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 새로운 세상 (5) >
***
진혁의 출전 종목은 100미터 예선, 멀리뛰기, 200미터, 그리고 400미터 계주 순으로 이어진다.
본래 각 종목의 예선과 결선이 다른 날에 치러져야 하지만 어디 옛날 경기 운영이 그렇던가. 충청남도 예선과 본선을 이틀 만에 치르고 결과를 전국대회 운영위에 보내야 한다. 우편과 팩스로. 덕분에 운영위원들은 물론, 코치들과 선수들도 정신이 없어 보였다.
“진혁이랑 지범이는 컨디션 관리 잘하고. 아침 먹은 건 괜찮니?”
“네, 선생님.”
“아차-.”
“선생님, 왜요?”
김영태가 이마를 쳤다.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있었다. 작년까지는 태양초등학교 선수 중에 육상대회에서 예선을 통과한 선수가 없었다. 박지범이 5학년 때도 대표를 했었으니 얼마나 육상 인재가 없었는지는 말 다했지.
그런데 올해엔 손진혁이 있다.
예선을 통과하면 오후에 준결승까지 치러야 한다. 100미터 예선은 오전 첫 순서. 예선 통과가 확정적이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손진혁의 실력이면 준결승 통과도 확정적이다.
‘그렇게 되면 하루 더 자야 하는데.’
식비 아끼려고 어제 삼겹살도 깨작거렸거늘. 낭패감에 쓴 입맛을 다시는데 똘망똘망한 눈동자 여러 개가 느껴졌다. 언제 봐도 순진한 눈망울이었다.
아이들의 시선을 의식한 김영태가 재빨리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아니야, 아니야. 진혁이는 체력 관리만 잘해. 종목이 많으니까 힘들면 포기해도 돼. 무리하지 말고.”
“네.”
숙박비는 선생님이 내주마.
너는 결승 진출만 해라.
김영태는 손진혁이 일으킬 파란을 기대하며 기분 좋게 비상금을 떠올렸다.
삐이이잉-.
마이크가 히스테리를 부리며 참가자들의 목을 움츠러들게 하는 마법을 부렸다.
[남자초등부 100미터 예선 1조 경기가 곧 시작됩니다. 해당 종목 출전 선수는-.]
장내 안내방송에 따라 박지범이 출발선에 섰다.
“박지범 화이팅!”
“태양국민핵교 화이팅!”
타앙-!
우와아아-!
총소리와 함께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열렬한 응원이 펼쳐졌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 학교관계자와 참가선수들뿐인 응원단이지만 그들의 설렘과 기대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뭐······, 멋지구만.’
진혁은 가슴이 벅차다.
과거에도 성인이 되어 이런저런 운동을 익히며 시간을 보냈지만, 누군가와 함께 달리고 소리를 지르는 일이 이토록 가슴 뛰는 일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TV로 보던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의 열기만큼은 아니어도 눈앞에서 펼쳐지는 경쟁을 보는 이의 감동은 그에 뒤지지 않는 것이었으니.
‘오길 잘했다.’
진혁에게 다시 한번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었다.
박지범이 조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와! 지범이 12초 98이여!”
“지범이 준결승 가겠다!”
연도별로 기복이 있긴 했지만, 13초 00도 초등부 지역대회에서 나오기 힘든 기록이었다. 이 컨디션으로 준결승을 통과한다면 결승도 노려볼만한 기록. 순둥이라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손진혁을 보며 박지범이 얼마나 이를 갈았을까. 김영태는 운동선수의 승부욕을 간과하고 박지범을 잠시 배제했던 자신에게 삿대질을 했다.
‘아이구, 미안해라.’
그만큼 손진혁이 난 놈인 걸 어쩌겠니. 김영태는 스스로를 변호하며 다음 출전 선수를 챙겼다.
“진혁아, 페이스 조절해. 다음 경기도 있으니까 너무 쥐어짜면 안 돼.”
“네.”
어차피 최선을 다할 생각은 없었다.
너무 뛰어난 자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익히 알고 있기에.
한편으로는 열심히 뛰어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는 자신감도 있다.
‘전력 질주해도 딱히 힘들지도 않고.’
달리기만큼 열심히 했던 것이 회복훈련이었다.
진혁이 가볍게 어깨를 풀며 출발구역으로 들어섰다.
경기장은 어제 미리 밟아봤다. 먼지 날리는 모래땅이 아닌 육상전용 트랙. 스타팅블록도 새것인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기분까지 좋게 했다.
“제자리-.”
발로 스타팅블록을 두어 번 차서 제대로 받쳐주는지 확인했다.
후우-, 볼을 부풀리며 숨을 길게 뱉어 폐를 비웠다.
“차려-.”
엉덩이를 치켜세우고 상체를 앞으로 부드럽게 밀었다.
따스한 봄볕에 목덜미가 간지럽다.
후우웁- 후우-, 공기를 한껏 들이쉬었다가 3분의 1쯤 내뱉고 폐를 닫았다.
곧 총이 울리리라.
타아앙-!
