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 새로운 미래 (6) >
***
홍기준은 당황스럽다.
“이히히히히히-.”
헤어질 때마다 눈물 콧물을 펑펑 쏟던 딸인데. 이제 철이 들려는지 울기는커녕 뒷좌석에 얌전히 앉아 연신 웃음을 흘리고 있지 않은가.
“어허허! 수정이, 오빠랑 헤어졌는데 안 우네?”
홍기준이 룸미러로 딸을 보며 웃었다.
“그럴 일이 있었거든.”
“그럴 일?”
“진혁이랑 뽀뽀했대. 광연 오빠랑 당신, 낮에 낙지 잡으러 갔을 때.”
홍수정은 진혁에게 당했다고 했지만, 유세라가 보기에는 정반대였다.
달리 항변하지 않아도, 누명 쓰고 징역을 사는 것 같은 진혁의 표정, 그리고 홍수정의 성격을 볼 때.
‘우리 딸이 했겠지.’
홍기준의 생각도 아내와 다르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웅얼거렸다.
“진혁이한테 그런 면이 있었나?”
진혁의 아버지인 손광연을 봐도 그렇다. 유세라 같은 미녀가 주위에 있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친구였다. 남녀 사이 모른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거겠지.
홍기준은 생각을 멈추고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유세라가 다리를 꼰 채 팔짱을 끼고 있었던 것이다.
‘또 어디서 심사가 뒤틀리셨나.’
돌아가서 처리할 업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걸까. 하긴, 유세라는 회사 일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실력이 있으되 억지로 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늘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아내였다.
그런데도 장인인 유명선 회장은 유세라에게 큰 책무를 믿고 맡겼다. 그리고 유세라는 빼어난 실력과 모나지 않은 인성으로 세간의 재벌 여식에 대한 색안경을 단시간에 벗겨냈다. 홍기준에게 아내는 존경스러운 경영인이었다.
홍기준은 자신이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아무렴. 재벌가 사위, 아름다운 아내, 사랑스러운 딸.
물론, 유세라도 홍기준을 사랑한다. 최근 들어 애정이 더 깊어졌다.
다만.
다소 띠꺼운 표정으로 동상이몽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으니.
‘나도 일찌감치 그······, 도장을 찍어뒀다면 인생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까?’
도장을 찍는다고 하던가, 아니면 침을 바른다고 하던가. 뭐가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딸이 하는 짓을 보니 침을 바르는 것 같던데.
아무튼, 맹랑한 생각을 하는 건 딸이나 엄마나 다르지 않았다.
가정에 가정에 가정을 더한 것뿐인데 뭐 어떠랴.
고속도로에 접어들어 휴게소에 들를 때까지 유세라의 자세는 바뀌지 않았다.
딸과 함께 핫바를 하나씩 손에 들고 나서야 웃는 아내를 보며 홍기준은 생각했다.
‘부디 오늘도 무사히······.’
핫바를 다 먹지도 못하고 조수석에서 꾸벅꾸벅 졸던 유세라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다음 주였나?”
“응. 뉴욕 출장 다음주.”
늘 그렇듯 개떡같은 유세라의 질문에 홍기준이 찰떡같이 답했다.
“요즘 미국 너무 자주 가는 거 아냐?”
“그럴 일이 좀 있어. 원래 지난주에 가려고 했는데 휴가 지내고 다녀오려고 미룬 거야.”
“당신 요즘 왜 그래?”
“뭐가?”
“너무 열심히 살잖아. 몇 년째 지치지도 않고.”
“젊을 때 열심히 살아야지.”
홍기준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세인그룹의 주인이 되는 것. 당장 손에 넣겠다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딸을 편애하고, 시원찮은 아들들에 실망한 장인이 딸에게 경영권을 넘기리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다. 거기에 자신의 능력을 보태기로 했다.
그렇게 얻은 경영권을, 회사 일을 싫어하는 아내는 남편에게 넘기고 기초체육 꿈나무 육성에 투신하게 될 것이다. 그 또한 홍기준은 내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손진혁이라는 미끼와 함께 스포츠 재단 떡밥을 풀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 얻어서는 떳떳할 수 없다.
스스로의 힘으로 그룹을 얻고 싶었다.
“열심히 사는 거랑 미국 가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어, 계획해둔 사업이 있어.”
“나한테도 말 못 할 계획이야?”
“별거 아냐. 그냥 투자사 하나 차렸어.”
“투자사?”
여자 생긴 건 아니지? 그렇게 물으려던 유세라가 말을 삼켰다. 세상에 믿을 남자 없다지만 남편 홍기준은 믿을 수 있고, 믿어도 되는 남자였다.
“나중에 잘 되면 알려줄게. 회삿돈에 손대거나 딴 주머니 차서 아버님 심기 거스르는 일 없을 테니 걱정 말고.”
결혼 후 10년이 다 되어서야 남자다운 배포가 생긴 걸까. 유세라는 남편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들어 더 캐묻지 않았다. 홍기준은 역시 유세라를 만족시키는 법을 아는 남자였다.
그에 반해 오빠라는 사람들은.
