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53화 (53/338)

# 53 < 두 호구 (3) >

홍기준의 반응을 살피는 진혁의 눈이 빛났다.

이 정도면 사고 나기 전 당신이 던진 질문에 답이 되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그 사람이라면 당연히 눈치채지 않을까요. 진혁은 시선에 기대를 실었다.

그러나 이내 나온 홍기준의 반응은 실망스러웠다.

“흐음-. 그렇구나. 그런 거라면 지금 충분히 누리고 있지 않니?”

“네. 그렇죠······.”

진혁은 대답에 아쉬움을 담았다. 물고기가 미끼에 반응을 보이지 않아 허탕 친 기분과 비슷했다. 숨찬 것도 참아가며 말도 길게 했는데, 이 아저씨는 그 할아버지랑 다른 사람인가? 올림픽 순위 맞히기 내기를 제안할 때는 홍기준이 회귀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내심 반가웠건만, 괜스레 서글퍼졌다.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기연이 아무에게나 흔히 일어난다면 기연이라 부를 수 없겠지.

“그런 의미라면 다행이구나.”

평소 듣지 못하던 진혁의 생각을 길고 자세히 들어서였을까, 홍기준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난 네가 방황이라도 할까 걱정돼서 보자고 한 건데, 그런 거라면 이 아저씨가 도울 방법이 많겠구나. 마침 구상 중인 것도 있고.”

진혁은 건성으로 들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뭔가에 몰입했을 때의 버릇이었다.

‘대놓고 물어봤다가 아니면 무슨 개쪽이냐.’

차라리 유진이처럼 물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에헤헤-, 저는 미래에서 왔지요? 회장님도 오셨지요? 에헤헤.

아니야,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과장 조금 보태면 정신병원 가기 딱 좋은 멘트였다. 실제로 홍기준이나 손광연은 그만한 능력도 있는 사람들이다.

‘여차하면 조때는 거다.’

육성찬의 아버지도, 조일헌도 귀신을 봤다는 말을 했다가 마을 이장 손에 이끌려 정신병원에 입원할 뻔하지 않았나. 진혁이 평소 농담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말수가 많지도 않았기에 농담을 가장해 묻는 방법은 피해야 했다.

어떻게 얻은 새 인생인데, 정신병원에서 썩을 순 없지.

‘애고 어른이고 간에 어려운 사람 앞에서도 당돌하게 말하는 사람은, 역시 드라마에나 나오는 거야.’

현실은 무겁다.

말 한마디 하기에도 큰 용기가 필요하지 않은가. 진혁은 차마 나오지 않는 말을 삭였다.

그리고 홍기준이 진혁의 회귀를 믿는다 해도 문제다.

‘이 아저씨 속셈을 모르니 밝히지 않는 게 나을 수 있겠지.’

아무리 홍기준이 믿을만한 사람이라지만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일 아닌가. 뭐, 악용할 여지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경쟁자로 여기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질 수 있지.

‘좀 더 지켜보자.’

그리 결론 내린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오래 생각했을까.

저 혼자 미간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젓다가, 끄덕이는 진혁을 홍기준이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서운한 빛도 담겨 있었다.

“아저씨가 뭘 구상 중인지 안 궁금하니?”

“······궁금은 하네요.”

진혁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최미경 청소년이 왜 자신과 대화할 때 입술이 돌출되는지 알 것 같았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니 그런 거였어. 이렇게 세상과 사람을 하나 더 배운다.

“네가 말하는 평범한 삶을 도울 생각이다.”

왜죠?

아저씨 아니어도 우리 집 잘 사는데.

“넌 엄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니?”

알만큼은 알거든요. 그렇게 되돌려주고 싶었지만 진혁은 할 말이 없었다.

엄마도, 아빠도 사연 있는 사람처럼 굴었으니. 아픈 과거보다 행복한 현재가 더 중요하다 여겼기에 진혁은 파고들지 않았다.

아픈 기억을 헤집는 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잘 아는 진혁이다.

마냥 아이처럼 굴 수 없었기에 호기심을 꿀꺽 삼키고 살아왔다. 부모님이 아픈 걸 원치 않았고, 제 호기심 충족을 위해 누굴 아프게 하는 무례는 저지르고 싶지 않았으니까. 궁금한 건 참으면 그만이다. 인내하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이건 비밀인데 네게만 말해주마. 아하하-, 나도 너희 엄마가 부탁한 게 있어서 알아본 거지, 뒷조사를 한 건 아니야. 오해는 하지 마라.”

그러니까······.

아들에게 말 못 하는 속내를 홍기준 아저씨에게는 말했다는 거 아닌가. 사춘기 아들이 심란해할까 염려한 부모님 심정을 헤아리면서도 진혁은 홍기준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우리 회장님, 엄마 아빠한테 호구 잡히셨구나. 사람 좋아서.’

보나 마나 휴가 때마다 붙어있는 아빠는 엄마보다 더했을 터.

