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 성장통 (4) >
집 안에서 아이들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떼떼떼- 아팀 바담 탄 바다메- 우고 가는 저 기더기-.”
“에헤헤-.”
홍수정이 유진이와 손뼉치기 놀이를 하는 소리였다. 혀 짧은 소리를 할 때마다 박장대소하는 아빠들이 보이지 않아 쎄쎄쎄 노래도 자신 있게 불렀다.
진혁은 웃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으나, 제멋대로 벌렁거리는 콧구멍은 어쩔 수 없었다.
크읍-!
‘위험했다.’
휘유우-.
집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참았던 웃음을 긴 숨으로 내보냈다.
진혁은 아빠들 해장을 위한 수박화채를 평상에 대령했다. 꿀에 재었던 수박에 꿀물을 붓고 실백자를 띄운 것인데, 홍기준이 특히 선호하는 간식이었다. 유세라에게서는 절대 얻어먹을 수 없는 음식이라며.
그건 그렇고.
긴장감 없이 판돈만 컸던 내기는 진혁의 승리로 싱겁게 끝났다.
“그워어어-, 속 풀린다!”
평상에서 수박화채를 들이킨 홍기준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진혁을 보았다.
“아저씨한테 맡겨주면 불려줄게.”
“아빠가 허락하시면요.”
“허락하고 자시고 할 게 어딨어? 이제 네 돈이니까 진혁이가 결정해.”
아빠는 재산이 얼마나 많기에 중학생 아들에게 3천만 원이라는 거금의 결정권을 넘기는 걸까.
어차피 진혁이 투입한 돈은 백만 원.
아빠만 2천만 원 가까이 쓰시는 셈이다.
이건 불공평하다.
“저는 판돈도 별로-.”
“아저씨가 천만 원 더 보탠다.”
“잘됐네. 그럼 진혁이 용돈도 그대로 둬.”
아이고.
졸지에 두 아빠에게서 2천만 원씩 삥뜯은 꼴이 되었다.
고급 세단 두 대를 살 수 있는 돈을 중학생에게 선뜻 내놓는다니, 이게 정상적인 세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인가.
부자들이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결국 내기는 진혁에게 돈을 주기 위한 핑계라도 된단 말인가.
그럴 명분이 없을 텐데?
“아빠가 고마워서 그래.”
“아저씨도.”
뭐가 고맙다는 건지 몰라 어물어물하던 진혁은 결국 그러시라고 했다.
어차피 돈 있는 아저씨들이 재미로 그러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게 속 편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돈에 관심도 없다.
“어떻게 불리실 거예요?”
궁금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설마 세인전자나 대정전자 주식을 사겠다는 건 아니겠지.
2005년에 사서 2020년에 파는 게 가장 좋을 텐데. 아, 이번에는 진혁이 그룹에 없으니 주가가 달라지려나.
“맡겨 둬. 이건 아저씨도 비밀이야.”
홍기준이 눈을 찡긋했다.
왜 남자들끼리 윙크란 말인가.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마그네슘 부족한 사람처럼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하는 꼴이라니.
아무튼 자기들 돈으로 알아서 불린다는데, 진혁도 권리를 주장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아 고개만 끄덕였다.
“진혁아, 근데 저건 무슨 나무니?”
홍기준이 가리킨 것은 마당과 밭 사이 고랑, 키는 작지만 제법 큰 그늘을 만드는 나무였다. 그 밑에 장군이가 구렁이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도토리나무요.”
“좀 생뚱맞지 않니?”
그러게요. 진혁이 중얼거렸다.
저곳에 자리 잡은 건 2년이 넘었지만 그러려니 넘어갔다. 그러려니 하는 게 자연 아니던가.
도토리나무답지 않게 원줄기는 굵고 짧았는데 이파리는 또 무지막지하게 넓었다. 양분 많은 땅에서 자란 덕인지 이파리 색상도 거무죽죽한 초록색이었다.
“왜 저기에 있을까······.”
“장마 때 떠내려왔나?”
쓸데없는 의문에 탐구욕을 불태우는 건 연령을 불문하고 남자 고유의 습성인 듯했다. 진혁은 제외하고.
두 아빠가 서로 경쟁하듯 가설을 세우기 시작했다.
“외계인이 심은 거 아닐까?”
“도토리에 발 달린 거 아녀?”
외계인 파종설, 도토리 이족보행설이 나왔을 때는 진혁도 그러려니 했다.
외계인까지는 진혁도 그럴싸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어쩌면 도토리는 공중에서 그냥 생기는 거 아닐까? 원소결합 같은 거 말야.”
“우리 장군이가 물어다 심은 건지도 몰러. 저놈이 주둥이로 땅을 기가 막히게 파거든.”
두 아저씨가 도토리 자연발생설, 장군이 농사견설을 주창했을 때는 하늘만 올려다봤다.
비나 와라.
그때, 구세주가 등장했다.
“진혁 아배- 식전부텀 바깥이서 뭐 헌댜? 아이쿠쿠, 서울 사장님 오셨구먼.”
“하하하. 안녕하셨습니까, 최 사장님.”
