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 새로운 미래 (4) >
***
[우리 어린······ 선수 꿈이 뭔가요?]
[농부요.]
[아······. 아하하.]
TV 속 기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어린 선수라고 부르려다 멈칫했을 때보다 더 난처한 얼굴이었다. 대구 MBS라는 공중파 소속 기자였는데 선수와 키가 비슷했다.
“허헛, 저긴 못 막은 모양이네.”
지역방송사라 이건가. 그리 중얼거린 홍기준이 고집스럽게 턱을 만졌다. 눈에는 묘한 총기를 띈 채였다.
[그래도 재능이 아까운데, 재능을 살려 국가와 체육 발전에 이바지할 생각은 없나요?]
[육상을 정말 좋아하지만, 저 때문에 누군가 비교당하며 학대를 받아야 한다면 싫습니다. 저 역시 언제고 그런 대우를 받을 수 있고, 후배들과 다음 세대에도 악습이 되물림 될 수 있으니까요. 그건 국가에 기여하는 게 아니라, 재능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어린 선수들을 체벌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띡-. 홍기준이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
길게 한숨을 뽑으며 검지로 리모컨을 딱따닥- 두드렸다.
민용락은 안절부절못했다. 방송 비디오를 구해오라기에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늘 웃는 부장이 보기 드물게 안색이 어두운 까닭이었다.
뭔가 잠시 고민하던 홍기준이 수화기를 들었다. 민용락이 옆에 있다는 사실을 잊은 사람처럼.
“예, 형님 접니다.”
누굴까, 민용락이 가만히 미간을 모으며 고개를 틀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덕분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민용락이 알기로 홍기준이 형님이라 부를 사람은 두 명뿐이다.
“한 번만 더 수고 좀 해주시죠. 예. 학원 체육 체벌실태 제대로 취재해오는 놈한테 활동비, 광고 몰아준다고 해보세요. 대구 MBS에 꿀 좀 보내시고요. 그렇게만 해도 다른 분야는 알아서 움직일 겁니다. 예, 형님만 믿겠습니다. 일본에는 제가 알려드린 대로 다녀오셨습니까? 잘하셨네요. 그 이후에는······.”
광고 예산집행과 언론 홍보를 담당하며 홍기준으로부터 형님 소리를 듣는 사람.
누군지 알 것 같아 민용락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유문식 사장.’
회장의 장남, 세인케미컬 사장 겸 그룹 홍보이사를 맡고 있는 사람.
홍기준의 목소리가 잠시 허공에 멈췄다.
홍기준은 민용락과 문을 번갈아 보며 눈썹을 움찔거렸다.
허리를 깊이 숙인 민용락은 조용히 비디오 테이프를 꺼내 부장실을 나섰다.
‘후우-. 숨 막혀.’
홍기준 부장은 늘 웃고 부드러워 직원들이 모두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칼날 같은 데가 있다. 눈빛으로 속마음까지 샅샅이 훑는 느낌이랄까.
저 샌님 홍기준 부장이 회장의 장남을 뒤에서 움직이는 실세라는 사실을 전하면 직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무도 안 믿겠지.’
자신을 향한 신임을 생각했을 때 누구에게도 말해서도 안 될 테고. 옆에 있는데도 저런 통화를 들려주었다는 건, 시험하려는 뜻일 거다. 민용락이 부러 입술을 꽉 다물며 책상으로 발길을 옮겼다.
부장님 귀는 당나귀 귀.
***
“오, 대단한데? 전국대회에서?”
이틀째 같은 내용이었다.
퇴근한 홍기준은 손광연의 자랑을 들어야 했다.
대학 시절까지만 해도 과묵하던 친구였는데 걸핏하면 전화를 걸어 자랑질이다. 아들 없는 놈 어디 서러워 살겠나 싶으면서도 10년 넘게 소식 끊겼다가 다시 만난 친구가 행복해하는 모습이 흐뭇했다.
와이프를 소개해준 장본인이니 홍기준에게는 은인이기도 했다. 그저 웃으며 축하한다, 부럽다는 말로 통화를 마쳤다.
“광연 오빠야? 전국대회는 무슨 소리야?”
“진혁이가 전국대회에서 금메달을 세 개나 땄다고 하네.”
홍기준의 재킷을 받아 옷걸이에 걸던 유세라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쩜. 방학 때도 매일 강아지 달고 뛰어다니더니 대단하네. 육상할 거래?”
공부 잘한다는 말은 들었다. 학생 수 적은 시골에서 그게 무슨 대수겠나 생각했다. 그와 별개로 전국규모 육상대회 우승은 놀라운 소식이었다.
“운동부에 들어갈 생각은 없나 봐.”
