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 새로운 미래 (7) - 무료 마지막 >
***
“진혁아아아아-!”
매일 최태양이 찾아왔다.
학력고사 준비도 해야 하니 합숙훈련장 공사가 끝날 때까지만 오겠다고 했다. 최태양은 마지막 학력고사 세대라고 했다.
“진혁아. 쟤 또 왔다.”
아들과 바둑을 두던 손광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나이 땐 보통 여학생을 만나거나 진로를 고민하지 않나? 동네 초등학생과 어울리는 데 시간을 할애하다니, 손광연의 눈에는 특이한 고등학생이었다.
‘누굴 닮았는지 독특한 녀석이야.’
아들과의 시간을 빼앗기니 싫어할 만도 한데, 그래도 친절한 손광연 아저씨는 집 뒤 터에 씨름판을 만들고 모래를 채웠다.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제가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말이 아빠 입에서 나오니 진혁은 가슴이 뭉클했다.
손광연은 만드는 김에 진혁을 위한 멀리뛰기 연습장도 만들었다. 50m에 이르는 도움닫기 주로를 닦고, 조일헌을 불러 굴삭기로 단단하게 다졌다.
진혁은 최태양의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매번 가르침을 내렸다.
‘내가 이 형을 계속 가르치는 게 맞는 걸까?’
잠시 고민했지만 뭐 어떠냐. 이미 달라진 세상인데. 스스로 어쩌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일을 고민하는 건 인생 낭비라고 여겼다.
진혁은 최선을 다해 최태양을 모래판에 꽂았다. 모래가 많으니 다치지 않기도 했고, 부상을 염려해 서로 무리하지 않았다. 수 싸움과 기술 향상을 위한 훈련이 주를 이루었다.
“와, 한 판을 못 이기네.”
혀를 내둘렀지만 최태양의 표정은 밝았다.
운동을 마친 후 우유를 마시며 진혁이 조심스레 조언을 건넸다.
“형은 체중 불리지 마요.”
과거 최태양은 백두장사까지 올랐다. 그러나 진혁이 기억하기로 그 과정이 전혀 순탄치 않았다. 서울에서 만난 최미경은 종종 오빠 얘기를 하곤 했는데, 무릎 부상이 잦다는 말을 했다. 최미경 유부녀가 오빠 얘기를 하며 짓던 슬픈 표정을 이제 와 떠올리니 진혁은 마음이 아팠다.
“나 체중 불리는 거 어떻게 알았어?”
“씨름선수들 체중 불리는 건 전국민이 다 알아요.”
물론 뻥이었다. 체급이 존재하는 종목이라면 누구나 체중 감량을 한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진혁은 최태양의 미래를 염려해 꺼낸 말이었다.
최태양의 스펙을 가늠해보았다. 신장은 185 정도 될까. 체중은 90kg에서 왔다 갔다 할 것 같다. 보수적으로 잡지 않아도 아마 100kg 정도면 적정 체중 아닐까.
‘지금처럼 최고 컨디션일 때 금강, 한라급인 사람인데.’
상위체급에서 성적을 내지 못하는 이유를 기술 부족이 아닌 체중 부족 때문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체중을 계속 불려 기어이 백두장사에 오르고 천하장사에도 도전했었지. 적정 체중을 초과하니 관절 부상을 달고 살았을 테고. 물론 나이가 들며 체중이 자연스레 증가하는 영향도 있었겠지만.
아무튼, 최태양은 씨름선수라기보다는 목과 팔다리가 긴 근육질 모델 같은 몸매였다.
“천하장사 되고 싶어요?”
“모든 씨름선수의 꿈 아니겠냐?”
프로 씨름단에 입단해 괜찮은 연봉을 받고, 각종 대회에서 우승해 이름을 알리는 꿈. 당사자가 아니어도 그 마음이 짐작이 갔기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술로 승부해요. 몸이 무거워지면 관절 다 상해요.”
