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36화 (36/338)

# 36 < 새로운 미래 >

“너 이씨······.”

최미경이 잡아먹을 듯 쏘아보았다.

아무래도 이건 정답이 아닌 모양이다.

“어······, 난 운동도 해야 하고 집에 가서 동생도 봐야······.”

누가 들어도 구차한 변명이었다.

“아, 그렇지. 유진이 어리지.”

그러나 최미경에게는 통하는 듯 보였다.

못내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최미경은 더 조르지 않았다. 진혁의 평소 행실을 알기에 쉽게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런 면만 보더라도 여러 의미로 조숙한 친구였다.

진혁의 달리기 습관 때문에 함께 통학하는 날이 많지 않지만, 최미경은 진혁의 집에 자주 놀러 왔다. 숙제를 함께 하기도 하고, 봄이면 함께 찔레 순을 꺾어 먹고, 유진이의 머리에 꽃을 꽂아주는 등. 그 또래 여자아이가 보일 만한 행동이었다.

“미경이 많이 먹으렴.”

“감사합니다.”

엄마가 늘 집에 계셨기에 최미경은 진혁이 걱정하는 수상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문제 풀이를 척척 도와주는 진혁의 얼굴을 힐끔힐끔 보기는 했지만, 되바라진 녀석이 아니었던지 최미경의 관심 표현은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진혁도 최미경을 밀어내거나 차갑게 굴지 않았다.

숙제를 마치고 돌아갈 채비를 하는 친구를 보며 진혁은 생각했다.

‘내가 오버를 했던 모양이다.’

오해를 한 기분이 들어 최미경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진혁아, 나 간다. 유진아, 언니 갈게. 잘 있어.”

“언니, 빠빠-.”

“살펴 가라.”

“······.”

말투 이상한 건 여전했지만.

***

아빠는 신나셨다.

대회에 다녀온 후 저녁마다 전화기를 붙들고 자랑을 하셨다.

“와하하! 그렇다니까 그러네. 우리 아들이 이번에 육상대회에서-. 아이고 어디 중학교에서 한 번 만나자는데 우리 아들이 싫대서 내가 거절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반말하는 걸 보니 이번엔 홍기준 아저씨와 통화하는 것 같은데 저 말을 몇 번째 하시는지. 그리고 홍기준은 중동과 서남아시아 플랜트 사업으로 지금 한창 바쁘다고 들었는데.

도내 육상대회에서 4관왕을 했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인가.

농부의 아들, 시골 아이의 일상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게 진혁이 바라던 삶이었다.

21세기였다면 초등부 멀리뛰기에서 한국 신기록이 나왔다고 짤막하게나마 뉴스에 소개라도 되었겠지만, 아직 인터넷은커녕 삐삐도 대중화되지 않았다. 그리고 진혁도 육상을 하며 느끼는 재미와는 별개로 유명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평범하게 살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육상보다 동생 유진을 안고 다니며 말을 가르치는 일이 더 재미있었다. 아마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다면 좋은 아빠가 되었을 거라고 진혁은 생각했다.

“나비.”

“아삐-.”

“꽃.”

“꼬오-.”

“꼬꼬.”

“꼬오-.”

“개구리.”

“애우-?”

유진이와 교양 있는 대화를 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말을 빨리 배우기에 천재인 줄 알았더니 어째 다시 아기가 되는 것 같지 않은가.

진혁은 시간 날 때마다 포대기를 둘러 동생을 업고 들로, 논으로 산책을 다녔다. 아빠는 여전히 수첩에 뭔가를 기록하고, 엄마는 아빠 옆에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모내기를 마친 인부들이 모자를 벗어 아빠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기업 회장님을 모시는 모습 같아 진혁도 흐뭇했다.

“엄마, 유진이 자요? 가만히 있는 거 같아요.”

“아이코오-, 우리 딸. 오빠 등이 얼마나 편하면 침까지 흘리면서 자네.”

어쩐지 축축하더라.

처자식이 모두 나와 있으니 신경 쓰였던 걸까, 십장과 몇 마디를 나누고 돌아선 손광연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팔을 벌려 가족을 한데 모아 안으며.

“집에 갑시다. 오늘은 우리 아들이랑 바둑 둬야지.”

마지못해 집에 가는 사람으로 보기에는 너무 신나 보이는 얼굴이었다.

*

아홉 살 때였나?

책이나 TV를 보며 혼자 두는 아빠가 심심해 보여 같이 두자고 했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하하하, 진혁이한테 또 졌네.”

아들이 바둑을 배우겠다는 말이 반가워 아홉 점이나 깔아주고 백돌을 집었던 아빠는, 진혁이 열 살이 되던 해에 흑돌을 쥐는 게 당연해졌다. 나아가 석 점을 깔고도 계가 없이 패배를 인정할 지경이 되었다.

손광연은 턱을 매만지며 바둑판을 응시했다.

백은 좌상귀에 성채를 구축하고 중원을 잠식해갔다. 다분히 공격적인 기세요, 누가 봐도 노련한 바둑 기사의 수 싸움은 아니었다.