그래도 한때 그룹 오너라 불리던 보스 중의 보스인데, 농사꾼 부부의 대나무숲 노릇을 하고 계시다니. 왠지 딱해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홍기준의 눈은 우수에 젖었고 어깨는 쭈구리 같았다.

“너희 엄마가 어르신 누명 건에 대해 말씀하시던 중에 듣게 된 건데······.”

진혁은 엄마에게 듣지 못했던 김응녀의 과거 행적을 들을 수 있었다.

“······이제 와서 피해 사실을 증명할 수도 없고, 그 사람들이 가져간 건 패물 정도라서. 옥비녀라든가, 화폐개혁 전의 지폐······. 피해자가 있다 해도 공소시효라는 것도 생각해야 하고. 어르신께서 후처의 딸도 비속으로 호적에 올리셔서 강도나 절도범으로 규정하기도 어렵고. 참 너그러운 분이셨을 것 같구나.”

진혁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 아직 내게는 해를 입히지 않았지만 이미 엄마에게 못할 짓을 했구나.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법전을 끼고 살 때도 느꼈지만 공소시효는 정말······. 잠시 형사소송법을 떠올리던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진혁이 어렴풋이 알고 있던 내용도 나왔다.

“소달구지 타고 다니던 마을에서 훈장을 하시던 분이 그런 일에 연루될 리가 없다고 본다. 네 엄마에게 듣기로 어르신께서 주로 만나던 사람들도 아이들이나 동네 사람들 정도라고 했으니까.”

그도 그럴 것 같았다.

진혁이 사는 동네만 해도 불과 몇 년 전까지 외지인의 방문이 거의 없지 않았나. 엄마가 사시던 곳은 더한 시골이라고 들었다.

“끌려가셨던 이유가 누군가의 제보 외에는 없다고 봐야지. 그땐 지금보다 민감하던 때라 투서나 전화 한 통이면 누구든 간첩 혐의로 끌려갔다. 미안하게도 아저씨가 아직 그쪽에는 줄이 없어. 그래서 결과는 장담할 수 없겠다.”

진혁은 숙제를 얻은 기분이었다.

아무렴, 동생을 위해 아버지 땅 삥땅 칠 때 치더라도 평범한 아들이라면 엄마의 한 정도는 풀어드려야 하는 거 아닐까.

“처음엔 네 걱정이 돼서 보자고 한 건데 내가 별소릴 다하는구나. 미안하다. 허허헛-.”

미안한 사람으로 보기엔 홍기준은 너무나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말할 곳 없으니 답답했겠지.

과거 홍수정 전무도 이렇게 홀가분한 표정을 짓곤 했다. 뾰루지 나고 누렇게 뜬 얼굴로 화장실을 들락거리다가, 마침내는 환하게 핀 달맞이꽃처럼.

‘예뻤지······.’

진혁은 운동화로 바닥을 직직- 비벼 삼천포로 빠지려는 생각을 재빨리 다잡았다.

“제가 나중에 알아보라는 말씀이시죠?”

“응? 뭐가?”

“외할아버지 이야기 해주신 거요.”

“아니? 아닌데?”

무슨 소리냐는 듯 홍기준이 눈을 끔뻑댔다.

“나도 어디 하소연할 곳은 있어야 하지 않겠니? 진혁이는 아직 어려서 무슨 뜻인지도 모를 것 같고,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과묵하기도 하고. 아닌가? 어리지 않은가? 알 거 다 알려나?”

홍기준이 뺨을 긁었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진혁의 시선을 외면하면서였다. 이제 보니 키도 비슷하고 체격은 진혁이 더 크다. 어리다고 하기에는 발육이 너무 좋았다.

‘나······, 이 아저씨한테 호구 잡힌 건가?’

어허- 날씨 좋다. 홍기준은 늙은이처럼 하늘만 살폈다.

날씨가 좋기는. 장마 오려고 한껏 찌푸렸는데.

가늘어진 진혁의 눈초리가 부담스러웠을까, 짭짭- 입맛을 다신 홍기준이 말을 돌렸다.

“아무튼 다행이다! 난 네가 방황이라도 하는 줄 알았지. 옳지 못한 길로 드는 순간 재능이고 뭐고 악행을 위한 흉기로 돌변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진로를 묻고 싶은 거였고.”

“할 수 있는 건 뭐든 할 거예요. 뭘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허허허-. 내가 한 방 먹었구나. 그렇지. 하나만 고집할 필요는 없지.”

후웁- 깊이 숨을 들이쉰 진혁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시선은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중학생들을 향해 있었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응? 뭐가 말이냐?”

“아직 애들이잖아요. 윤성동도 그렇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저 소망처럼 들릴 말이었으나,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홍기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에게 보이지 않는 방향의 입꼬리가 실룩 올라갔다.

‘일단은 그렇게 하자. 애들은.’

홍기준은 진심으로 기분 좋은 표정이 되었다.