다른 학교 선수들 훈련하는 모습, 지도자에 대한 실망 등등.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늘어놓은 손광연의 말을 홍기준 역시 빠짐없이 유세라에게 전했다. 큰 오빠에게 뭔가 조사를 사주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빠들을 한심하게 여기는 아내였으니까.
“당신 올림픽 보면서 우리나라에는 왜 저런 선수들 없을까 한탄했었지?”
“응? 그랬었지.”
갑작스러운 홍기준의 말에 유세라는 눈만 끔뻑였다.
딸과 똑같은 아내의 표정에 홍기준이 아빠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해볼래? 기초체육 육성.”
“내가? 난 체육 몰라.”
“내가 도와줄게. 남편만 믿어.”
백화점과 호텔을 경영하는 사람에게 기초체육 육성이라니.
남편이 적극적으로 달라지긴 했지만 뜬금없는 제안이라고 유세라는 생각했다.
그 생각을 아는지 홍기준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다른 그룹 딸내미들처럼 갤러리 같은 거 하지 말고 재단 하나 만드는 거야. 당신 갤러리 싫다며.”
“응. 그랬지.”
언젠가 아버지 유명선 회장의 권유가 있었지만 유세라는 지체 없이 팔을 내둘렀다. 조명 밝힌 곳만 밝은 곳. 세상의 명암을 고급스럽게 꾸며 전시한 신들의 전당을 떠올리게 만드는 장소. 그곳에 따로 마련된 공간에서 어떤 말들이 오가는지, 어떤 악취를 풍기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었기에.
“당신 학을 떼는 일 말고, 재능있는 미래의 스포츠 인재를 육성하고 후원하는 일은 어떨까?”
홍기준이 덧붙인 말에 유세라가 눈을 빛냈다.
여러모로 뜻이 통하는 부부였다.
“재단 같은 거 만드는 거야?”
“사업 지속성을 고려할 때 재단도 필요하겠지? 재단은 프레임의 문제고, 내가 구상하는 사업에는 스타플레이어가 있어야 해.”
“스타플레이어? 그게 뭐야?”
쉬운 단어의 결합이고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말임에도 스포츠 문외한인 유세라에게는 생소하게 들렸다.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면 서로 곤란해질 수 있다. 함께 야구를 관전하다가 ‘저 선수는 왜 뛰어?’ 하고 묻는 여자친구에게 도루를 설명하다가 헤어지는 남녀가 얼마나 많던가.
“명품 같은 거지. 잘하는 선수 골라서 지원하는 거야. 연예인처럼 매니저도 붙이고, 스폰서 영업도 하고, 법률 대리인도 하고.”
에이전트였다.
그러나 어찌 된 것이 유세라는 명품이라는 말에 반응한 듯 보였다.
“스타플레이어를 진짜 스타로 관리한다는 뜻이네? 오빠는 진혁이가 그럴 인재라고 보는 거고?”
여보 당신으로 부르면서도 가끔 이렇게 오빠 소리가 튀어나오는 유세라였다. 흥분했다는 뜻이었고, 이때는 더 설득할 필요가 없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꿀단지 이미지를 눈앞에 그려주면 그만이다.
다소 엉뚱한 아내였지만 유세라 역시 재벌가 자녀이며 최고경영자. 자신이 얻는 것이 있다면 과감히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홍기준은 유세라의 욕망을 알고 있었다.
“매니징과 육성을 병행하면 홍보 효과도 대단하고 명예도 얻겠지.”
“명예······.”
유세라가 초점 없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국가 스포츠의 앞날을 위해 기초체육을 후원하고 인재를 육성하는 유세라. 단순히 명성에서 끝나지 않을 걸? 대한민국 기초체육의 어머니라는 명예를 얻겠지······.”
다음에도 홍기준이 뭐라 뭐라 덧붙였으나 유세라는 세상과 완벽히 단절된 자기만의 세계에 들어간 후였다.
‘명예라······.’
한때 영화배우를 하려다가 아버지 반대로 유학을 다녀오지 않았던가. 유명해지고 싶다는 꿈. 세인그룹 회장의 외동딸이 아닌 유명인 유세라가 꿈일 때가 있었다. 유명해지고 싶어 백화점과 호텔을 번듯하게 경영 중이지만 신문에 실리는 것은 그룹 이름뿐이었다.
남편이 갑자기 왜 이리 열심인지, 왜 자신을 설득해 그런 일로 인도하려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진혁이가 아니면 다른 선수라도 괜찮겠지. 인기 종목이든, 비인기 종목이든. 시간은 많고 선수도 많으니 차차 알아봐. 내가 밀어줄게.”
“피-, 어디 부장 나부랭이가 사장님을 밀어준대?”
그렇게 대답했지만 유세라는 아직 다른 세계에 갇혀 있었다.
‘스포츠 에이전시라······.’
