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58화 (58/338)

# 58 < 성장통 >

거룩한 므야므야 실험을 마치고 집에 도착했을 때였다.

“어윽-.”

“왜 그러니?”

차에서 내리며 외마디 신음을 내는 진혁을 손광연이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나날이 새롭게 행복했던 진혁에게 갑작스러운 고통이 찾아왔다.

지난 삶과 비교하면 별것 아닌 시련으로 치부할 통증이었지만, 결코 가볍다 할 수 없었다.

‘허리가.’

그저 차에서 내렸을 뿐인데,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

무더운 계절이다.

집주인네 마당은 아주아주 단단한 흙바닥이고, 평상도 있고, 그 위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어 그늘도 만들어 준다. 몹시도 시원하고 개가 살기 좋은 환경이라는 뜻이다. 장군이는 똑똑한 개라서 이런 것도 안다.

워얼-.

몇 년 전 집을 새로 지으며 원목으로 만든 개집도 제법 쾌적하다.

그러나 장군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따로 있다.

마당과 밭 사이의 고랑. 원래는 장군이가 화장실로 사용했던 곳이다.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 한 장소에만 똥쓰를 처리하기에 장군이도 장소를 지정해 볼일을 봤던 건데. 거기서 갑자기 새싹이 돋더니 나무 하나가 자라났다.

도토리나무였다.

장군이는 저 나무가 어디에서 왔는지 정확히 기억한다.

아마······ 겨울이 세 번인가 바뀌기 전이었을 거다.

아닌가?

장군이는 저 나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렴풋이 기억한다.

지금은 엄청나게 커버린 아이가 큰 밭 건너 최멍멍이라는 암컷 친구네 누렁이만큼 작았던 시절이었을 거다. 뭐, 그때도 장군이보다는 컸지만 아무튼. 아이가 그때 밥그릇에 도토리를 넣어줬지.

미안했는지 비린내 나고 맛있는 녀석들을 그 위에 가득 담아줬고.

장군이는 코를 벌름거리며 아련하게 도토리나무를 올려보았다.

······장군이 몸속을 탐험한 그 도토리가 겨울이 몇 번 지나 싹을 틔운 거다.

‘월-.’

- 내가 도토리나무를 쌌어.

낳았다고 하던가? 뭘 낳아본 적이 없어서 정확한 표현은 모른다. 뭐, 개가 모를 수도 있지.

개 화장실. 쉽게 말하면 개똥밭이다. 개똥만큼 독한 게 없는데, 이 미친 도토리나무는 더 독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더니, 식물도 예외는 아닌 것일까. 이럴 때 생명력이 강하다고들 하던가. 개똥밭에 뿌리를 내린 도토리나무는 한겨울에도 열매를 맺었다.

이웃 마을 쫑이란 녀석은 목련 나무를 화장실로 사용하는데, 그 나무도 겨울에 꽃을 피웠다는 말을 들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나무의 심경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다만 장군이는 생각했다.

‘멍.’

- 내 똥보다 독하다니, 내가 졌다.

그래서 장군이는 화장실을 다른 장소로 바꿨다. 집주인네 아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긴 하지만.

으르르-, 헤헤헥-?

아니, 개가 마당에 똥 싸는 게 뭐 흉이냐. 그러냐, 안 그러냐?

겨울엔 자기도 골프 친답시고 삽으로 내 똥 치면서 놀더만. 하여간 인간들이란.

아무튼, 잠자는 시간과 노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도토리나무 밑에 기거하기로 했다. 승자에 대한 충성의 표시였다. 그렇게 도토리나무는 장군이가 인정한 두 번째 승자가 되었다.

첫 번째는 집주인 아들인데, 이 녀석이 머리털을 짧게 자르더니 어느 순간 장군이보다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동안 봐준 건지도 모르겠다.

털이 짧으면 빨리 달리는 모양이라고 장군이는 생각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더워지기 시작하는 계절, 아주머니가 개털을 정리해줬지만 장군이의 속도는 향상되지 않았다.

