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 사고 쳤어요 (2) >
홍기준은 바둑이나 골프를 칠 때도 부하직원들 부담 주기 싫다며 내기를 걸지 않았다. 가뜩이나 접대 바둑을 두는 임원들 투성이라 재미가 없는데 내기까지 걸면 그들의 속이 얼마나 타겠냐는 말도 했다.
그래서 한 수도 접어주지 않는 진혁과 어울리는 걸 선호했는지 모르겠다.
“케흠! 무슨 내기?”
갑작스러운 제안에 맥주가 걸렸는지 손광연이 명치를 두드렸다.
“올림픽 메달 개수나 종합순위, 금메달이 나올 종목 같은 거 말이야.”
“내기는 무슨. 그런 거 좋아하지도 않는 친구가 별일이네.”
“재미로 하는 거지. 애들 방학 때 내려와서 같이 올림픽 보는 것도 재밌겠다.”
진혁은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관련된 기억을 떠올려봤지만 기억나는 게 없었다. 마라톤에서 금메달이 나왔다는 정도? 양궁은 원체 잘하는 종목이니 거기서도 나왔겠지. 정말 정보가 없구나 싶었다. 책이나 외우고 신문 배달하고, 밤에는 TV도 없는 다락방에서 또 책이나 봤으니.
‘그때 세상을 알았더라면.’
그러고 보니 왜 거길 벗어날 생각을 못했을까.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뻔했지만, 세상살이를 알았더라면 영악하게 굴 수 있지 않았을까.
잠시 회상에 잠긴 진혁을 홍기준이 건져 올렸다.
“진혁이도 같이 할래?”
빛나는 홍기준의 눈을 보며 진혁은 생각했다.
저 자신만만한 눈빛.
‘혹시 홍기준 회장도 돌아온 게 아닐까.’
결과를 알고 베팅하려는 걸지도 몰라. 감히 세인그룹 회장을 상대로 바둑과 골프를 한 번도 져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과거의 내게 복수하려는 건 아닐까.
정보가 없을지언정 진혁은 바보가 아니다. 그런 상대와 내기에 임하는 건 바보나 할 짓이지.
진혁이 결심한 듯 입을 열 때였다.
“저는······.”
“그래. 해라. 아빠가 돈 보태준다.”
어이구야-.
아빠가 이렇게 즐거워할 땐 진혁으로서도 방법이 없다. 어울려드리는 수밖에.
복잡하게 하면 재미없다며 종합순위 맞히기로 내기가 정해졌다.
“나는 10위에 건다! 지난 대회에도 4위 했으니 그 정도는 하겠지!”
홍기준이 10위를 선점했다.
진혁은 들리지 않게 탄식을 뱉었다. 아, 바르셀로나 때 10위 했었나 보다. 저렇게 자신만만한 걸 보면 저 아저씨는 미래를 아는 걸지도 몰라. 과거로 돌아오신 거냐고 묻고 싶어도 홍기준은 대하기 어렵다.
‘쫌 불편해.’
멀쩡한 사람에게도 족쇄처럼 작용하는 존재가 있지 않던가. 진혁에게는 양부모 가족이 그러했고, 홍기준이 그런 사람이었다. 보스였으니까.
“그럼 나는 6위.”
“6위? 해외에서 열리는데 가능할까?”
“아 몰라. 내가 너보다 밑에 있을 순 없지.”
아빠는 언제 봐도 이상하다. 내기에조차 이상한 이유를 걸지 않나.
홍기준이 눈을 빛내며 진혁을 보았다.
“진혁이는?”
“저는······.”
홍기준의 수첩에 진혁이 숫자 8을 썼다.
“오-, 꽤 높게 잡았네. 부자가 아주 긍정적이셔? 진혁이 이유도 들어볼까?”
“그냥요······.”
기억나지 않아서라고 대답하면 누가 봐도 이상할 테고, 그냥 6과 10 사이를 택했다고 하려니 너무 없어 보였다. 아빠보다 위에 적으려니 후레자식이 될 것 같고, 뭐 아무튼.
“저······, 그런데 내기 보상은 뭐예요?”
“너희 아빠 땅으로 할까?”
“내 땅을 왜 네 멋대로 걸어 인마!”
진혁은 버럭하는 아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땅에 진심인 아빠인데 홍기준이 선을 넘은 거지.
아빠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늘게 뜬 눈으로 홍기준을 응시하며.
‘이 아저씨는 우리 아빠 땅을 노린 회귀자가 아닐까.’
설마. 홍기준 회장은 부동산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마, 장인인 전대 회장의 영향이 컸다고 들은 거 같은데.
손광연이 정리하고 나섰다.
“그냥 돈으로 해.”
“그럼 진혁이가 불리하지 않나?”
“저 백만 원 정도 있어요.”
아빠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언제 그렇게 모았을까 하는 눈빛이었다.
“졸업할 때 받은 학교 저축 통장이랑, 아빠가 용돈 주신 거 합치면 그 정도 돼요.”
“좋았어! 백만 원 빵!”
