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45화 (45/338)

# 45 < 어린 동생이 있어요 >

***

“깨진 유리는 씨름부에서 변상한다. 이의 있나요?”

고등부 주장이라는 녀석이 고개를 저었다.

씨름부 주장 3학년 박만수는 무슨 일이 있는지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중학교 3학년 부원들이 찾아와 신입생에게 맞았다는 말을 듣고 확인차 중학교 1학년 교실에 왔던 건데.

*

“너냐?”

신입생은 묻는 말에 대꾸도 않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이 쌕!”

어린놈의 무시에 화가 치민 박만수는 팔을 뻗었다. 8년간 씨름을 해온 몸이다. 아무리 싸움을 잘하는 놈이라 해도 어깨만 쥐어도 비명을 지르며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겠지.

그런데 왜 갑자기 무중력 체험을 하는 것 같지?

“어어어-!”

중학생의 어깨를 잡으려 했던 건데, 신입생이 빙글 도는가 싶더니 어깨로 박만수의 겨드랑이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박만수는 갑자기 몸이 붕 뜨며 교실 바닥에 처박혔다. 깨끗한 업어치기 한판이었다.

교실 천장이 빙빙 돌고 뒤통수와 등골이 욱신거렸다.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도 못하다가 깨달았다.

‘아! 신입생 잡으러 왔었지.’

컥-컥-.

아프기는 하지만 숨은 쉴 수 있었다. 그 순간 드는 생각은 한가지, 곧 얼굴에 퍼부어질 주먹질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씨름을 한 이후 싸우거나 맞아 본 적은 없지만, 어릴 때 맞고 다니던 기억에 의하면 남자아이들은 누군가를 넘어뜨리면 올라타 주먹세례를 퍼붓곤 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주먹이 아니라 목소리였다.

“다시 대화로 풀어볼 마음이 생기나요?”

“어, 그-. 그래.”

박만수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신입생을 올려다보았다. 박만수가 먼저 싸움을 건듯한 상황임에도 이놈은 대화를 제안하고 있다. 대화로 풀자는 건 보통 약한 녀석들이 취하는 행동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면 착한 애거나.’

박만수는 진혁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섰다. 신입생의 억센 팔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박만수의 체중을 버티고도 남았다.

“나가서 얘기하자.”

“저 친구랑 도시락 먹어야 하는데요. 증인도 필요할 거 같으니 여기서 얘기하죠.”

“그러자.”

박만수가 가슴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등으로 떨어졌는데 가슴이 아프다니, 인체는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어떻게 오셨죠? 여긴 중학교 건물인데.”

“네가 우리 애들 때렸잖아.”

“왜 맞았는지는 말 안 했나 보네요?”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였지만 진혁으로서는 최선을 다해 예의를 갖추고 있는 거였다.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실력행사 한 놈들을 때려눕히지 않은 것만 해도 많이 봐준 거지 뭐.

“어이, 거기 3학년들. 사실대로 말 안 했지?”

진혁이 뒤쪽에 서 있는 중학교 3학년들을 보며 물었다.

녀석들은 진혁의 시선을 피하며 쭈뼛거렸다. 맞은 것도 창피한데 1학년 교실에서 추궁을 당하는 꼴이 되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얼굴이었다.

“내 친구들 불러다 돈 뺏으려고 하던데요? 때리려고도 했어요. 고등부 선배가 나였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진짜냐?”

박만수는 진혁에게 물은 것이 아니었다.

씨름부원들은 박만수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눈을 굴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는 게 이상한 거지. 진혁과 이승훈, 신우성까지 증인이 있으니 아니라고 발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시인하기도 그렇고.

“이놈들이 왜 말을 못해?”

박만수가 이를 갈 듯 말했다.

그러나 침묵은 긍정 아니던가.

이럴 땐 확인 작업을 도와주는 게 좋다. 진혁은 어디 한두 해 구른 애송이도 아니었다.

“승훈아, 우성아. 내가 가만히 있는 너희 씨름부 선배들 때렸냐?”

현장 목격자가 직접 진술하는 것보다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을까.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반장 말이 맞어요. 중핵교 들어온 첫날부텀 군기 잡는다구 얼차려 주구요, 애들헌티 뺏어서라도 돈 가져오라구 했어요.”

“맞아요. 으으엉-.”

마음 여린 신우성은 끝내 서러운 눈물까지 보였다.

바득-.

박만수가 이를 갈았다.

실력은 좋아도 모난 녀석들이 거의 없는 씨름부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씨름부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았다. 정확히는, 이상한 소문이었다. 드디어 증거를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이 실수했다. 사과할게.”

박만수는 제법 남자다웠다.

창피함은 뒷전, 진혁에게 악수를 청했다. 진혁이 그 손을 맞잡으니 그제야 목을 돌리며 엄살을 피웠다.

