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48화 (48/338)

# 48 < 사고 쳤어요 >

***

학기 초, 친구들은 진혁을 무서워했다. 무표정과 과묵함으로 일관하는 성격 탓이었다. 그러나 진혁이 여느 또래 아이들처럼 욕을 한다거나, 힘 좀 쓴다는 녀석들처럼 친구를 윽박지르거나 괴롭히지 않자 두려워하기보다는 조금 어려워하는 정도로 변했다.

“선생님, 범석이가 아프다는데요. 열도 좀 나는 것 같습니다.”

“어, 어? 그, 그래. 그럼 외, 외출증 끊어줄까?”

아프거나 집에 일이 있는 친구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챙겨주는 모습도 친구들의 인식을 전환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물론, 그런 진혁을 고깝게 보는 녀석들도 있었다. 학기 초 진혁의 무용담을 부풀려진 거라 믿으며 진혁을 경쟁자로 상정해 언제든 깔아뭉개겠노라 생각하는 녀석들.

‘야, 저새끼가 그때 그새끼여?’

‘딱 보면 모르냐, 빙시나?’

‘아오, 저걸 확!’

사람이 모여 있는 세상에서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무용담이란 믿는 자에게는 신성시되는 것이지만 보지 않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허풍에 불과하기 마련이었으므로.

그리고 그건 선배라고 예외가 없었다.

그중엔 어설프게 혼나고 이를 가는, 한때 씨름부원이었던 녀석들도 있을 테고.

점심식사를 마치고 신우성과 이승훈의 공부를 돕던 어느 날이었다.

공붓벌레 채규호도 거기 꼽사리 껴서 진혁으로부터 과외를 받았다.

박용석이라는 옆 반 아이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야, 채규호, 성동 형이 보자더라.”

“어? 나, 나? 왜왜, 왜?”

“몰라, 인마.”

진혁이 함께 있었기에 인상을 쓰거나 욕을 하지는 않았지만 박용석의 태도에는 특유의 껄렁함과 띠꺼움이 녹아 있었다.

진혁은 교실을 나서는 채규호와 박용석을 슬쩍 곁눈질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쉬었다 하자.”

여름방학을 앞두고 더워진 날씨, 진혁이 무서워 식곤증도 호소하지 못하는 두 씨름부 친구를 위한 조치이기도 했지만.

‘성동이라면 3학년 윤성동이겠지. 우성이 삥뜯던 놈들 뒤에 그놈이 있을 테고.’

짝꿍 채규호가 걱정되었다.

채규호는 평소 누가 괴롭힌다거나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호소하지 않는 친구였다. 진혁은 윤성동이 짝꿍을 불렀다는 사실에서 불결하고 불쾌한 공기를 느꼈다. 그건 진혁의 본능과 결합한 과거 정보에서 오는 경고였다.

‘우성이를 칼로 찔렀던 놈.’

진혁이 서른다섯 살 되던 해였다. 윤성동은 술집에서 신우성을 살해하고도 무혐의로 풀려났다. 조폭 두목인 부친이 동원한 대규모 인맥 덕분이라는 말을 이승훈에게 들었다.

3학년 윤성동은 폭력으로 1년 유급했기에 3학년들 중에서도 왕으로 군림하고 있을 터였다. 진혁은 친구 신우성을 위해서라도 윤성동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참이었다. 학기 초 혼내준 3학년 씨름부원들이 언제고 움직일 거라 예상하고 있었고.

진혁이 신우성의 어깨를 다독였다.

“내일 아침에 숙제 검사할 거야.”

“으아아-, 차라리 죽여.”

신우성이 머리를 감싸 쥐고 절규했다.

진혁이 짐짓 화난 척 신우성을 노려보았다.

“아, 아니야. 살려 줘.”

“다 하지 않아도 된다. 한 문제만이라도 이해하고 풀면 돼.”

하려면 제대로 하라. 신입사원 홍수정에게도, 마일스톤 기한을 중시한 나머지 허점투성이 프로젝트를 억지로 끌고 가는 팀원들에게도 진혁이 했던 말이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신우성의 눈에는 ‘수학 어려워’라고 쓰여 있었다.

