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55화 (55/338)

# 55 < 조커 대장 (2) >

***

참으로 평범했던 1학기의 끝이 보이는 여름방학 전날.

수업을 마치고 진혁은 시소에 앉았다.

그 옛날에 그랬듯이.

‘휴식 같은 시간이다.’

저 멀리 씨름부 선수들과 노닥거리는 염병택이 보였다.

코치도 없이 육상부 훈련을 하던 조슬찬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여어-, 우리 조커 대장 혼자 뭐혀? 고독 씹는 겨? 그거 맛 웁쓸 텐디?”

언제나 밝은 조슬찬의 너스레에 진혁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조슬찬은 진혁이 사고를 쳤을 때 가장 먼저 달려온 친구였다. 다친 곳은 없는지, 왜 싸웠는지 조심스레 묻기도 했다. 진혁의 설명을 듣고는 가장 광분한 사람도 조슬찬이었다.

‘애는 참 착해.’

조슬찬이 진혁의 맞은편에 앉아 두 친구가 함께 시소를 탔다.

초등학교도 아닌데 왜 시소가 있는지 궁금할 만한데, 개교 이래 40년이 넘도록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저 있으니 타는 거다. 그러고 보니 진혁이 다녔던 사립고에도 시소가 있었다.

시소를 타며 조슬찬이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는 동안, 진혁은 지난 생을 잠시 떠올렸다.

‘가물가물하지. 열네 살 때였으니까.’

신문 배달을 마치고 혼자 여기 앉아 후문을 오가는 사람들을 본 날이 많았다.

하루는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가 학교에 들어오셨었는데, 나갈 때는 가방을 메고 보자기에 책을 싸서 나가셨다.

일수놀이에 희생당해 자살한 동급생이 있었는데, 그 유품을 챙기러 오신 거라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자살한 손주의 물건을 챙기러 학교에 들렀던 할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왜 조슬이 보면서 그 기억이 떠오르냐.’

그 뒷모습을 기억한다. 혼자 시소에 앉아 책을 보던 진혁은 구부정한 할머니의 등을 보며, 제 뒷모습도 저렇게 쓸쓸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삐거덕거리는 시소 마찰음 사이로 조슬찬의 목소리가 진혁의 상념을 깨웠다.

“진혁아, 방학 때 뭐 헐라고?”

“동생이랑 놀아야지.”

유진이도 이제 49개월이다.

새벽에 운동하기 위해 깨어보면, 2층 진혁의 방문 앞에 유진이가 개구리 자세로 잠들어 있어서 매일 놀라곤 한다. 분명 엄마 품에서 잠들었는데 새벽엔 왜 거기서 자고 있는 걸까.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동생을 떠올리며 진혁은 행복한 계획을 세웠다. 방학 때는 하루 종일 함께 놀아줄 수 있으니까.

‘동물 이름도 제대로 가르쳐 줘야지.’

엄마와 아빠가 가르칠 때는 곧잘 따라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종종 이상하게 부른다. 비둘기를 압두, 참새를 브랍사, 독수리를 느뢰, 개구리를 아도륵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그렇게 가르친 사람이 없는데도 말이다. 처음에는 아빠의 욕설 영향인가 생각했던 엄마도 생각을 달리 하는 중이다.

- “내가 이 동네 애들 쭉 지켜보니께 유치원 들어가기 전까지는 죄다 헛소리를 허고 댕기더라고.”

그나마 두내리 척척박사 조일헌 덕분에 진혁의 가족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안심하는 데에는 진혁의 영향도 있었다. 아들도 어릴 때는 정체불명의 이상한 노래를 흥얼거리고 다녔으니까.

‘뭐, 이쁘고 건강하면 됐지.’

유진이는 매일 흙을 퍼먹으면서도 감기 한번 걸리지 않는 기특한 동생이다.

“진혁아, 나 놀러 가두 되간?”

“되지 그럼. 와. 언제든.”

진혁이 조슬찬을 향해 웃었다. 답지 않게 부드러운 미소였다.

방학 때면 늘 가족과 시간을 보냈는데, 친구와도 어울리면 진혁에게도, 조슬찬에게도 좋은 추억이 되지 않을까.

