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 거부의 아들 >
***
시간은 평화롭게 흘러 5월이 되었다.
손진혁이 달리고 힘쓰는 운동만 하는 건 아니다.
회복훈련도 필수로 진행했다. 근육이 놀랐으니 충분히 이완시키는 거다. 오렌지 주스와 바나나를 먹고 운동장을 일정한 속도로 걸으며 근육이 뭉치지 않도록 온몸을 주물렀다.
“후어-, 뻐근하다-!”
하루가 다르게 몸이 크는 게 느껴졌다. 티셔츠가 작아지고 바지가 짧아졌다.
봄 신체검사에서 신장이 175cm로 측정되었다. 성인 평균신장보다 크다고 했다. 진혁보다 큰 친구는 이승훈뿐이었다. 신우성은 옆으로 퍼진 스타일이었으니까.
‘나는 21세기형 바디인가.’
잘 먹고, 잘 자고, 매일같이 운동을 하는 덕분이겠지. 새삼 부모님의 존재가 감격으로 다가왔다.
6월에 육상대회가 있다더니 염병택과 조슬찬, 그리고 처음 보는 두 명까지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그 두 명은 다른 시골초등학교를 졸업한 선수들이라고 했다.
‘작년 군 예선 때 못 보던 애들인데.’
수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아침과 저녁에만 훈련을 하는 거겠지. 아직 정식 운동부가 없어서 수업을 빠질 핑계가 없으니까.
벤치에 앉아 친구들을 보며 다리를 주무르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운동 끝난 겨?”
체육교사 이병세다. 육상부 담당이긴 하지만 전문 코치는 아니었다.
아마 별명이 시방새였던가. 온몸에 북슬북슬한 털과 거뭇한 피부가 짐승 그 자체로 보이는 사람이다.
손진혁이 끔찍이 싫어했던 선생인데, 예전 생에 여교사를 교실에서 희롱하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늦게까지 남아 공부를 하던 진혁이었기에 그 광경을 볼 수 있었고, 소심하게 교실 창문을 깨는 것으로 이병세를 방해했던 기억이 난다.
‘유리창 손맛이 짜릿했지, 아주.’
진혁 최초의 일탈이었다.
이병세는 일주일 넘게 유리창 깬 놈을 잡겠다며 눈에 불을 켜고 다녔었다. 진혁의 포커페이스 때문에 결국 못 잡았지만.
“명색이 육상부원인데 육상 대회 나가야지?”
멋대로 육상부원이란다. 뭐,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육상부는 기명제가 아니어서 해당 학교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학교 이름을 달고 대회에 나갈 수 있으니까.
이병세는 성질이 고약하고 더러운 데다 딱 봐도 술과 여자를 밝히게 생겼다. 김영태 선생님이 그립다. 이병세를 쫓아내면 김영태 선생님이 올 수 있지 않을까?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차이 때문에 오지 못하려나?
“저는 3학년 때만 나가면 안 될까요?”
“왜? 재능도 있고 기록도 좋은디 감 떨어지지 않게 꾸준히 해야지. 재능 썩히면 못 쓰는 겨.”
이병세가 진혁을 바라보며 인상을 구겼다.
진혁은 추가 설명의 필요성을 느꼈다. 요즘 잘 먹히는 멘트가 있지.
진혁은 최대한 예의를 갖췄다. 이병세의 태도가 예전과 많이 다른 것 같다고 느끼며.
“집에 어린 동생이 있어서요.”
그리 말하며 빤히 쳐다보는데 이병세가 주춤 물러섰다.
“아, 그러냐? 알았다.”
역시 유진이가 최고다. 저 고약했던 이병세마저 꼬리를 내리지 않나. 진혁은 어서 집에 가 동생을 안고 둥개둥개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양보를 얻어냈음에도 진혁은 이병세와의 눈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옛 기억에 의한 반항심리였다.
‘지지 않아.’
이병세는 슬쩍 눈을 돌렸다. 어차피 선수가 아쉬운 건 아니었다. 1, 2학년은 경험 삼아 나갈 뿐이고, 최고 기록은 3학년에서 나오지 않던가. 그런데 이상하다. 염병택에게 듣기론 이놈 집이 제법 산다고 한 것 같은데. 이제보니 형편이 넉넉치 못한 모양이다.
‘아니면 1년 새 쪽박을 찬 겨?’
요즘 보증 잘못 서서 패가망신하는 집이 읍내에 수두룩했다. 어린 동생을 돌봐야 한다니 힘들겠구나.
