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 새로운 세상 (4) >
침묵하던 진혁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 창문 내려도 될까요?”
“그래, 뒤 친구들도 바람 좀 쐬게 해 줘.”
창문이 내려가자 바람이 부드럽게 흘러들어왔다.
자유를 상징하는 반가운 풍압이었다.
‘전생에는 이맘때 뭘 했었지?’
5월.
봄 소풍을 앞둔 시점이었다.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메이커 새 옷을 샀고, 새 운동화를 자랑했다.
쩝-.
진혁은 기억하기를 그만두었다.
애써 관심을 억누르며 책을 보거나 운동장 구석을 찾아 헤맨 기억뿐이니까.
부우우웅-.
진혁을 태운 승합차가 군 외곽도로로 접어들었고, 엔진룸에서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며 속력을 올렸다. 멀리 보이는 보리밭이 펼친 녹음이 싱그러웠다. 앞에 펼쳐지는 평화로운 정경이 자신의 바뀐 인생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진혁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상쾌하구먼!’
계기반을 보니 시속 80킬로미터였다.
팔을 밖으로 뻗어 손을 모았다.
둥그렇게 말아쥔 손바닥에 바람이 잡혔다.
진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였다.
‘도저히 모르겠어.’
신경질적으로 창문 손잡이를 돌려 차창을 올렸다.
운전대를 잡은 김영태 선생이 그 모습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진혁이 멀미하니?”
“아뇨, 괜찮아요.”
에이스의 컨디션은 중요하다.
뒷좌석에서 부스럭대며 멀미약을 꺼내던 염병택이 다시 집어넣었다.
***
대회 하루 전.
여관에 도착해 짐을 풀고 가볍게 스트레칭과 조깅을 했다. 스파이크화를 신고 공설운동장 트랙도 달려봤다. 우레탄 트랙이 처음인 진혁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사실, 이전 생에 이런 트랙을 많이 밟아봤지만 어린 몸으로, 스파이크화를 신은 선수로 참가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뭐······ 재밌네.’
진혁은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는 감상에 젖었다. 나무와 벤치가 있고 때론 작은 돌이 튀는 시골의 모래 운동장이 아니다. 육상 트랙과 잔디밭, 2만 관중석까지 갖춘 정식 경기장이었다.
염병택과 조슬찬은 경기장 규모에 입을 떠억 벌렸다.
“작년 가을에 개장했대.”
“깨깟허네-.”
진혁이 스타트 자세를 취했다.
김영태 선생님과 다른 친구들의 눈이 빛나고.
파바바-파파팟-!
앞으로 기울인 진혁의 몸이 20미터 구간을 거침없이 질주했다.
“와-. 진혁아, 워뗘? 내가 볼땐 훨씬 빨른 거 같은디?”
진혁은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며 조슬찬의 어깨를 툭 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매일 훈련한 효과도 있는 것 같고, 바닥이 단단하게 밀어주니 힘 손실도 적은 것 같다.’
진혁은 그 외에도 트랙을 달리며 깨달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신체 밸런스를 위한 적정 체중이었다. 트랙을 박찰 때는 발목으로 트랙을 밀며 몸을 띄워야 하는데, 체중이 과하면 발목에 무리가 간다. 뿐만 아니라 몸을 띄우고 전방으로 달려나가는 데에 오롯이 사용되어야 할 탄력이 체중 때문에 트랙에 먹혀버리게 된다.
반대로, 체중이 너무 가벼우면 트랙을 강하게 딛지 못한다. 파워가 부족해진다는 뜻이다. 지금은 몸이 조금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는 충분히 튼튼한데 무게 추가 약해 탄력이 붙지 않는 느낌.
‘살 좀 찌워야겠네. 근육량만 늘리면 부상 위험이 따른다고 했던가? 지방을 좀 붙이면 되려나?’
생소한 영역이라 제대로 아는 게 없다.
‘일단 달리는 일에 집중하자.’
허리에 손을 얹고 호흡을 고르며, 어깨를 크게 빙빙 돌리며. 깨달은 것을 계속 주입했다. 공식처럼 머리로 기억하고, 반복해서 외우고 끝내는 몸에 익어 숨 쉬듯 자연스럽게 체화될 때까지. 할 수 있는 것이 공부밖에 없어 공부만 해야 했던 손진혁의 심장이 새로운 도전을 향해 두방망이질했다.