‘기력이 좀 되는 사람들은 안정적으로 대국을 이어가니까.’

틀이 잡히지 않고 참신한 발상을 하는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대국이었다. 진혁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아빠는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니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아빠, 제가 접대 바둑 같은 걸 몰라요.’

그룹 회장과의 대국에서도 기세를 접어주지 않던 진혁이다.

진혁은 모른 척 바나나를 벗겨 한 입 베어먹으며 일어섰다. 물리도록 먹었지만 어린 입맛에는 먹을만했다. 피로한 근육 사이사이 양분을 공급하려면 먹어두어야 한다.

“진혁아, 한 판만 더 두자. 응?”

“마당에서 줄넘기 할 시간이에요.”

“그럼 장기! 장기로 할까? 장기는 금방 끝나잖아.”

한 판도 못 이기면서 또 이러신다.

진혁은 마지못해 다시 앉았다. 아빠가 이렇게 즐거워하시는데 장기 백 판인들 못 둘까.

승부는 금방 났다.

“아빠, 장군이에요.”

“하아-, 외통수야. 또 졌네.”

그래도 양보는 없다. 효도는 효도고, 승부는 승부다.

저녁을 준비하던 엄마가 입을 가리고 소리 없이 웃었고 아빠는 옆머리를 북북 긁었다. 외통수에 몰려 하얗게 질린 대장 장기알이 애처롭게 떠는듯했다.

다다닥-.

거실 유리를 박박 긁는 소리가 들렸다.

장군이였다.

이 집에서는 장기 둘 때 장군도 함부로 외치면 안 된다.

***

올해엔 검사결과가 금세 나왔다.

시골 학교 아이들에게서 회충이 많이 발견되니 우선 검사하는 건 그렇다 치고. 인구 감소로 학생 수가 줄어든 것이 그 이유라고 했다. 학년이 내려갈수록 줄어든 학급 인원수는 1학년이 11명을 기록하고 있었다. 병설 유치원에 등록한 원아는 여섯 명이라고.

‘나 고등학교 다닐 때 폐교됐었지 아마.’

폐교 사실을 미리 아는 심정이 밝을 수 없는 까닭에 진혁은 착잡함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이유로도 마음이 무거웠다. 왜냐하면.

“박정임-.”

선생님이 구충제를 나눠주는 중이었으니까.

30명의 초등학교 6학년생이 긴장한 채 선생님의 입에 주목했다. 이름 불린 여자아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앞으로 나갔다. 보조개가 패도록 입술을 안으로 오므린 것을 보니 민망한 모양이었다. 눈동자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했다.

최응묵 선생이 박정임의 손에 하얀 알약 세 개를 주며 웃었다.

“요, 요- 아가씨가 뭘 먹길래-.”

그래도 아이들 마음이 다칠까,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선생님이었다.

맨 앞자리에 앉아 코를 훌쩍거리는 강진수는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럴만한 것이, 성씨로 번호를 매기는데 강진수를 건너뛰고 다음 친구를 호명하지 않았던가.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야, 강진수가 하나도 안 나왔나벼-.”

“매년 한 주먹씩 받더니 말세여, 말세.”

“장청소 행겨?”

“락스 마셨나?”

손진혁은 두 손을 모으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냐. 박 씨 다음에는 손 씨다.

“성공한.”

“으악-.”

이름이 불린 녀석이 소리를 지르고 달려나갔다.

아, 성씨 중에 성 씨 성이 있었구나. 비명으로 대답을 대신하다니 특이한 녀석일세. 두근두근, 조마조마했다. 초등학교 시절 매년 겪었으면서도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다. 어린 마음이었다면 그저 웃으며 넘어갔을까? 아마 예전에도 이 순간엔 긴장했던 것 같다.

성공한이 들어가고, 회충을 품은 다음 순번 학생이 호명되었다.

“육성찬.”

저 깐돌이 녀석, 닥치는 대로 주워 먹을 때 알아봤지.

휴우우-. 진혁이 긴 한숨과 함께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무사히 넘어갔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빠르게 뛰던 심장도 안정을 찾았다.

휘유-. 최미경도 함께 안도했다. 아, 살았다. 그리 중얼거리면서였다. 수고했다는 듯 진혁의 등을 토닥였다. 힘든 노동을 마친 기분이 이럴까, 불주사 맞을 때보다 더 긴장한 최미경이었다.

‘강진수가 걸리지 않았으니 미경이도 괜찮겠지.’

진혁은 편안해진 기분으로 교실을 둘러보았다. 한 명씩 불려 나갈 때마다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냈다. 놀리는 뉘앙스라기보다는 격려하는 느낌이 컸다.

누구 하나 모난 데 없이 착하고 다정한 녀석들이었다. 과거로 다시 돌아오고 3년 7개월 남짓, 평범하고 평화로운 생활에 일조한 순둥이 친구들. 올해가 지나면 남자아이들은 같은 중학교에 진학할 테고, 여자중학교에 진학하는 친구들과는 헤어져야 한다.