돌아선 이병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뭔 놈의 애새끼 눈빛이 저렇게 무서워.’
이병세는 잠시 뭐에 홀렸나 싶어 돌아봤다가 다시 진혁과 눈을 마주치고는 흠칫 놀랐다. 진혁은 가만히 있었는데.
바보.
그래도 이병세는 흐뭇했다. 어쨌든 육상부원으로 확인받은 것 같아 기뻤다.
씨름부에 뺏기지 않은 게 어디냐.
진혁은 오늘도 이렇게 평범한 하루를 사수했다.
‘3학년 때만 출전할 거야.’
대회에 나가자면 가족과 떨어져야 한다. 진혁의 우려는 그것뿐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즐겁지만 하루라도 가족을 보지 않으면 마음이 허전했다.
‘평범하게 살겠다는 게 재능 썩히거나 숨어 지내겠다는 소리는 아닌데.’
치열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 치열함의 끝에 도사리고 있는 허무를 익히 경험했으므로. 지금은 가족이 있어 그 허무가 덜하다 해도, 모든 것에는 우선순위라는 게 있다. 진혁에게는 가족이 최우선인 거고.
아무튼.
기량이 최대일 때만 출전해서 기록을 뽑는 거다. 어차피 전용 트랙이 없는 건 집이나 학교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훈련에 대한 아쉬움도 없다. 달리기는 한적한 시골길이나 해변에서 하면 된다. 멀리뛰기는 아빠가 씨름장을 만들 때 국제규격과 똑같이 만들어주신 연습장이 집 뒤에 있다.
‘고운 모래도 구해다가 부어놨지.’
한때 고양이들이 습격하기도 했으나, 공중화장실로 사용하려던 고양이들이 장군이에게 적발되어 치도곤을 당한 후로는 항시 청정구역으로 유지되고 있다.
역시 집과 가족이 최고다.
그리 흐뭇한 감상에 젖은 진혁이 어깨를 돌리며 육상부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병택아, 슬찬아. 100미터 한 번 뛸래?”
“좋지.”
경쟁 경험은 이렇게 채울 수도 있다.
염병택과 조슬찬도 겨울방학 동안 키도 크고 팔다리도 길어졌다. 그러나 진혁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주력은 더더욱 그러했다.
“으아아-, 진혁이랑 차이 더 많이 벌어졌어.”
“야, 진혁아. 넌 워치게 그렇게 더 빨러졌냐?”
“자전거 타고 통학해.”
왕복 20킬로미터 거리를.
매일.
사실 너희가 등교하기 전에 운동장도 20바퀴씩 돌고 있단다.
호흡을 가다듬은 진혁이 호기롭게 외쳤다.
“자세 교정하자!”
“으아아-!”
염병택과 조슬찬은 진혁과의 경합 때보다 빠른 속도로 달아났다.
자세를 교정해준다는 진혁의 제안에 응했다가 주리를 트는 고통을 경험한 탓이었다.
‘자세만 교정해도 기록 단축될 거 같은데.’
염병택의 팔자주법과 조슬찬의 벌어진 무릎을 보며 진혁이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
중간고사가 끝나니 체육대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초등학교는 가을에 두 팀으로 나누어 대운동회라는 걸 했는데, 중학교에서는 반 대항 체육대회를 봄에 개최했다. 낯설었다. 처음도 아닌데 그럴 이유가 있느냐 물을 수 있겠지만······.
예전에는 체육대회 때 단체종목 외의 어느 종목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비리비리해서 끼워주지도 않았고.’
한차례 씁쓸한 웃음이 입가를 스쳤다.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긴장감이 전무한 행사였다. 예전엔 참가하지 않아서, 지금은 모든 종목이 만만해서.
진혁은 축구와 씨름 단체전, 계주에 참가했다.
체격 조건이 좋으니 뺄 수도 없었고, 병아리 같은 친구들이 진혁을 보며 눈을 빛내는 통에 외면하지 못했다.
‘반장이니까 모범을 보여야지.’
씨름 개인전은 이승훈이 출전해서 우승했다. 씨름부원인데 우승 못하면 욕먹을 일이지.
그런데 욕먹는 선수가 나왔다.
“어어어!”
“저저저!”
꾸웅-.
“저게 뭐야!”
“야! 씨름부 해체해라!”
