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 성장통 (2) >
각양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인간지능 유세라의 입에서 정보가 범람했다. 내가 아는 정보를 모두 줄 테니 알아서 해석하라는 뜻이었을까, 제법 방대하다 할 수 있으나 논리적 연결성이 부족했다.
“어, 성장호르몬이 부족하고-, 아니, 과다한 건가? 거기다 영양이 골고루-.”
진혁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뭔가 길게 설명할 때 버벅거리는 것까지 어쩜 저리도 모녀가 똑같을까. 진혁이 겪어 본 바에 의하면, 빠른 두뇌 회전을 입이 따라가지 못해 생기는 일이었다. 그가 알기로 저들은 머리가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으므로.
토라진 아이를 달래듯 홍수정을 무릎에 앉힌 진혁이 급히 나섰다.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 저라도 유세라를 구원할 의도였다.
“근육이 놀라서 허리 쪽 신경을 눌렀대요.”
“어, 어. 내 말이.”
신경이 눌렸으니 모든 처치 효과가 일시적이고 통증이 지속되었다. 도시의 전문의가 그리 진단을 한 터였다. 과거에 성인이 되어서도 일주일 이상 꼼짝없이 고생해야 했다. 심할 경우 좌우 어디든 한쪽 허리가 내려앉은 사람처럼 조심조심 걸을 때도 있었다.
“병원에서도 그렇게 얘기했으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거네?”
“네, 뭐······.”
진혁은 말려 올라간 티셔츠를 주섬주섬 내렸다.
읍내 병원에서는 그저 주사를 맞고 엎드려 쉬라는 말을 했다. 통증에 맞는 처방이었으니 틀린 진단이라고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온몸의 관절이 간지럽다 못해 가려울 지경이라 자다가도 여기저기 주무르고, 애벌레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아무튼 이렇게 허리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게 성장통이라면 성장통이겠지.
‘운동을 못하니 좀이 쑤셔.’
단지 운동을 하지 못한 데서 오는 아쉬움이 아니다.
늘 운동을 하며 몸을 지치게 만든 이유가 잡념을 떨치기 위한 것이었는데, 강제로 휴식을 취하게 된 탓에 이런저런 생각이 진혁을 괴롭혔다.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진혁에게 손짓했고, 그때마다 길 잃은 답을 찾아 영혼이 미궁을 방황했다.
“엄마, 저 찜질 좀 해주세요.”
“응, 그래.”
“죄송해요. 좀 엎드려 있을게요.”
부모님도, 서울에서 온 손님들도 신기한 눈으로 진혁을 보았다.
특히 유세라의 눈은 반짝이기까지 했다. 아프더니 제법 말이 많아졌잖아. 역시 아픈 만큼 성숙하는 모양이야.
‘신기하게들 보시네. 환자 처음 보시나.’
진혁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지만.
제 방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진혁은 거실에 엎드려 저주파 찜질기를 붙였다. 이것저것 시험해 본 결과, 시장에서 5천 원 주고 산 저주파 치료기의 효과가 가장 좋았다.
‘오오오-, 역시 전기자극이 최고인가. 짜릿혀.’
찌릿찌릿, 아프면서도 시원했다.
올림픽 재방송을 보는 어른들의 대화가 멀리 들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며 잠이 몰려왔다. 그대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었다.
*
“오빠, 오빠. 오빠, 아프지요?”
잠결에 유진이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라도 동생 때문에 더 힘들어질까, 아들을 생각해 엄마가 철저히 막은 탓에 유진이는 그동안 오빠 근처에 닿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아무런 방해 없이 오빠에게 돌진했다. 유세라와 회포를 푸느라 엄마가 유진이를 미처 막지 못한 걸까, 아니면 엄마가 잠든 틈에 유진이가 탈출한 걸까.
‘아니면 내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보내신 건가.’
아무렴 어떠냐, 오랜만에 동생이 오빠 등에서 놀겠구나. 잠결에도 진혁은 등을 넓게 폈다. 아기가 놀다 떨어지면 위험할 테니까.
유진이는 오빠의 까까머리를 마구 비비며 놀기도 했고, 등 위에 올라 말을 타기도 하고, 등과 허리를 두드리기도 했다.
빠악빠악-!
‘어허허-. 옳지, 옳지. 잘한다 내 동생! 손이 여전히 맵구나.’
비몽사몽 간에 진혁은 유진이가 찰싹찰싹 때리거나 손바닥으로 누르는 압력을 느꼈다. 몸이 따뜻해지며 쾌감을 동반한 짜릿한 감각이 찾아왔다.
소나기가 퍼붓기 전 갑작스레 찾아왔던 통증은, 사라질 때도 먹구름이 걷히듯 순식간에 가셨다.