‘뷔앵신들.’
허구한 날 아버지에게 불려가 마빡이 깨지고 있었다.
듣기로 큰 오빠는 오늘내일하는 판국이라고 했다.
젊은 탤런트에, 여직원에. 추문이 끊이지 않는다고.
‘내 귀에 들어올 정도면 아빠도 아실 테고.’
사실 경영권이니 유산이니 하는 것에 별 관심이 없었음에도, 고운 구석 하나 없는 오빠들에게 빼앗기기 싫었다. 그 못난 오빠들보다 더 못난이 짓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유세라도 적극적으로 경영에 참여한 것이었고. 이제 남편까지 야망을 드러냈으니.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던가.’
남편을 회장으로 만들어주기로 결심했다.
명색이 유세라 남편인데 쭈구리로 살게 둘 순 없지.
눈을 부릅뜨고는 마지막 남은 핫바를 야무지게 씹었다.
‘나는 명예를 추구하는 멋진 여성이 될 거야.’
잔다르크처럼.
크어-.
핫바를 삼키지도 못하고 유세라가 목을 꺾었다.
승용차 조수석만큼 잠이 쏟아지는 공간도 드물다.
홍기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핫바를 굳게 쥔 채 잠든 딸을 룸미러로 확인하면서였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어쩜 이리도 모녀가 목을 꺾은 각도까지 일치할까.
‘외탁 제대로 했네.’
***
진혁은 아침 일찍 최미경 어린이네 집으로 향했다.
한 팔로는 동생을 안고, 한 손에는 수박을 받쳐 들었다.
“흡! 헙!”
마당 옆 빈 밭에서 웃통을 벗고 삽질을 하는 최태양이 보였다.
최태양을 보는 진혁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합숙훈련기간이라 더욱 시간이 안 날 텐데? 운동하느라 바쁜 사람이 어쩐 일로 집에 있는 걸까.
최대한 아이답게 인사를 건넸다.
“형, 좋은 아침입니다.”
그리 친하지 않은 사이에 사용하는 사무적인 말투가 자연스레 나왔다.
유진이도 오빠를 따라 인사하며 꼽박 고개를 숙였다.
“에헤헤-, 형 존나침미다-?”
말은 많이 늘었지만 발음은 부정확한 편이었다.
“어! 진혁이랑 유진이! 수박 주러 온 거야?”
“예.”
“녜. 에헤헤-.”
“뭐하세요?”
“머세오?”
“하하하! 유진이 말 많이 늘었네? 뭐 좀 만들려고. 아이고, 쉬울 줄 알았는데 좀 많이 힘드네.”
최태양이 잠시 허리를 펴고 숨을 골랐다. 아이고 허리야, 앓는 소리를 내며.
땀으로 번들거리는 상체가 햇빛을 받아 보기 좋게 반짝였다.
“좀만들? 좀마니?”
유진이는 삽질의 목적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아기의 동그란 눈을 보며 최태양이 헤벌쭉 웃었다.
“간이 씨름장이라고나 할까?”
“가니? 씸장?”
이게 뭔 소린가 싶어 멀뚱한 진혁을 보며 최태양이 설명을 이어갔다.
“훈련장이랑 합숙소 공사 중이야. 학교 훈련장이 깡통막사였거든. 누가 기부해줘서 최신식으로 짓는대. 읍내 사는 친구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하면 되는데 나는 집이 머니까 집에서 하려고.”
아, 그렇구나.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육상대회 예선 때 보았던 그 씨름부 합숙소 겸 훈련장을 새로 짓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웃했다.
‘나 중학교 졸업할 때도 썩은 깡통막사였는데?’
진혁은 아직 중학교와 연관이 없다. 씨름부와는 더더욱 인연이 없었다.
혹시 홍기준 아저씨가 힘을 쓴 걸까.
“형, 기부자가 누군데요?”
“글쎄? 코치님도 모르신다더라. 익명으로 기부했다던데? 학교 선배라는 말도 있고, 고향이 태양이라는 말도 있고. 경기도 어디 대학교 이사장이라는 말도 있고. 다 추측이지 뭐.”
최태양의 말을 종합하면 성공한 태양군 출신 대학교 이사장쯤 되는 사람이려나. 잘 알지 못하는 진혁으로서는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성공한 사람이 고향이나 출신학교에 기부하는 사례가 드물지 않았으니까. 씨름부가 있는 대학에서 선수 선발과 육성을 위해 투자한 것일 수도 있다.
“근데 누구랑 훈련해요?”
“누구양? 훌륭?”
“아······?”
최태양이 머리를 긁적였다.
미처 거기까지 생각 못했다.
이미지 트레이닝하려고 그런 건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최미경이 유진이를 안고 그늘에 앉았다.
아이가 먹기 좋도록 작게 자른 수박을 하나씩 먹이며, 턱으로 흐르는 단물을 닦아주며 보모 노릇을 하는 중이다.
시선은 밭에서 샅바를 굳게 움켜쥔 고등학생과 초등학생을 나른하게 응시했다.
‘낭만적이네.’