단체전에서 손진혁이 다른 반의 씨름부원을 모래판에 꽂아버렸다. 진혁보다 키가 크고 체중이 100kg에 육박하는 선수였다.
‘태양 형에 비하면 이 친구는 힘도 약하고 두부 같네.’
들배지기를 시도하던 씨름부원의 다리에 발목을 걸고 버티는 강철 같은 다리, 샅바를 쥐고 좌우로 흔들며 능숙하게 상대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노련함,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위한 완력까지.
진혁은 씨름선수를 압도했다. 한쪽 무릎을 슬쩍 굽혀 빈틈을 보인 후 들어오는 상대를 되치는 호랑이 같은 허리가 백미였다.
“두 번째도 똑같이 당했네.”
“저거 유도 기술인가?”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쟨 진짜 괴물이야.”
씨름부원은 경기를 진행하던 씨름부 코치 성부현에게 욕을 먹었다. 그러나 진혁의 평소 밧줄 오르는 실력을 눈여겨 봐둔 씨름부 코치도 웃으면서 핀잔을 준 것일 뿐이었다.
“괜찮니?”
진혁은 미안했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 일부러 져줄 수는 없는 일 아니겠나. 상대 선수의 머리숱 틈틈이 박힌 모래를 털어주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진혁이 고등부 주장을 업어친 일, 3학년을 실신 KO 시킨 일을 들어 자신을 변호하고 싶었던 씨름부원은 입을 꾹 닫았다.
중학교 축구.
환상적이었다. 슈팅은 골대 너머 농구장으로 날아갔고, 패스는 관중석을 조준했다. 골키퍼 앞에서 스위퍼를 보던 진혁의 눈빛이 점차 몽롱해졌다.
물론, 실력 좋은 친구들도 있었지만 진혁의 눈에는 그저 비슷해 보였다.
‘내가 장화 신고 차도 저것보단 낫겠는데.’
골키퍼는 골대 위로 날아가는 슛에도 눈을 질끈 감았고, 심판 보던 이병세는 염병택이 찬 공에 사타구니를 맞아 뒹굴었다. 정의구현 슛에 아이들이 환호했다.
‘뭐······ 소림축구인가.’
진혁은 이전 생에 축구를 좋아해서 사회인 축구도 하고 군대에서도 축구를 곧잘 했다. 달리는 게 좋아서 축구도 좋아하게 된 케이스랄까.
“야! 쟤, 다리 걸어!”
“하이씨-! 드럽게 빨러!”
그저 도움이나 줄까 싶어 수비수를 자원했다가 공격수들 똥볼에 혈압이 올라 공을 몰고 질주했다. 상대 팀의 조슬찬도, 염병택도 따라붙지 못했다. 골키퍼까지 제치고 두 골을 넣었다. 멀리서 슛하면 누군가 맞고 다칠까 봐.
삐이익-!
이야아아-!
힘찬 호각 소리와 함께 기마전이 시작되었다.
기수의 발이 땅에 닿지 않으면 그만이다. 좌우 날개가 도와준다지만 가운데의 말이 기수가 떨어지지 않도록 꽉 붙잡고 버티면 승리한다. 진혁은 기꺼이 말이 되었다.
진혁의 등에 올라탄 채규호가 울상을 지었다.
“반장, 나 토할 거 같어. 불알도 아픈데.”
“조금만 더 버티자 친구야.”
기수 역할을 하던 채규호가 힘들고 지쳐서 포기하고 싶어했지만 손진혁이 허벅지를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진혁은 상대와 맞붙지 않고 이리저리 도망다녔다. 채규호의 전투력이 부실한 탓이었다.
‘내가 도망치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히지.’
진혁은 그 겨울 돈가스의 위협을 떠올리며 투지를 불살랐다.
결국 공격하던 상대 팀 말이 다리가 풀려 주저앉으며 경기가 끝났다.
소풍이든 체육대회든 가장 즐거운 건 점심시간이었다.
그늘에 숨어 책이나 보던 인생이 친구들과 어울려 함께 도시락을 먹는 삶으로 변모했다니. 설레고 두근대는 시간이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할 때였다.
“와-! 저거 뭐야?”
처음 보는 트럭 몇 대가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왔다. 화물칸 윙에 초대형 핫도그 사진이 걸린 트럭이었다.
조회대에서 교감 선생이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 학생들을 위해 준비한 간식 트럭입니다. 인원에 맞게 준비했으니 질서정연하게-.]
와아아아-!
[야! 야! 질서! 인마아아-!]
