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60화 (60/338)

# 60 < 성장통 (3) >

‘부드럽기만 하고 별 효과는 없는 것 같은데.’

두통은 그대로였다.

잠시 유진이에게 판타스틱한 능력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의심했는데, 역시나 판타스틱한 상상이었나 보다.

솔직히 아쉬웠다.

‘이게 말로만 듣던 사춘기 망상인가?’

완전히 잠에서 깨며 정신이 들었다. 정말로 나을 때가 되어서 나은 거구나, 역시 밤은 생각을 많아지게 하는 힘이 있다.

진혁은 피식 웃어넘겼다.

상상속에서 무슨 일이 불가능할까. 망상 속에서라면 어처구니없지만 홍수정이 자면서 흘린 침 때문에 나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자식, 축축해 죽겠네.’

홍수정은 잘 때 침 흘리는 버릇이 있다. 출장이나 연수 길에 올라 함께 비행기를 탔을 때도 심심치 않게 목격했다.

‘망상과 잡념만 쌓여가네.’

불가사의한 현상투성이인 세상에 홀로 던져진 자의 어깨가 홀가분할 리 없었다. 터놓고 말할 사람 없이 혼자 고민하려니 두통도 만만치 않다.

‘그래도 동생 안으니 좋다.’

유진이를 안고 냉장고로 가서 문을 열었다.

이제 아기라고 부르기 애매하지만 하여튼 아기들은 호기심이 많다. 지금도 냉장고에 짧은 팔을 뻗지 않나.

“유진아, 그건 간장이예요.”

“······.”

유진이가 웬일로 말을 따라 하지 않는다. 뭔가 실망한 듯한 눈빛은 착각이겠지.

묵직한 유리 주스병에서 황금색 자태를 뽐내는 보리차를 병째 들이켰다.

‘크어어-, 여기가 식도인가!’

차가운 기운이 위장까지 훑고 내려갔다. 보리차의 이동경로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냉기였다.

정말 성장통이었는지 키가 더 큰 기분도 들었다. 며칠 새 운동복 바지가 짧아져 복숭아뼈가 드러났다.

진혁은 벽에 붙어 서서 키를 재보았다.

정확하지는 않아도 예전 키와 비교는 가능하니까.

‘열흘 동안 5cm가 컸다고?’

풀이냐. 진혁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식물인간? 아니, 이건 이상한데. 식물성 인간인가.

전생과 비교하면 5년이나 빠른 성장이다.

허어-, 헛숨이 나왔다.

‘옷부터 사야겠네.’

그래도 이렇게 쑥 커버리는 일이 자주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 또한 감에 의한 것인데, 이제는 육감의 영역마저 넘어선 느낌이었다.

진혁이 키에 놀랄 때 아빠들은 다른 이유로 경탄성을 질렀다.

“와, 진혁이가 팔위에 걸었지? 지금 딱 팔위인데?”

텔레비전 중계를 보던 손광연과 홍기준이 놀란 이유는 대한민국의 종합순위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혁은 알고 있었다. 내일 새벽이면 마라톤에서 금메달이 하나 더 나올 테고, 대한민국은 7위로 올라서겠지. 종합순위는 몰랐지만 단 하나의 금메달이 걸린 마라톤, 그 결과는 워낙 유명했다.

‘이러면 나가린데······.’

소식가여서 빈번하게 허기를 느끼는 진혁은 아쉬움을 반찬 삼아 테이블 위의 우유를 들이켰다. 홍수정이 마시다 남긴 모양인데 아주 미지근했다.

가만, 그런데 맞힌 사람이 나오지 않으면 내기는 어떻게 되는 거지?

손광연이 진혁과 같은 의문을 던졌다.

“그때는 근사치로 가야지.”

홍기준이 대수롭지 않게 툭 던졌다.

홍기준의 말에 진혁의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7위를 하게 되면 6위와 8위의 중간, 아빠와 진혁 중 누가 승자란 말인가.

“메달 개수로 하면 되겠네.”

현재 7위는 헝가리. 금메달 개수는 11개로 대한민국과 같았지만 메달 합계는 30개로 2개가 더 많은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황영조가 원래의 역사대로 금메달을 획득할 경우 대한민국이 금메달 12개로 7위로 올라설 테고······.

진혁은 재빨리 6위 국가의 메달 합계를 살폈다.

스페인, 22개.

‘옳거니! 나의 승리인가.’

홍기준이 내기를 제안했을 때, 진혁은 잠시나마 그를 회귀자로 의심했다. 학교 운동장에서의 대화 내용이나, 올림픽 순위를 틀리는 모습에 그 의심이 거의 사라졌지만. 육감이라는 게 증거만을 담보로 발동하는 건 아니니까.

어른들의 대화를 엿들은 내용만으로도 의심의 여지는 충분했다.