홍기준이 선언하듯 힘껏 외쳤다.
백만 원 있다는 말이지 그 금액 모두 걸겠다는 뜻은 아닌데.
진혁도 남자지만 어른 남자들 심리는 이해할 수가 없다.
자칫 잘못하면 초등학교 시절 열심히 저축한 돈을 홀라당 털리게 생겼다.
‘걸지 뭐. 생판 남도 아니고 내 사람들이 즐겁다는데.’
용돈 필요하면 엄마한테 손 벌리면 된다. 우리 집 최고 현금 부자는 엄마니까.
“야, 천만 원으로 해. 아빠가 보태준다고 했는데.”
아빠의 폭탄 발언에 진혁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지금 천만 원이면 도대체 얼마냐. 무려 천만 원인가.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가치를 따지던 진혁의 회로가 꼬여버렸다.
“진심이냐?”
지갑에서 수표를 꺼내던 홍기준도 놀란 눈치였다.
술이 센 손광연이 허투루 내뱉은 말도 아닐 터. 취했다 해도 정신이 흐릿해질 사람도 아니다.
진혁은 아빠의 의중을 파악해보려 애썼다.
그러나 늘 그렇듯 꾼들은 상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좋아 까짓거! 손광연만 남자냐! 나도 불알 달린 남자다!”
왜 이 대목에서 불알스를 자랑하는 걸까.
전생에 보니 그렇게 실하지도 않던데. 그땐 나이가 많아서 쭈그렁 방탱이가 되었던 거고 지금은 젊으니 부피와 무게감이 남다른 걸까.
‘남자들이란.’
아무튼, 애늙은이와 철없는 두 남자가 벌인 뜻밖의 도박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유진이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기에 진혁은 먼저 집에 들어갔다.
홍기준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면서.
‘수상해.’
진혁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따뜻한 물로 유진이의 얼굴과 손을 씻겼다. 목과 귀도 씻기고 코도 풀게 했다.
“흥!”
취잇-.
꾸벅꾸벅 졸다가 세수를 당하니 칭얼거릴 만도 한데, 유진이는 오빠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랐다. 이래저래 예쁜 동생이다.
“어이구 착하다 우리 애기.”
“에헤헤-, 착하지요?”
잠에서 깨는듯하더니 유진이는 금세 곤히 잠들었다.
언제봐도 순둥이다. 유진이를 엄마 방에 눕히고 집을 나섰다.
장군이와 동네 마실을 다니며 홍기준을 향한 의심을 정리했다.
순전히 올림픽 내기 때문이었다. 달리 의심할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야, 장군아. 네가 보기에는 저 아저씨 수상하지 않냐?”
헤헤헥-? 장군이는 갸웃거릴 뿐이었다.
에라이, 말을 말아야지. 진혁이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보면 수상하지 않다는 뜻 같기도 하고.
‘조만간 떠봐야겠다.’
뭐라고 묻는 게 좋을까.
어떤 식으로 물어야 오해를 사지 않을까.
아, 이상하게 친해지기 어려운 아저씨다.
올 때마다 아빠와만 어울리니 그럴만했다.
두내리에는 아웃도어 레저를 즐기는 남자 어른이 즐길 거리가 무궁무진했다. 여름에는 갯벌과 시원한 산을 오르고, 겨울에는 칡뿌리를 캐거나 산토끼, 너구리 등 산짐승도 쫓으며 포식자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홍기준은 방학 때마다 손광연의 손에 이끌려 바다로, 산으로 모험을 다녔다. 처자식을 버리고.
‘천천히, 제대로 파헤쳐 보자.’
역시 청소년의 몸이 되니 생각이 많아지는 모양이다.
***
다음 날.
일찌감치 운동을 마친 진혁은 교실에서 채규호를 기다렸다.
교실 밖에서 채규호를 기다리는 박용석이 보였다.
저 녀석의 역할은 뭘까, 피해자들 모으는 모집책 같은 걸 텐데.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교사에게 제보하는 선택지는 제외했다.
교사 세계의 생리는 뻔하다. 이 시절의 교사는 더더욱.
학대를 당하는 진혁의 상황을 알면서도 외면했던 교사들이다. 학생들 간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교사는 이 시대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고 치면 두들겨 패기는 하겠지.’
무수한 탈선이 벌어져도 교사들은 게임 속 NPC처럼 굴지 않던가. 함께 만드는 세상이라더니, 그 ‘함께’에 가난하고 약한 피해 학생은 없었다. 체벌도 일부 개구쟁이에 국한되어 있었다. 진짜 문제아들에게는 손댈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말이 정확할 터였다.
진혁은 결심을 굳혔다.
‘법으로 처벌하지 못하는 미성년자들.’
박용석과 대화하는 채규호가 보였다.
‘나도 미성년자다.’
채규호가 교실로 우다다 달려 들어왔다.
믿는 구석 진혁에게 자세히 보고하는 걸 빼놓지 않았는데 어쩐 일인지 말도 더듬지 않았다.
