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 옛 친구, 새 친구 (2) >
이전 생에 진혁은 화장실 가는 일 외에는 의자에서 일어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오래 앉아있으니 대퇴사두근 무릎 부근이 이완되고, 골반 쪽 근육이 수축되는 것이 느껴졌다.
다리가 저리다는 뜻이다.
‘피가 안 통하는 것 같은데.’
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을 경우, 허벅지 근육에 그렇게 비대칭 긴장이 형성되면 나중에 무릎이 체중을 받치는 사태가 벌어진다고 했다. 결국 근육량이 많아 발생한 문제였다.
‘쉬는 시간엔 근육을 풀어줘야겠다.’
옛 친구들, 앞으로도 친구가 될 녀석들도 찾을 겸.
어슬렁어슬렁-.
태양중학교는 고등학교와 붙어있다.
고등학교는 정문을 바라보며 운동장에 붙어있고, 중학교는 그 뒤편이다. 중학교 뒤에도 작은 운동장이 있는데, 주로 야외 실습이나 몰래 담배 피우는 용도로 사용하던 곳이다.
이 덩치 큰 녀석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면 학교 뒤편에 있겠거니. 진혁의 다리는 자연스레 그리로 향했다.
‘저기 있다.’
그늘진 곳에 두 친구가 열중쉬어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앞에는 친구들보다 체격이 큰 남자 네 명이 있었는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씨름부 교사로 착각했을 거다.
‘선배인가 본데?’
이 학교의 씨름 코치는 체격이 크지 않았다. 지도자보다 체격이 좋은 선수들이 많았는데, 이는 중등부 선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친구들에게 가는데 욕설이 들려왔다.
“야이- 쒸벌놈들아. 돈을 안 가져와?”
“죄송합니다.”
“죄송은 확 씨! 뺏어서라도 가져왔으야지!”
선배가 손을 올리자 친구들이 목을 움츠렸다.
진혁에게는 낯선 광경이다.
이전 생에서는 쉬는 시간에 학교 안을 돌아다닌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고, 가진 게 없어서 빼앗긴 일도 없으니까. 거의 매일 얼굴이 엉망이 되어 등교하는 진혁을 때리는 녀석들도 없었다. 신우성과 이승훈도 어디서 맞고 다닐 친구들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선배들이 때릴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네.’
저 친구들은 저렇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자신에게 잘해준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이번엔 아무래도 내가 너희를 보호해야 할 거 같다.’
진혁이 일부러 발을 끌어 소리를 냈다.
착-.
“어이, 거기 뭐하냐?”
“넌 뭐여? 너도 신입생이여?”
“그래. 신입생이다. 돈 줄까?”
진혁은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아빠가 용돈을 너무 많이 주셔서 쓸 곳도 없다.
“이 새끼 봐라? 어디 선배헌티 반말을 찍-.”
선배라는 녀석이 팔을 뻗어 진혁의 머리를 밀었다.
찍-!
그와 동시에 진혁이 지폐로 놈의 턱을 올려쳤다.
“뭣-.”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가장 놀란 사람은 진혁이었다.
‘아아? 이럴 마음은 없었는데.’
세상에. 돈으로 사람을 쳤어.
***
“옴마, 옴마.”
“아이코오-, 우리 딸. 맘마 먹을까?”
“녜에헤-. 오빠 보러 가요.”
“오빠는 학교 갔지요-.”
“하꾜 갔지요?”
유진이는 방학 내내 붙어있던 오빠가 보이지 않으니 궁금한 모양이었다.
한유영은 유진이를 다리에 앉히고 밥을 떠먹였다.
“맘마 먹자. 아-.”
“아-.”
남편은 한 해 농사를 준비하기 위해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기 시작했다.
한유영은 아직 대화가 통하지 않는 딸과 단둘이 집에 있으려니 답답하기도 했고 밖에 내보낸 아들이 걱정되기도 했다.
“지금 점심시간일까? 친구는 생겼으려나 모르겠네.”
“음마-, 음마-. 오빠, 오빠.”
유진이도 오빠 걱정이 많은 것 같았다. 밥을 오물거리면서도 오빠 타령을 했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유진이를 유모차에 태웠다.
장군이가 호위하듯 옆에 붙었다.
“유진아, 저기 봐. 꽃 폈네?”
“꽃-!”
“개나리가 벌써 폈네?”
“개나리-!”
하늘과 땅이 함께 알리는 봄소식은 언제 봐도 싱그럽다.
졸졸 흐르는 투명한 개울물, 개나리와 밭에 돋아난 새싹.
거기에 충만감을 더해주는 봄 햇살까지.
유진이의 손에 개나리꽃을 꺾어 쥐여주고 머리에도 꽂았다.
“예뻐라 우리 딸-.”
“에헤헤-, 녜쁘지요?”
개울가에 주차하고 반짝이는 눈으로 개울을 구경했다. 개울 속 돌이 들썩이는 걸 보니 가재가 노는 모양이다.