“어으, 목 부러지는 줄 알았네. 너 힘 진짜 좋다. 씨름할 생각 없냐?”

“아뇨. 집에 어린 동생이 있어서요.”

진혁이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진혁에게 누군가의 제의를 거절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었다. 라면 먹고 가라는 홍수정 전무의 제안을 뿌리친 게 몇 번이던가. 그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나 박만수는 달리 받아들인 눈치였다.

“그렇구나······.”

어린 동생이 있다는 말에 박만수의 눈동자에 안쓰러운 빛이 스쳤다.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오해한 눈빛이었다. 190이 넘어 보이고 목이 거의 없어 보이는 거구지만 눈동자는 선량했다.

“그래, 다음엔 좋은 일로 보자.”

“살펴 가요.”

신우성과 이승훈을 선배들 괴롭힘으로부터 구해냈다.

나름대로 잘 마무리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진혁은 도시락을 꺼냈다.

젓가락을 물고 짝꿍을 기다리던 채규호도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그때, 복도에서 우당탕탕 굉음이 울렸다.

들소라도 한 마리 달려오는 듯한 진동도 함께였다.

진혁도 소리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쿵쿵쿵쿵-.

‘쥬만지?’

자연스럽게 어드벤처 영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효과음이었다.

“만수야아아아-! 걔는 안 된다아아아-! 우우웩-.”

최태양이 들이닥쳤다.

어느 반인지 몰라 뒷반부터 뒤지는 바람에 늦었다.

“우웨엑-! 아이고 힘들어-.”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는 최태양을 보며 진혁은 숟가락을 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모습, 저 헛구역질······.

어디서 봤더라?

“우우웨에-!”

진혁은 어디선가 소똥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

학교를 마친 진혁은 신문배급소를 찾았다.

옛날에도 배달했던 곳이다.

“여름방학 전까지만 해도 될까요?”

“어, 그래. 고등학생이니? 교복 안 입은 거 보니 중학생 같은데?”

담배를 삐뚜름히 문 배급소장이 물었다. 큰 체격에 비해 앳된 얼굴을 보며 긴가민가하는 표정이었다.

“중학생인데요. 중학생은 안 되나요?”

“안 될 거 있나. 자전거는 있니?”

“네.”

중학교 입학했다고 아빠가 사주신 철TB 자전거가 있다.

서울에 가서 더 비싼 걸 사주겠다 하셨지만 굴러만 가면 된다고 진혁이 말렸다.

안경 너머로 눈을 치켜뜬 배급소장이 물었다.

“두 코스 해줄 수 있어? 요즘 사람이 부족해서 말야. 돈 더 줄게.”

진혁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어쩜 이리도 멘트까지 옛날과 똑같을까. 예전엔 세 코스를 돌렸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어차피 신문 배달로 떼 돈 벌 것도 아니고.

“한 코스만 할게요. 집에 어린 동생이 있어서요.”

“그렇구나······.”

배급소장도 뭔가 오해한 듯 동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진혁의 눈에는 착한 사람의 선량한 눈빛으로 비쳤다.

‘집에 치킨 다섯 마리 사갈 정도만 모아야지.’

장군이까지 다섯 식구니까.

진혁은 제힘으로 돈을 벌어 가족과 치킨 파티를 하고 싶었다.

이제 중학교에 왔으니 실행에 옮길 때다.

자전거도 있으니 한 코스 배달하는 데 30분이면 충분하다.

***

중학교 개학 후 며칠, 복도가 소란스러웠다.

중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손진혁과 씨름부의 활극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활극이라고 볼 수도 없는 깜짝 이벤트였는데. 말이 어떻게 와전된 것인지 고등학교 씨름부 선배 다섯 명을 한주먹에 보냈다는 말까지 돌았다.

진혁은 책상에 얼굴을 박고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아아-, 평범한 삶. 평범한 삶.’

태양고등학교는 완전 공학은 아니지만 반공학이랄까? 아무튼 여학생만 있는 학급도 있었다. 씨름부 주장을 메친 중학교 신입생을 보기 위해 고등학생 누나들까지 교실을 기웃거리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복도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열심히 회피하던 진혁은 그중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가영이 누나?’

이모의 둘째 딸. 황가영이었다.

진혁보다 세 살 많은, 예전 삶에서 속옷 차림으로 진혁을 찾아왔던 사람.

진혁으로 하여금 이성에 대한 관심의 싹을 자르게 만든 여자였다.

그날을 생각하니 당황스러운 나머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꺄아아-! 귀여워!”

지들 때문에 얼굴 붉힌 거 아닌데.

오해는 자유라지만 떼거리로 몰려와서 오해를 하니 진혁으로서는 마땅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해결책이 있기는 한 걸까?

‘아아아-, 전학 갈까?’