“반장! 쟤가 돈 내놓으래! 어제 준 돈 뱉어낸다니까 필요 없고 이자 달래!”
쥐똥만 한 새끼가 감히 내 짝꿍 삥을 뜯어?
어린 것들이 신성한 학교에서 일수놀이를 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벌떡 일어선 진혁은 속으로 욕을 내뱉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스핑크스처럼 입을 열었다.
“너, 이리 와 봐.”
죄지은 영혼에게는 가장 무섭게 들릴 말이 진혁의 입에서 나왔다.
채규호를 잡으러 들어오던 박용석이 움찔 놀라 뒷걸음질 쳤다.
아침 해를 가리고 선 손진혁이 저승사자처럼 시커멓게 보였다.
‘어으, 씨- 뒈지게 무섭네.’
그가 상대하기에 진혁의 그림자는 너무 크고 짙었다.
그렇다면 줄행랑이다.
진혁은 교실 뒤편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수업 시작 전까지 20분가량 남은 시각.
그대로 박용석을 쫓아 걸음을 옮겼다.
***
손광연과 홍기준은 평상에 앉아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느티나무 밑에서 친구와 함께 마시는 달달한 믹스커피 한 잔에 행복했다.
백돌을 쥔 손광연이 후루룹- 커피를 마셨다.
“으앗! 뜨거 씨-.”
손광연은 입술을 만지면서도 아내가 보고 있지는 않은지 두리번거렸다. 한유영 앞에서 모양 빠지면 안 되니까.
뻐뻐뻡- 연신 입술소리를 내다가, 피식거리는 홍기준에게 시선을 보냈다.
“어르신은 무탈하시고?”
“그렇지 뭐. 어찌나 정정하신지 걸핏하면 바둑 두자고 부르셔.”
“다행이네. 그런데 아들이 둘이나 있는데 사위를 편애하시나?”
“딸을 예뻐하시는 거지. 처남들은 바둑에 소질도 없고.”
손광연 또한 홍기준의 장인이자 세인그룹 회장인 유명선을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갈 곳 없는 그를 후원하고 알게 모르게 보살펴준 사람이니 잘 안다는 말로는 부족할 터였다. 그러나 만나기를 꺼렸다. 10년 넘게 은둔생활을 하다가 이제 와 찾아가기 면목이 없다는 표현이 적절하리라.
그 마음을 아는 홍기준이 넌지시 말을 던졌다.
“언제 인사드리러 갈 생각 없냐?”
“글쎄. 무슨 염치로. 설마 내 얘기한 건 아니지?”
“얘기는 무슨. 입이 근질근질한 것도 참고 있는데.”
홍기준이 염불하듯 중얼거렸다. 바둑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내 얘기 물으시거나 하지는 않고?”
“뭘 알고 물으시겠냐. 혹시나 미행이라도 있을까 봐 휴가 때마다 빙 둘러 온다.”
“미행?”
“재벌들 잘하는 짓이잖냐. 나도 세라랑 결혼하고 미행 많이 당했지. 오랫동안 안 보이더니 봄부터인가? 수상한 놈들이 다시 붙은 거 같아.”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분명 최근에도 미행이 붙었다.
외도를 의심하는 건가 생각하기도 했지만, 유세라와 함께 있을 때도 미행을 했던 걸 볼 때 그 이유만은 아닐 거라 여겼다. 그렇다고 장인에게 대놓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 홍기준은 운전 실력 향상을 통해 미행을 뿌리치는 길을 택했다.
“요즘도 이상한 놈들 가끔 보여. 뭐 하자는 수작인지 통 모르겠어.”
“미행이 아니라 경호 아냐?”
“뭐······, 그럴지도.”
홍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속내는 그렇지 않았지만 친구 마음이라도 편하길 바라는 뜻이었다. 대통령도 아닌데 무슨 경호를 숨어서 한단 말인가.
손광연 또한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건넨 말이었을 뿐, 경호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어린 시절부터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얼마나 꼬리를 달고 다녔던가.
‘재벌들이란······.’
바둑판에 흑돌이 떨어졌다.
홍기준이 혀를 내둘렀다.
“햐-, 광연이 기력 옛날보다 올라간 거 같은데? 나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이기질 못하겠어. 대국자도 없을 텐데 비결이 뭐냐?”
“말도 마라. 진혁이한테 한 판을 못 이긴다.”
아들이 아홉 살일 때부터 쭉 전패의 신화를 써온 손광연이었다.
홍기준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하더니 파안대소했다.
“네가 드디어 적수를 만났구나! 으하하하!”
“내기라도 했으면 내 땅 진혁이한테 다 뺏겼을 거여-. 크크큭.”
두 친구가 유쾌하게 웃는 사이 현관이 열리며 한유영이 나왔다.
핏기 없는 얼굴로 파르르 떨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손광연의 몸이 벌에 쏘인 망아지처럼 아내를 향해 쏘아졌다. 아내를 끔찍이 여기는 그였기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까닭이었다.
“괜찮아요?”
“오빠······. 우리 진혁이가······.”
한유영의 몸이 끝내 털썩 무너져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