열흘간 진혁을 꼼짝 못 하게 괴롭히던 허리가 그렇게 나았다.
‘······뭐.’
***
손유진은 노여워하는 법을 모른다.
말 못 하는 아기라면 답답할 때 빽빽거리며 우는 게 정상이거늘, 손유진은 아기 때도 방긋방긋 웃는 일이 익숙했다.
‘응가해도 웃었지요?’
물컹하고 따뜻한 느낌이 좋아 기저귀를 깔고 앉아 엉덩이를 비비는 날도 많았다. 그렇게 놀고 나면 엉덩이가 가려워져서, 기저귀 뜯는 시늉을 하며 삐죽삐죽 울었다. 서럽게 히잉히잉 울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달려와 물로 씻어주고 기저귀도 갈아줬다.
배고플 때나 무서울 때도 어쩔 수 없이 울었다. 그래야 굶주림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빼액 소리 지를 만큼 노한 일은 없었다.
‘오빠, 아저씨. 맴매해도 웃었지요?’
그건 아마도 웃는 일 가득하길 바라는 가족의 마음이 아기에게 영향을 준 것이리라. 화목한 환경도 영향을 미쳤을 테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재주 없는 아기는 어렴풋이 그리 짐작할 뿐이었다.
손유진은 젖먹이 때 머릿속에 울린 말을 기억한다.
눈과 입을 거치는 것보다 직관적인 교감이었다.
【건강하게 크거라.】
모습을 갖춘 목소리였다. 소리가 어찌 모습을 갖추느냐 묻는다면 손유진으로서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걷기도 전에 뛰어다닐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목소리의 주인을 찾고 싶다고 생각한 건 항상 제 주위에 머무는 가족의 존재를 깨달은 순간부터였다. 손유진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탐색했다.
‘아빠는 아니지요?’
아빠 음성은 부드러워 듣기 좋았으나 중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운 음성의 엄마는 더더욱 아닐 터였다.
적어도 동네에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없었다. 보호자의 등에 업혀 몇 년간 동네를 순회한 후 그리 결론 내렸다.
그나마 느낌이 가장 비슷한 존재를 꼽으라면 오빠였지만, 지켜본 바 오빠 목소리는 조금씩 변해서 특정하기 어려웠다.
찾을 수 없는 이유는 또 있었다.
‘살다 보니 말이 다르지요?’
머릿속에 들렸던 말은 가족이 사용하는 언어와 달랐다는 뜻이다.
손유진은 그 목소리의 언어를 알아듣는 경지를 넘어 입으로 말할 수도 있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대부분 잊었기 때문이다. 물론,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단어가 많지는 않았다.
그건 틀린 말이라고, 쓰면 안 되는 말이라고 했다. 엄마 므야므야를 므야므야라고 불렀을 때는 귀엽다며 웃던 엄마조차도.
엄마와 아빠가 그럴 때는 못 들은 척했는데, 가장 의지하는 오빠마저 그리 말하니 어쩔 수 없이 고쳐야 했다.
‘그래도 멍멍이는 사니얼이 맞지요?’
마지막으로 강아지를 표현하는 말도 버렸다.
이상하다. 아빠도 개는 사니얼이라고 소리 지르던데.
의아했지만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는 사람의 말을 거스를 순 없었다.
그렇게, 손유진은 조금씩 세상과 타협하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사람과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지며 목소리의 주인도 점점 잊어갔다.
다만, 건강하게 크라는 말이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기에 건강하게 크기로 했다.
쯥쯥쯥-퉤테테-.
흙도 퍼먹고, 발가락도 빨았다. 냉장고 문을 핥고, 소파도 뜯어먹었다.
다정한 엄마는 손유진이 뭘 먹든 말리지 않았다.
아, 모두 먹도록 방치한 건 아니다.
“유진아, 이건 간장이지요?”
엄마는 거짓말쟁이지요.
엄마가 숨긴 간장은 갓난아기 때 들은 목소리와 비슷한 색상이었다. 목소리가 어찌 모습을 갖추고 색상까지 있느냐 따진다면 이 50개월 아기는 설명할 재간이 없다. 논리는 이지의 영역인데 손유진은 아직 영성의 영역에 머물고 있으므로.
아무튼, 어른들은 간장을 벌컥벌컥 마셨다. 간장을 마신 아빠가 목에서 괴물 소리를 냈다. 그워어어어어-, 괴물 소리에서 달콤한 냄새가 났다.
엄마는 절대 못 먹게 했지만 손유진은 노여움을 표현하지 못할 뿐, 바보가 아니었다.
‘이 냄새는 간장 냄새가 아니지요오오-!’
그렇다면 역시 믿을 사람은 한 명뿐이다.
‘오빠는 주겠지요?’
