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62화 (62/338)

# 62 < 기꺼운 사명 >

“겨누와 딩녀는 띠럴 띨썩- 아오-. 티이럴- 띨-. 아 딘따.”

쩝쩝-.

유진이에게 책을 읽어주던 홍수정이 혀로 잇몸을 훑었다.

홍수정은 한 움큼 잘 모아둔 이빨을 시골에 내려오기 무섭게 흙집 지붕에 던졌다. 그렇게 하면 금방 새 이빨이 나온다고 외할아버지가 알려주셨다. 그런데 아직 제비가 새 이빨을 가져오지 않는다. 제비는 새끼를 두 번 키우는데, 지금은 두 번째로 부화한 새끼들 먹이느라 바쁘다고 했다. 엄마 아빠도 매일 바쁘고, 수정이에게 매일 뭘 먹이던데. 나는 제비 새끼인가. 내가 제비 새끼면 엄마랑 아빠도 제비고, 아빠는 강남 제비여서 엄마를 꼬드긴 건가. 그런데 제비는 새끼를 1년에 두 번 깐다는데, 왜 엄마 아빠는 나를 한 번만 낳았을까.

제 엄마가 그렇듯, 서울 꼬맹이도 깊은 의식의 흐름 속으로 빠져들었다.

몽롱한 눈빛으로 의식의 늪을 허우적거리는 홍수정을 유진이가 건져 올렸다.

“에헤-. 칠월칠석 여기 했지요?”

“아, 마따-.”

홍수정은 유진이가 짚은 곳을 눈으로 찾았다.

현재 치아 배열로는 발음하기 어려운 대목이었다.

홍수정은 제 녀석이 뭔가 말할 때마다 아빠들이 배를 잡고, 눈물을 흘리며 웃는 심정도 이해한다. 제가 들어도 발음이 우습게 들렸으니. 그런데 세상 물정 모를 이 손유진도 슬쩍슬쩍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게 영 마뜩잖다. 2학년 언니가 책을 읽어주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할 일이지 어디 버릇없이.

그러던 홍수정의 눈에 구원자가 들어왔다.

거인이 우수에 찬 눈으로 노을에 기대 있었다.

‘히이-.’

아빠가 시킨 대로 일찌감치 침 발라둔 믿을 구석.

뭔가 부탁하면 한 번의 거절이나 고민 없이 흔쾌히 들어주는 거인이었다. 사촌 오빠나 언니들은 홍수정을 귀찮게 여기는데, 손진혁은 홍수정이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경호원처럼 보호한다. 키도 아빠보다 크고, 얼굴도 외삼촌보다 잘 생겼다.

‘이제 유명해지고 돈만 많이 벌면 되는데.’

엄마와 한유영 아줌마가 하는 얘기를 들어 보니 이 동네에서 살려면 못해도 5천만 원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아이들은 벌 수 없는 큰돈이라고 했다. 홍수정은 5백 원도 없다. 부잣집 딸이 왜 돈이 없느냐, 모두 헤프게 소비한 거 아니냐 할 수 있지만 홍수정은 떳떳하다. 홍수정이 돈이 없는 건, 여기저기서 용돈을 많이 주지만 엄마가 가져간 후로 통 볼 수가 없는 탓이다. 유세라 엄마는 지혜로운 소비를 할 줄 알아야 한다며 홍수정에게 천 원 이상 주지 않는다. 다른 친구들은 지갑에 만 원짜리도 있던데. 더 달라고 조를 때마다 이 엄마는 경제관념이니 회계 관리니 하는 어려운 말로 홍수정의 혼을 쏙 빼는 수법을 썼다.

또 홀로 생각이 많아졌다.

홍수정은 고개를 강하게 저어 정신을 차린 후 거인을 불렀다.

“오빠-.”

개집만 노려보던 진혁은 홍수정이 부르는 소리에 돌아섰다.

이빨 빠진 서울 도장구 꼬맹이가 진혁의 가슴팍에 책을 들이밀었다.

책 읽어 달라는 의사표시였다.

노을에 붉게 익은 거인이 웃었다. 미풍처럼 부드러웠다.

“그래.”

소파에 앉아 책을 펴자, 두 꼬맹이가 달라붙었다.

진혁은 책을 읽어주며 잠시나마 장군이 때문에 심란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 그렇게 까막까치가 오작교를 만들었어요. 견우와 직녀는, 까막까치 덕분에 오작교에서 만나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에오-.”

“오빠, 오빠. 겨우앙 지녀느 스퍼께따 그티?”

“견우, 직녀 슬펐지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리 말하고 싶었지만 진혁은 동생들에게 친절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른은 어른들끼리, 꼬맹이들은 꼬맹이들끼리, 개는 개들끼리. 각자 어울리는데 진혁 홀로 주변인처럼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탓이다. 혼자가 편하니 아쉬울 건 없었지만, 소속감은 별개의 감정이니까.

“슬프고 그리웠겠지만, 다시 만날 수 있는 걸 아니까 어른스럽게 참지 않았을까?”

“음-.”

“음-.”

어려웠나 보다.

