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34화 (34/338)

# 34 < 무명 선수 (3) >

***

5월의 둘째 날.

하늘은 푸르고 공기도 상쾌했다. 역시 시골이란 이런 것인가, 개발이 안 된 지역의 상쾌함이란 이런 것인가. 저 자신도 촌놈이면서 새삼 감탄하며 진혁은 몸을 풀었다. 목부터 발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절에 지긋이 힘을 주어 돌리고, 승모근부터 족저근에 이르기까지 모든 근육을 이완해주는 것이다.

[잠시 후 10시부터 체육청소년부장관기 제12회전국시도대항육상경기대회 예선을 겸한 충청남도대표선발전의 각 종목별 결승전을 시작할 예정이오니-. 스읍-.]

대회이름이 더럽게 길었다. 얼마나 길면 지금도 사회자가 잠시 숨을 고르지 않나.

김영태 선생님과 아이들은 아무 의자에나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의자에 있는 것은 가방뿐이었으니. 결승전에 진출한 진혁을 가까이에서 응원하기 위해 가방을 던져두고 결승선 부근을 서성이고 있었다. 코치와 선수들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이었다. 물론,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되지만 말이다.

“선생님은 출발지점에 가셔야 되는 거 아니래유?”

“왜······?”

역시 하고픈 말을 참지 못하는 조슬찬의 물음에 김영태 선생이 다소 멍청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선수 격려두 하구, 그 뭐여-, 그 긴장 풀라구 말유-, 거 금싸라기 같은 말두 해주구유-.”

조슬찬의 말을 듣던 박지범이 피식 웃었다.

또래 중에서도 의젓한 박지범인데 결국 못참겠다는 듯 한마디 내뱉었다.

“야, 누가 누구 긴장을 풀어 줘? 선생님 지금 우실 거 같은데.”

“이놈들이!”

와하하-.

오랫동안 함께 한 선생님과 제자들은 그렇게 웃으며 떨리는 가슴을 주저앉혔다. 결승전이라니. 관전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맞다, 지범아. 누가 누구 긴장을 풀어주겠냐.’

김영태 선생의 시선 끝에는 멀리 출발선에 우뚝 서 있는 손진혁이 있었다.

*

진혁은 앞발로 트랙을 꾹꾹 밟아 눌렀다.

단단한 트랙이 종아리와 무릎, 허벅지와 복근을 따라 심장에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조금 긴장이 되네.’

인생을 한 번 살아봤다고 해서 긴장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살아봤다고 모든 걸 다 해보지도 않았었고, 오히려 제한적인 인생만 살지 않았던가.

“수우우우웁-. 후우우우-.”

일부러 소리가 나도록 크게 숨을 쉬었다.

아랫배부터 명치와 심장을 거쳐 정수리까지 힘과 함께 고양감이 차올랐다.

‘적당히 뛰자.’

결승전 진행을 위해 확성기를 든 진행위원이 스타트라인 근처로 왔다.

진혁은 감독관을 한 번 본 후 하늘을, 결승선 근처에서 주먹을 흔드는 친구들과 선생님을 보고 슬쩍 웃었다.

그리고 그 뒤쪽에.

‘엄마? 아빠? 유진이?’

후웁-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가족.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세상 무엇보다 소중했기에. 그들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기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진혁의 명치에서 솟았다.

그것이 목젖을 강하게 때렸다.

진혁은 감독관을 향해 급히 손을 들어 타임을 불렀다.

“왜 그러니? 오래 걸리니?”

곧바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목을 가다듬고 겨우 사정을 얘기했다.

“크흠-! 아뇨, 신발에 뭐가 들어가서요.”

“그래.”

진혁은 얼른 스파이크화를 벗어 신발을 털었다. 들어가긴 뭐가 들어갔겠나. 모래도 없는 인공합성트랙인데. 스파이크는 트랙 알갱이가 들어가지 않을 만큼 발에 딱 맞는다. 벅찬 가슴을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우리 엄마랑 아빠 맞아. 내 동생 유진이도.’

