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 새로운 미래 (5) >
*
졸졸졸 흐르는 개울가에 똥꼬발랄한 홍수정은 사라지고 우수에 가득찬 여자아이만 남았다.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유진이 낮잠 자는 사이 송사리 잡으러 가자고 꼬드긴 건데. 홍수정은 무릎을 끌어안고 투명한 냇물만 물끄러미 보았다.
“수정아, 오빠랑 고기 잡자.”
“으응-.”
쟤가 왜 저러나.
홍수정은 멍한 눈으로 개울만 바라볼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시끄러운 녀석이 조용하면 평화로울 거라 생각했는데, 평화로운 건 고막뿐이었다. 감정이 생긴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감정이란 건 꽤나 불편하구나. 진혁은 제 안에 돋아난 평범한 인간의 감정이 불편한 한편, 내심 반가웠다.
어쨌거나.
‘대마법사가 저러고 있으니 마음이 너무 불편해.’
정강이까지 들어가는 개울에 들어갔던 진혁이 홍수정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곁에서 본 홍수정의 눈동자는 개울에 비친 햇빛이 한 번 더 반사되어 영롱하게 빛났다. 그러나 초점 없는 눈동자와 무표정한 얼굴은 나 지금 슬프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얘가 걔가 맞는 거 같기도 하고.’
과거에 봤던 눈동자다.
혼자 임원 사무실에 앉아 멍하니 있던 홍수정. 보고나 회의를 위해 진혁이 들어가면 그제야 황급히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곤 했었다. 과거의 대마법사는 왜 덩그러니 앉아 슬픈 눈빛을 하고 있었을까.
지난 생의 대마법사는 이제 어쩌지 못하지만 현재의 홍수정은 진혁이 달래줄 수 있다. 아니, 달래주고 싶었다.
“수정아. 물놀이 싫으면 집에 갈까?”
“······.”
홍수정은 여전히 턱을 무릎에 괴고 말이 없었다.
조그만 녀석이 강아지처럼 그러고 있으니 어디 아픈가 싶기도 한데.
‘설마 이 녀석 뽀뽀 때문에 이러는 건가?’
손진혁이 바보도 아니고, 유추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뿐이었으니.
“수정아, 오빠가 뽀뽀하자고 안 해서 그래?”
뽀뽀라는 말에 홍수정이 진혁을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눈에는 이미 가출했던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살짝 원망 섞인 눈빛.
진혁은 내심 안도했다. 그거 때문에 그런 거 맞구나.
“그런 얘기는 다른 사람들 있는 곳에서는 하는 거 아냐. 둘만의 비밀이니까.”
“아, 그런가?”
“그럼. 둘만의 소중하고 비밀스러운 그- 뭐랄까······.”
개뿔 알지도 못하면서 설명하려니 진혁은 말문이 막혔다.
이래서 경험이 중요한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거 어째 조기교육 분위기인데. 대마법사를 길들이는 조련사의 기분이 이런 걸까?
“그럼 둘만 있을 때는 하자고 할 거야?”
조련은 무슨.
이렇게나 당돌한데.
“어-, 그게.”
“피-, 거 봐. 싫은 거잖아.”
“그게 아니라.”
“아니야? 그럼 좋아?”
도대체 어떤 몹쓸 선생이 이런 극단적인 논리를 가르친 걸까.
다시금 말문이 막혔다.
진혁이 뭐라고 대꾸할 새 없이 홍수정이 화색을 띠었다.
그 얼굴을 보며 진혁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누가 봐도 내가 조련당하는 거 아닌감?’
진혁이 엉뚱한 의문에 빠진 틈을 타 홍수정의 얼굴이 다가왔다.
아, 안 돼. 나는 오빠가 아니라 아저씨야! 아니, 이게 뭔 소리야.
진혁의 사고 회로가 꼬여 어어어 하는 사이 고양이 눈이 코앞에서 질끈 감겼다. 곧이어 쪽- 하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커헉! 방심했다!’
피를 토하는 충격이었다. 내상이 그만큼 컸다는 뜻이다.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이렇게나 큰데, 고막을 때리는 마찰음은 그보다 더 강렬했다. 설렐 것도, 좋을 것도 없었다. 동생 유진이가 걸핏하면 오빠를 찾아와 뽀뽀를 날리는 통에 익숙한 감각이기도 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래도 남이라고 조금 불편한 느낌이랄까.
‘이게 뭐야! 꼬맹이한테 털려버리다니!’
어디에 따져야 할지 몰라 당황한 사이 꼬맹이 홍수정의 작은 두 손이 진혁의 뺨을 잡았다. 확인 사살이었다. 꼬맹이가 구수한 소리까지 냈다.
“우움-.”
도망치면 안 된다.
뿌리치면 대마법사가 다시 대마법사가 될 거다. 그런데 왜 눈물이 날 것 같지?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분한 것 같기도 하다. 역시 서울 여자는 무섭구나. 이제 그만 날 놓아줘!
진혁은 다리가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가 균형을 잃었다.
첨벙-!