그 옛날 한 시대를 호령했던 닭 존슨도 온몸의 털이 다 뽑혔을 때 극강의 주력을 선보이기는커녕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털이 아닌 다른 비결이 있다는 뜻이로구나.

으르르-.

장군이는 주인집 아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옳거니, 대갈빡 뒤에 땜통이 비결이었구나.

그래서 장군이는 오늘도 흙바닥에 뒤통수를 비빈다.

헤헤헥-.

생겨라 땜통.

어우, 개 시원해.

터벅-, 발소리가 들린다.

묵직하면서도 흥겨운 발걸음, 주인아저씨다.

요즘 주인집 아들이 안 보인다.

가끔 보이기는 하는데 예전처럼 달리기도 하지 않고, 밥도 주지 않는다.

변했어······.

걷는 폼을 보면 엉거주춤한 것이, 안쪽 마을 메리네 주인집 아들이 뿔을 깠을 때와 비슷했다. 그 녀석 이름이 육왈왈이라고 했던가.

주인아저씨 아들도 깠나?

이족보행 수컷들이란.

***

‘몸이 더 크려나 보다.’

일컬어 성장통이라고 하던가.

허리는 그렇다 치고 온몸의 뼈마디가 쑤시고 가려웠다.

‘통증은 익숙하다 자신했는데 이번엔 낯설다.’

제 방에 오르락내리락하기 버거워 진혁은 거실에서 서식했다.

가끔 거실 유리문을 열고 장군이를 부르고, 달려온 장군이를 쓰다듬어주는 일 외의 외부활동은 자제했다.

방학이라고 소꿉친구가 놀러와도 거실에 엎드린 채 우정을 쌓아야 했다.

“진혁아, 그 친구는 갔어?”

학기 중에는 잠시 소원했기에 최미경 청소년은 조심스러운 몸가짐을 보였다.

그러나 다시 적응하는 데는 몇 마디 대화면 충분했으니. 본디 친구란 그런 사이인가 보다.

“있잖아-. 우리 반에 초원연립 사는 애 있는데 걔 완전 내숭 덩어리다? 선생님 앞에서는 안 그런데 애들끼리만 있을 땐 욕도 하고 치마도- 듣고 있니?”

진혁은 ‘그렇구나’만 반복하다가 정신을 잃었다.

풍경소리처럼 낭랑한 친구의 음성이 어떤 진통제보다 효과가 뛰어난 탓이었다.

“여름성경학교 해수욕장으로 간다고 교회 나오라는데. 아니, 우리 동네도 깨끗한 바다 있는데 내가 왜 그런 것 때문에 교회를- 자니?”

최미경 청소년은 엎어져 잠든 진혁 앞에 앉아 귀밑머리만 열심히 넘기다 갔는데, 전에 없던 버릇이 생겼는지 가끔 크흠- 하며 헛기침을 했다.

배웅은 못했지만 찾아와 주는 친구가 있어서 진혁은 아파도 행복했다.

최미경이 오지 않는 날에는 최태양이 찾아왔다.

“진혁아-! 씨르음-.”

“에헤헤-. 유진이 오빠 아프지요? 유진이랑 안 놀지요?”

“정말? 그 철인이 아프다고?”

“형, 어부바 잘하지요?”

“응?”

아픈 오빠 괴롭히지 못하도록 철벽 방어를 친 엄마 때문에 심심하던 유진이다.

최태양은 씨름하러 왔다가 유진이를 업고 동네를 돌았다.

유진이와 놀아준 후에도 자유롭지 못했다.

“운동하는 사람이 만져주면 좋아지지 않으려나-. 어어- 덥다.”

장군이 털을 빗기던 손광연이 중얼거리듯 던진 말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면 시원하니?”

“아뇨. 아무 느낌도 없어요. 무릎은 시원해요.”

“이상하다. 체중을 실었는데도 말랑한 느낌이 없어. 너 피부 안에 철판 심었니?”