신발이 아닌 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았다. 습습- 후후- 호흡을 진정시켜야 했다. 벅찬 가슴 때문에 호흡이 틀어지면 달리는데 지장이 올 수 있다. 그러면서도 가족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겨우 이틀 안 봤다고 이렇게 반가운 걸 어쩌겠나.

안구가 따뜻하게 데워졌다.

입꼬리는 제멋대로 씨익 올라갔다.

***

“어떡해요, 우리 본 거 같은데.”

“그러게요. 안 보이는 자리로 갈 걸.”

마침 경기장에 들어와서 자리 잡은 곳이 거기였으니. 진혁의 부모는 곧 경기가 시작된다는 말에 아무 곳에나 자리를 잡은 거였다. 아들이 자신들을 알아본 것 같다. 부담을 준 건 아닐까.

그러나 이내 정비를 하고 자세를 잡는 아들을 보며 불안했던 마음이 다소 풀어졌다.

“우리 아들이 제일 잘 생기지 않았어요?”

“하하! 당연한 소릴. 누구 아들인데요.”

위아래 파란색 유니폼과 흰색 번호표에 검은색으로 마킹된 91.

자신들의 귀한 아들이 도내 내로라하는 육상선수들과 나란히 출발선에 섰다.

“우리 진혁이 몇 등 할까요?”

“제일 잘 뛰는 학생들인데 등수가 중요하겠어요?”

남편의 말에 한유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아들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제자리-.]

바람에 실려 희미하게 구령이 들려왔다.

진혁의 엄마 한유영이 기도하듯 두 손을 꼭 쥐었다.

3번 레인 출발선에 웅크리고 앉은 아들이 보인다.

[차려엇-.]

모두가 숨을 죽였다.

손광연이 딸 유진을 안은 팔에 힘을 줬다.

‘성적은 중요하지 않다. 낙심만 하지 말자, 우리 아들.’

뭐가 신나는지 유진이가 초고속으로 박수를 쳤다.

“오빠빠빠빠-!”

유진이의 응원이 절정에 달할 때 총소리가 울렸다.

[타아앙-!]

200미터 결승전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었다.

신기한 노릇이다. 총소리보다 선수들이 더 빨리 튀어 나가는 듯했으니.

손광연과 한유영의 아들.

그들이 가장 뜨겁게 사랑하던 시절 만들어낸 사랑의 결정체.

손진혁이 스타팅블록에서 번개처럼 튀어 나왔다.

그 순간, 젊은 부모는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섰다.

“우와와와와!”

“어머머! 어머!”

분명 우리 아들인데.

우리 아들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총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박차고 나오는 모습이 마치.

남의 아들 같았다.

손진혁의 다리는 강철로 만들어진 듯 거칠게 트랙을 박찼고, 발이 바닥을 떠날 때마다 트랙 알갱이가 튀었다. 어깨와 가슴의 근육은 한여름 참외를 떠올리게 하는 조형미를 자랑했다. 자세는 어떻고. 올림픽에서 본 선수들처럼 시원시원 힘차게 공기를 가르는 역동적인 모습에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 소변이 마려울 지경이었다.

와아아-!

다행히 옷에 소변을 지리는 사람이 나오기 전에 경기가 끝났다.

승자는 너무나 쉽게 결정되었다.

진혁이 곡선주로를 벗어났을 때, 주위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끼야아아아아-!”

손광연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아니, 우리 아들이 1등 했는데 왜 저 아주머니들이 난리지?

***

김영태 선생님과 친구들이 달려들었다.

진혁은 숨찬 기색도 없이 친구들과 어깨에 팔을 두르고 등을 두드리며 우승의 기쁨을 함께했다.

“와하하! 진혁이 존나 빨러! 2등이랑 20메다는 차이 나는 거 같더라!”

“얌마, 조슬찬이! 존나가 뭐야 존나가. 존만한 시키가!”

