척박사 조일헌이 사사로이 건넨 한마디 말에 진혁도 수긍하고 말았다. 명징한 문장으로 직관성을 담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니.
*
“수정아, 아빠가 많이 잡아 올게!”
저녁식사를 마친 홍기준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빠들은 메기를 잡아 오겠다며 낚싯대를 어깨에 걸치고 어둑해지는 수로로 향했다. 낮에 잡은 닭 내장을 따로 빼두기에 삶아서 장군이 주려나 싶었는데, 메기 낚시에 미끼로 쓰려고 그런 모양이었다. 닭내장을 적당히 잘라 양쪽에 매듭을 지으면 훌륭한 미끼가 된다고 조일헌이 알려준 터였다.
‘저 아빠들이 과연 메기를 잡을 수 있을까?’
진혁은 잡지 못한다는 데에 마음속으로 500원을 걸었다.
아마 수다 떠느라 물고기도 모두 쫓을 테지.
‘황소개구리 무섭다고 일찍 오실지도 몰라.’
엄마들은 옥상에 마련된 한유영의 정원으로 향했다. 방학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며 유세라가 뜨개질을 가르쳐달라고 조른 까닭이다.
어른들이 각각 짝을 지어 시간을 보내니 아이들도 알아서 어울렸다.
홍수정은 거실에서 그림책을 펴고 유진이에게 말을 가르쳤다.
평상에 앉아 포만감을 즐기려니 거실 방충망 너머로 두 꼬맹이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비두디.”
“비둘기.”
“보뚜아.”
“복숭아.”
“고야이.”
“고양이.”
어째 유진이가 더 뛰어난 거 같은데.
진혁은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미간에 조심스레 힘이 들어갔다.
최근 들어 불가사의한 일의 연속, 그러려니 한다지만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왜 내 주변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허리 통증이 그러했고, 뱀 습격 사건이 그랬다.
이전 생은 요행은커녕 우연조차 없는 황무지 같은 삶이었는데. 지금은 온갖 기연이 나타나 자신을 돕는 듯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기연은 실체가 없었다.
‘당연히 의심할 사람은 나뿐이다.’
진혁이 알기로 가장 이상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는 자신뿐이었으므로.
터놓을 사람도 없고, 혼자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넘길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잡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찝찝했다.
‘망할 놈의 질풍노도를 정통으로 맞았어.’
뇌 호흡, 단전 호흡. 뭐라 부르든 관계없다.
명상에 들어간 진혁은 머리부터 폐, 단전까지 깨끗이 비워냈다.
과거로 돌아온 후 평정심을 유지하고 컨디션을 관리하기 위해 사용하던 방법이다. 그렇게 하면 흐릿하던 기억도 곧잘 떠올랐고, 제 안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기분도 들었다.
으르르-.
장군이가 경고성을 날리기에 누가 오나 싶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나 작은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장군이, 조용.”
처음에는, 죽어서 천국에 왔노라 여겼다. 하루 만에 그게 아님을 알았다. 그 후의 삶은 내내 갈구했던 가족과의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이었다. 품에 들어온 파랑새를 꼭 끌어안고 몇 년을 살았다.
남에게 위해를 가할 마음이 없었는데도 뜻하지 않게 무력을 사용하게 되었을 때, 분노가 마그마처럼 심장 언저리에 똬리를 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가족, 내 스위치.’
분명한 사실이다. 진혁이 품은 마그마는 제 가족을 향한 아주 작은 돌멩이도 용서치 않겠다는 듯, 돌팔매의 원흉을 집어삼키려 끓어올랐다.
으르르르-.
장군이가 또 시작이다. 정말 비협조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늘 신기해하던 터였다. 장군이뿐 아니라 다른 집 개들도 괜히 혼자 으르렁거리지 않던가.
“아잇! 훼방꾼!”
막혔던 숨을 탁 내쉬며 진혁이 눈을 떴다. 어두웠던 시야가 환해지고 그와 동시에 장군이의 으르렁거림도 멈췄다.
“넌 인마, 왜 난리냐?”
