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47화 (47/338)

# 47 < 거부의 아들 (2) >

“우리 반 반장 진혁이가 1학기 중간고사에서도 전 과목 만점을 맞았다. 모두 박수 쳐줄까?”

짝짝짝-.

익숙하고도 익숙한 상황. 내심 그러려니 하면서도 건방 떨기는 싫었기에 진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이 무서웠을까, 선생님과 친구들이 움찔했다.

채규호는 진혁의 옆자리를 사수했다. 다른 녀석들에게 떠밀려 억지로 짝꿍이 되었던 학기초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반장, 이거 무슨 소린지 알려줄 수 있어?”

공부 욕심이 상당한 녀석이었는데, 수업보다 진혁의 과외가 머릿속에 더 잘 들어온다고 했다. 진혁은 기꺼이 친구들의 공부를 도왔다. 어차피 신우성과 이승훈을 가르치던 참이니 책상 하나만 더 붙이면 그만이다.

진혁은 여느 시골 중학생들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며 평범하게 지냈다.

‘다리가, 다리가 저리다.’

쉬는 시간에는 산책을 하거나 친구들과 턱걸이 많이 하기 내기를 했다. 점심시간에는 축구도 했다. 역시 운동이 최고다.

‘호르몬 때문인가. 몸이 근질거려.’

다른 아이들이 가져오는 도색잡지도 힐끗거렸는데, 일본에 사는 사촌을 둔 친구가 가져온 잡지가 유독 마음에 들었다.

“반장, 이거 가져.”

진혁의 눈길이 뜨거웠을까, 코팅된 용지에 선명하게 컬러로 인쇄된 페이지를 친구가 잘라 건넸다. 친하게 지내자는 뇌물이었다.

“난 됐다.”

모델의 아찔한 므야므야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눈에 담으며 거절했다.

참으로 힘든 결정이었다. 멀어지는 사진을 따라 진혁의 눈동자도 이동했다.

‘자꾸 생각나네.’

진혁의 집은 학교와 멀었기에 다른 친구들 대부분이 다니는 수학, 영어학원에는 다니지 않았다. 이전 삶에도 학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굳이 학원이 필요 없기도 했다. 애초에 공부를 잘했으니 선생님도 야간자율학습을 강제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웃기면서도 이상하다.

자율학습이라며?

자율학습인데 출석을 체크하고 지각하거나 도망치면 혼꾸녕을 낸다. 이상한 세상이었다. 뭐, 그렇다고 따질 마음은 없고.

‘나만 혼나지 않으면 되지 뭐.’

그렇게, 진혁은 슬슬 세상에 적응하는 듯했다.

신우성과 이승훈의 공부를 돕는 일은 이전보다 더 열심히 했다. 녀석들은 씨름부 주장보다 무서운 진혁을 잠시 어려워했으나 착한 녀석들답게 금세 적응했다. 무서워서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 집중했고, 진혁이 기억하던 과거보다 더 좋은 성적을 받는 것 같았다.

졸린 눈을 꿈뻑거리며 신우성이 어물거렸다.

“반장, 우린 훈련 가야 해.”

“그래.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대회 기간이어서 신우성과 이승훈이 바빠졌다. 그래서 옛 친구들과는 오래 붙어있을 수 없었다. 아쉬웠지만 진혁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뭐, 옛날에도 종일 붙어있던 사이는 아니다.

마음이 통하고 서로 보완적인 관계여서 자주 보지 못해도 친구가 되었던 거니까.

‘평화롭구먼.’

새로 주어진 일상이 마치 선물이나 보상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생 많았다. 돌려보내 주마······】

어쩌고저쩌고.

고막에 직접 대고 말하는 듯하던 음성의 영향도 있을 터였다. 꿈에서 들었건만 그 목소리를 떠올릴 때마다 두개골이 울리는 듯했다.

‘뭐 어떠냐.’

이대로 평화롭게, 조용히 흘러가라.

그러나 누군가 건드린 역사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하는 법이었고, 진혁은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이미 각오했다 해도 감당하는 건 다른 문제일 테니까.

***

아침 운동을 마치고 교실로 가던 길이었다.

‘오 쒯······.’

재빨리 건물 뒤로 몸을 숨긴 진혁이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등교 중인 황가영을 목격한 탓이었다.

진혁은 잠시 놀란 가슴을 주저앉혀야 했다. 영혼에 새겨진 화인은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고, 놀래라. 그 가족은 이제 볼일 없는 건가?’

미래가 바뀌었으니 만날 일은 없는 건가?

구질구질하게 과거에 얽매이는 게 아니냐 물을 수도 있지만 진혁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PTSD 그 자체인 사람들. 과거의 삶에서도 멋지게 한 방 먹여 보내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진혁이 의도한 건 아니었다.

···

대학 시절 사법고시에 합격한 진혁은 면접을 보지 않았다. 진혁의 사법고시 합격을 담보로 여기저기서 돈을 빌렸던 이모부는 빚쟁이가 휘두른 칼에 찔려 죽었고, 이모와 누이들은 행방이 묘연해졌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진혁은 사법고시 면접에 심각한 결격사유가 있었다.

