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32화 (32/338)

# 32 < 무명 선수 >

소리를 지른 사람은 감독관이었다.

“육미터 이칠.”

기록원이 재차 진혁의 기록을 불렀다.

오오오오오-.

군중의 웅성거림이 감탄으로 바뀌었다.

“6미터는 처음 아녀?”

“작년에 나온 기록이 6미터가 안 될 걸?”

“아깝다. 전국대회였으면······.”

감독관이 어딘가로 손짓을 하자, 누군가 한 손으로 모자를 누르고 뛰어왔다.

하얀색 야구모자 차림의 남자가 진혁의 착지 장소를 한 번 더 확인 후 선언하듯 입을 열었다.

“참고기록 확인합니다. 남자 멀리뛰기 육 미터 이칠, 육백. 이십. 칠. 센티미터. 태양군 91번 선수. 소년부 한국 신기록입니다. 대회 규정상 참고기록으로만 인정됩니다.”

진혁의 표정이 꺼벙하게 변했다.

‘뭐라고?’

비공인이라지만 신기록이라니.

종전 기록이 몇이었기에? 진혁이 어리둥절할 틈도 없이 인파가 몰려들었다.

와아아-!

짝짝짝-!

기록관리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위에 있던 이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축하해-!”

“축하한다-!”

“진짜 나는 것 같더라!”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는 사람들인데. 많은 사람들이 진혁의 어깨를, 등을 두드렸다. 누군가는 머리를, 누군가는 엉덩이를 다독였다. 축하하는 사람 중에는 진혁이 관찰 대상으로 삼았던 선수도 있었다.

‘아, 엄마 보고 싶다.’

인정받고 관심받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기록이 문제가 아니었다. 마지막 시기에서 성공했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을 봐주어서, 자신을 향해 웃어주고 박수를 보내주어서.

‘감사합니다.’

진혁은 끝내 말을 꺼내지 못하고 연신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입을 열면, 눈이 마주치면 눈물을 쏟을까 봐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지옥 같던 전생도 눈물 없이 버틴 상남자가 여기서 울 순 없지.

그러다가 진혁의 몸이 붕 떠올랐다.

“으왓! 짜식! 내가 해낼 줄 알았다! 으하하하하!”

김영태 선생이 진혁의 다리를 안아 높이 들어 올렸다.

태양초등학교 개교 이래 최초의 육상종목 금메달이 멀리뛰기에서 나왔다. 개교 85년 만이었다. 태양초등학교는 김영태의 모교이기도 했다. 김영태의 머릿속엔 최초의 영광을 썼다는 환희뿐이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손진혁은 다른 학교 학생이다.

***

계주 준결승을 앞두고 200미터 준결승이 치러졌다.

타앙-!

손진혁이 스타팅블록에서 총알처럼 튀어 나왔다.

김영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내 팔을 들어 거칠게 흔들었다.

‘저런 놈이 촌구석에 처박혀 있었다니!’

도대체 어디 숨어있다가 나온 거야! 왁-!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른의 체면으로 꾹 참던 김영태가 기어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우와와와와! 달려! 달려!”

2레인에서 출발한 손진혁이 곡선 구간을 선두로 빠져나와 직선 구간을 치고 나갔다. 고삐 풀린 망아지가 사방팔방으로 난동을 부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달린다면 저런 모습일까.

‘너무 튀지 말자.’

힘이 넘치면서도 냉정한 망아지였다.

후웁-후-, 후웁-후-.

100미터와 다른 점은 곡선주로가 있다는 것.

곡선주로를 고속도로의 가속구간으로 상정하고 꾸준히 관성을 주다가 직선주로에서 액셀러레이터를 풀로 밟았다. 물론, 곡선주로에서도 가속페달은 밟고 있었지만 말이다.

‘상쾌하구먼!’

포장도로를 달리던 것과는 또 다른 환희였다.

진정 자유를 찾은 감동이었다.

조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결승선을 통과하기 직전 속도를 줄이는 여유도 잊지 않았다.

김영태는 그 모습에 진혁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멀리뛰기 시상식이 끝난 후였다.

- “선생님, 이 대회에서는 순위가 중요한 건가요?”

- “그렇지. 모든 기록은 참고기록으로 올라가. 전국규모 대회에서 세운 기록만 공식기록으로 인정받지.”