질서는 엿 바꿔 먹었다.
진혁도 덩달아 친구들 틈에서 질서의식을 팔아먹었다. 수백 명 틈에 섞이면 안 보이겠거니.
키 커서 다 보이는데.
‘전에도 이런 게 있었나?’
없었는데 이상하다. 알 게 뭐냐. 친구들과 함께 통제를 무시하고 난장판을 만드는 자체로 즐거웠다.
느허헛-. 자연스레 입에 웃음이 걸렸다.
오후 일정이 시작되자 다른 트럭이 나타났다.
와아아아아아아-!
윙바디가 열리며 중학생들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읍내까지 쩌렁쩌렁 울리게 만드니 차라리 폭성에 가까웠다.
수업 중이던 고등학교 교실에서도 창문을 열고 운동장을 구경했다. 교사와 학생들이 한마음이었다.
[빰빠라- 빰빠빠-.]
치어리더들이었다.
농구대잔치 때 TV에서나 구경하던 누나들이 학교 운동장에 나타났으니 난리 나지 않는 게 이상할 노릇이었다.
“아이구우- 누나! 나 죽어유-!”
“서울 여자다-!”
“누나! 내 이름 한 번만 불러주세요오-! 염병아- 하고 불러주세요!”
“오늘 다 잤구나아아악-!”
진혁은 채규호를 목말 태워 잘 볼 수 있도록 도왔다. 키 작은 녀석이 뒤에서 까치발을 서고 깡총거리는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탓이었다.
채규호를 어깨 위에 올린 상태로 까치발을 섰다. 그러면 더 잘 보이니까.
[둠칫-둠칫-.]
진혁의 입이 헤 벌어졌다. 저절로 둠칫둠칫 어깨가 들썩여졌다. 기마전 때처럼 채규호가 고통을 호소했지만 진혁의 오감은 다른 곳에 있었다.
‘좋다, 좋다. 어이구 잘헌다. 옳지, 옳지.’
또 다른 감수성이 개화하는 듯했다.
농구. 구기 종목 중 마지막이었다.
센터를 보던 친구는 진혁보다 키가 작았는데 발목 부상을 호소했다. 어쩔 수 없이 진혁이 투입됐다. 리바운드를 모조리 잡아냈다. 진혁과 부딪힐 때마다 상대팀 선수들이 쓰러졌다. 잡아낸 리바운드를 하프라인 부근의 친구에게 던지고 상대 팀 골 밑을 향해 달리면 다시 공이 온다. 그대로 레이업 슛이다.
“쟤 지금 손이 림에 닿은 거지?”
“그런 거 같은데.”
수비를 해야 할 상대 팀 선수들은 아직 하프라인을 넘지도 못했다.
10킬로미터 마라톤.
자유 참가였다. 그러나 순위권에 들면 가산점을 준다고 했다. 태양중학교에는 이은수라는 마라톤 선수가 있었는데, 초등학교 시절 충남 대표로 활동하던 선수라고 했다.
“얼레? 진혁이 단거리 아니었어?”
진혁이 그 선수보다 일찍 들어왔다.
이은수는 이병세에게 욕을 먹었다.
진혁의 활약으로 1반이 우승을 차지했다.
그렇게 평범한 체육대회를 마쳤다.
***
“아, 작년에 육상대회 현수막 걸린 게 진혁이였어?”
“태양국민핵교에서 우승한 줄 알았지.”
“그게 그거지 인마. 김영태 선생님이 감독으로 갔었으니께에-.”
조슬찬은 진혁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신이 나서 떠벌였다.
“우리 조커 대장이 다 휩쓴 겨-. 그 촌눔덜 조뚜 뭇 뛰더라니께?”
“진혁이 별명이 조커야? 왜 조커야?”
“그게 크-.”
조슬찬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멀리서 무감정한 눈으로 바라보는 진혁과 눈이 마주치자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이었다.
“계주 마지막 주자를 조커라고 하는겨어-. 야, 수업 시작허겄다. 드르가, 드르가.”
조슬찬이 친구의 등을 밀었다.
급히 교실로 사라지는 조슬찬을 보며 진혁이 갸웃거렸다.
‘나 본 거 같은데 이상하네? 반가워서 인사나 할랬더니.’
진혁의 체격과 학기 초 벌어진 사건들, 체육대회를 휩쓴 신입생의 등장. 손진혁을 모르는 학생이 없을 지경이 되자 진혁의 학교생활은 갈등 없이 흘러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