소매를 걷어 시계를 확인한 홍기준이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저씨는 너희 아빠처럼 천재가 못 되는 사람이야. 그저 공부하는 재주나 있었지. 그런데 그마저도 손광연을 넘어보지 못했다. 그 친구보다 잠도 덜 자고 공부만 했는데 말이다. 그놈은 막노동에, 과외, 택시 운전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한 번도 수위를 내주지 않았어. 에이- 징그런 놈.”

그리 말하면서도 홍기준은 즐거워 보였다. 아빠와 함께 나눈 추억이 그만큼 깊어서겠지.

‘아빠는 정말 좋은 친구를 두셨구나.’

홍기준이 옆에서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지만 진혁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김응녀가 엄마에게 한 짓을 어떻게 되갚을지,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이 되었으니까. 홍기준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있자니 귀에서 피가 날 것 같기도 했고.

“······ 이것저것 눈치 볼 것 없이 네 꼴리는 대로 사는 거지 뭐. 사고만 치지 말고. 듣고 있니?”

“예에-, 예.”

진혁의 심각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을까, 홍기준은 진혁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당부도 잊지 않았다.

“뭘 어떻게 하려고 애쓸 것 없다. 그 사람들도 산 목숨인데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불이익을 주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그런 걸 보면 너희 엄마도 장군이, 아니 군자 같은 분이시지.”

홍기준은 재빨리 표현을 정정했다. 하필 개 이름을 그렇게 지었냐고 생각하며.

“막말로 네 엄마가 그럴 마음이 있으셨다면 벌써 아빠에게 말했겠지. 그랬다면 네 아빠가 가만히 있었겠니?”

진혁은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빠의 인맥이라면 법으로 어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해를 입힐 수 있을 터였다. 적어도 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에게는 말이다. 속내가 어떤지는 몰라도, 어쩌면 엄마는 혼자서만 끌어안고 살 생각으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역시 우리집 최고 어른은 엄마야.’

엄마 뜻이 그렇다면 일단 과거는 묻어두는 게 좋겠다.

용서도, 복수도 엄마 몫이니까.

일단은 그렇다는 거다.

진혁의 반응엔 관심 없다는 듯 홍기준의 입이 다시 모터를 달았다.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지? 아, 그래. 너희 아빠가 말이다. 갯벌에서 오줌을 갈기는데 이 친구가 게 구멍을 조준하고-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는데 이게 게거품인지 오줌 거품인지- 크핫핫핫핫-!”

“······.”

이번에는 진혁이 시계를 들여다봤다. 홍기준 혼자 떠들기 시작한 게 벌써 20분, 처음 보는 모습이다.

이 얘기했다가, 저 얘기했다가.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말이 너무 많지 않나.

진혁이 살던 시대에서는 일컬어 뇌절이라고 했던가.

‘이 아저씨 언제 가시나.’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네.

마치 집중을 방해하려는 것처럼 끝없이 이야기를 쏟아낸다.

***

“어? 엄마? 아빠? 안 가셨어요?”

교실로 돌아가던 진혁은 학교를 구경하는 부모님을 발견했다. 당연히 유진이와 장군이도 함께였다.

다소 멍한 눈동자의 손광연이 어물어물했다.

“너 오면 가려고 기다렸지.”

“전 태양이 형 훈련 도와주기로 했는데요.”

진혁은 가끔 최태양과 신우성, 이승훈의 개인훈련을 봐주고 있었다.

오늘은 단단히 사고를 쳤으니 씨름 훈련 도와달라며 최태양이 이상한 논리를 펼쳤다. 진혁은 그런 최태양을 보며 최미경의 친오빠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기준이 차 타고 우리 먼저 갈게.”

“아저씨 가셨는데요.”

“응?”

“형사들이랑 뭔가 얘기하더니 가셨어요.”

“하 씨-. 이 나쁜 새끼. 지 차 타고 나왔는데.”

홍기준의 복수는 뜻하지 않게 이루어졌다.

호구 잡혔던 한을 풀 듯 한방에 응징한 셈이다.

손광연의 뇌리에 운전하며 박장대소할 홍기준의 모습이 그려졌다.

“개새-.”

아내의 눈치를 살핀 손광연이 입을 닫았다.

서울 사나이가 오늘은 못난 모습을 너무 많이 보였다.

손광연은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잡았다.

버스를 타려 했으나 장군이가 낑낑거리며 버스를 거부한 탓이었다.

사실, 아내와 딸도 있는데 시골 버스에서 담배 피우는 이들 때문에 승차를 꺼리기도 했고.

택시 기사가 장군이를 보며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아저씨, 개는 좀-.”

“오오-, 요즘 택시는 미터기 안 꺾어요? 이상하다? 시골 택시라 그런가? 나 서울 살 때는-.”

“출바알-!”

한마디 하려던 택시 기사는 손광연과 손유진의 합공에 1단 기어를 넣었다.

빈차로 나와야 하는데. 투덜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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