보기 좋게 넘어지며 개울에 머리부터 입수했다. 저도 모르는 사이 다리가 풀렸나 보다. 잠시 달궈졌던 얼굴이 개울물 속에서 시원하게 식었다. 그와 동시에 안도가 밀려왔다. 이제 대마법사는 슬퍼하지 않겠지. 나는 최선을 다한 거야.
“파하-!”
일부러 과장된 동작을 취하며 개울에 박혔던 머리를 들었다.
이렇게 하면 대마법사가 뒤집어지도록 웃겠지. 웃는 홍수정은 세상 누구보다 예쁘다. 미래의 홍수정을 뜻하는 거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기척도 없었다.
“수정아?”
홍수정은 없었다.
설마, 전생의 미련 때문에 갑자기 닥친 꿈이었을까. 아쉬움이 만들어낸 허상은 아닐까.
진혁이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방황할 때였다.
“엄마아아아아-.”
멀리서 꼬맹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길게 꼬리를 남기며 진혁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짧은 다리로 집을 향해 무섭게 질주하는 서울 꼬맹이가 보였다.
“엄마아아아아-! 이건 비밀인데에에에-!”
저 녀언······석이?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허망한 눈으로 개울을 보던 진혁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풀숲에서 진혁을 지켜보던 네발 달린 짐승도 조용히 이동했다. 길게 빼문 혀가 달랑거리도록 갸웃거리면서.
헤헤헥-?
인간들은 주댕이를 핥지 않네? 좋은 구경할까 싶어 숨어있었는데.
후우-. 진혁은 한숨이 나왔다. 벌을 받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서울에서 온 귀한 손님에게 몹쓸 짓을 한 게 아닌가. 그렇게나 어진 부모님이 화를 내시면 얼마나 무서울까. 생각하기도 싫었다.
죄지은 심정으로 언덕을 오르니 영웅담을 늘어놓는 홍수정의 목소리가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빠가 이케, 이케 내 얼굴 잡고 이케 우움-.”
홍수정이 엄마 유세라의 뺨을 잡고 입 맞추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성심을 다해 까뒤집은 새빨간 입술이 주름 없는 닭똥집 같았다.
억울한 와중에도 진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손을 쓴 기억은 없는데.
“어머머, 그랬어? 그래서 우리 수정이 좋았어?”
저 양반이?
어처구니없어할 줄 알았는데, 유세라는 딸의 재롱 섞인 재연에 세상 환한 미소로 화답하고 있었다. 아직 아이들이니 부적절한 눈빛으로 볼 필요 없다 이건가?
“아이, 뭐 별거 없더라 엄마.”
얼씨구?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두 손을 모아 아래로 쭉 뻗고 몸을 배배 꼬는 것이 어지간히 부끄러웠나 보다, 하는 생각도 잠시.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헤벌쭉 웃는 걸 보며 진혁은 생각했다.
‘다행이네. 싫지는 않았나 봐.’
쩝. 이렇게 첫 뽀뽀를 무방비로 털릴 줄이야. 괜히 대마법사가 아니구나. 다시 생각해 봐도 예측을 불허하는 기습 공격이었다. 홍수정은 특전사에 입대해도 잘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특히 후방교란과 요인암살 임무가 제격일 것이다.
진혁은 엄마를 향해 말없이 눈빛으로 호소했다.
‘엄마, 저는 억울해요. 억울한 것이에요.’
말은 없었지만 엄마들의 눈꼬리는 아래로, 입꼬리는 위로 올라가 있었고. 그 시선의 끝에는 허망한 표정의 진혁이 서 있었다. 진혁은 해명하기보다는 자업자득이라 생각하며 집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내가 마음이 약해져서······.’
감정을 느끼고 충실했던 진혁의 업보였다.
이상하리만치 몸이 피곤했다.
‘낮잠이나 자야겠다.’
진혁은 잠결에 누군가 2층 자신의 방을 들락거리는 기척을 느꼈다. 그리고 들락거릴 때마다 입술에, 뺨에 대마법사의 숨결이 깃들었다.
쪽-, 쪽-, 쭈아압! 강렬하고 뚜렷한 마찰음도 빼면 안 되지.
깊은 잠에 취한 진혁은 꿈속에서 생각했다.
‘차라리 먹어라······.’
침 좀 그만 묻혀.
***
저녁상을 치운 평상에서 후식으로 수박을 먹을 때였다.
홍기준이 물었다.
“진혁이는 커서 뭐 될래?”
어째 만날 때마다 이런 질문을 하는 것 같다. 마치 원하는 답이 있는 사람처럼 끈질기지 않은가.
“그······.”
수박을 작게 잘라 유진이에게 먹이던 진혁이 뺨을 긁었다.
지금처럼 가족과 평화롭게,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인데요. 또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부모님과 홍기준을 비롯해 유세라, 홍수정까지 자신을 보며 대답을 기다리는데도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중한 꿈이란, 늘 그렇게 아무에게나 보이고 싶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운동 잘한다던데, 체육중학교 갈래? 아줌마가 도와줄게.”
“아뇨.”