‘반가웠다.’

한 명, 한 명 뒤통수를 보며 시선으로 인사를 남겼다. 아직 1학기도 마치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런 감상에 빠진 걸 보니 호르몬이 용암처럼 흐르는 모양이다. 진혁도 어쩔 수 없는 대자연의 습격이었다.

최응묵 선생이 마지막 학생을 불렀다.

“황진희.”

와아아-, 짝짝짝-.

신체검사 다음으로 민망한 연례행사가 박수갈채와 함께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이름이 불리지 않은 아이도, 약을 잔뜩 탄 아이도 후련함에 표정을 풀었다.

그러나.

“강진수, 최미경 이놈들 나와.”

으응?

끝나지 않은 듯했다. 두 명을 함께 호명한 최응묵 선생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팔을 부들부들 떠니 손에 들린 검사용지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나풀거렸다.

“이놈들 이거······.”

선생님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진혁은 물론 다른 친구들도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최미경을 주시했다. 강진수는 그러려니 하겠는데 깔끔쟁이 부반장은 왜? 어안이 벙벙한 것은 강진수와 최미경도 마찬가지였으니. 두 친구는 쭈뼛거리며 교탁으로 갔다.

“이거 한 통씩 가져가.”

더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다는 듯, 최응묵 선생은 어른 주먹만 한 구충제를 통째 나눠주고는 나가버렸다. 강릉 최 씨 망신 어쩌고 중얼거리며.

그때였다.

진혁을 노려보는 최미경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아······ 조때따.’

화장실에서 힘쓰던 강진수에게 최미경 어린이의 채흐응봉투를 건네고 부탁한 것인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최미경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벌개진 눈으로 자리에 돌아왔다. 한 손에는 구충약이 통째 들려 있었다.

진혁은 짝꿍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 미경아. 그게-.”

“득츠-.”

최미경 어린이가 이를 악문 채 목울대를 움직였다.

초고수가 보내는 전음에 진혁은 다소곳이 고쳐 앉았다.

“어, 알겠다. 그게 좋겠지.”

쉬는 시간이 되어도 최미경은 책상만 노려볼 뿐 진혁을 타박하지 않았다.

진혁은 강진수를 붙잡고 자초지종을 물었다.

“이이, 회장. 그게 워치케 된거냐먼-, 암만 용써도 안 나오더라고.”

오케이, 거기까지. 진혁은 강진수의 어깨를 다독여 위로했다.

다행히 최미경은 모든 수업을 마칠 때까지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 분노를 한데 모아 폭발시키려고 그랬던 모양이다.

*

“야, 이 새꺄아아아아악-!”

집에 가는 길, 최미경은 버스를 타지 않고 진혁을 쫓아 열심히 달렸다.

진혁은 미안한 마음에 전력 질주하지 않고 천천히 달렸다. 최미경 어린이 손에 잡힐 듯 말 듯 거리를 조절하며.

‘너무 빨리 달리면 안 돼.’

급하게 쫓아오다 최미경 어린이가 넘어져 다칠지 모르는 일이다. 친구를 걱정한 진혁 나름의 배려였다.

“내가 니 똥 달랬지, 강진수 똥 달랬냐아아아아아악-!”

평소엔 나긋나긋 귀여운 최미경 어린이였지만 한 번 발동이 걸리니 욕을 시원시원하게 잘했다.

성공한 진혁을 시기하던 이들을 향해 사회생활 한 번 안 해본 병신들이라는 욕도 했었지.

“거기 서라고 이 새꺄아아아악-!”

진혁은 최미경 어린이의 변화를 지켜볼 수 있어 흐뭇했다. 욕이 욕처럼 들리지 않는다.

목청도 좋고.

워러러러러-워워월!

지금도 보라지. 온 동네 개들이 최미경에게 호응하고 있지 않은가.

너른 벌판을 관통한 포장도로를 친구와 함께 달리니 진혁은 진정 흡족했다. 이래서 함께 달리는 거구나. 새삼 깨달으니 이 어찌 즐겁지 않을쏜가.

“으허허-.”

뒤에 최미경을 달고 쉬지 않고 달리는 진혁의 입에서 영문 모를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분명히 미안한데 희한하게 재밌네? 이런 재미라니,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최미경 어린이도 즐거워서 계속 달리는 건가 봐.’

봄바람을 타고 인근 축사의 소똥 냄새가 훅- 끼쳐 왔다.

향긋한 고향의 냄새였다.

최미경 어린이도 그 냄새가 반가웠나 보다.

“우웨엑-! 손지녀어어어억-! 너 거기 서 이색- 우우웩-!”

으허허, 느허허허허-.

너무 즐거운 나머지 계속 웃음이 흘러나왔다. 장군이와 달릴 때와는 또 다른 감흥이었다. 고개를 돌려 외쳤다.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였다.

“미경아-. 나랑 매일 뛰어다닐래?”

“닥치고 거기 서 이 색-!”

느하하하하하-.

연애 감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 잡아 봐라-.

“우우웨엑-!”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