연좌제.

폐지되었으나 폐지를 확신할 수 없는 제도였다. 나라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진혁이 받은 정신적 고통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모는 늘 ‘빨갱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진혁을 두고 빨갱이 자식이라고 하는 것이었으니, 이모가 떠드는 비사는 이러했다.

엄마와 배다른 이모라던 김응녀는 알다시피 성씨가 다르다. 배만 다른 것이 아니라 씨도 달랐던 것. 진혁의 외조부 한호라는 분은 시골 유지였는데, 본처에게서 아이를 두지 못해 딸 하나 딸린 여인을 후처로 들였다. 아들을 두고 싶어하는 옛날 사람의 욕심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옛날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하니 그걸 원망할 수는 없지만.’

그런데 후처에게서는 태기가 없고 오히려 본처, 즉 진혁의 외할머니가 진혁의 엄마인 한유영을 낳았다. 외조부는 아들은 아니었지만 본처에게서 나온 딸을 아끼고 고등학교 교육까지 받게 했다. 그러다가 조용하던 집에 양복 입은 사람들과 경찰이 들이닥쳤는데 외조부를 잡아가며 대공용의자라는 말을 공공연히 떠들고 갔다고 했다. 그것이 진혁의 엄마가 열여덟 살 되던 해의 일이었다.

거기까지가 진혁이 과거의 생에 김응녀로부터 들은 전부였다.

그래서 김응녀는 진혁을 두고 거리낌 없이 빨갱이 자식이라고 불렀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두 세대나 지난 후손에게 빨갱이라니.

‘무식에는 약도 없지.’

합격할 수도 있지만 어디 사람이 하는 일이 내 뜻대로 돌아가던가. 면접관도 사람이어서 불문의 연좌제로 묶어서 떨어뜨릴지 모를 일이었고, 사실 진혁은 공무원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저 홀로서기를 위해 가장 현실적인 방법으로 재능을 살린 것뿐이었다.

‘인적성 검사 결과가 판검사로 나와서······.’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어찌 보면 면접을 포기한 덕분에 과거에 홍기준을 만났고, 그의 차에 함께 있다가 과거로 온 것일 수 있으니. 결과적으로는 잘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는 거 아닐까?

의식의 흐름이란 이렇듯 무서워서, 황가영을 본 일로 김응녀 가족을 떠올리고 과거로 오게 된 인과까지 나름대로 추리하게 되는 것이 나름대로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나름대로 소득은 있었다.

‘어쩌면 다시 안 보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며 치를 떠는 진혁으로서는 희망적인 희망. 일부러 다방에 가지 않는 한 볼 일이 없을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

김응녀를 안 봐도 되어서 좋은데 이상한 사람들이 학교에 기웃거렸다.

“아, 글쎄 그 학생 한 번만 보자니까요!”

“공 던지기 테스트 한 번만 합시다!”

한국사회의 인맥. 학연, 지연, 혈연 등. 그로 인한 폐해가 적지 않아 듣는 이로 하여감 거부감이 들게 만드는 단어였지만 인맥을 갖춘 이에게는 제법 쓸만한 도구였다. 경기기록위원회와 육상연맹 등에 줄을 댄 학원 체육 관계자들의 러시가 이어졌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왜 학교 방문을 막는 겁니까!”

“내도 이 학교 출신이라카이!”

“나-가 여그 70회 졸업생이랑께에-!”

저들의 말투를 떠나서, 6·25 전쟁 중 개교했으니 태양중학교는 역사가 40년을 겨우 넘겼다.

말로는 선수 선발을 위한 방문, 유망주 발굴을 위한 서칭으로 포장했지만 초등부 100미터, 200미터 한국신기록 보유자와 안면을 트겠다는 목적이었다. 선수의 부모가 철벽을 치고 있어 학교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덕분에 수위 아저씨들은 편할 날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운동장에 탱크라도 한 대 세워둬야겠다는 말을 했을까.

결국 이병세가 교직원 회의에서 말을 꺼냈다.

“교장 선생님, 그러지 마시고 학생을 한 번 설득해서······.”

“이 선생. 학생이 싫다고 확실히 못을 박았는데 교사로서 학생을 보호할 생각을 하지 않고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이병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저런 교장이 아닌데 이상하게 학생 인권을 생각한다.

‘얼마 전에 뭔 대대적인 인권 어쩌고 조사를 했다더니 그래서 저러시나?’

학원 체육 관계자들이 대대적으로 조사를 받고 일부 구속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는데, 뒷돈을 받거나 폭력 정도가 심한 지도자들이라고 했다.

‘씨름부 감독이랑 코치도 그때 모가지가 날아갔지.’

특기 교육자가 아닌 일반 체육 교사라서 가슴을 쓸어내린 선생들이 많았고, 이병세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래도 계속 저렇게 찾아오면 면학 분위기 조성에 방해가······.”

면학 분위기는 개뿔. 사실 이병세도 궁금했다. 저도 그놈 테스트하는 거 보고 싶어요! 이럴 순 없겠고. 이병세가 다음 말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데 교장의 날 선 음성이 날아왔다.