“너무 쉽게 대답허먼 호구된다던디.”

“그래?”

진혁이 땅을 힘껏 박찼다.

호구의 단호한 응징이었다.

덜컹- 꾸웅-!

갑작스레 엉덩이와 허리에 올라온 고통에 조슬찬이 울상을 지었다.

“하이고오-, 할머니 찬이 죽어유-.”

그 할머니는 그 후로 혼자 어떻게 사셨을까.

부모님이 안 계시고 할머니와 단둘이 살던 친구라고 했었다.

전생에 그런 일수놀이에 이용당해 농약을 마시고 자살한 중학교 1학년생.

진혁은 끝내 그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가먼 뭐 허구 놀으야 되나?”

“수영도 하고, 낚시도 하자. 마당에서 자두도 따 먹고. 오래 쉬다가 가.”

“히익-, 마당에 자두도 있간?”

“복숭아도 있다.”

아빠는 마당을 넓히며 주위에 다양한 유실수를 심었다. 살구, 자두, 복숭아, 사과, 포도, 모과 등등, 없는 과일나무를 찾는 게 빠를 터였다. 꽃을 보는 게 좋아서라고는 하시는데, 익지도 않은 열매가 매일 사라지는 걸 보면 누군가 먹고 있다는 뜻이겠지.

“우리 할머니 혼자서 농사 짓는디 오래는 뭇 놀구-. 한 이틀만 놀러 가두 될라나?”

“그래. 당연히 되지.”

조슬찬은 머쓱하게 웃었다.

친구들에게 거절당하는 게 일상이었는데, 역시 조커 대장은 다르구나. 진혁의 거리낌 없는 대답이 기꺼웠다.

“뭐 사가꾸 가까? 할머니가 넘이 집 갈 때 빈손으루 가는 거 아니라구 했는디이-.”

“사와. 개집에서 자고 싶으면.”

우리 장군이 잠꼬대 엄청 많이 해 인마. 코도 곤다. 무표정한 얼굴로 진혁이 중얼거렸다.

좀처럼 접할 수 없는 진혁의 농담에 조슬찬은 배를 잡고 웃다가 시소에서 떨어졌다. 뭐가 그리 웃긴지 땅바닥에 누워 장군이처럼 배를 까뒤집고 꺽꺽거리기까지 했다.

‘저러다 턱 빠지겠네.’

조슬찬이 모르는 게 있는데.

진혁은 농담에 소질이 없다.

***

방학을 맞아 조슬찬이 놀러왔다.

공주에서 대면한 바 있는 진혁의 부모님과 조슬찬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엄니, 아부지 안녕하셨대유-?”

“어머, 슬찬이 오랜만이야. 어서 와.”

“그래, 할머님은 건강하시고?”

한유영과 손광연도 조슬찬을 아들처럼 살갑게 맞았다. 그러잖아도 다정한 사람들이지만 아들 진혁의 당부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

- “슬찬이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저를 많이 따르는 것 같기도 하고······.”

조슬찬의 할머니는 텃밭을 일구어 시장에서 나물을 팔며 생계를 유지하신다고 했다. 과외나 학원에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 해도, 한참 성장기인 손주를 먹이고 입히는 데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갈 터였다. 할머니의 고생을 알기에 조슬찬이 운동을 하며 간식 따위를 챙기는 것이고.

‘슬찬이 속마음은 옛날의 내 바람과 비슷하지 않을까.’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친구였다.

다르다면 조슬찬은 활기차다는 거랄까.

한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복스럽게 해치우는 조슬찬을 보는 진혁의 눈에 잠시 애틋한 빛이 돌았다.

한유영이 조슬찬의 앞으로 고추장불고기 접시를 밀었다.

아들 친구가 읍내에서 놀러 온다고 낙지볶음도 만들고 닭도 삶았다.

“슬찬아, 천천히 실컷 먹어요. 엄마가 많이 해놨어.”

“컥-! 예, 오므니.”

엄마라는 말이 목에 걸렸을까, 대답하느라 사레들렸을까.

조슬찬이 촉촉해진 눈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점심상을 물리고 손광연이 바둑판을 꺼냈다. 그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슬찬이 바둑 좀 두니?”