뭐라는 거야. 서로 질세라 이상한 소리를 하는 남매다. 그래도 진혁은 최 씨 오누이가 있어 지루하지 않았다.

제 손이 얼얼해지도록 진혁을 마사지한 최태양이 집을 나설 때였다.

유진이가 치어리더처럼 방방 뛰었다.

“형 내일도 올 거지요? 유진이 어부바했지요? 형 높아서 재밌지요? 유진이가 감사합니다 했지요? 에헤헤, 형 감사합니다?”

아, 유진아.

최태양이 도움을 바라듯 진혁에게 눈길을 던졌지만, 진혁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아하하-, 유진이 말 짧고 길게 잘하네······.”

유진이 눈빛을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

최태양은 그 눈빛이 밟혀 매일같이 찾아왔다. 모친께 부탁해 모기장으로 포대기도 만들었는데, 유진이가 더울까 봐 신경 쓴 거라고 했다.

유진이가 오빠 없이도 즐거워하니 진혁은 행복했다.

척척박사 조일헌은 만병통치약이라며 염소똥처럼 생긴 풀색 환약을 줬는데, 혹시나 해서 입에 넣어봤지만 그냥 풀 맛이 났다.

‘진짜 염소똥 아녀?’

에퉤퉤-뱉뱉-.

걸쭉한 풀색 액체가 독침처럼 뿜어져 나왔다.

***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끝나갈 무렵 홍기준의 가족이 찾아왔다.

많이 호전되었기에 진혁도 일어서서 손님을 맞았다.

예년보다 이른 방문이었는데, 진혁과 손광연은 홍기준이 내기 때문에 서둘러 왔으리라 짐작했다.

한데 그게 아니었다.

“수정 아빠가 일하다 쓰러질까 봐 내가 억지로 끌고 왔어요.”

홍기준은 벌인 일이 많다고 했다.

한 달을 10년처럼 산다는 말도 덧붙였다.

“세상에, 진혁이는 졸업식 때보다 더 큰 것 같네?”

“오빠응 뭠 머꼬 그더헤 커떠? 우디 아빠보다 큰 거 같아.”

유세라와 홍수정이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뭔가에 놀란 고양이 눈이었다.

운동하고, 잘 먹고, 잘 자면 크는 법인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진혁은 과거의 홍수정을 떠올려 보았다.

‘꼬꼬마.’

그만 떠올려 보자.

“오빠, 오빠! 나도 요대 주넌끼도 하고 도깅도 한다? 그리고, 어, 어, 이띠, 어, 바레도 하고, 어, 어-.”

뭐, 가지가지 한다는 소리 같았다.

진혁은 칭찬의 의미로 홍수정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꼬맹이의 입을 유심히 살폈다. 자존심도 강한 녀석이 왜 혀 딻은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걸까. 상냥했지만 맨정신에 애교부릴 성격은 아닌 것으로 기억하는데.

‘앞니를 홀라당 털렸구나. 틀니가 필요해 보이는데.’

밥을 어떻게 먹을지 궁금할 정도였다. 진혁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느라 얼굴이 벌게졌다.

성장 속도에 차이가 있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홍수정의 경우는 좀 늦은 감이 있었다. 유치는 보통 7, 8세에 빠지지 않나 생각하면서도 육아 경험이 없는 진혁은 개인 차이라 생각하며 넘어갔다.

어쨌든 귀여웠다.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홍수정의 두 뺨을 감싸 쥐고 세레나데를 불렀다.

“이빨 빠진 도장구- 개울가에 가지 마라-. 붕어 새끼 놀란-.”

“우띠!”

“아윽!”

홍수정이 진혁의 명치에 펀치를 꽂았다.

감정과 체중이 모두 실린 훌륭한 타격이었다. 역시 특전용사 뺨치는 실력이랄까.

“아빠가 매날매날 그 노대 부든단 마댜잉-. 노디지마잉-.”

매콤한 주먹을 날리긴 했으나 홍수정은 토라질 뿐 표독스럽게 굴지 않았다.