언제고 오빠를 졸라 반드시 맛을 보겠노라 다짐했다.
동생이라면 껌뻑 죽는 오빠니까.
손유진도 엄마 므야므야 만지는 것보다 오빠 머리끄덩이 잡는 게 더 재밌다. 짧아서 잡기 어려운 녀석들이 은근히 승부욕을 자극한다. 그래서 가끔 입으로 뜯기도 했다.
‘냉장고에 간장이 둘이지요-.’
그러자면 저 오빠가 냉장고 문을 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키 크고 힘센 오빠가 요즘 통 걷지를 않는다.
‘오빠, 학교 안 가고 배밀이 하지요?’
언제든 동생을 위해 벌떡 일어날 사람이다.
손유진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드디어 때가 왔다.
서울에서 다른 가족이 놀러 오자 엄마가 바빠졌다.
엄마는 서울 엄마와 침대에 앉아 새 화장품을 보며 웃음꽃을 피웠다.
‘화장품은 맛없지요······.’
손에 닿는 것은 모두 맛본 손유진이다. 이 집에서 맛에 대한 정보는 가장 해박할 터였다. 손유진은 화장품을 맛본 후 인생의 쓴맛을 경험한 바 있다.
어쨌든 손유진에게는 기회였다.
오빠에게 가야 한다!
엄마의 감시가 소홀해져 드디어 오빠에게 닿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빠악빠악-!
오랜만에 상봉한 오빠를 마구 만지고 때렸다. 그 손길에 진심을 가득 담았다.
오빠에게만 사용하는 반가운 인사인데, 차라리 구타라 할 수 있으나 오빠는 이렇게 때릴 때마다 잘한다 잘한다 하며 사니얼 장군이처럼 웃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오빠 반응이 이상하다.
“유진아, 어떻게 한 거야?”
그냥 반가워서 냅다 때렸는데, 오빠가 뭔가 착각하는 것 같다. 벌떡 일어서더니 어떻게 한 건지 묻잖아.
말주변 없는 손유진이지만 묻는 말에 대답 정도는 가능하다.
오빠를 보며 활짝 웃어주었다. 달콤한 간장을 줄 사람이니까.
“이케, 이케 했지요?”
이제 괴물 소리 나는 간장을-.
***
열흘 넘게 고생했으니 나을 때가 되긴 했다.
그래도 보통은 푹 자고 일어난 다음에나 통증이 가셨던 것 같은데.
실시간으로 통증이 가시는 걸 느끼다니.
‘이건 좀 신기한데?’
진혁은 너무 놀란 나머지 벌떡 일어섰다.
진혁의 다리를 베고 자던 홍수정이 데구르르 굴렀다.
김치전에 막걸리를 마시던 아빠들은 화들짝 놀라 입을 뻐끔거렸다. 요통 때문에 바닥에 누워 발발거리던 녀석이 강시처럼 일어섰으니 그럴 수밖에.
손광연이 불콰한 얼굴로 혼잣말하듯 입술을 달싹였다.
“쟤가 저렇게 컸나?”
“나는 너 술 먹다 말고 언제 저기 갔나 했다.”
아직 양껏 마시지 않은 홍기준의 눈에도 기이한 모습이었다.
앓는 동안 꼿꼿이 선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그럴만했다.
“까하하-.”
유진이는 굴러떨어진 홍수정을 보며 박장대소했다.
진혁의 갑작스러운 기상에 놀라지 않은 사람은 유진이뿐인듯했다.
진혁은 끊어질 듯했던 허리부터 만졌다.
‘설마, 유진이······.’
사고함으로써 존재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진혁은 모든 일에 사색의 계측을 들이미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 그랬던 것도 있거니와 직접 부딪치며 깨닫는 편이 여러모로 효율적이라 여겼기에.
그래, 손진혁은 여러가지로 효율을 추구하던 인간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이성으로 통제가 가능한 상황에 대해서는.
‘그런데 이건 좀. 뭔가······.’
끊어질 듯했던 허리가 갑자기 멀쩡해지니 정상적인 사고 자체가 불가능했다.
나을 때가 되어서 그런 건지, 유진이가 만져서 그런 건지도 헤아리기 어려웠다.
방긋방긋 웃는 동생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유진아, 어떻게 한 거야?”
“이케, 이케 했지요?”
찰싹찰싹-.
유진이가 웃으며 고사리손으로 오빠 허리를 때렸다. 뭔가 염두에 두고 하는 행동은 아닌 듯 보였다.
‘유진이는 약손인가?’
진혁은 동생의 손을 잡아 제 이마에 댔다.
어설피 자다 깬지라 머리가 띵하던 차였으니 시험해볼 생각이었다.
유진이 손이 약손인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