그렇게 쏘아붙였다가 장군이에게 다시 미안해졌다. 미우나 고우나 가장 가까이에서 진혁을 지켜주는 친구 아닌가. 부기가 제법 가라앉은 장군이의 머리를 장난스레 비볐다.
“우쭈쭈-.”
이랬다가, 저랬다가.
진혁 스스로도 놀랄 심경 변화였다.
헤헤헥-.
장군이를 쓰다듬고 털을 빗기는 진혁의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졌다.
‘사춘기가 아니라 갱년기 아녀?’
전생의 나이부터 셈하면 갱년기 폭풍을 정통으로 맞았다 해도 자연스러울 터.
인간으로서 이치에 따라 미루어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은 많지 않았다.
‘요즘 몸이 편해서 그런가.’
그래서 잡념이 떠나질 않는 거다. 갱년기에는 운동을 해야 한다고 들었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줄넘기를 잡았다.
커진 키 때문에 줄을 조절하자니 현관문이 열렸다. 꼬맹이들이 재잘거리며 나타났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오빠.”
“오빠.”
“투박 터리하어 가자.”
“수박 해요. 서리 가요.”
그거 불법인데. 진혁이 말을 삼켰다.
저 사특한 서울 도장군이 순진한 내 동생 유진이를 꼬드겼구나. 하나 거절하면 서운해하겠지. 그리고 수정이에게 잘해주기로 결심한 터였다.
진혁은 어쩔 수 없이 마당을 벗어나 개울가로 향했다.
‘방학 때는 하루 한 번은 꼭 개울에 가네.’
오늘처럼 하루에 두 번 가는 날도 있고.
초등학교 다닐 때는 매일 달리던 길인데 중학교 진학 후에는 물놀이를 하거나 물고기를 잡을 때만 이용했다.
어둡고 민가에서 제법 떨어진 거리.
가로등도 없이 짤짤짤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리는 곳.
나쁜 짓을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휘영청 밝은 달이 떠서 네 개의 생명과 그림자가 너무 잘 보이지만. 뭐, 서리하는 기분을 내는 게 중요하겠지.
아무거나 하나 따려던 진혁은 뒤에서 들려온 주문에 엉거주춤 멈춰 섰다.
“오빠, 진따 도둑놈처엄-.”
“오빠, 진짜처럼요. 도둑이요.”
진혁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없다.
‘아이고 머리야.’
며칠간 은근하게 지끈거리던 차에 내적 두통도 진혁을 덮쳤다.
그래도 꼬맹이들이 리얼리티 서리를 원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
아이들의 추억은 오빠가 책임지고 만들어줘야 하니까.
‘그렇다면 기꺼이 에프엠 포복을 보여주마.’
내가 포복으로 산도 넘었지!
예비역 부심은 때와 장소, 상대를 가리지 않고 고개를 쳐드는 것이었다.
진혁은 바짝 엎드려 수박밭 고랑으로 들어갔다. 완벽한 낮은 포복 자세였다. 우거진 수박 넝쿨이 진혁의 몸을 완벽하게 가렸다.
홍수정과 유진이도, 장군이도 진혁을 따라 기었다. 요령 없는 두 꼬맹이는 엉덩이를 한껏 쳐든 자세였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 숏다리인 장군이도 손유진을 따라 빵뎅이를 쳐들었다.
옷과 털에 흙이 묻거나 말거나였다. 시골에서는 그런 거 걱정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이상하게 두근거리네.’
나쁜 짓이라 그런 걸까. 심장이 허락 없이 쫄깃해졌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두 꼬맹이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얼마나 떨리면 가슴 뛰는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올까. 진혁은 모험에 심취한 아이들 심정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모기가 목덜미와 팔, 발목, 귀까지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하지만 꾹 참았다. 모기 신경 쓰면 시골에서 못 산다.
잘 익어 꼭지가 돌아간 수박을 하나 땄다.
“텅공!”
“성공!”
꼬맹이들이 만세를 불렀다.
진지한 표정의 진혁이 검지를 세워 입에 댔다.
야, 조용히 해. 창피해 죽겠네 진짜.