그래도 악연이 될 뻔한 씨름부와의 인연은 잘 마무리된 것 같다. 주장에게 귀를 잡혀 끌려가던 3학년생들이 다시는 친구들을 괴롭히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다만 시간이 빨리 흘러 잊히길 바랄 뿐.

황가영에 대한 생각도 재빨리 지워버렸다.

그게 지운다고 지워지는 건 아니겠지만, 최소한 잊으려는 노력은 필요했다. 어두운 다락방에 비치던 나신의 실루엣이 한창 피 끓는 진혁의 머릿속을 불쾌하게 지배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나마 착했는데.’

과거의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떠올리니 입맛이 썼다.

황가영은 진혁이 누구인지, 서로 어떤 관계인지 모른다.

일부러 진혁의 발목을 잡을 사람도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걱정은 된다.

‘우리 집에 언젠가 찾아오는 거 아닐까?’

찾아오면 그땐 어쩌지?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인데.

무엇보다 엄마가 걱정이다.

***

학교에서 집까지 10킬로미터.

뛰어다닐까 생각도 했지만 아침저녁으로 그렇게 달리면 피곤해서 다른 일을 하지 못할 게 뻔했다.

‘상쾌하구먼-!’

그래서 자전거로 통학을 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적당히 섞인 코스였기에 근력과 심폐지구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 빠른 속도는 덤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읍내 여자중학교에 진학한 최미경과 김은정을 비롯한 다른 친구들과 함께 버스를 탔다.

씨름을 배울 생각은 없었지만.

학교에 도착하면 씨름부원들이 훈련하는 곳에서 몸을 풀었다.

씨름부 훈련장을 신축하며 샤워실도 크게 갖춘 덕에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했다. 덕분에 아침에 땀을 흘리고, 씻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씁후-푸후-.”

하루도 빠짐없이 밧줄을 잡고 올랐다. 높다란 철봉에 굵은 밧줄이 여러 개 매달린 운동기구였다.

진혁은 그 밧줄을 팔 힘만 이용해서 10회 정도 올랐다가 조심조심 내려오는 운동을 했는데. 손목과 어깨는 물론 등 근육까지 단련을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코어 운동 기구였다.

“야, 너 씨름 하자니까?”

“생각 없습니다.”

씨름부 코치 성부현이 들러붙었다.

밧줄 오르기를 팔 힘만으로 쉬지 않고 10회를 하는 중학생이 있다고?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남자애들이라 그런지 허풍이 심해. 시골이라 더한 거 같고.’

그런데 그런 괴물이 실존한다는 증언을 모든 씨름부원이 했다. 그래서 아침 일찍 나와봤다.

며칠, 몇 주가 지나도 그 중학교 1학년생 손진혁은 운동을 반복했다. 정상까지 오르는 시간도 점점 단축됐다.

‘진짜 괴물이네?’

그래서 달라붙었다.

찰거머리가 뭔지 보여주마. 내가 선수 시절 체격은 작지만 덩치 큰 선수 몸에 찰싹 붙는 방법으로 상대 힘 빼던 전략을 구사했었지. 이긴 기억은 별로 없지만.

“씨름 하자니까? 매일 고기 사줄게.”

“어린 동생이 있어서요.”

그리 대답하며 진혁은 운동화 끈을 딴딴하게 고쳐 맸다.

이제 ‘그렇구나’라는 대답이 나오겠거니 생각하며.

“동생도 데려와.”

미쳤나 봐.

진혁은 정말로 미친놈을 보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아직 48개월도 안 된 여동생을 매일 학교에 업고 나오라는 소린가? 씨름부 주장 박만수도, 신문 배급소장도 그러더니 이 코치도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중학생으로부터 한심하다는 눈빛을 받은 코치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게 어린애 눈빛이 맞아?’

빛나는 눈이었지만 총명함과 궤를 달리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위엄이 서려 있었다. 남자로서 자존심 상하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때문에 성부현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하고 말았다.

아무튼 진혁은 집에 일찍 가서 동생 유진이와 놀아줘야 한다.

요즘은 말도 많이 늘어서 동생 재롱 보는 재미에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신다니까?

“아, 씨름 좀 하지······.”

진혁의 떡 벌어진 어깨와 쩍쩍 갈라진 등 근육을 보며 코치가 입맛을 다셨다.

진혁은 운동장을 달리며 성부현을 힐끗거렸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과거, 씨름부에 입단하고 싶어 찾아왔을 때는 얼굴이 거뭇하고 말투가 거친 산적 같은 아저씨가 있었는데. 지금은 허여멀건 젊은 코치가 있지 않은가. 말투도 샌님처럼 부드럽다 못해 조심스럽다.

‘같은 듯 다른 세상이네.’

씨름부 합숙소도 커지고 선수들도 더 많아졌다.

아무렴 어떠냐. 이미 달라진 세상인데.

머리를 털어 잡생각을 떨쳐 버렸다.

그런데 들러붙는 사람은 씨름부 코치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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