홍기준의 출세는 예전에 비해 빨랐다. 아니, 빠르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의 행보였다.

‘벌써 사장이 됐다던데.’

과거 그의 행적이 어땠는지 진혁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진혁은 회사에 목숨 바치고 오너에 충성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으니. 회사의 간략한 연혁 정도만 머릿속에 있었다. 그럼에도 홍기준의 현재 성장세가 이전보다 충분히 빠르다고 진혁의 감각은 진단해냈다.

‘10년 이상 빠른 거 아닌가.’

유세라의 말처럼 몇 년간 미친 듯이 이룬 업적이 100년을 아우르기라도 하는 걸까. 한 달을 10년처럼 산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라면 능히 가능하리라.

유세라도 그렇다. 2002 월드컵이 지나고서야 기초체육에 눈을 돌릴 사람이 벌써부터 관심을 갖고 있지 않나. 그 뒤에 홍기준이 있을 거란 사실을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무튼, 진혁의 육감은 여전히 홍기준을 의심하고 있었다.

‘저수지 얼음 같은 아저씨야.’

멀리서 보면 단단해 보이지만 언제 깨져 사람을 삼킬지 모르는 불투명 얼음.

불온한 냉기였다.

그 냉기가 머리 위 숨구멍을 은은하게 덥혔다.

*

그건 그렇고.

세상은 그대로지만 진혁이 알던 인물의 역사는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윤성동이라는 놈과 불량 서클 녀석들도 학교에서 사라졌지. 다 나 때문인가 봐.’

이것저것 손을 대니 알고 있던 세계가 달라진 거다.

그 외에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사춘기 싫다. 정말 싫다. 누가 내 사춘기 사가라.’

언젠가부터 평온한 상태로 하나의 이슈에만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진혁은 가만히 내면으로 들어갔다.

‘잘 먹고, 힘쓰고, 그래서 쑥쑥 크고. 거기까진 좋다 이거야. 그런데 호르몬이 너무 많이 분비되는지 머릿속이 시끄러워.’

두개골을 경계로 대치한 내외의 열기가 병장기를 부딪는 긴장감이, 삽시간에 얼굴 뼈를 타고 내려와 아래턱마저 간질였다.

어차피 필요한 건 육체 성장이고 뇌는 그럭저럭 쓸만하다. 그러니 몸만 크고 뇌는 그냥 두면 좋으련만, 역시 세상 일은 원하는 대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일찍 잠들었다가 깼더니 잠이 오지 않았다. 아빠들의 대화를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다. 진혁은 중얼중얼 잠꼬대하는 유진이를 안고 다시 몸을 눕혔다.

“싀베브 님 탄도 나디스카브 아프 네드라크다르트 이 흐코 아프 네드라크마르프······지요?”

그런데 유진이는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어느 나라 말인지 모르겠고 억양도 낯설다. 조일헌이 그랬던가, 유진이도 이 동네 아기라고 유치원 들어갈 때까지는 헛소리를 하려는 모양이다.

‘허-, 신기하네.’

유진이의 잠꼬대에 귀를 기울이니 잠이 쏟아졌다.

금세 꿈의 경계에 발을 들였다.

유진이와 교양있는 대화를 나누는 꿈이었다.

‘바크슬릭 븨율 사스아조스 아빁 스니이프데트-지요?’

‘냉장고에 달콤한 간장이 두 병 있다고?’

‘오빠가 유진이 줄 거지요?’

‘유진, 로릅알록 아빁 기드에그 아크스 개즈, 그닐크슬라 니므.’

에헤헤-.

행복한 꿈을 꾸며 유진이가 히죽히죽 웃었다.

오빠 등을 타고 달콤한 간장의 바다를 노니는 꿈이었다.

***

벌써 새벽을 넘어 아침을 기다리는 시각.

방충망 너머로 풀벌레 소리가 정겨운 가운데 홍기준이 손광연에게 자랑스레 말했다.

“대오통신 우리가 인수하기로 했어.”

“그렇게 큰 회사를? 제법 탄탄하지 않았나? 그런데 소식도 없이 갑자기 인수라니?”

“작업을 좀 했지.”

“공작을 벌인 건 아니고?”

두 남자는 거실에 널브러져 자는 세 아이가 깰까, 소리 낮춰 키득거렸다.

“사실 거기가 빚이 많았어. 그룹 전체가 휘청거릴 만큼.”

“거래를 했겠구만.”

척하면 척이라더니,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친구를 보며 홍기준이 흐뭇한 얼굴로 주억였다.

“와서 도와달라고 해도 거절할 거지?”

“난 사회생활 경험도 없고 이제 평범한 농부야.”

“평범한 놈 다 죽었다.”