“형은 관절도 쌩쌩해.”
“지금은 젊고 몸도 가벼우니까요.”
진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고집이 뚜렷한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님을 알기에 어찌 설득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헤휴-.
우유를 얻어 마시던 장군이도 함께 한숨을 쉬었다.
“코치님이 그러시는데, 내년부터 천하장사 대회 규정이 바뀔 거 같다고 하시더라.”
“어떻게요?”
“희망자는 전부 참가할 수 있도록 바뀐다나 봐. 경량급도. 그냥 인맥 통해서 들은 거라 확실하지는 않다고 하는데······.”
진혁은 당연히 알지 못하는 이야기다.
씨름에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니고 최태양을 제외하면 유명 선수 몇몇의 이름만 기억할 뿐이니까.
그래도 언뜻 들은 기억은 난다. 천하장사 도전 제한을 없앴다고 했던가. 물론, 그렇다고 경량급 선수들이 대거 참가해 이변을 일으키는 일도 없었던 것 같다. 씨름에서 체급 차이란 그만큼 절대적이라 볼 수 있으니.
‘이 사람 정도 체격에 완력이면······.’
체중을 과하게 불리지 않아도 해볼 만하지 않을까. 이만기도 백두급이 아닌 한라급에서 천하장사에 오르며 유명세를 더하지 않았던가.
진혁은 남은 우유를 개밥그릇에 부어주고 일어섰다.
“한 시간 더해요.”
“어? 너 달리기 할 시간이잖아.”
“특훈해요.”
최태양이 군말 없이 진혁을 따랐다.
몇 번을 모래판에 굴렀을까.
최태양이 머리에 묻은 모래를 떨어냈다.
“잡치기는 이상하게 헷갈리더라.”
“몸에 익히면 전혀 어려운 기술 아니에요. 들배지기랑 다를 것도 없어요. 헷갈리는 이유는 상대 변화를 제때 파악하지 못해서 그런 거예요.”
평소 힘에 의존하고 상대적으로 쉬운 기술을 선호하는 최태양이다. 다른 기술을 어려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진혁은 생각했다.
“네 균형이 깨져야 반응을 살피든가 하지······.”
아차. 진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유도에서도 일부러 기술에 걸리고 당해주며 훈련을 하는데, 한번을 져주지 않으면서 기술을 가르치려 했으니. 최태양의 반응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크큭-. 괜히 웃음이 나왔다.
“크흠! 뭐, 내가 먼저 씨름하자고 한 건 아니니까요.”
많이 뻔뻔해졌다.
이제야 아빠 성격을 닮아가는 것 같다.
“그건 그렇지.”
“이제부터 기술 받아주면서 할게요.”
“나야 고맙지. 근데 넌 어디서 씨름을 배운 거니?”
“그······.”
그러게요? 언제 배웠지?
혼자 살며 명절 때마다 명절 장사씨름대회를 유심히 본 게 전부였다. 친구 오빠가 출전했으니까. 밥 샙이라는 이종격투기 선수는 액션 영화를 보며 격투술을 익혔다던데, 진혁도 그런 경우일까.
‘힘세고 빠른 것도 설명 못하는데.’
진혁은 이번에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뒷머리만 긁적였다.
*
“진혁아아아-! 씨름하자아-.”
처음 약속과 달리, 최태양은 훈련장 공사가 끝난 후에도 샅바를 들고 찾아왔다. 매일 우유를 챙겨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수업료라며 고집을 부렸다. 진혁이 기술을 가르치며 자주 깔려주니 신나서 더 열심인 것 같았다.
“자-, 모래 걱정은 하지 말고 신나게 해봐!”
손광연과 한유영, 유진이와 장군이도 신이났다.
거의 매일 집 뒤에서 두 장사가 씨름을 하니 볼거리가 생긴 까닭이었다.
“어머-, 어쩜. 태양이는 몸매가 람보 같네요.”