***
전담 코치도, 영양팀도 없는 학교. 정식 육상부도 없으니 운영비도 넉넉히 편성되지 않는다. 대회 참가를 위한 숙식비와 교통비도 빠듯할 터였다.
지글지글-.
‘삼겹살 먹어도 되나?’
운동부 경험이 일천했기에 관련 지식이 부족했다. 고기를 먹어도 되는지도 궁금했다. 진혁은 의아했지만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인솔 교사가 정한 메뉴인데 괜찮겠지.
“지헤이 어응 머거-.”
조슬찬이 입안 가득 쌈을 넣고 웅얼거렸다.
소화력 왕성한 어린 선수들이고, 식단 프로그램도 존재하지 않던 시절인데 뭐가 대수랴. 무엇보다, 허겁지겁 고기를 욱여넣는 친구들을 보며 진혁 또한 식욕이 동했다.
상추에 삼겹살, 파채, 고추, 쌈장 찍은 마늘을 올리고 잘 감싸 입에 밀어 넣었다.
‘어으으-, 너무 맛있다.’
특히 매콤새콤한 파채가 일품이었다.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맛이 너무 황홀해 진혁은 눈물을 흘릴 뻔했다.
이 나이에 친구들과 어울려 이런 회식을 하다니, 처음이기에 더욱 특별한 식사였다.
“아줌마! 여기 고기랑 파채 좀 더 주유-!”
건너편 테이블의 남자가 큰소리로 외쳤다. 육상대회 참가를 위해 다른 지역에서 온 교사와 학생들이었다. 검은색 운동복 상의에 흰색으로 인쇄된 ‘대성’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들도 삼겹살을 먹는 걸 보면 괜찮겠지.
“저녁은 배불리 먹고, 소화되면 씻고 일찍 자라. 내일 오전에 100미터 예선, 오후에 계주 예선이다.”
김영태 선생님은 입맛이 없는지 맥주를 홀짝거리며 브리핑을 했다.
“선생님, 200미터도 있네요?”
“어어, 그러네? 400미터도 있는데?”
박지범과 염병택이 교사의 손에 든 일정표를 들여다보며 처음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200미는 밥 먹고 매일 운동만 하는 애들이 나가는 거야. 특히 초등부는 더 그렇지. 400미는 중등부야.”
스태미너가 뛰어나지 않은 아이들은 100미터를 한 번만 뛰어도 속이 뒤집히고 며칠간 근육통에 시달린다. 물론, 육상선수에게는 한나절이면 피로가 풀리는 종목이었지만, 200미터는 단거리 육상을 위해 방과 후 훈련을 한 박지범 같은 아이에게도 쉽지 않은 종목이었다. 몸이 200미터라는 종목에 길들어 있지 않으면 힘들다는 뜻이다.
“선생님, 저희는 200미터 못 나가요?”
“나갈 수는 있어. 내일 아침에 확인 도장만 찍으면 된다.”
참가 선수 명단이 곧 출전 명단이다. 그 명단에서 출전하는 종목에 도장을 찍는 것이 곧 참가 신청인 셈이었고, 도장을 찍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출전을 포기하는 것이었으니. 전문 체육과 동떨어진 시골 학교를 위한 집행부의 배려였다.
“100미터 뛰고 두 시간 후에 200미터 뛰는 건 가능한데, 200미터 끝나고 30분 후에 계주야.”
“저 200미터도 뛰고 싶어요.”
풉-!
손진혁의 말에 김영태가 맥주를 뿜었다.
저렇게 단호하고 길게 제 생각을 말할 수 있는 녀석이 평소엔 왜 네, 아니오만 했을까.
***
아이나 어른이나 남자는 마찬가지인 걸까.
여관방 벽에 기대앉은 염병택과 조슬찬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야, 3반에 임희진 걔 이쁘지 않냐?”
“아녀-, 우리반 안지윤이 더 이쁘지.”
“조슬 넌 새꺄 가슴 큰 탤런트만 봐도 다 이쁘다고 하잖아.”
“이이-, 그건 그려. 으흐흥.”
남자아이 네 명이 한 여관방에 모이니 여자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므야므야 이야기에 진혁은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이지가 아닌 본능의 지시였다. 그러나 자세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얘들도 자세히는 모르나 봐.’
욕실로 들어가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어딘지 때 묻지 않고 순수해 보이는 친구들이어서 진혁은 이들이 좋았다. 곧 중학교에 갈 텐데 같은 학교에서 만나게 되겠지.