채규호를 찾아 교실을 나서는 진혁의 등 뒤로 신우성의 푸념이 들려왔다.

“반장은 야자도 않고 집도 먼데 어떻게 공부를 잘하는 거지?”

“얀마, 지금 그게 중요허냐? 반장이 우덜 붙들고 공부 갈치는 이유가 더 궁금해야 하는 거 아녀? 우성이 넌 인마 생각을 좀, 그 머여-, 전략적으루다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이이?”

이승훈이 신우성보다 좀 더 똑똑했다. 그러니 태양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씨름을 계속할 수 있었던 거겠지.

친구들의 대화를 들으며 진혁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교과서 다 외우면 되는데.’

순진한 녀석들.

진혁은 수학의 정석과 성문종합영어까지 외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전보다 외우는 시간은 더 오래 걸렸지만 한 번 해봤기에 어렵지 않았다.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오 그대여- 가아지 마세어오오-.”

복도에 나가니 최신가요를 흥얼거리며 오징어처럼 흐느적거리는 녀석들이 태반이었다.

진혁은 그들을 보며 잠시 한숨지었다.

‘올드하군. 방탄 선생님들은 언제 데뷔하시나.’

탄생이나 하셨으려나. 〈전하지 못한 진심〉이라는 곡의 멜로디와 가사에 꽂혀 매일 들을 때가 있었다.

‘아르미 가입할까 고민도 했었지.’

블랙벨벳과 레드핑크도 괜찮았다. 또 누가 있었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머리 하나는 좋았는데 신기한 일이다.

‘피부로 겪은 일 외에는 잘 떠오르지 않으니.’

자신이 살던 시대의 역사 자체가 가물가물하지 않은가.

그러나 의문은 잠시뿐이었다.

지금은 중요한 일로 마음이 급해 회상에 빠질 여유가 없었다.

‘왜 안 보이지?’

학교를 훑었지만 좀처럼 채규호를 찾을 수 없었다.

갈 곳은 뻔한데.

수돗가에도, 보조 운동장에도, 윤성동이 있을 3학년 교실에도 채규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교실로 돌아올 때였다.

“어? 반장?”

교실로 돌아오는 채규호를 만났다.

손에는 지폐 몇 장을 든 채였는데, 상기된 듯하면서도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채규호를 불러세웠다.

“무슨 일이라더냐?”

“나도 모르겠어.”

채규호는 손에 들린 지폐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윤성동을 만나고 온 채규호의 설명을 들은 진혁은 한숨을 푹 쉬었다.

‘싹수는 변하지 않는구나.’

진혁이 알기로, 그것은 일수놀이라 불렸다.

세력을 꾸린 불량학생들이 순진한 학생들에게 친구비라며 아무런 조건 없이 돈을 주는 것인데, 피해자들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5, 6만 원에 달하는 큰돈을 주니 처음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기 전에 다음 날부터 악몽이 시작된다.

이자를 갚으라며 협박과 폭력이 자행되는 것이다.

어린 학생들이 설마 그럴 리가 있느냐고?

어리고 철이 없을수록 자극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쉽게 빠져드는 게 인간 아니던가. 그리고 선행보다 악행이 주는 자극이 더 강하고, 복제도 쉬운 법이었다.

그 옛날, 누가 봐도 가진 것 없고 불행해 보이는 진혁으로서는 그런 불량학생들의 관심에서조차 멀리 있었기에 딱히 피해를 본 경험이 없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자살한 학생도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손진혁이 워낙 아웃사이더였고, 친구가 없었기에 그 학생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사건 자체는 워낙 떠들썩했다.

‘이름이······ 뭐였더라······?’

성 씨도, 얼굴도 모르는 동창이었다.

멀리 떨어져 관망하던 진혁에게조차 충격이었다. 단지 학생이 자살해서가 아니라, 학교와 경찰 측에서 단순 자살로 사건을 종결지은 탓이었다.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채규호가 웅얼거렸다.

“그 형이 친하게 지내자고 그냥 용돈이라고 줬어.”

“다른 얘기는?”