그래서였을까, 진혁은 기록에 미련이 없어 보였다.

“마지막에 속도 줄이는 거 같더라?”

“페이스 조절하라고 하셨잖아요.”

“아, 아. 그랬지. 어허허!”

김영태는 기어이 비상금 잔액을 계산하느라 머리를 굴려야 했다.

200미터 결승은 내일이다.

“계주 뛸 수 있겠어?”

“네! 오히려 몸이 풀려서 더 잘 뛸 거 같은데요?”

믿음직스럽다.

진혁은 어쩐지 상기된 표정이었다. 말도 많아지지 않았나. 오랫동안 아이들을 지도한 김영태가 즐기기 시작한 아이의 표정을 몰라볼 리 없었다.

‘짜식, 재밌나 보네.’

이제 박지범의 차례였다.

박지범은 100미터 준결승에서 아쉽게 고배를 마셨다.

‘200미터는 더 어려울 텐데.’

3년 동안 100미터만 한 녀석인데 끝내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김영태는 박지범의 아쉬움을 짐작하며 제자의 마지막 레이스를 묵묵히 응원했다.

타앙-!

태양초등학교 에이스답게 박지범이 곡선주로를 자신 있게 치고 나갔다. 4번 레인임에도 다른 코스의 선수들보다 앞으로 나와 있는 것이, 그가 선두임을 짐작케 했다. 그러다 직선주로에 접어들어 다른 주로 선수들에게 따라잡혔다.

“어? 지범이 어디 아픈가?”

“아녀. 암부러 안 뛰는 거 같은디?”

절뚝이지는 않는데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는다.

왜 그러지?

결승선을 꼴등으로 통과한 박지범이 가벼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지범이 어디 불편한 곳 있니?”

“아뇨? 계주 전에 몸만 풀었어요. 후반부 전력 질주는 진짜 힘들어서요.”

계주. 30분 후에 진행이다. 친구들을 생각해서 힘을 아꼈구나. 김영태는 코를 한껏 찡그려 감동이 차오르는 것을 막았다. 어린 것들이 기특하구만.

해가 지려는지 파랗던 하늘에 회색이 섞이기 시작했다.

***

“나는 온종일 놀고 먹었더니 힘이 넘쳐!”

“나두.”

염병택과 조슬찬의 넉살에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몸을 풀었다. 진혁도 아이들 틈에서 긴장을 풀고 다리를 주물렀다. 악력을 이용해 친구들의 다리도 꾹꾹 만져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운동하며 웃고 땀 흘린 친구들. 마지막까지 함께 웃을 수 있기를 바랐다.

박지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히야-, 진혁이가 만져주니까 허벅지랑 종아리 땡땡하던 게 사라졌어. 다리에 힘도 생긴 거 같고.”

“너두여? 나두여!”

하루종일 쉬었던 조슬찬이 박지범의 말을 받아 너스레를 떨었다.

김영태는 태양초등학교 아이들이 두 번째 경쟁 조에 속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덕분에 손진혁과 박지범이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다.

아까부터 시커먼 남자들이 자신의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지 않은가.

“몸들 풀고 있어. 선생님은 잠깐 수첩 좀 가져올게.”

“네.”

천진난만하게 대답하는 아이들과 달리 손진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김영태 선생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수첩은 손에 들고 계신데.’

진혁은 무릎 언저리를 주무르며 김영태와 남자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

“아이고! 저걸 워쩐디야-!”

조슬찬이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했다.

계주 첫 번째 조에 속한 다른 학교 선수가 배턴을 떨어뜨린 것이다. 배턴 패스 중 순식간에 발생한 일이었다. 냉큼 주워 출발했으나 다른 주자들은 이미 속력을 올려 멀어진 후였다.

“저것들이 제일 빠른 핵교 아니었남?”

“맞네. 대성국민학교.”

“아이구-, 아깝것다아-.”

남 일인 듯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조슬찬과 염병택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연신 얕게 호흡하며 무릎을 달달 튕기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중에서도 조슬찬이 가장 긴장한 듯 보였다.

“아이구-, 시벌거. 왜케 오줌이 마렵다니-?”

“이제 변소 못가! 뛰면서 싸!”