모처럼 던진 유세라의 질문에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진혁이는 엄마, 아빠랑 한집에서 오래오래 사는 게 꿈이래.”
“에게-, 그게 꿈이야?”
아빠의 설명에 유세라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기분 나쁜 웃음이 아니었고 유세라의 반응도 이해할만한 것이었다. 과학자나 정치인, 하다못해 부자나 운동선수를 꿈꿀 나이 아니던가.
“부모님이랑 같이 산다고 하면 시집오는 여자 없다, 너?”
“결혼할 생각 없어요.”
이 아줌마가 어디 되지도 않는 협박을 하려 드네. 결혼을 하게 되면 하는 거고, 나중에야 어찌 되든 당장은 가족과 지내는 것이 좋다는 뜻이었는데. 어른들은 한 번에 몇 단계를 건너뛰는 좋지 못한 습관이 있는 존재다. 진혁 역시 성인의 영혼을 가졌지만 이런 식의 대화는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다소 당돌하고 무뚝뚝한 진혁의 말투에도 어른들의 얼굴에는 불편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들은 아마도 진혁이 사춘기인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그러나 홍수정은 달랐다.
나라 잃은 표정의 꼬맹이 입에서 수박주스가 주르륵 흘렀다.
“야, 이 나쁜 놈아!”
홍수정은 진혁에게 수박 껍질을 던지고 어두운 길로 우다다 달려갔다.
우애애앵-! 삐뚤어져 버릴 거야!
다리도 짧은 녀석이 어둠속으로 삽시간에 사라졌다.
‘아,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엄마가 던진 돌이 딸에게 튄 꼴이 되었다.
그 돌을 튕겨낸 당사자인 진혁은 다시 죄지은 심정이 되어 꼬맹이를 찾아 나섰다.
“수, 수정아-. 그게 아니라-.”
전생의 기억 때문일까, 아직 꼬맹이일 뿐이지만 홍수정에게는 잘해주기로 결심한 터였다.
그 뒤를 놓칠세라 장군이가 달려갔다.
어른들의 유쾌한 웃음이 여름밤을 수놓았다.
“허헛. 그래도 내 딸은 끔찍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네.”
늙은이 혼잣말 같은 홍기준의 중얼거림도 웃음 소리에 묻혔다.
홍수정은 외할아버지에게 일러바칠 거라며 어두컴컴한 버스정류장에서 훌쩍대고 있었다. 맹랑한 서울 꼬맹이는 진혁이 뽀뽀를 해준 후에야 등에 업혀 돌아왔다.
“오빠, 나랑 약속한 거다?”
“······.”
진혁의 등에 업혀 신난 아이의 짧은 다리가 달랑거렸다.
과거 홍수정 전무의 기억력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진혁은 거기에 기대 덜컥 혼약을 해버렸다. 새끼손가락까지 걸었다.
“왜 대답이 없지?”
“어······.”
집요한 꼬맹이다.
어쩌면 꽤 오래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내게 강 같은 평화.’
***
“어머나, 봉숭아 예쁘게도 폈네. 우리 수정이 봉숭아물 들일까?”
“치-, 엄마는 비싼 매니큐어 바르면서 나는 봉숭아물 들이라고?”
홍수정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뽀뽀에 이은 비혼 선언으로 전날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려 심기가 불편했다.
“이거 첫눈 올 때까지 물 안 빠지면 첫사랑 이루어진다? 너 그거 모르지?”
“정말?”
홍수정의 볼이 봉숭아물을 들인 것처럼 붉게 익었다.
그러더니.
“오빠아-!”
집 안으로 들어가 진혁을 끌고 나왔다.
“빨리, 빨리 나와 봐아-.”
유진이와 색칠 놀이를 하다가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진혁은 엄마들의 의미심장한 웃음과 제 새끼손가락에 올려지는 짓이긴 봉숭아꽃을 보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흠-, 이거 아무래도 대마법사한테 코 꿰인 거 같은데.’
아무렴 어떠냐.
잠시뿐이다.
‘얘가 중학교 때 유학을 가던가?’
홍수정은 머지않아 유학을 갈 테고, 성장기를 거치며 남자 취향도 변할 텐데 뭐. 잠시 어울려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방학 때마다 찾아와서 엄마와 아빠를 즐겁게 해주는 귀한 손님들 아닌가.
“오빠, 이거 첫눈 올 때까지 손톱 깎으면 안 되는 거야. 알았지?”
“학교 가면 애들이 놀릴 텐데······.”
“수정이 위해서 놀림 좀 당해주면 안 돼?”
“어, 그래. 그럴까?”
이상하게 바가지 긁히는 기분이었다.
짐짓 화난 듯 허리에 손을 얹는 꼬맹이를 위해 한 번 더 져주기로 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진혁을 놀릴 녀석들도 없다.
“오빠 안녕-. 유진아, 언니 갈게-.”
초등학생이 된 홍수정은 휴가를 마치고 떠날 때, 더는 울지 않았다.
대신.
떠나는 차창으로 바알갛게 물든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배시시 웃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