홍기준이 최장환과 함께 온 동행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살폈다.
진돗개 누렁이였다.
으르르-.
장군이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나지막이 경고성을 날렸다.
“장군이는 인기도 웁쓸 텐디 우리 황구랑 짝지어줄라구 왔지. 암내가 나서 우리 황구가 미쳐 날뛰더라고.”
최장환이 벙글벙글 사람 좋은 웃음을 던졌다.
대개 주민들은 인연이 되는 반려견을 들이지만, 경비견 목적으로 마당에 묶어두는 개는 대부분 대형견을 택했다. 대형은 못되더라도 중형견 이상을 선호한다. 최미경네 진돗개 황구가 그랬고, 이재영네 도사견 도꾸, 육성찬네 이상한 믹스견 메리 등, 일일이 언급하기 어려울 만큼 경비견은 대형견이 주류였다.
뭐, 다 아는 얘기다.
장군이는 귀가 크고 털이 긴 전형적인 발바리다. 이런 발바리에게서 강아지를 얻으려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일부러 짝짓기를 시키려는 이웃이 없었다. 그래서 시골 발바리들은 묶이지 않고 자유연애를 했다.
그런데 최장환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장군이한테 집적대는 놈들 많던데.’
장군이가 발바리여서, 인기가 없어서 강아지를 못 낳는 게 아니다. 동네 발바리도, 떠돌이 개도, 목줄 풀린 대형견도 장군이에게 성가시게 굴다가 피를 흘리며 줄행랑을 놓았다. 장군이와 항상 붙어있다시피 한 진혁이니 모를 리 없다.
진혁은 내심 콧방귀를 뀌며 누렁이를 살폈다.
꼬리에도, 목에도, 귀에도 털이 뭉텅이로 빠졌다. 이빨 자국도 선명하다. 용맹하고 날랜 진돗개인데도 말이다. 예리한 안목에 의하면 저건 장군이 소행이 확실하다.
장군이는 진혁이 챙겨주는 밥 외에도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남의 집 개밥을 빼앗아 먹는다. 훔쳐먹는 게 아니라 원주인을 겁박하고 두들겨 패서 강탈했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싸워 쟁취하던 것도 어느새 상납으로 바뀌었다. 장군이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나면, 개들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장군이는 그렇게 두내리를 평정했다.
사자라고 해도 믿겠다던 수의사 박부로의 안목이 놀라울 따름이다.
누렁이 몸에 난 상처도 개밥과 관련 있을 것이다.
가장 가까이 사니 장군이의 방문을 가장 많이 받은 녀석이 누렁이일 터. 제 밥을 뺏어 먹는 장군이에게 집적대다 혼쭐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장군이는 대장견이야. 여왕이라고.’
작고 예쁜 걸 좋아하는 진혁이기에 은근히 강아지를 기대했었다. 한데 장군이는 연애보다 진혁과 뛰어노는 데에 더 애착을 보였다. 하여, 진혁은 강아지는 되었으니 장군이 좋을 대로 살기를 바랐다. 자유롭게.
끼잉-.
진혁은 내심 장군이가 자존심을 세우길 바랐다. 대장이니까.
그러나 누렁이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경계하던 장군이는 최장환이 다가가자 꼬리를 말고 뒷걸음질했다.
‘동네 개들은 최 씨 아저씨를 무서워하지.’
조일헌에게 듣기로, 최장환에게서 나는 피 냄새가 그 원인이라고 했다. 마을 잔치 때마다 솔선수범해 닭이나 돼지, 소를 손질하니 그 냄새가 밴 탓이라는 말이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 용감한 장군이마저 꼬리를 내리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진혁은 제집으로 들어가 낑낑거리는 장군이를 보며 속에 피눈물이 났다. 차라리 짖고 싸웠으면 좋겠는데 저렇게 약한 모습은 처음이다.
장군이는 도움을 청하는 듯 큰 눈을 굴려 손광연과 진혁을 보았다.
참지 못한 진혁이 나서려 할 때였다.
“형님, 제가 채울게요.”
손광연이 최장환에게서 목줄을 넘겨 받았다.
무슨 생각인지 아들에게 씨익 웃어 보이면서였다.
“우리 장군이 착하지? 이리 와. 쭈쭈쭈-.”
그래도 주인이라고, 장군이는 애처롭게 두리번거리며 집 밖으로 나왔다. 목걸이가 채워지는데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 순간에도 진혁을 보며 애원하는듯했다.
‘다른 때였으면 도망쳤을 녀석인데.’
장군이는 개목걸이 없이 사는 녀석이다.
항상 주인을 따라다니고 배가 부르면 도토리나무 밑에서 잠을 자는 게 일상이니까. 도망을 치자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런데 최장환이 누렁이를 데리고 올 때 장군이는 도망을 치지 않았다.
‘우리가 있어서 그랬겠지.’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는 법이다. 오랫동안 붙어 지내면 작은 행동을 보고도 마음을 읽게 된다. 진혁은 장군이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주인이 보호해줄 거라 믿었거나, 반대로 주인을 누렁이로부터 보호하려던 생각이었으리라.