이게 뭐라고 저리도 신나 할까. 아이들에게는 이마저도 모험으로 기억되려나.
개울로 나와 수박을 씻고 자리를 잡으니 꼬마 공범들이 진혁 앞에 빙 둘러앉았다. 얼굴과 손, 팔에 흙과 검불이 붙어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거지 왕초가 수박을 가격했다.
푹- 쩌억-! 손날을 세워 찌르니 수박에 박혔다. 수박에 손날을 찔러 박지 못하면 시골에서 수박 서리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수박을 가르고, 빨갛게 잘 익은 수박을 여러 조각으로 갈라 꼬맹이들과 장군이에게 분배했다.
훕쪕쪕-처처처첩-.
“아-, 마이따.”
“아-, 맛있다.”
헤헤헥-.
얼굴이 번들거리도록 과즙을 묻혀가며 수박을 먹는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진혁은 자괴감이 들었다. 회귀자씩이나 되는 놈이 평범한 삶을 꿈꾸는 건 그렇다 쳐도, 단련된 신체를 꼬맹이들과 수박 서리하는 데에 쓰고 자빠졌다니.
그뿐 아니었다.
‘자기네 밭 수박을 서리하는 인간이 나 말고 또 있을까.’
씁쓸히 한숨을 내쉬고 수박을 한 조각 떼어 입에 넣었다.
‘오오-.’
저세상의 당도였다.
진혁도 수박에 얼굴을 묻었다.
‘으흐흐흑-. 너무 맛있어.’
보름이 가까이 왔는지 상현달보다 불룩한 파란 달이 떴다.
수박 도둑들도 배가 불룩해져 갔다. 파란 달 아래, 입에서 수박 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모습이 회식하는 흡혈귀를 닮았다.
내년엔 장군이 화장실에 수박이 자랄 테지.
진혁은 입술에 묻은 단물을 핥으며 밝은 달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쩜 저렇게 눈이 부실까.’
달은 음기를 상징한다고 하던데 내 몸에 정말 귀신이라도 붙었다면 이런 날 더 난리를 치지 않을까. 그래서 요 며칠 우연히 때가 맞아 내내 이상한 일을 겪은 건 아닐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그 생각을 하는 자신을 보며 진지하게 갱년기를 의심했다.
몽환적인 달빛이었다.
달빛을 받아 부드러운 개울의 윤슬이 비범한 감흥을 북돋웠다.
전설적 존재가 두른 망토처럼 눈을 시리게 만든다.
바로 옆에서 흐르는 개울 소리가 멀리 들리고 꼬맹이들의 재잘거림도 잦아들었다. 작은 모기의 간미한 날갯짓까지 진혁의 시력 안에 갇혔다.
파르라니 서늘한 빛이 스미는 것을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안개에 부서진 청월의 광휘를 닮았다. 달빛이 정수리를 거쳐 두개골을 뚫고 심장으로, 다시 아랫배로 꽂히며 감각을 열어젖혔다.
진혁이 턱관절에 힘을 주었다.
앳된 외모만 아니라면 누가 봐도 장성한 청년의 자태였다.
가슴에 손을 얹지 않아도 단단한 심장의 박력이 느껴졌다.
시퍼런 정념의 불꽃이 일었다.
그 많던 생각이 한 점으로 수렴되어 날카롭게 벼려졌다.
잡념이 걷히고 동요가 가라앉으니 마음이 고요했다.
‘새롭다. 몸도, 마음도.’
진혁의 뇌중에 번개가 쳤다.
이 순간 잊힌 역사서를 넘겨 비사를 확인하듯, 유일한 존재가 떠올랐다. 동네 어른들이 나누는 대화에 종종 등장하던 인물이다.
소매로 입가를 스윽 닦아내는 진혁의 눈이 빛났다.
‘그 할아버지를 한 번 뵈어야겠다.’
예사롭지 않은 현상, 호르몬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괴팍하다 할 만한 심리와 그를 비웃듯 갑작스레 찾아온 정온.
괴사에 임하여 유일하게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선녀바위에서 할머니도 언급했던 살아있는 전설을 이제야 되새겼다.
무당 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