“아, 선생님!”

“어? 아, 몰라! 진혁이 잘했어! 잘했어!”

삐이이잉-.

[원활한 경기 운영과 선수 보호를 위해, 응원을 위해 찾아주신 가족 친지들께서는 경기장으로 내려오지 마시고-.]

마침 태양군 선수들의 엄마들로 보이는 아주머니들이 경기장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들 때문에 운영석에서 방송을 한 것 같았다. 아빠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핀잔을 하며 배우자를 다시 관중석으로 끌고 올라갔다.

‘엄마랑, 아빠는?’

잠시 두리번거린 진혁의 눈에 가족이 들어왔다. 부모님은 관중석을 점잖게 지키고 계셨다. 남들도 다 치는 박수조차 안 치신다. 기쁘지 않으신가?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엄마는 아들을 보며 입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셨고.

아빠는.

‘아이고 아버지······.’

통곡을 하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들썩였다.

진혁은 스파이크화를 벗고 관중석으로 올라갔다.

“옵빠-, 오빠아-.”

아홉 살 차이가 나는 여동생의 볼을 톡톡 두드린 후 팔을 크게 벌려 부모님을 끌어안았다.

“울지 마세요. 왜 울어요.”

엄마는 눈물 고인 눈으로 아들을 보며 진혁의 뺨을 쓰다듬었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아빠는 아들의 배에 머리를 대고 등을 두드렸다.

“어우으어흐흐엉-.”

꽐라 홍수정 전무의 옹알이도 알아듣던 진혁인데, 이 아빠가 뭐라고 하는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부모의 마음을 어느 자식이 알 수 있을까.

자식의 마음은 어떤 부모가 완벽히 알 수 있을까.

더군다나 진혁은 이전 생에 부모가 없었고, 결혼도 하지 않았으니. 부모는 물론 자식의 마음도 알지 못했다.

다만.

‘너무 좋아.’

좋아서 우시는 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진혁은 울지 않았다.

이번 생은 많이 웃기로 했으니까.

*

상견례를 하는 부모님들과 선생님을 뒤로 하고 진혁은 트랙으로 내려왔다. 김영태 선생도 맡은 일이 있기에 학부모들과 인사만 마치고 곧바로 따라왔다.

25초 01.

김영태가 기록을 보며 갸웃거렸다.

초등학생의 경우 두 종목을 병행하는 선수의 200미터 기록이 100미터 기록의 2배수보다 높게 나오는 편이다. 초반의 탄력을 후반부까지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근력과 스태미너 부족에서 오는 문제였다. 중등부 이상 선수들과 다른 점이다.

‘그래도 너무 느린데?’

진혁의 100미터 기록은 12초 플랫에 육박한다. 체격은 물론이고 힘도 좋다. 그렇다면 200미터 기록은 못해도 24초 중반대는 나올 거라 생각했거늘.

‘볼수록 이해 안 되는 놈이야.’

힘을 아꼈나?

아니면 모래땅에서 기록이 더 잘 나오나? 그럴 리가.

김영태는 진혁에게 물어보려다 관두었다.

다리를 쭉 펴고 선 채 허리를 숙여 스트레칭하는 진혁을 바라보았다.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평범한 초등학생이었다. 200미터를 달렸으니 힘들 텐데도 숨차하는 기색 없는 건 이상했지만.

‘뭐······, 지가 알아서 하겠지.’

*

높이뛰기 결승전이 잠시 중단되고 100미터 결승전이 열렸다. 점심 식사 전 마지막 트랙 경기였다.

총소리가 울리고 13초 만에 결정되는 단판 승부.

“와! 진혁이 3관왕이다!”

염병택이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그 시선 끝에 숨찬 기색 없이 금메달을 받는 손진혁이 있었다. 모두가 예상한 대로였으니. 태양군에서 온 학부모와 선수들은 그저 환호하는 것만이 유일한 할 일이었다.

12초 50.