유세라가 큰 시장과 미래를 내다보며 가슴 두근거리는 것만은 아니었다.
‘스포츠 에이전시.’
그저 근사해 보였다. 명칭부터 지구촌 스타일 아닌가.
운동선수들을 후원하며 관리하는 재단. 꿈나무를 육성하고 될성부른 나무와는 따로 계약도 하고. 돈은 그룹에서 나올 테니 세인을 따서 일단은 SI에이전시, SI재단이 좋겠다. 나중에는 SR로 바꿔야지.
‘그럼 나는 이사장인가?’
대한민국 체육의 어머니, SI재단 이사장 유세라.
상상 속에서 유세라는 순식간에 간판과 명패까지 팠다.
구름 위를 걷는 아내를 홍기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구체적인 질문이 나와야 할 상황에서 상상의 나래로 급발진하니 대화를 길게 가져가기 힘든 사람이었다. 한참을 아내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에휴. 그놈의 위인병이 또.’
이럴 땐 화제를 돌려야 한다.
“수정이는 어디 갔어?”
“츄릅-. 어, 어? 누구?”
급히 침을 닦은 유세라가 덤벙거렸다.
그리고는 눈을 강하게 깜빡여 현실로 돌아왔다.
“수정이 정원에서 줄넘기해.”
“줄넘기?”
“응. 방학 때 진혁이 따라다니려면 다리가 튼튼해야 한다면서. 어휴-. 누굴 닮아서 벌써 남자 꽁무니나 쫓아다니는지.”
홍기준은 이번에도 엄마 닮았다는 말을 꾹 참았다.
뭐, 유세라가 남자 쫓아다니는 모습은 보지 못했으니 맞는 말이기도 했고.
유세라는 다음날부터 여기저기 발품을 팔고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와 영국, 독일에 있는 유학 시절 친구들에게 이것저것 자문을 구하고, 논문을 요청하기도 했다. 미국에는 아는 사람이 없어 홍기준이 알아보기로 했다.
***
방학이 되면 대마법사가 찾아온다.
“안녕하세요!”
“우리 수정이 왔구나. 뭘 먹고 이렇게 컸어?”
한유영이 홍수정을 꼭 끌어안고 다정히 안부를 물었다.
그러나 대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홍수정은 목표의식이 뚜렷한 아이였다.
“그럼 전 이만-.”
서울 꼬맹이는 머리카락이 땅에 닿을 정도로 한유영에게 인사 후 진혁의 옆에 들러붙었다. 진혁의 방학은 두 꼬마의 보모 역할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오빠, 고스트가 뭔지 알아?”
“유령.”
“그럼 헤미스피어는?”
“반구?”
“오빠는 국민학생인데 어떻게 알아?”
“······.”
뭐라는 거야, 자기도 초등학생인 주제에.
조기교육에 영재 교육까지. 비싼 사교육이란 사교육은 다 받는 홍수정이었다. 그러나 과거조차 천재였던 손진혁에게 홍수정은 한낱 꼬맹이일 뿐이었으니. 감히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서려는 꼬맹이가 귀여워 진혁은 홍수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럴 때마다 홍수정은 강아지처럼 눈을 감고 진혁의 손에 머리를 들이댔다.
“어쩜, 쟤는 누가 머리 만지는 거 싫어하면서 진혁이한테는 안 그러네?”
“호호. 정말이에요, 언니?”
“네. 그렇다니까요. 지 아빠가 머리 만지거나 뽀뽀하려고 하면 기겁을 해요.”
유세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 딸을 노려봤다. 집에서 아빠에게 하는 행동과 비교가 되기도 했고, 지난 겨울방학 때 침 바른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수정이 너, 진혁 오빠가 뽀뽀하자면 어쩔 거야?”
이러는 게 아닌가?
그 말에 깜짝 놀란 진혁이 수정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급히 회수했다. 도대체 저 아줌마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싶어서.
‘내가 수정이를 너무 애기 취급했나?’
당황한 진혁과 달리 홍수정은 진혁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불그스름한 갈색 눈동자가 고양이처럼 제 영혼이라도 들여다보듯 하니 진혁은 괜히 싱숭생숭해졌다.
“오빠.”
“으응?”
“나한테 뽀뽀하자고 할 거야?”
“······아니?”
홍수정이 뭔가 말하려는데 유진이가 진혁의 뺨에 입을 맞췄다. 돌격하는 병정처럼 과감성이 돋보이는 동작이었다. 엄마나 아빠보다 오빠를 더 좋아하는 동생이라 이 집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에헤헤-, 뽀뽀했지요?”
유진이가 까르륵 웃으며 박수를 쳤다.
잘못 본 걸까?
홍수정의 눈동자가 실망한 빛을 띠더니 다시 책을 향해 스르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