주인을 따라 장군이도 주저앉았다.
“아-, 좋다.”
길지 않은 생이었지만 지나온 생을 되짚어봤다.
아버지 옥바라지하시던 어머니는 한유영이 열아홉 되던 해에 주무시다가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한유영이 늦둥이였으니 요절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연세였다.
이미 칠순을 넘긴 나이에 옥고를 치른 아버지도 머지않아 어머니의 뒤를 따랐다.
‘우리 엄마랑 아버지 보고 싶다.’
넉넉했던 시골 유지의 살림은 아버지 옥바라지와 구명을 위한 뇌물에 모두 쓰이고 마지막에는 한유영만 남았다. 아버지 첩으로 들어왔던 여인과 의붓언니는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몽땅 뒤져 빼앗아 갔다.
저항하는 한유영을 향해 형부라는 인간은 칼도 들이댔다. 가장 가까운 이웃집이 200미터 넘게 떨어져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바랄 수 없어 한유영은 구석에 웅크린 채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도둑X들, 벼락 맞X 년들, 개년X, 날강도 같X 년들.’
입에 욕을 담지 못하는 한유영이지만 항마력을 최대한도로 끌어올려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읍내에서 다방을 한다는 의붓언니 부부를 마주칠까, 좋아하는 군것질은커녕 시장도 보러 가지 않는다. 차가 생긴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엄했던 아버지였으나, 장에 가실 때마다 머리핀이나 치마, 튀김 등을 가득 사서 딸에게 안기곤 하셨는데. 이제 남편이 그 역할을 해주고 있다.
‘오빠가 계셔서 버텼지.’
부모도, 재산도 남지 않은 한유영을 일으켜준 사람이었다.
손광연을 만난 후 한유영은 눈물을 닦을 수 있었다. 자신의 슬픔이 전해질까, 남편에게는 짧은 생의 곡절을 일언반구도 전하지 않았다.
한유영은 괜히 한숨이 나왔다.
남편을 만나고 내내 행복했지만 진혁이 중학교에 진학 후로 다시 근심이 생긴 탓이었다.
‘에휴, 몸도 약하고 마음도 여린 우리 아들. 읍내에는 못된 애들 많을 텐데 누가 괴롭히지는 않으려나. 땜통 때문에 놀림이나 당하지는 않는지.’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그렇게 평가하는지는 몰라도······.
엄마에게 아이는 어디 내놓아도 마음 쓰이고 걱정되는 존재였다.
‘성격 때문에 애늙은이 같다고 구박받으면 어쩌나.’
그래서 한유영은 오늘도 걱정이 많다.
또 그래서.
끼잉끼잉-.
개울로 굴러가려는 유모차를 장군이가 물고 버티는 것도 보지 못했다.
으르르-.
내 부하는 내가 지켜!
***
“어러? 이 새끼 봐라?”
돈으로 맞은 선배는 황당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황하기는 진혁도 마찬가지였다.
‘아, 이것 참.’
저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그냥 돈 주고 끝내려던 건데. 돈 몇 푼으로 친구들의 자유를 살 수 있다면 그럴 셈이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좋게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고, 진혁도 그걸 알고 있었다.
“이 색-!”
촤아악-!
단단한 땅바닥에서 박력 넘치는 소음이 올라왔다. 씨름으로 다져진 육중한 몸의 발놀림이 만드는 효과음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턱-.
선배의 주먹은 진혁의 손에 잡혔다. 너무나 가뿐하게.
진혁이 조용히, 그러나 또박또박 말했다. 상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잘 듣고, 잘 생각하고 대답해.”
“어우윽-! 안 놔?”
녀석이 용을 썼다.
주먹을 빼내려고 힘을 줬지만 힘을 쓸수록 신입생의 손아귀에 힘만 더 들어갈 뿐이었다. 눈앞의 신입생이 중학생치고 큰 편이라고는 하나, 자신은 운동도 많이 하고 나이도 많은데 힘에서 밀리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어흐으으-.”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신입생의 손가락에 짓눌리는 손등의 통증이 범상치 않았다. 단련할 수 없는 부위에 전해지는 악력이 무시무시한 탓이었다.
“내 친구들 계속 괴롭힐 거야?”
“이익-.”
“대답해.”
“조까!”
진혁은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안 깐 거 어떻게 알았을까.
‘제법 통찰력이 있네.’
대단한 안목이다. 역시 선배라 이건가.
“이 새낏!”
놈의 왼 주먹이 날아왔다.
제법 날렵한 몸놀림이었지만 서로 머무는 시간이 너무나 달랐다.