진혁은 사과의 뜻으로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고 천천히 소파에 앉았다.

밝고 쾌활한 꼬맹이를 보니 썩 즐거웠지만 허리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표정은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

팔걸이를 짚어 체중을 받치며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런 진혁의 모습에 유세라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진혁이 어디 아픈 거니? 다친 거야? 지금 수정이가 때려서?”

“끄으-.”

저도 모르게 늙은이 숨넘어가는 소리가 나왔기에 진혁은 입을 다물었다.

그저 손을 저어 괜찮다는 시그널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는데 병원에서도 모르겠다고 하더라고. 침을 맞아도 아주 잠시뿐이고.”

입술을 꽉 깨문 진혁을 대신해 친절한 손광연이 나섰다.

조슬찬을 데려다준 후 차에서 내렸을 때는 어딘가 놀라서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손광연도 농사일을 할 때면 기온이나 습도가 급격히 변할 때 그런 경험을 해봤으니까.

그런데 크게 아파 본 일이 없는 아들이 다음날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을 때는 손광연과 한유영이 호들갑을 떨었더랬다. 그 좋아하는 달리기도, 등산도 하지 못하지 않았나.

허리를 편히 굽히지 못하니 장군이 밥도 손광연이 대신 챙겨주는 중이다.

“큰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대학병원 같은 곳. 천안에도 대학병원 있지 않나?”

“다 다녀왔지. 열흘 정도 지나니 많이 나아져서 쉬면서 지켜보는 중이야.”

읍내와 이웃 도시 의료원을 전전하고 한의원에서 찜질과 침까지 맞은 터였다.

그나마 며칠 지나며 차차 호전되어 지켜보는 중이었다.

“어디 아줌마가 좀 보자.”

아니 이 아줌마가!

유세라가 예고도 없이 진혁의 셔츠를 훌떡 걷어 올렸다.

“오-, 근육 좀 봐. 사람 몸이 이럴 수가 있는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따지고 싶었지만 진혁은 눈만 질끈 감았다.

유세라가 허리를 살펴보는 동안 가만히 등을 돌렸다.

어차피 보는 거 편하게 보라는 뜻이었다.

“여기 누르면 아프니?”

“아뇨.”

몇 군데 꾹꾹 눌렀지만 통증은 없었다.

유세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거 그거 같네.”

“그거? 그게 뭔데?”

혹시나 하는 기대에 찬 손광연이 재빨리 되물었다.

어릴 때부터 엉뚱하긴 했어도 영특한 면이 있는 유세라였으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성장통.”

“그게 뭐야?”

“내가 유소년 체육 공부하다 알게 된 건데-.”

20세기까지만 해도 성장통을 대놓고 겪는 청소년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영양과 운동량이 받쳐줄 경우 폭발적인 성장을 하고, 이런 아이들은 성장판이 계속 열려있다시피 한다. 그 과정에서 에너지 소모가 많아지고 열병처럼 앓는다는 설명이었다.

‘아니, 이게 뭔 소리야. 나는 열병이 아닌데.’

진혁도, 손광연도, 한유영도. 말을 잃었다.

스스로 너무나 대견한 표정을 짓는 유세라 때문이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병증이 너무나 다르지 않은가.

유진이를 안고 온화한 얼굴로 둥개둥개야-를 시전하던 홍기준은 참선에 임한 승려처럼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있잖아. 더 들어 봐.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면-. 관절이 성장하는 속도가- 근육이랑, 그, 신경이 또-.”

인간지능 유세라가 버벅버벅 오류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누가 좀 말려야 할 텐데.

‘저 모습, 어디서 봤더라?’

왠지 낯익은 장면이었다. 갸웃거리던 진혁의 시선이 홍수정을 잡아냈다.

이빨 없는 꼬맹이가 입을 헤 벌리고 엄마를 자랑스럽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유 씨라 그런지 정말 유식하잖아. 역시 우리 엄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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