“지금 이 선생 육상부 운영하는 거 말이요오-. 비용, 물품 구입비, 유니폼, 식대, 간식비. 그거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알죠?”

“아······, 예.”

돈 얘기가 나오자 이병세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태양중학교는 시골의 공립중학교다. 사립학교처럼 재단이 빵빵한 것도 아니요, 인구도 많고 부자도 많은 도시의 학교들처럼 학부모들이 열성적으로 후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의 재정을 쥐어짜도 운동부 하나 건사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었다.

씨름부는 역사와 전통이 있으니 선배들이 기부한 돈으로 운영된다 쳐도, 단거리와 마라톤까지 있는 육상부를 운영하려면 별도 예산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할 터. 돈 문제는 입상 실적 없는 이병세의 아킬레스건이었다.

“행정실장, 이 선생한테 설명 좀 해줘요.”

“예.”

왜 갑자기 행정실장에게 마이크를 넘기시나?

억울한 표정의 이병세가 교장과 행정실장에게 번갈아 시선을 던졌다.

“육상부 운영에 필요한 재정은 손진혁 학생 부모님이 후원하고 계십니다. 학생이 정식 부원도 아닌데 후원 문의를 해오셔서 저도 놀랐습니다. 여쭤보니 태양국민학교에도 김영태 선생을 통해 후원을 하고 계시더군요. 그 댁 아드님은 시골의 다른 학교를 나왔는데 말입니다.”

이병세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씨름부 코치 역시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 학교에 제일 먼저 자전거를 타고 등교해서 운동을 하는 녀석의 부모가 그런 재력가였다니. 집에 어린 동생이 있어서 집에 가야 한다며 학교가 파하자마자 자전거 페달을 밟는 모습에 석간신문이라도 배달하나 보다 생각했는데.

교장 선생이 이병세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소문이 사실인지는 모르겠는데 태양군 땅의 십프로 이상이 그 댁 소유라는 말이 있어요. 그런 사람 심기 거스르는 일 없도록 하세요. 군수조차 철마다 얼굴도장 찍으러 가는 집안이니까. 작년 지방선거 때도 후보들이 줄지어 찾아갔었다죠?”

“예. 저도 들었습니다. 체육대회 때 행사 차량과 간식 차량도 다 진혁 학생 아버님께서 협찬해주신 겁니다.”

행정실장이 덧붙였다.

“그리고 진혁군 귀에는 절대 들어가면 안 됩니다. 아드님이 아는 순간 후원은 끝나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 아버지의 후원이 운동을 하라는 압박으로 해석된다면 아들이 부담을 느낄 거라는 의미 아닐까.

“명심하겠습니다.”

눈치 없는 이병세도 금세 이해할 수 있는 메시지였다.

내 아들한테 부담 주지 마라. 지역 유지의 경고였다.

꿀꺽-.

이병세는 끝내 마른 침만 삼켜야 했다. 학교를 침략하는 외부인을 모조리 쫓아내는 선봉에 서겠다는 다짐과 함께.

행정실장이 성부현을 보며 말했다.

“씨름부 운영비도 후원하고 계십니다. 훈련장 신축 비용도 학생 아버님이 마련해주셨습니다. 이 또한 비밀입니다.”

“넵!”

씨름부 코치 성부현도 다짐했다.

행정실장의 말은 끝나지 않은 듯했다.

“교사들 회식비, 수학여행 경비도 상당 부분 후원하셨습니다.”

다른 교사들도 반듯하게 고쳐 앉았다.

역시 돈이 최고다.

그런데 손진혁은 늦둥이인가?

대개 시골의 거부는 나이가 많지 않던가. 늦둥이 아들이 예뻐서 다 해주는 그런 부모 아닐까? 이병세는 진혁의 아버지가 백발노인일 거라 생각하며 조심스레 수첩을 덮었다.

***

씨름장에서 장군이 털을 빗기던 손광연이 신경질적으로 귀를 후볐다.

한쪽 눈을 한껏 찡그린 채였다.

“아이 씨- 가려웡-. 개벼룩 들어갔나?”

“에헤헤-, 아빠 개벼룩 먹었지요?”

까르륵-.

모종삽을 들고 모래판을 푹푹 쑤시던 유진이가 아빠에게 삿대질하며 즐거워했다.

한유영이 쟁반에 커피를 받쳐 들고 나왔다.

“오빠, 학교에서 감사패 주고 싶다고 연락 왔는데요.”

“허이구, 감사패는 무슨.”

우리 돈 한 푼도 안 썼는데요. 손광연은 뒷말을 삼켰다.

아내 앞에서는 항상 무게를 잡는 서울 사나이다. 손광연이 한 일이라면 아들을 위해 친구 삥뜯어 인심을 쓴 정도랄까. 절대 아내에게 밝힐 수 없는 상남자의 비밀이었다. 홍기준의 입단속도 단단히 해두었다.

‘짜식 치어리더도 보낼 거면 귀띔이라도 해주든가.’

진혁이는 직접 봤겠지. 좋겠다.

좋았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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