공설운동장의 대기가 신경질적으로 찢기는 소리와 함께.
푸하악-!
무릎과 팔꿈치를 힘껏 올린 손진혁이 포효하듯 거친 숨을 토했다.
***
“에이, 충청도는 느리잖아.”
“무슨 소리! 옛날부터 속도위반은 충청도가 1위여 인마! 너도 뭐라도 건지려고 온 거 아녀?”
말이 느려 답답한 나머지 행동이 빠르다고 누군가 그랬다. 도로에서도, 침대에서도 과속이 만연하다나? 코딱지만 한 나라에서 지역별로 구분해서 규정짓는 것도 웃기지만 그 또한 근거 없는 말은 아니었으니.
“하긴. 봉수 네가 증인이지.”
정봉수만 봐도 말하는 건 느리고 다리는 빠르다.
초중고를 거쳐 대학, 그리고 실업팀까지. 축구선수로 활동하며 항상 11번을 달고 뛰던 친구였다. 발재간과 정확도만 더 좋았다면 국가대표로도 발탁될 거라는 말을 듣고 살았다.
‘그놈의 부상만 아니었어도 선수생활 더 하는 건데.’
지금은 대전에서 중학교 축구 감독을 하고 있다.
수원에서 중학교 축구 감독을 하는 이해동을 오랜만에 공주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전학 좀 시킨 애 있어?”
“에이, 시부럴. 죄다 야구부에 뺏겼지 뭐.”
스포츠 지도자들의 한결같은 지론이 있었으니.
‘기술은 가르칠 수 있지만 스피드는 가르칠 수 없다.’
초등부 6학년 중 체격이 좋고 발이 빠른 육상 꿈나무를 스카우트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주를 찾았는데 눈에 띄는 선수가 없다. 찾는다 해도 돈이 되는 야구부의 유혹에 넘어가는 선수가 태반이었고, 그나마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야구보다 돈이 덜 들어가는 축구를 선택했다.
그렇게 대한민국 기초체육은 돈의 논리에 밀려 그 싹이 일찌감치 잘려갔다.
타앙-!
“어?”
총성에 트랙으로 고개를 돌린 정봉수가 이해동을 상념에서 끌어올렸다.
우와아-!
약속이라도 한듯한 경기장 내 함성.
관중도 없는데 함성이 이렇게 클 일인가. 그러나 정봉수와 이해동도 곧바로 그 대열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워워워-! 뭐야, 뭐야!”
압도적인 질주였다.
다른 선수와 비교해서도 물론이고 초등학생 치고 큰 키와 넓은 어깨. 그리고 무엇보다.
스피드.
88년 서울올림픽 대회의 벤 존슨을 연상케 하는 주법이었다. 그러나 정확히는, 그보다 역동적이었다. 끊김 없이 이어지는 두 다리의 질주, 그에 뒤질세라 누군가 뒤에서 밀기라도 하는 듯 앞으로 쭈욱 밀어 나가는 상체.
저 체격에 저 정도 주력이라면 발목의 힘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방금 1위로 골인한 선수를 향해 정봉수가 삿대질을 했다.
“야! 너 축구하자!”
정지 상태에서도 강한 킥력을 끌어낼 수 있는 튼튼한 발목은 축구선수에게 축복과 같은 것이었고, 스피드 다음으로 후천적 개발이 어려운 요소로 꼽혔다.
정봉수가 짜증스럽게 외쳤다.
“이놈의 촌구석 전광판이 웁써!”
전광판이 있었다면 금세 기록이 떴을 텐데. 기록이 궁금했으나 육상기록부라는 화이트 보드에 기록을 할 뿐이어서 관중은 기록을 알 수 없었다.
정봉수와 이해동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의자를 박차고 트랙 근처로 달려갔다.
‘잡아야 한다.’
서로 밀치며.
“밀지마 새꺄!”
두 중학교 축구부 감독은 축구선수 생활을 하며 갈고 닦은 몸싸움 실력을 유감없이 선보였다. 그 뒤로 천안과 공주에서 온 야구부 코치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여유롭게 걸어갔다. 누가 야구부 코치 아니랄까 봐 멋쟁이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였다.
[아아-. 내려오지 마세요. 경기 관계자 외에는- 삐이잉-.]
***
퍼억-.
붉은 깃발이 올라갔다.
“91번 파울.”
손진혁의 등 번호였다.
처음 해보는 멀리뛰기였다. 힘차게 도움닫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고 타이밍을 또 못 잡았네.’
20센티미터의 구름판과 10센티미터의 점토판.
처음에는 구름판을 발가락이 전부 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발가락 끝에 다소 탄력 있는 이질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뛰는 순간 파울임을 직감했다.
두 번째 시도는 스스로도 괜찮았다는 판단이 들었다. 도움닫기부터 발구름, 공중 자세, 착지까지. 그런데 러닝화 코가 살짝 삐져나간 모양이다.
“휴우-.”
한숨을 쉬어서였을까.
김영태 선생이 진혁을 격려했다.
“진혁아, 괜찮아. 잘했어. 한 번 더 뛸 수 있어.”