“그냥 내일 보자던데.”

아무런 대가 없이 돈을 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진혁은 일수놀이가 아니기를 바랐다. 친구 손에 있는 돈을 빼앗아 돌려줄까 고민했으나 모양새가 이상할 것 같아 자제하기로 했다. 주제넘은 짓이었다.

‘일단 지켜볼 필요도 있을 것 같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 데에는 과거와 다른 양상으로 흐르기를 바라는 진혁의 소망도 담겨 있었다. 황가영을 보며 놀라면서도 이를 갈거나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 것 또한 아직 그들이 진혁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기에 그런 것이었다.

‘지금은 다른 세상을 살고 있잖아.’

누가 부추기지 않아도 충분히 인간혐오를 경험한 진혁이지만, 제 주위 사람들은 선량하고 평화로운 인생을 즐기기를 바랐다. 새로운 세상에서.

“내일 또 부르면 나한테 말하고 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으응, 반장.”

채규호가 착한 동생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진혁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윤성동에게 받은 돈을 한 푼도 쓰지 말라고 하려다 참았다.

똑똑한 녀석이니 알아서 하겠지.

어리바리해 보여도 이번 시험에 전교 2등을 한 녀석이다.

***

학교를 마치고 신문배급소에 갔다.

“진혁이 오늘이 마지막이네? 아저씨가 너무 아쉽다.”

“오래 못해서 죄송합니다.”

월급봉투를 받아들며 진혁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배급소장이 아쉬움을 담아 진혁의 어깨를 강하게 두드렸다.

“아니야. 언제든 또 와. 신문 배달이 돈은 별로 안 되지.”

일요일을 제외하고 50가구가 넘는 구독자의 집에 한 달 내내 신문을 넣고 받는 돈이 5천 원이었다. 거리 문제로 석간신문을 택했지만 조간신문이라고 처우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새벽에 일어난다는 이유로 천 원을 더 주는 수준이었으니.

당연히 한 푼이 아쉬웠던 1회차 진혁은 조간신문도 돌렸지만, 사실 벌이는 석간신문이 더 좋았다.

조간신문은 소장이 직접 수금을 하거나 고지서를 우편으로 보내는 방식이었고, 석간신문은 배달원이 영수증을 들고 다니며 수금을 했다. 복덕방이나 다방 같은 곳에 수금하러 가면 화투판을 벌인 아저씨들이 어린 학생이 수고한다며 5천 원이나 만 원 지폐를 찔러주곤 했다. 팁이 월급의 몇 배나 되는 셈이었다.

진혁은 그 돈을 알뜰히 모아 시장표 운동화를 사고, 속옷과 옷을 사 입었다. 시장통에 있는 신협에 적금도 들었다가 훗날 다락방도 탈출할 수 있었다.

세상 물정에 어두웠지만 나름대로 똘똘하게 헤쳐나갔던 셈이다.

아무튼, 목표를 달성했으니 이제 신문 배달은 더 하지 않아도 된다.

진혁은 링스치킨을 찾았다.

시장에서 파는 튀김닭은 먹어봤어도 시골에 산다는 이유로 치킨이라는 것을 접해보지 못한 엄마를 위해서였다. 시장통의 튀김닭도 맛은 좋았다. 그러나 시골 상인들이 퇴계라고 부르던 폐계를 조각내어 튀긴 것은 식감도, 풍미도 치킨에 비할 것이 못 되었다.

당당히 문을 열고 들어가 포장 주문을 했다.

“한 마리유?”

올챙이처럼 배가 뽈록 나온 아저씨가 담배를 삐뚜름히 물고 검지를 세웠다.

어디 보자, 엄마, 아빠, 나, 유진이, 장군이.

“다섯 마리요.”

“어헛-, 3만원입니다.”

“아니다, 여섯 마리 주세요.”

“어허헛-.”

신문 배달하고 받은 월급에, 수금하며 받은 팁까지. 돈은 넉넉했다. 부족했다면 아빠가 주신 용돈이라도 보탤 생각이었지만 부잣집 아들한테 치킨값 그거 몇 푼이나 한다고.