아까운 인재였지만 친구의 고집을 알기에 어차피 홍기준으로서도 그냥 꺼내 본 말이었다. 물론, 도와준다면 큰 힘이 되겠지만 숨어 살다시피 하는 친구를 다시 세상 밖으로 끄집어낼 마음은 없었다. 시골에 있는 게 안전하기도 하고.

“수정 아범 잘 풀리면 우리 아들이나 키워서 쓰던가.”

냉장고에서 꺼낸 지 오래되어 미지근해진 보리차를 마시며, 홍기준이 눈동자만 굴려 진혁을 찾았다. 두 꼬맹이를 품에 아늑하게 가두고 저는 새우처럼 웅크려 잠든, 사춘기 따위 남 일이라는 듯한 사내아이.

“진혁이가 우리 딸 데리고 산다고 하면 생각해보고.”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는 말자고. 그런 건 아이들이 결정하는 거야.”

“우리 딸이 어디가 어때섯-.”

발끈하려던 홍기준이 급히 성대를 조였다. 아이들이 깰까 살피면서였다.

손광연이 벽에 걸린 가족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운명은 모르는 거니까.”

홍기준도 어쩔 수 없이 오랜 친구의 말에 동의했다.

운명도, 인연도 모르는 일이다. 당장 손광연만 보더라도 아무런 연고 없는 시골에 틀어박혀 살고 있으니.

여름이라도 시골의 새벽은 서늘했다. 유진이는 오빠 품에 안겨 잠들었고, 홍수정도 젖먹이 강아지처럼 그 틈을 파고들었다.

‘평화롭네.’

홍기준은 아이들이 선사하는 목가적인 정경을 감상하며, 외로운 성장기를 보낸 친구가 비로소 평화를 찾았음을 실감했다.

‘그래, 이렇게 사는 게 꿈인 놈이었지.’

도시의 팍팍한 삶에서 잠시 벗어난 홍기준의 감상을 손광연이 깨웠다.

“야, 근데 우리 아들이 마음에 들긴 하냐? 그저 평범한 시골 애야.”

차라리 평범한 놈들 다 죽었다고 하라니까?

알면서도 묻는 거겠지만.

‘마음에 들다마다.’

대형사고를 치고도 혼란스러워하지 않는 대범함을 어떤 열네 살이 보일 수 있을까. 성격은 어떻고. 낯을 가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기 위해 말을 참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저를 따르는 꼬맹이들은 끔찍하게 챙긴다. 개까지.

사람을 제대로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크기나 해라.’

아니다, 재미나게 살며 천천히 커라. 지나고 보니 그때가 제일 좋더라.

뭐, 키는 이미 어른보다 큰 것 같지만.

꿈결을 걷는 듯 홍기준의 시선이 아련하게 진혁을 볼 때였다.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잠든 진혁이 한기에 몸을 떨었다.

두 팔은 꼬맹이들에게 제압당했는데, 무슨 수를 썼는지 이불이 가슴께까지 올라갔다.

이불이 저절로 스르르 올라가 아이들을 덮는 것 같은 광경에 홍기준이 사백안이 되었다. 머리의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휘둥그레진 눈으로 낯선 적막을 살폈다.

갑작스러운 침묵에 친구를 보니 손광연은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때맞춰 누가 볼륨을 키운 듯, TV 캐스터의 목소리가 갑작스레 커졌다.

[황영조! 황영조! 대한민국의 황영조 선수가 몬주익 스타디움에 선두로 들어섭니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순간입니까!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홍기준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붉게 물든 눈으로 흡족하게 웃었다.

그워어어억-.

길게 트림을 게워내고는 시큼한 냄새에 코를 찡그렸다.

밤이 새도록 막걸리를 많이도 마셨다.

그나마 손광연의 집이기에 이렇게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실 수 있다.

*

아침 새소리를 음악 삼은 아빠들이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평상에 앉았다.

홍기준이 멀리 감나무를 가리켰다. 그의 손이 가리킨 곳에서 수십 마리 참새가 나무에 앉았다가 바닥에 앉기를 반복하며 방정을 떨었다.

“저 참새들은 왜 저 나무에서만 저러냐?”

“낸들 아냐. 매년, 매월, 매일 저 나무에서만 저런다. 겨울에도 예외가 없어. 아지트라도 되나 봐.”

아지트라.

홍기준이 턱을 짚고 고개를 쭉 뺐다. 훤히 뚫린 아래로 논밭과 수로, 개울이 보이고 뒤로는 언덕을 올라 버스 길과 멀리 구봉산이 보인다.

동쪽으로는 읍내로 이어지는 숲이, 서쪽으로는 바다가 있다.

아늑했다.

‘나도 참새로구나.’

아늑하고 안전한 곳이다.

정경을 감상하듯 한 번 더 사방을 훑었다.

양 팀장은 어디쯤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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