진혁의 눈에는 상대의 움직임이 너무 느리게 보였다. 마치 피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진혁은 이미 잡고 있던 놈의 오른 주먹을 엄폐물 삼아 녀석의 오른쪽으로 돌았다. 녀석의 주먹은 진혁에게서 한참 먼 허공을 갈랐다. 잡았던 주먹을 놓고 손목을 잡았다. 그와 동시에 오른손 엄지로 녀석의 팔꿈치 안쪽을 눌렀다.
“아아아-.”
덩치가 크네, 힘이 좋네 해도 아직 십 대 소년이다. 어린아이와 다를 것 없는 비명이 들리자 진혁이 피식 웃었다.
팔꿈치를 잡은 손은 안쪽으로, 손목을 잡은 손은 바깥쪽으로 힘을 가하며 놈의 다리를 후려 자빠뜨렸다.
꾸웅-. 체급에 걸맞은 소리와 진동이 지면에서 올라왔다.
“으아아아-.”
다른 덩치가 달려들었다.
귀찮게 됐다.
빠방-!
근처에 있던 아이들의 귀에 그런 소리가 들렸다.
달려들던 덩치가 끈 떨어진 인형처럼 풀썩 쓰러졌다. 진혁의 주먹이 녀석의 인중과 턱에 연달아 들어가는 것을 누구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죽은 건 아니지?’
쓰러진 녀석을 보니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리려 애쓰고 있었다.
그에 속으로 안도하는 한편 아직 서 있는 다른 씨름부원들을 노려보았다.
“어이, 너희들.”
진혁이 부르자 나머지 둘은 싸울 생각이 없는지 주춤거렸다.
“내 친구들 괴롭히면 혼난다.”
녀석들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이렷다.
얼어있는 친구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우성아, 승훈아.”
신우성과 이승훈은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섰는지 군말 없이 따랐다. 널브러진 두 선배를 걱정스레 바라보며.
‘차라리 교실에 있었다면 좋았을 걸.’
쓸데없는 참견을 한 것이 아닐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다. 친구들의 장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으니. 그러나 불의를 목격하고도 이들의 장래를 위해 모른 척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불의를 막을 힘도 있는 사람이? 진혁은 이기적인 사람으로 살고 싶었지만 비겁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누가 귀찮게 굴면 곧바로 얘기해.”
진혁이 두 친구를 돌아보며 말했다.
표정이 진지했기에 신우성과 이승훈은 고개만 끄덕였다.
‘좀 시끄러워질지도 모르겠네.’
나서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도 괜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왜냐하면, 선배나 어른한테 혼난 거면 몰라도 후배한테 혼났으니 벼르게 될 테니.
진혁 역시 언제 폭주해도 이상하지 않을, 호르몬 뿜뿜하는 혈기왕성한 몸을 지닌 남자아이의 몸이다. 그러니 진혁인들 그들의 심리를 모를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4교시를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손님이 찾아왔다.
드르륵-! 꽈앙-! 콰차창!
뒷문이 거칠게 열리며 문짝이 바닥에 떨어지고 유리가 깨져 파편이 날았다.
“씨름부 건든 놈이 누구냐!”
***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최태양은 수학의 정석을 베개 삼아 단잠을 청했다. 점심시간에 잠을 자기 위해 도시락은 일찌감치 먹어치웠다.
역시 책만 한 베개가 없다. 시원한 감촉이 정신을 맑게 해주지 않나. 자켓도 벗어 머리까지 덮어썼다.
그런데 후배 하나가 급히 찾아왔다.
“선배! 태양 선배!”
“츄릅-, 왬마?”
“만수형이 중학생 혼내준다고 갔어요!”
“뭔 소리야아-. 만수는 여기-.”
어라, 이 덩치 큰 곰탱이 놈이 밥도 안 먹고 어디 갔지?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사라지기에 컵라면이라도 사러 간 줄 알았다.
“그런데 무슨 중학생을 말하는 거냐?”
“중학생이 중학생이죠. 무슨 중학생이 어딨어요.”
최태양이 벌떡 일어섰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씨름부 주장이라는 놈이 중학생에게 손을 댄다니.
잠깐, 그런데 그 순딩이 박만수가 나섰다고?
쫙쫙-!
잠을 깨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최태양이 뺨을 두어대 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은 탓이었다.
“이유가 뭐라든?”
“신입생이 중학교 3학년 부원을 때려눕혔다고······.”
1학년이 3학년을? 그것도 씨름부원을?
최태양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느허헛-. 얌마, 말이 되는 소릴-.”
가만, 그럴 수 있는 놈을 한 명 알고 있다.
최태양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신입생 이름이 뭐라든?”
“손······, 뭐라고- 악!”
최태양이 후배를 밀치고 교실을 뛰쳐나갔다.
쿵쾅쿵쾅- 거구가 전력 질주하니 복도가 쿵쿵 울렸다.
“아이고오오-! 만수야아아-! 걔는 안 된다아아아-!”
미리 먹어둔 도시락 연료가 급속 연소되었다.
그에 고무된 최태양이 다리 근육을 쥐어짰다.
박만수가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