씨름은 재미없는 스포츠였는데. 잘생긴 남자 둘이 부둥켜안고 힘과 기술을 겨루는 모습이 썩 근사하다.
푸확-!
최태양이 볼썽 사납게 나동그라졌다.
‘또 졌네.’
오빠 최태양은 전국구 씨름선수다.
고교 2학년인데도 3학년 선수를 번쩍 들어 모래판에 자빠뜨리는 장사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퍼석-!
아이고, 또 오빠가 졌다. 이번에는 보기 흉하게 옆머리부터 떨어졌다. 뭐, 아까는 얼굴로 떨어지며 흙을 먹었으니 많이 나아졌다고 볼 수 있으려나.
“꺄하하하-!”
유진이가 짧은 팔을 들어 올리며 통쾌하게 웃었다.
밭에서 두 남자가 두런두런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 판 끝나면 꼭 저렇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마치 스승이 제자를 앉혀 놓고 가르치는 모습 같았다. 스승이 너무 어려서 이상하긴 하지만.
“형은 힘만 믿고 상대를 들려고 하잖아요. 힘으로만 하는 건 하수에게나 통하는 거예요. 수를 읽는 상대한테는 기술을 걸어 수 싸움을 해야죠. 힘 위주로 하다가 상대가 버티거나 되치기하면 자기 힘에 당하는 거예요.”
“으, 응. 그렇지. 그렇긴 한데······. 나는 힘으로만 하지는-.”
“다리 짧고 힘 약한 사람이 들배지기를 주특기로 쓰지는 않지요.”
“어, 그렇지. 맞아.”
최태양이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의 지적이 틀리지 않았으니. 최태양은 큰 신장과 길고 굵은 팔다리, 거기서 나오는 힘으로 들배지기 후 밀어치기를 주특기로 사용했다.
“다시 해요.”
머리에 잔뜩 묻은 흙을 털어버리고 최태양이 다시 무릎을 꿇었다.
누구에게도 힘으로 밀리지 않았고, 완벽하게 구사하는 기술도 있다. 18세 최태양을 고교생 중 무패의 씨름선수로 만들어준 두 가지 무기였다. 그런데 손진혁에게 내리 다섯 판을 내주고 나니 훈련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무 튜브를 당길 게 아니라 칡뿌리를 캐야겠네.’
진혁은 최태양의 기술을 곱씹었다.
들배지기뿐 아니라 쇠기둥 같은 다리로 시도하는 밭다리 걸기도 훌륭했다.
한데 힘과 체중의 분배가 적절치 않았다.
‘이 형, 별로 져본 경험이 없나 봐.’
완벽하지 않은 기술을 남발한다는 건 성공으로 인한 긍정적 효과가 크게 작용한 것일 터. 진혁은 최태양의 기술을 그대로 돌려주기로 했다. 더 완벽하게 채워서.
“이제까지는 제가 되치기만 했잖아요.”
“어, 그랬지.”
투레질하듯 뜨거운 숨을 뱉은 최태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진혁의 어깨에 얹은 채였다.
“형 기술 써볼 테니 비교해 봐요.”
흡- 짧은 기합과 함께 진혁이 샅바를 당기며 하반신을 바짝 붙였다.
거짓말처럼 최태양의 몸이 들렸다. 자신보다 키큰 상대를 순전히 허리와 전완근의 힘으로 들어 올린 것이다. 최태양은 진혁에 비해 다리가 길어 버둥거리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최태양이 겨우 까치발로 버티는 순간, 진혁의 오른쪽 어깨가 최태양의 가슴을 밀었다. 허리 샅바를 쥔 손은 고정하는 동시에 다리 샅바를 강하게 당기는 솜씨가 능숙했다.
‘밀어치기!’
신장 차이가 큰 선수를 상대로 작은 선수가 사용할 기술은 아니다. 그러나 최태양의 머리는 교본을 잊은 지 오래였다. 이 초딩은 교본에 등장하는 일반적인 상대가 아니므로.
최태양이 급히 왼 다리를 뒤로 뻗었다. 두 다리를 모두 빼면 분명 당겨서 엎어뜨릴 터였다. 아까도 그 수법에 당했다.
역시나, 진혁이 엉덩이를 뒤로 빼며 샅바를 당겼다.
‘이번엔 안 속는다!’
나보다 힘이 강한 상대가 당길 때는 상대를 축으로 삼아 회전을-.
푸확-!
‘어?’
최태양이 보기 좋게 나동그라졌다. 옆으로 두 바퀴쯤 구른 것 같았다.
주위를 돌며 힘을 빼려 했는데 어느새 발 축이 잠겨버렸다. 발이 갇히니 그대로 넘어가 버린 거다.
‘오, 온몸이 짜릿해.’
이 순간, 최태양에게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뭔가 자신의 한계를 관조한듯한 후련함,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라는 통쾌함이 물밀 듯 몰려왔다.
“까하하-!”
수박 먹으며 박수를 치는 동네 아기는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최태양은 밭에 철푸덕 앉아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호흡이 가빠서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아서였을까.
해를 등지고 선 초딩이 너무 커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