최장환이 장군이네 집 앞에 쇠말뚝을 박고 두 개의 목줄을 걸었다.
신방을 꾸린 최장환이 현관을 향해 팔을 내둘렀다.
“어허-, 애덜은 가.”
바깥의 소란이 궁금했던 홍수정과 유진이가 빼꼼 내다보고 있었다.
***
“어머나, 민망해라. 저 사람은 저기서 구경하고 있네?”
유세라는 밖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홍기준을 보며 투덜거렸다. 그래도 남편이라고 남자는 어쩌고 하는 소리는 내지 않았다. 늘 일에 매달려 살았으니 쉬러 왔을 때라도 잔소리를 하지 않으려는 생각이었다.
“진혁 엄마, 장군이 괜찮을까요?”
“큭-.”
참외를 깎던 한유영이 이 사이로 바람을 내보냈다.
다분히 가소롭다는 의도가 담긴 웃음이었다.
“장군이가 벌써 다섯 살인가, 여섯 살인가 됐을 거예요.”
“예뻐서 애기인 줄 알았는데. 하긴, 내가 본 것만 사 년이네요.”
땅 주인을 만나러 왔다가 이 가족과 연을 맺게 됐으니.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열 살 꼬마였던 손진혁은 남편보다 키가 커졌고, 말 배우는 게 느려 걱정했던 다섯 살 딸은 벌써 학교에 다닌다.
한유영이 잘 자른 참외를 포크로 찍어 유세라에게 건넸다.
“장군이 나이면 강아지를 낳아도 벌써 몇 마리는 낳아야 정상이죠.”
“혹시 불임인가?”
참외를 한 입 베어문 유세라가 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본인도 딸을 어렵게 얻었으니 장군이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감정이입이 되었다.
“그건 모르겠는데 다른 개들이 무서워서 접근을 못해요.”
한유영의 표정은 개선장군의 그것이었다. 자칫 거만해 보일 수도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조그마한 녀석이 무서워 봤자 얼마나 무섭다고 그럴까, 유세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때였다.
꺼거엉- 꺼엉-!
유세라의 예상을 비웃듯 밖에서 요란한 비명이 들렸다.
***
진혁은 아빠가 여유를 부린 속내를 알 수 있었다.
최장환이 무서워 개집 안으로 숨어들었던 장군이는, 누렁이가 코를 벌름거리며 집안을 기웃거리자 코를 물어버렸다.
손광연 또한 장군이의 비범함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고, 누렁이 아프겠다.’
쟤도 주인이 가자니까 따라왔을 텐데.
아르르-! 왈!
장군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돌아선 누렁이 꼬리를 야무지게 물어버렸다.
깨갱-!
진혁은 이마를 짚었다. 장군이가 굽히지 않고 자존심을 세워서 반갑긴 한데, 가장 친한 이웃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 까닭이다.
‘그래도 우리 장군이가 최고다.’
장군이라는 이름답게 용맹하고 자존심도 강하지 않은가.
가늘게 뜬 눈으로 뭔가 고민하던 홍기준이 턱을 쓰다듬었다.
“이 녀석들 말야. 보는 눈이 많아서 부끄러운 거 아닐까?”
아, 저 저수지 얼음 같은 아저씨 도움 안 되네. 이제 장군이가 해방될 타이밍인데.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했다. 장군이는 눈치라는 게 있는 녀석이니. 제 녀석도 뜻이 있는데 수치심 때문에 앙탈을 부리는 걸지도 모르지.
“그럼 여기 뒀다 명일 데릴러 올텡께 하루 냅둬 보자고-.”
수캉아지는 수놈 주인 주는 거여. 최장환은 아직 생기지도 않은 강아지를 선점하며 멀어져갔다.
‘그래, 누렁이 힘내 봐라.’
진혁은 누렁이를 응원하며 집으로 들어섰다.
꼴에 누굴 응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강아지를 보고 싶었다.
***
마당에도, 거실에도. 노을이 주황빛 포단을 드리웠다.
진혁은 장군이가 마음에 걸려 거실 창가를 배회했다.
누렁이는 혼자 가버린 주인이 야속한지 최미경 청소년네 집 방향으로 앉아있었다.
‘개 뒤통수가 왜 저리 쓸쓸해 보이냐.’
장군이는 집에 들어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다행히 유혈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았으나, 완전히 내외하는 분위기였다.
‘장군이 속을 모르겠어.’
그거 뭐 어려운 거라고 저러나 싶었다.
구원요청을 보내듯 애처로웠던 눈빛도 생생하다.
장군이는 어쩌면 진혁과 유진이와 어울리는 게 좋아 개 친구들을 멀리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여러모로 기특하고 애틋한 녀석이다.
‘내가 잘못 가르쳤어. 매일 뜀박질만 하고 다녔더니 장군이도 연애에 관심이 없는 거야.’
내 탓이오.
내일부터는 3층 서재에 있는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읽어줘야겠다.
뭐, 진혁도 아는 게 없으니 이론이라도 들려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