염병택의 말에 아이들이 긴장을 놓고 웃었다.

“연습했던 대로만 하자. 실수만 없어도 성공하는 거야.”

짝짝-!

김영태 선생님이 손뼉을 쳐 아이들의 주목을 끌었다.

“자! 화이팅 한 번 하고 가자!”

“핵교가 달른디 뭐라구 헌대유?”

조슬찬 나름대로 예리하다고 생각하며 던진 질문이었다.

“그냥 태양으로 해. 곧 중학교에서 만날 텐데.”

“이이-, 그려. 진혁이는 애가 항상 이렇게 똑똑혀-.”

큰 손 하나, 중간 크기인 진혁의 손, 작은 손 셋.

다섯 개의 손이 겹겹이 포개졌다.

“태양! 태양! 화이팅!”

짝짝짝-!

손을 높이 들어 손뼉을 치고 아이들이 트랙으로 들어갔다.

“후우-. 내가 다 떨리네.”

스벅스벅-짝짝-!

김영태는 마른세수를 하고 싸다귀 마사지를 했다. 원래 선수보다 코치가, 코치보다 가족이 더 긴장하는 법 아니겠나. 김영태에게 아이들은 제자가 아닌 자식 같은 존재들이었다.

‘성적은 상관없으니 마음만 다치지 마라, 내 새끼들.’

그런 스승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이 주로에 들어갔다.

“1번 주자들일랑 빠께스이서 바통 하나씩 집어가요-. 거기 7번 레인! 왜 빈손으루 있디야?”

박지범이었다.

그렇게 연습을 하건만, 배턴을 들고 뛰어야 한다는 걸 깜박하는 1번 주자들이 종종 하는 실수였다.

붉은색과 노란색 배턴은 이미 누군가 선점했고, 희한하게 파란색이 남았다. 계주에는 미신처럼 원색 배턴을 선호하는 현상이 있었는데, 눈에 잘 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어차피 손바닥으로 색깔 보는 것도 아닌데.

‘오! 재수!’

박지범은 행운이 따르려나 보다, 생각하며 덩그러니 남은 파란색 배턴을 집었다. 직전 조에서 실수한 팀이 파란색 배턴을 사용했다는 걸 박지범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걸 알고 있던 다른 팀이 파란색 배턴을 피한 것이고.

계주의 징크스.

한 번 놓친 배턴은 다시 놓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걸 두려워하는 것이 인간의 간사한 마음 아니던가.

다른 레인의 주자들이 모두 자신에게 눈길을 줬지만 박지범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럴 땐 모르는 게 약이다.

‘실수 없이 완주만 해도 어디냐.’

계주를 위해 200미터를 몸 풀 듯 뛴 것만 보아도 박지범은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럽고 여유가 있는 친구였다. 6학년 들어 기록 단축에 애를 먹고 있지만 4학년 때부터 태양초등학교의 에이스로 활약한 박지범이다.

“제자리-.”

박지범은 왼손에 쥔 배턴을 놓칠세라 주먹을 쥐어 땅에 댔다.

숨 막히는 긴장감에 볼을 팽팽하게 부풀렸다.

“차려-.”

다리를 펴서 허리를 들어 올렸다.

너무 긴장한 탓일까, 머리로 피가 쏠리는 느낌이었다.

타아앙-!

착-! 탱그렁-.

1번 주자들이 떠난 자리, 쇠붙이가 신경질적으로 부대끼는 소리만 남았다.

***

“엄마-, 엄마-.”

“응-, 엄마 여깄어.”

“아빠-, 아빠-.”

“아이코-, 우리 공주님-.”

36개월도 안 된 손유진이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엄마, 아빠에게 번갈아 안겼다. 널찍하게 집을 지으니 아기가 마구 돌아다녀도 거칠 것이 없다. 아빠 손광연은 증축하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진혁이 아기일 때는 형편이 어려워 그러지 못했던 것이 미안했다. 그래서 더 마음 쓰이는 아들이었다.

‘그런데 벌써 다 큰 녀석처럼 행동을 하니······.’