“뭐, 나도 벗으면 저 정도는-.”
“에이-.”
“까하하-. 아빠, 엄마가 에이- 했지요?”
아내와 딸까지. 손광연 인생 최초로 여자에게 면박을 당한 날이었다.
삐뚤어질 거야. 손광연이 무릎을 모아 당겨 안았다.
푸확-!
두 다리가 뜬 진혁이 보기 좋게 자빠졌다.
“까하하! 오빠 졌지요? 흙 먹었지요? 형이 이겼지요?”
유진이는 누가 넘어지든 웃는 것 같았다.
‘미경이 생각해서라도 잘해줘야지.’
진혁은 최태양의 훈련 상대로서 최선을 다했다.
주말에는 한나절을, 평일 저녁에는 한 시간이라도 어울리고자 했다.
가을에도.
“진혁아아아아아-! 노올자아아아-!”
학교에서는 최미경과, 집에 오면 최태양과 어울렸다.
겨울에도.
“진혁아아아-! 에헷취-!”
장군이는 이제 최태양이 찾아와도 개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저 인간이 또 왔네 하는 눈빛을 보낼 뿐.
‘이 형은 친구가 없나? 훈련장 공사 다 끝났다면서 왜 자꾸 오는 거지?’
그래도 함께 이야기하며 운동하는 사람이 생겨 진혁은 즐거웠다.
***
홍기준은 미국은 물론 다른 나라에 출장 나가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집에서도 국제전화를 하느라 새벽에 깨어있는 시간이 많았다.
“······ discuss it again later.”
뭐,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자는 소리 같은데.
그럴거면 이 새벽에 뭐하러 30분 넘게 통화하는 건지.
‘여자들이 저러지 않나?’
자다 깬 유세라가 목을 벅벅 긁으며 퉁퉁 부은 눈을 꿈뻑였다. 옆자리가 허전해 찾아보면 남편은 응접실에서 전화기를 붙들고 있다. 투자사를 차렸다더니 무슨 투자를 저리 열심히 하는 걸까.
‘저 사람이 저렇게 영어를 잘했나?’
신혼여행 갔을 때는 아내 등 뒤로 숨던 사람이었는데. 아, 거긴 독일과 이탈리아였으니 당연한 거였나. 명문대를 나온 수재니 저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유세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몇 달에 걸친 학습과 조사 끝에 유세라는 인재육성 재단과 스포츠 에이전시 구상을 마쳤다. 호텔과 백화점 경영 업무와 병행하느라 오래 걸렸다고 변명을 했지만. 사실은 종이와 글자만 보면 잠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뭐······, 자세히 보니 별거 없네.”
그리 말하며 주루룩- 코피를 쏟았다.
***
해를 넘기고 드디어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두내리의 자랑 최태양! 제3회 〇〇배 전국장사씨름대회 용사급 우승!〉
바람 한 점 없는 날, 마을회관에 팽팽하게 걸린 현수막이 햇볕을 받아 빛났다.
‘용사급이라······, 태양 형은 용사였나?’
마왕을 때려잡고 공주도 때려잡고?
헛소리를 중얼거리는 진혁을 태우고 손광연의 차가 부드럽게 내달렸다.
2월 초였지만 햇살이 따뜻했다.
덕분에 교실이 아닌 운동장에서 졸업식을 진행할 수 있었다.
[손진혁-.]
연거푸 이름이 불렸다. 졸업장을 받고 상장을 받았다.
우등상, 개근상, 학교발전상, 공로상, 모든 과목의 성적 우수상에 시골 이장단이 주는 장학상까지. 부상으로 받은 앨범만 다섯 권이 넘었다. 사진을 잔뜩 찍어 인화해둔 손광연이 앨범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음음-. 언니들과 오빠들께서 중학교에 가서도 공부 열심히 하시고. 음-, 중학생 되시면 좀 잘 씻으시고······. 음음-.]