홍수정도, 유진이도 괜스레 머리를 긁었다.

“마음이 아파도 버티고 이겨내면 아픈 만큼 성장하는 거래. 그러니까 견우와 직녀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어른스러워져서 슬프지만은 않았을 거라는 말이지.”

“텅장통잉가?”

“성장통이지요?”

역시 아이들은 기억력이 좋다. 유세라가 하는 말을 들어두었다가 바로 사용하지 않나. 그런데 너무 아무 말이나 가져다 붙이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 말을 여기에 대입할 수 있을까, 속으로는 갸웃했지만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하며.

“그럴 수도 있겠다.”

진혁은 마지막 질문이었기를 바라며 미소를 유지했다.

그러나 유진이는 의문이 남은 모양이었다.

“오작교? 오작교 머지요?”

유진이가 까맣고 큰 눈을 모로 떴다.

진혁은 어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유진이 눈높이에 맞추려면 무슨 답을 내놓는 게 좋을까.

음, 까막까치가 만든 다리라고 읽어줬는데도 물어본다는 건 용도를 묻는 걸까, 건축 양식이나 외관 디자인을 묻는 걸까. 혹시 은유가 내포한 함축적인 의미를 묻는 건 아닐까. 유진이는 평범하지 않은 아기니까 별자리 관련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견우성과 직녀성을 잇는 은하 브릿지라고 설명하는 게 적절하려나.

손유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울 언니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고. 뭘 물으면 한참을 고민한다. 아빠는 바로바로 알려주는데 말이다.

손유진은 고개를 돌려 대국 중인 아빠를 찾았다. 쯥쯥거리며 포도를 먹는 아빠에게 곧장 달려갔다.

“아빠아-, 오작교 무에요?”

투투투-. 포도씨를 뱉은 아빠가 바둑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인간지능을 능가하는 엘리트답게 빠른 답변이었다.

“모텔. 읍내 거쳐 범산시 가다보면 오작교 모텔 있잖아.”

아빠는 안 가봐서 모르겠는데 시설은 괜찮다더라. 엘리베이터도 있대. 손광연은 입으로 포도씨를 발라내느라 오물거리며 중얼거렸다.

‘저 아빠가 진짜······.’

*

이상한 소리를 하는 아빠 때문에 진혁은 현기증이 났다.

동생들을 보호해야 하는 오빠의 숙명, 유진이와 홍수정을 데리고 마당으로 대피했다.

“이렇게 잡으면 되니?”

“응. 그어케.”

고무줄 놀이를 하겠다며 홍수정이 가방에서 까만 고무줄을 꺼내왔다. 서울에서부터 챙겨온 모양이다. 한쪽을 평상 다리에 걸고 한쪽은 진혁이 적당히 벌려 잡고 쪼그려 앉았다.

‘얘 이런 거 안 해봤다고 했었는데.’

술이 한 잔 들어가면 홍수정 전무는 신세 한탄 비슷한 걸 했는데, 어린 시절 친구들과 논 기억이 너무 없다는 내용도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친구들과 교분을 쌓을 틈 없이 학원을 다니고 과외를 받느라 그랬다고. 그래서 놀이의 추억이 없다며 속상해했다.

“캔타뜨 외딴 시골띱에서- 어느 날 잠을 다고 이뜰 때-.”

그런데 지금은 유진이나 엄마와 손뼉치기 놀이를 하고 고무줄놀이도 한다. 함께 불러주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신나게 노래 부르며 사뿐사뿐 잘도 넘는다.

‘엉뚱한 데서 세상 바뀐 걸 실감하네.’

논에서 얼음도 지치고, 눈썰매도 탔지. 여름에는 물놀이도 하고 숲속 모험도 다녔다. 생각해보니 진혁은 이미 홍수정의 인생에 많은 추억을 그려 넣고 있었다.

은연중 책임감과 함께 신선한 사고가 뇌리에 들어섰다.

이미 다른 세상을 사는데, 평범 타령하며 역사가 어쩌고저쩌고 더 고민할 필요가 없는 거 아닐까.

한때 걱정하고 고민했다.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비틀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겁쟁이여서 그런 건 아니었다.

진혁은 혹시라도 천벌이나 신벌 따위가 내려 가족이 해가 입을까 두려웠다. 하찮은 생명체의 인간적인 고뇌라 할 수 있으나 저로 인해 가족이 다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나 혼자였으면 별짓을 다하고 다녔겠지.’

행복의 의미를 몰랐기에, 세상을 망하게 만들 계획을 세워 시행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홀로 이기적으로 살 수만은 없는 처지.

가족에 의한 행복이란, 책임이라는 무거운 족쇄를 채웠다.

모종의 이유로 하늘이 내린 벌이라 해도 달가운 천형이었다.

진혁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으르르-! 왈!

꺼엉-! 깨이잉-!

이 집에서는 볼 수 없는 고무줄놀이가 궁금했을까. 장군이가 집에서 나왔다가 누렁이 목을 물었다. 누렁이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 수작을 부린 탓인데, 역시 명견 장군이는 방심하지 않고 있었다.