학교를 마치고 엄마를 도와 빨래를 널거나 집안 청소를 하고 어린 동생을 끔찍하게도 챙긴다. 그러고도 부족한지 논과 밭에 할 일이 없을까 아빠를 따라나서고 힘이 남아돈다며 운동까지 빼먹지 않는다. 숙제와 공부는 말할 것도 없다. 서울의 아이들은 레고라는 블록 장난감이나 무선조종 자동차를 가지고 논다고 하던데.

‘근데 우리 아들 언제 오나?’

아이답게 자라도록 해주지 못한 것 같아서, 어리광을 제대로 받아주지 못해 철이 든 것 같아서, 그래서 아빠의 사랑을 더 주지 못한 것 같아서 더 애틋했다. 손광연 또한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자랐기에.

“진혁 엄마, 자기야. 우리 아들 전화 올 때 안 됐나요?”

어제저녁에 잘 도착했다는 연락, 오늘 아침에 잘 자고 일어났다는 연락만 받았을 뿐이다. 시합은 하루면 된다며, 끝나고 전화를 하기로 했는데 곧 저녁 먹을 시간인데 연락이 없다. 시합은 오늘 하루만 진행된다고 선생님이 알려줬다던데.

따르르릉-.

내 자식도 양반은 아닌가 보다, 생각하며 손광연이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어어-, 진혁아! 응? 그래? 그으래? 와하하-!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냐? 어, 어. 알았어. 엄마? 엄마는 머리 감으시는데. 어, 그래. 아빠가 전해줄게. 그래. 저녁 맛있게 먹고. 잘 자라 우리 아들-.”

딸깍-.

수화기를 내려놓는 손광연의 만면에는 자상하고 여유로운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눈동자는 맹한 것이. 아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와닿지 않은 탓이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으니.

‘뭐? 금메달이라고?’

비록 지역대회라고는 하지만 도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를 가리는 시합이다. 물론, 실력이 좋은데도 참가하지 않은 선수도 있겠지. 그래도 금메달이 어디냐! 게다가 뭐? 한국 신기록? 비공인은 개뿔, 우리 아들 기록인데 누가 비공인이래!

“어디 보자, 뭘 해야 하지? 이럴 땐 뭐 하는 거더라?”

만세를 부르던가?

만세 외치면 우리 자기가 째려볼 텐데?

손광연은 눈이 동그래진 딸을 안고 허둥댔다.

전화통화를 하며 웃던 아빠의 목소리가 너무 우렁찼던 탓에, 유진이가 안 그래도 큰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어쩌지, 어쩌지? 뭘 어째야 하나?”

아들이 금메달을 땄을 때 아빠는 뭘 해야 하지? 물어볼 아빠가 없으니 더 당황스러운 노릇이다. 금메달 딴 자식을 둔 아빠 모임 같은 거라도 있다면 조언을 구할 텐데. 이 촌구석에는 농약과 비료 주는 시기를 알려주는 아빠들뿐이다.

‘아, 기준이한테 물어볼까?’

아들 자랑도 할 겸.

손광연은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어어어-, 기준이냐? 으하하하 우리 아들이!”

- 귀 아파 인마!

종알종알-.

“알려지지 않길 바라는 눈치야. 유명해질까 걱정도 하더라고.”

- 도 대회에서 잘했다고 유명해지지 않으니 걱정 마라.

“하하하! 나를 닮아 어찌나 겸손한지!”

홍기준이 현실을 알려줬지만 손광연은 진정할 생각이 없었다.

아들 자랑인지 지 자랑인지 모를 장르를 한참 늘어놓았다.

아내가 욕실에서 나올 때까지 손광연의 종알종알은 계속되었다.

“오빠, 우리 진혁이 전화 왔어요? 뭐랬기에 얼굴이 그러세요?”

욕실에서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나온 한유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울 사나이임을 강조하며 항상 무게를 잡는 남편 아니던가. 그런 사람 터질 듯 붉어진 얼굴로 수다를 떨고 있으니.

덜커덕-.

아내의 머리에 얹힌 하얀 수건을 본 손광연은 수화기를 떨어뜨렸다. 벌떡 일어서며 그제야 중요한 게 생각난 사람처럼 외쳤다.

“현수막!”

“네?”

손광연은 유진이를 안은 채 아내의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을 췄다.

얼씨구나 좋구나-.

그렇게.

홍기준은 또 한 번 패배했다.

- 여보세요? 여보세-. 야 인마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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