“아뉴. 아부지가 갈쳐주시먼 한 번 배워볼라구유-.”

붙임성 좋은 조슬찬이었지만 바둑을 짧은 시간에 배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조슬찬에게는 소질이 없었다. 그래서 손광연과 조슬찬은 알까기로 마무리했다.

“오-, 슬찬이 알까기 잘하네. 자! 이겼으니 만 원!”

만 원짜리 지폐를 처음 본 사람처럼 조슬찬이 눈을 끔뻑거렸다.

진혁이 옆구리를 찌른 후에야 조슬찬은 넙죽 절하며 돈을 받았다.

알까기 대전이 끝나고 소화가 거의 되었을 때쯤, 진혁이 물동이 두 개와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었다. 비닐봉지에는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주먹만 한 떡밥을 가득 담았다.

“슬찬아, 미꾸라지 잡으러 가자.”

시골에 왔으니 시골 체험을 시켜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조슬찬이 슬리퍼를 신을 동안 진혁은 기획안을 들여다보았다.

〈에너지를 추억으로〉

「목적. 아웃도어 액티비티를 통해 질풍노도 에너지의 건전한 소모를 유도하기 위함」

I. 미꾸라지잡이 및 판매를 통한 생산활동과 수익 창출로 경제관념 제고

II. 개울 물놀이와 수생 생물 탐사로 체력 향상

III. 저수지 마름 수집으로 원시 수렵 체험 및 생존능력 배양

IV. 야간 등산으로 프렌드십 및 호연지기 함양

V. 구황작물 섭취 및 역사적 배경 설명

비고. 우천 시 실내 체력단련(팔 굽혀 펴기, 온몸 비틀기······ 각 50회 5 set)

이틀을 알차게 보낼 완벽한 계획이었다. 비록 PPT 없이 볼펜으로 작성했을지언정, 녹슬지 않은 기획 능력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출바알-!”

유진이가 조슬찬의 손을 잡고 오빠 뒤를 따랐다. 앞코가 막힌 분홍색 엄마 슬리퍼를 신은 조슬찬이 조심조심 논둑을 밟았다.

“미끄리는 지금 농약 땜이 다 안 죽었간?”

“우리 동네는 농약 안 쳐.”

논 미꾸라지는 보통 장마가 오기 전에 잡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장마와 무더위가 시작되면 병충해가 기승을 부리는 탓에 농약을 치니 그 전에 잡는 것이었다. 농약을 치면 몸을 기역자로 꺾은 물고기들이 논에 둥둥 뜨곤 했다. 그러나 농약을 치지 않는 논은 예외였다.

“농약두 안 치구 워치게 농사를 짓는댜?”

“효소라는 걸 쓰는데 병충해는 막고 동물에는 해가 없대.”

“희한허네이-.”

손광연은 몇 가지 효소를 개발해 여러 논에 시험 중이었다. 처음에는 가족이 먹을 벼를 재배하는 논에만 사용하다가, 효과가 입증되자 점차 생산량을 늘리고 다른 농가에 제조법을 전수하는 중이었다. 흔히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드는 것이어서 제조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것이 장점이었는데, 희한하게도 다른 집 아저씨들은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는 말을 하며 한숨을 쉬곤 했다.

논에서 퍼덕거리는 붕어와 새까맣게 깔린 우렁이를 보며 조슬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의 설명보다 확실한 시각 자료였다.

“진짜 근처에 농약병이 하나두 안 뵈네? 그거 숴다 농약 가게 가따주먼 하나에 300원씩 주는디-.”

공병 수집 취미가 없던 진혁에게는 새로운 정보였다.

소주병이 10원, 콜라병이 20원, 맥주병이 30원이던가? 농약병 하나면 열 배나 쳐주는 셈이구나.

“썬글라스마냥 코팅 돼서 비싼 거랴.”

진혁은 알지 못하는 분야이니 조슬찬의 설명에 그런가 보다 생각할 뿐이었다.

“나두 잘 물러. 정확헌 건 아녀.”

조슬찬은 빠져나갈 여지를 남겨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어, 유진이 미끄러질라. 슬찬이 오빠 옆댕이루 바짝 붙어잉?”