“네.”
실망해서 그런 게 아니라 숨을 고른 것뿐인데 김영태 선생은 손진혁이 주눅 들지 않도록 애썼다. 여러모로 좋은 선생님의 자질을 갖춘 김영태였다.
진혁의 등을 두드리던 김영태가 힐끗 착지 장소를 봤다. 마침 진혁의 엉덩이가 닿으며 움푹 파인 모래가 진행요원의 마름질에 의해 묻히고 있었다.
‘6미터?’
잘못 봤나?
***
91번.
진혁은 마지막 아홉 번째 순번이다.
애초 참가자가 많지 않아 예선 기록이랄 것도 없이 신청으로 참가하는 종목이었다. 신청순으로 하다 보니 마지막 순번이 되었지만, 마지막 도전자라는 부담감이 명치를 은은하게 덥혔다.
하지만 마지막 순번이라서 좋은 점도 있었다.
‘아, 도움닫기는 처음부터 전력 질주하는 게 아니구나.’
마지막 단 한번의 기회, 마지막 도전자.
긴장과는 별개로 다른 선수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었으니. 진혁은 예리한 안목으로 다른 선수들의 움직임에서 자신이 취할 것을 빠르게 찾아냈다.
다다다다닷-!
멀리뛰기에 참가한 다른 선수가 힘차게 도움닫기를 했다.
‘구름판을 딛기 2, 3보 전까지 최고속력으로 올리는구나.’
이제까지 가장 성적이 좋은, 공주에서 온 선수였다. 그 선수의 움직임을 1차 시기부터 집중적으로 관찰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속도를 올리며 뛰다가, 발 구르기 2보 전에 상체를 세우고, 도약하면서 상체를 숙이지 않고 상향되도록.’
갑작스러운 참가 신청이었지만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암시를 걸듯, 주입한 논리적 순서대로 몸이 작동하도록 코딩을 하듯, 진혁은 빠른 속도로 멀리뛰기라는 종목에 빠져들었다.
‘어차피 개인 경기다. 나 혼자 하는 것만큼 잘하던 것도 없지.’
누가 몸싸움을 걸어 올까 걱정할 필요도, 다른 동료의 실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며 실망할 필요도 없었다. 경쟁 선수의 기록도 당연히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나만 잘하면 된다.’
진혁의 차례가 되어 출발구역에 섰다.
이전 생에 국제대회 중계를 보며 익힌 것을 떠올렸다. 무릎을 살짝살짝 구부리며 박자를 맞추는 거다. 함께 박자를 맞춰주는 관중들은 없지만, 혼자만의 박자에 맞춰 상체를 까딱거리며 호흡을 했다.
그런 진혁을 다른 이들이 의아하게 볼 때.
탁-!
탓-타-타-타타탓-!
도움닫기 구간을 달리는 진혁은 한 마리 오골계가 되었다. 저를 괴롭히는 꼬맹이를 쫓아가듯 목과 가슴을 앞으로 쭉 빼고 달리는 거다. 물론,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눈에는 상체를 세운 자세로 보였다.
파파팟-!
금세 최고속도에 도달했다.
상체를 세우고 호흡을 깊이 들이쉬었다.
이제 구름판이다.
파악-!
알 수 있다. 이번에는 구름판을 넉넉히 남기고 밟았다.
빠르게 달리고 힘차게 디뎌 중력을 떨쳐내고 높이, 멀리 날아올랐다.
후우웅-, 하늘을 나는 듯, 요상한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턱이 들린 진혁은 눈동자를 아래로 굴려 착지 장소를 찾았다. 시야에 관중석이 스치고, 트랙이 보인다. 너무 높이 뛰어올랐을까? 다리가 애매하다. 공기를 딛어볼까, 다리를 한 번 허우적거렸다. 다리 하나가 뒤에 쳐지면 곤란하다. 허벅지를 조이니 다리가 앞으로 당겨졌다. 다소곳이 발을 모았다.
고운 모래가 보인다.
곧 발이 닿을 것 같다.
젖먹던 힘을 다해 가슴을 앞으로 당겼다.
이를 악물고 어깨를 틀었다. 뒤로 넘어지면 말짱 꽝이다.
촤아악-!
고운 모래가 앞과 옆으로 튀었다.
착지 후 몸을 옆으로 한 바퀴 구른 진혁, 구름판 옆 의자에 앉아있는 감독관에게 눈을 돌렸다.
흰색 깃발!
눈대중으로 기록을 살폈다.
‘좋은 기록인가?’
다른 선수의 기록을 모르니 알 수가 있나.
툭툭- 모래를 털며 밖으로 나왔다.
진혁은 허리에 손을 얹고 기록관 두 명이 모래판 양쪽에서 줄자를 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상기된 표정의 김영태 선생과 친구들이 진혁의 옆으로 모였다. 다른 학교의 참가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기록관이 진혁의 기록을 불렀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기록관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6미터-.”
김영태 선생의 턱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떨어졌다.
그때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여기, 여기! 빨리 와 봐요! 여기 얘 이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