교생 실습 나온 체대생인 모양인데 회식하냐며 치킨집 사장은 훤한 낮에 찾아온 개시 손님을 기꺼워했다.

짜그르르르-.

진혁은 튀겨지는 닭을 구경하며 행복했다.

‘엄마가 좋아하시겠지?’

엄마는 시장표 튀김닭도 좋아하시니 치킨에도 감동하실 거야.

치킨을 맛있게 먹을 가족들을 생각하니 설레는 동시에 배가 고파졌다.

식기 전에 집에 닿아야 할 텐데.

*

자전거 핸들 양쪽에 치킨 세 마리씩 걸고 페달을 밟았다.

밸런스는 중요하다. 짝수로 주문한 이유였다.

차가 별로 다니지 않는 포장도로에서 진혁이 탄 자전거는 스쿠터보다 빨랐다.

평소 40분이 걸리는 거리를 25분 만에 돌파해 집에 도착했다.

‘으잉? 수정이네 왔나?’

마당에 홍기준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방학이 아니면 거의 오지 않던 사람인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오, 우리 아들 오늘은 일찍 왔네?”

“진혁이 어서 와라-.”

평상에 있던 아빠와 홍기준이 진혁을 반겼다.

왕년에 모시던 보스라는 생각 때문에 홍기준을 어려워했는데, 그를 발견한 진혁의 얼굴도 환해졌다.

‘여섯 마리 사 오길 잘했다!’

역시나, 많이 이상한 이유였다.

평상에 둘러앉아 치킨을 뜯는 가족을 보며 진혁은 행복했다. 살점만 발라 유진이와 장군이에게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녁때도 안 되었는데 웬 떡이냐며 치킨을 뜯던 홍기준이 물었다. 입가에 번들거리는 기름을 잔뜩 묻힌 채였다.

“진혁이 신문 배달 계속할 거니?”

“아뇨.”

치킨 사 먹으려고 했던 거예요. 오늘로 마지막이었답니다.

뒤엣말은 또 삼켜버렸다. 진혁의 대답은 늘 이런식이다.

답답해할 만한데도 홍기준은 그런가 보다 하며 웃어넘겼다.

“오늘은 아저씨가 지방 갔다가 그냥 들렀어.”

“네.”

그러시군요.

안 물어봤는데도 굳이 말하는 이유는 뭘까.

진혁이 자신을 불편해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럴 만도 하다. 진혁은 실제로 홍기준 대하는 일을 어려워했으니.

“자고 갈 거지?”

닭을 뜯으며 희번덕대는 눈으로 손광연이 물었다.

그 모습이 마치 돼지 뼈를 품고 으르렁거리는 장군이 같았다.

“제수씨 불편하신데 이거나 먹고 가야지. 내가 진혁이가 번 돈으로 치킨을 다 먹어 보네?”

“불편할 게 어딨어요. 주무시고 가세요.”

“아하하, 그럴까요?”

기다렸다는 듯 달가워하는 홍기준을 보며 한유영은 눈이 사라지도록 웃었다.

그러면서도 유진이 손에 닿지 않도록 콜라를 등 뒤로 숨겼다.

“아코-, 유진아 이건 안 돼-. 이건 간장이야.”

“에헤헤-, 안 되지요? 간장 짜지요?”

아직 콜라맛을 모르는 유진이는 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손광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내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술을 가져오려는 심산이었다.

친구가 왔을 때나 맛볼 수 있는 술인데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진혁은 유진이를 안은 채 맥주를 마시는 아빠들 곁을 지켰다.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데도 엄마는 과일이나 마른안주 같은 것을 계속 내오셨다. 음식은 내오는 족족 유진이와 장군이 뱃속으로 사라졌다.

“진혁이 방학은 언제니?”

“7월 마지막 주 토요일요.”

“올림픽 개막일이네?”

벌써 그렇게 됐나.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회가 어디서 열렸더라?

아, 바르셀로나에서 열렸지.

“광연이, 우리 내기할까?”

홍기준이 뜬금없이 내기를 제안했다.

진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아저씨 내기 같은 거 싫어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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