200미터 기록을 칼로 자른 듯 딱 절반이다.

‘의도한 건 아닌데. 어쨌든 그렇게 됐네.’

진혁은 관중석 상단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다수의 남성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김영태 선생의 철벽방어, 아니면 기량을 충분히 확인했으니 후일을 기약한 것일 터.

‘아니면 내 진면목이 나왔다고 생각해주면 좋겠는데.’

진혁도 그들의 속은 알 수 없지만 김영태 선생님이 중학교 운동부 관계자들에 의해 피곤해지는 걸 막고 싶었다. 동시에 빚도 갚는 길을 택했다.

본인도 굳이 운동부 지도자들 눈에 띄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으니까.

기록이야 어쨌든 1등은 1등. 진혁의 목에 두 개의 금메달이 더 걸렸다.

멀리뛰기에서 신기록이 나온 후 내심 기대했던 기록원은 볼펜을 책상 위에 던지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조슬찬이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 아저씨들 안 뵈네유?”

“누구?”

“썬글라스 아저씨들유-, 어제 밥값 내 준 사람들.”

밥값까지 내주며 줄을 대려던 야구부 코치라는 사람들은 떠나고 없었다.

김영태는 손진혁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에이, 설마. 저 어린놈이 거기까지 계산하고 달리지는 않았겠지.

운동복 차림의 축구부 감독들은 여전히 눈을 빛내고 있지만.

진혁의 기록과 야구부 코치들이 사라진 건 순전히 우연이겠지.

‘실업선수도 그 정도로 기록 조절은 못해.’

100분의 1초를 가지고 놀아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 리가.

***

관중석에 앉은 이해동이 담배를 빠끔거리며 웅얼거렸다.

“야, 봉수야. 91번 쟤 힘 아낀 거 같지?”

“아낀 건지 뭔지는 몰라도, 힘을 안 쓰긴 했어.”

정봉수가 껌을 질겅거리며 말했다.

아무리 체격이 좋기로 어떤 초등학생이 200미터와 100미터를 1등으로 골인하고 허리에 손도 올리지 않을까. 가슴조차 들썩이지 않았다. 누구 눈을 속여?

‘안 뛰었어.’

계주 때문이겠지.

정봉수의 눈이 더욱 빛났다.

기록과 순위 사이에서 순위만 취하는 영악함이라니.

***

사실, 계산된 것은 적당한 속도뿐이었다.

컨디션이 좋을 때 치러진 첫 경기였지만 200미터 결승에서는 힘을 다하지 못했다. 직선주로를 절반쯤 달렸을 때, 진혁은 왼쪽 허벅지가 묵직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초반에 기록을 바짝 끌어올렸기에 1위로 통과할 수 있었고, 더불어 쟁쟁한 경쟁자도 없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허벅지에 쥐가 올라온 건 아무래도 영양 문제겠지.’

곡선주로는 왼쪽 커브 형태다. 천천히 달릴 때는 큰 차이가 없지만, 빠르게 곡선을 벗어나려 하면 왼쪽 허벅지 근육이 뭉칠 수 있다. 안쪽 코스일수록 그런 경향이 크다. 그렇게, 곡선주로에서 경쟁자들을 제치기 위해 가속하느라 피로가 누적되었다는 판단이 섰다. 200미터를 이렇게 미친 듯이 달려본 적이 없었으니 전에는 알 수 없는 문제였다.

단시간에 근육에 피로가 쌓이지 않도록 하는 방법, 근지구력을 향상하는 방법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이전 생에는 바나나와 오렌지 주스를 같이 섭취하면 근육의 피로가 덜했던 것 같은데.

‘육상 재밌구먼.’

그리고 결승선 통과 후 확인하는 부모님의 환한 얼굴이 진혁을 너무나 행복하게 했다. 뭘 알까 싶은 여동생이 오빠를 부르며 박수를 치는 모습을 봤을 땐 심장이 저릿했다.

‘짜릿혀!’

느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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