“녜, 에헤헤-.”

조슬찬은 좁은 논길을 걸으며 유진이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이용 밀짚모자를 쓰고 꽃무늬 장화를 신은 여자아이가 오빠들 뒤를 졸졸 따랐다. 마치 호위하듯 두리번거리며 장군이가 유진이 꽁무니를 쫓았다.

진혁은 논에 들어가 작은 통발을 건졌다.

성인 남성 허벅지보다 짧고 굵은 통발이었다.

파다다다다-!

통발 안의 물고기들이 난리법석을 떨었다.

미꾸라지와 송사리, 우렁이, 붕어도 있었다.

“히이-, 무쟈게 많이 들었네?”

양동이에 쏟아지는 미꾸라지를 보며 조슬찬의 턱이 떨어졌다.

진혁은 능숙한 솜씨로 통발을 비우고, 준비한 깻묵 떡밥을 넣은 다음, 통발을 다시 논에 돌려놓았다.

“인 줘. 내가 헐랴.”

몇 번 지켜본 조슬찬이 통발을 건네받아 바글거리는 미꾸라지를 쏟았다. 그리고 진혁이 했던 대로 주먹만 한 떡밥을 투입 후 진혁에게 다시 건넸다.

“이야-. 이거 재밌네-. 진혁이는 맨날 이거 허는 겨?”

“아니. 원래 더울 땐 안 해.”

나 재밌으라고 하는 거구나.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린 조슬찬이 잠시 말을 잊었다. 똑똑하지는 않아도 눈치는 있었으니. 친구의 마음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긴, 저렇게 큰 집을 짓고 부족함 없이 살 녀석이 이런 일을 매일 할 리가 없지.

“일루 나와 봐. 내가 건질랴.”

“그래.”

조슬찬이 슬리퍼를 벗고 논에 들어갔다.

진혁은 잠시 논둑에 앉아 유진이를 안고 휴식을 취했다.

밀짚모자 덕분에 머리는 뜨겁지 않았지만 등판이 너무 뜨거웠다.

“우리 애기 시원해?”

“녜, 에헤헤-. 오빠, 부채 잘하지요?”

진혁이 모자를 벗어 유진이에게 부채질을 할 때였다.

“끼야아아아아-. 허더더더더더더-.”

워러워러월-!

초음파에 가까운 조슬찬의 비명이 울리고, 거기에 놀란 장군이가 화답했다.

조슬찬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논에 짤뿍 자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허우적거릴 때마다 빼곡하고 싱싱하게 커 오른 벼 포기가 춤을 췄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기겁한 진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원인을 찾았다.

‘아, 물뱀.’

황토색에 가까운 갈색 물뱀이 통발에서 빠져나와 유유히 헤엄쳐 갔다. 가느다랗고 길쭉한데, 머리를 물 위로 내놓고 끊임없이 S자를 그리며 헤엄치는 모습이 우아하게 보이는 녀석이었다.

조슬찬이 얼굴에 묻은 뻘을 훔쳤다. 허망하기 짝이 없는 눈빛이었다.

“진혁아······.”

“근츤느?”

뻘을 잔뜩 뒤집어쓰고 벌렁 자빠진 모습에 진혁이 이를 악물었다. 대놓고 웃으면 조슬찬이 서운할까 배려한 것이었다.

조슬찬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나, 오줌 쌌는디. 어차피 물이니께 상관 웁겄지? 옴니랑 아부지헌티 비밀 지켜줄 거지?”

“으그흑-. 크흑!”

미처 입을 열지 못하고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진혁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가끔 이렇게 웃겨주는 사람이 있어서 진혁은 사는 맛이 난다.

그러나 진혁의 입을 막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짧은 팔 손유진이 조슬찬에게 삿대질을 했다.

“에헤헤-. 쉬했지요? 지저기 안 찼지요? 에헤헤헤헤헤-.”

아, 유진아.

조슬찬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월! 워러월!

장군이도 꼬리를 흔드는 것이, 함께 놀리는 듯 보였다.

친구가 상처받을까, 진혁은 끝내 웃지 않고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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