‘장군이 너도 참 어지간허다.’

진혁은 고무줄을 넘는 홍수정에게 눈길을 돌렸다. 개의 일은 개들끼리 해결하라는 의도였다.

“오드는-, 오드는- 어떤 나라까-. 하얀 눈나라일까- 헥헥-.”

헐떡이는 걸 보니 꼬맹이는 잠시 쉬어도 될 것 같았다.

누렁이가 죽기 전에 최미경 청소년네 집에 데려다주는 게 좋겠다.

“머고도 험한 모허메 길- 헥헥.”

강아지 보고 싶은데, 장군이는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아무래도 물 건너간 느낌이다. 누렁이는 개밥 셔틀로 지내는 편이 좋겠다는 판단이 섰다.

‘자고로 영웅에게는 그에 맞는 짝이 있는 법인가.’

용감해야 한다고도 했다. 홍수정처럼. 그럴듯한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스스로 어처구니없어 진혁은 목을 움츠렸다.

에휴-.

어쨌든 장군이가 안타까워 한숨이 나왔다.

‘세상에나. 연애도 않고 사는 놈이 우리 집에 있을 줄이야.’

못난 놈.

진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쩐 일인지 고개 젓는 시간은 길었으며, 표정은 슬프기 짝이 없었다.

***

누렁이를 무사히 데려다 주고 평온한 밤을 보냈다.

하나 진혁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오빠 더수지 가다-.”

“저수지 가자고?”

“응!”

입을 뻥끗할 때마다 웃는 아빠들이 미워서 홍수정은 말을 아꼈다. 홍수정이 진혁의 코앞에 책을 디밀었다. 탐구생활이었는데 갈대를 채집해 제출하라는 숙제가 눈에 들어왔다.

참, 방학숙제로 별게 다 있다.

진혁도 지난 겨울방학 때 네 종류나 되는 나무의 겨울눈을 수집했다.

“그래.”

“히이-.”

역시 오빠가 최고다.

위아래 앞니가 몽땅 실종된 홍수정이 히죽 웃었다.

진혁은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웃음을 참았다.

‘귀여워.’

다른 친구들은 전자오락실에 다니고 땡볕에 농구도 할 텐데. 진혁은 꼬맹이 둘과 발바리 한 마리를 달고 숲을 지나 논길을 걸어 저수지로 향했다.

“내가, 내가-.”

직접 갈대를 자르겠다며 홍수정이 발을 동동 굴렀다. 자그마한 가위를 들고 설치는 홍수정의 허리를 안고 뒤에서 버텼다. 타이타닉도 아니고 이 무슨······.

그러면서도 고개를 돌려 유진이를 찾았다. 장군이가 근처에 있으니 안심이지만 저수지와 논 근처에는 뱀이 많다.

‘풀이 너무 많네.’

본명 대신 꽃뱀이라는 예쁜 별칭으로도 불리며 독이 없는 뱀이라는 오해를 사는 녀석도 있는데, 진혁으로서는 가장 경계하는 놈이었다. 논둑 등 풀숲에 은신하고, 낮에 활동하는 녀석이라 자주 눈에 띄는 까닭이다.

‘꼬맹이들 안전은 내가 책임져야지.’

유혈목이. 몸통은 대체로 얼룩덜룩한 풀색에 목 부근과 몸통 군데군데 주황색에 가까운 붉은색을 띤다. 유혈목이는 다른 독사들처럼 독니가 앞에 있지 않다. 입 안쪽 어금니에서 내출혈을 일으키고 쇼크를 유발하는 독을 분비하는데, 우리나라에 사는 독사 가운데 가장 독성이 강하다는 까치살모사보다 더 위험하다는 견해도 있다.

‘일본 중학생이었나 초등학생이었나.’

진혁은 유혈목이가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한 사례를 기억한다.

유혈목이도 엄연한 독사, 아이들이 어금니에 물린다면 짧은 시간에 죽음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시골에서 그걸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진혁도 군 복무 중에야 그런 지식을 접했고.

“오빠 파디 안 닿아.”

진혁은 어쩔 수 없이 홍수정을 허리를 감았던 팔을 풀고 바지춤을 잡았다. 본의 아니게 팬티까지 같이 잡은 탓에 몽고점이 보였다. 그러나 진혁도, 홍수정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진혁은 팔에 힘주는 일에, 홍수정은 갈대를 자르는 일에. 각자 할 일에 집중하는 프로였다.

으르르-.

괜히 뱀 생각을 해서였을까.

장군이의 경고성이 들려 진혁은 마음이 급해졌다.

앞쪽에서 싹둑- 소리와 함께 갈대를 자르는 소리가 들릴 때였다.

“꺄아아아아-.”

뒤쪽에서 유진이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급히 시선을 돌린 진혁의 눈에 주저앉은 유진이가 보였다.

유진이는 논둑에 핀 꽃을 꺾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잠시 후 진혁의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크르르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장군이가 1미터가 넘는 뱀의 꼬리를 물고 좌우로 거칠게 흔들고 있었다.

유혈목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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