귀여운 후배 대표의 송사를 듣는 진혁의 얼굴에 아빠 미소가 걸렸다.
송사가 끝나고 진혁이 조회대 연단에 올랐다.
30명의 졸업생을 대표해 답사를 할 차례였다.
[안녕하십니까.]
낭랑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퍼지자, 웅성거리던 운동장이 조용해졌다. 인간관계는 넓지 못해도 마이크 앞에서 절대 주눅 들지 않는 진혁이었다. 발표로 단련된 내성 덕분이었다. 차라리 관록이라 칭할만했다.
[······ 우리는 아주 작은 세계에 머무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이 학교는 그중 가장 작은 세계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우리 학교가 있었기에. 우리 친구들과 동생들, 선생님들이 계셨기에. 안전하고 아늑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머물다 가노라,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를······]
차분하되 주요 메시지에서는 힘을 주었다. 몸에 밴 발표 습관이었다.
강진수가 헤죽 웃었고 육성찬이 코를 실룩였다.
최미경은 소꿉친구를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아홉 살이 된 홍수정도 부모와 함께 졸업식이 열린 시골 학교를 찾았다.
“오빠, 축하해-!”
홍수정은 진혁에게 꽃다발을 안기고 팔짱을 꼈다. 그리고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진혁의 여자 동급생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쳤다. 나 서울 여자야, 얘랑 뽀뽀도 했어, 라고 말하는 듯 기세등등한 얼굴이었다.
겨울방학을 지나며 엄마보다 훌쩍 커진 진혁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홍수정도 나이에 비해 제법 큰 편이었다. 그럼에도 누가 봐도 저학년 꼬꼬마였다.
“수정이도 왔네? 어머나 귀여워라.”
최미경이 홍수정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진혁의 비어 있는 팔을 잡았다.
홍수정은 말도 못하고 분한 마음에 뒤돌아 눈물을 떨궜다.
그렇게, 평범한 졸업식을 마쳤다.
‘세상이 변했구나.’
진혁은 새삼 저를 둘러싼 바람이 바뀌었음을 실감했다.
낯설었으나 포근했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가족과 홍기준의 가족이 자신만 보고 있었다.
그들 모두를 눈에 담았다.
‘좋구나.’
이런 그림을 얼마나 꿈꾸었던가.
모두가 애정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새로운 미래였다.
진혁의 감상을 손광연이 깼다. 팔을 넓게 벌려 인연을 한데 모으며.
“자-, 졸업식 했으니까 짜장면 먹으러 가야지?”
“요즘 서울에서는 졸업식 때 짜장면 안 먹어. 돈가스 먹으러 가자.”
촌놈 되더니 그런 것도 모르냐. 홍기준이 웃으며 핀잔을 던졌다.
그와 동시에 진혁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돈가스는 위험하다!’
진혁은 급히 운동화 끈을 고쳐 맸다.
그 모습에 손광연과 한유영이 배를 잡고 웃었다.
홍기준은 영문을 몰랐지만 친구가 웃으니 그저 좋은 일인가 보다 생각했다.
“우리도 여기서 사진 찍고 가요.”
정문에 이르러 진혁은 가족을 불러세웠다.
아담하고 작은 시골 학교의 정문에 졸업생 가족이 줄지어 섰다.
진혁도 가족과 함께 차례를 기다렸다.
〈졸업을 축하합니다〉
승합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은 정문.
그 폭만큼이나 짧은 현수막이 정겨웠다.
홍기준이 카메라를 잡았다.
학교 이름을 배경으로 엄마와 아빠가 진혁의 양쪽에서 팔짱을 꼈고, 동생 유진이가 진혁의 앞에 섰다. 진혁이 꼭 데려와야 한다고 고집해 동행한 장군이도 유진이 옆에서 포즈를 취했다. 옆으로 비스듬히 선 채 고개만 정면을 향하는, 얼짱견 각도였다.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진혁은 행복했다.
행복한 만큼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