*
“염병아, 우리 할머니가 그러시는디 남자는 허벅지가 튼튼허야 된댜-.”
“조슬 넌 새꺄 혓바닥이 젤 튼튼해.”
달칵-.
씻고 나왔는데도 친구들은 씻을 생각이 없는지 한창 수다를 떨고 있었다. 스마트폰이 있다면 각자 게임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원초적인 관심사를 나누는 모습이 차라리 아이들다워 보였다.
진혁의 나신을 본 염병택이 감탄을 뱉어냈다. 점잖은 박지범도 빠지지 않았다. 시선이 향한 부위가 약속이나 한 듯 동일했다.
“워어-, 진혁이 좀 봐라. 존나 크다.”
“히익-! 키가 커서 그런가?”
“진혁이 조커서 조커따아-.”
아차, 갈아입을 속옷을 욕실에 챙겨가지 않았다가 그냥 나왔더니 졸지에 구경거리가 되었구나. 그러고 보니 이 친구들과 함께 목욕탕을 갈 기회가 없었지. 그런데 이 조그만 놈들은 그게 크면 좋다는 걸 어떻게 아는 걸까? 이전 생에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 따위 갖지 못했던 진혁이기에 아이들의 반응이 신기하기도 했다.
“소화됐으면 씻고 자자. 내일 힘쓰려면 쉬어야지.”
진혁의 말에 친구들이 꾸물꾸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곤해서 귀찮을 만한데도 운동을 하는 녀석들이라 컨디션 관리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진혁이는 형 같어서 장냥치기두 어렵다니께?”
욕실로 들어가며 투덜거리는 조슬찬의 말에 진혁이 피식 웃었다.
‘형이 아니라 아저씨뻘이야 인마.’
***
구수한 된장찌개로 아침식사를 하고 공주공설운동장으로 이동했다. 이미 도착한 다른 학교 선수들이 스트레칭이나 가벼운 조깅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아, 이해 좀 해주세요! 이렇게 대규모로 하는 건 우리도 처음이잖아요!”
대회 운영위원회 담당자였다.
이해해 달라는 사람 치고 너무 당당한 나머지 모두의 이목을 끌었으니. 종목 진행 순서, 중간 휴식 시간이 체계적이지 못하고 출전 명단이 미리 나오지 않아 선수들과 코치들이 힘들어한다는 항의를 받은 것이었다.
툭툭-, 삐이이잉-. 마이크가 비명을 질렀다.
[곧 남자 초등부 100미터 예선을 시작으로, 높이뛰기, -, 선수들은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김영태 선생님은 분주하게 운영위와 선수 대기석을 오갔다. 손진혁 때문이었다. 200미터에도 출전하고 싶다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뛰어보겠냐는데 말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역시 이번 경험을 위해 아이들이 다치지 않고 모두 오기를 바랐으니까.
“진혁아, 하는 김에 멀리뛰기도 해볼래?”
그거 뭐 어렵겠나.
냅다 달리다가 힘차게 날아오르면 되는 거 아닌가.
“네.”
그냥 해본 말인데 하겠단다. 김영태는 보이지 않게 한숨을 푹 쉬고는 참가확인서에 도장을 하나 더 찍었다.
‘이런 출전은 전국대회에서나 가능할 텐데.’
100미터, 200미터, 멀리뛰기, 남자초등부 400미터 계주까지.
네 종목이라니. 육상은 복수 종목에 참가하는 선수들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초등부 선수가 짧은 경기 기간 동안 다수 종목에 출전하는 건 비정상에 가까운 발상이었다.
200미터도 단거리로 치지만 어디 100미터처럼 진짜 단거리와 같던가. 스태미너와 스피드를 모두 갖춰야 도전할 수 있는 종목이 200미터다.
‘펜대만 굴리는 놈들 덕분에 좋은 기회가 생겼지 뭐.’
이번 대회는 이틀 동안 치러진다. 공인 대회라지만 기초체육 육성의 기치를 내걸고 육상을 별도 편성했다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였다. 결국 졸속이라는 뜻이었다.
“지범이도 200미터 나간다고?”
“예.”
박지범은 원래 육상을 하던 녀석이었으니 경험 좀 해보라고 하자. 김영태는 아이들이 최대한 경험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대회 조직위의 허술한 운영 덕분에 아이들에게 뜻밖의 기회를 제공하게 된 셈이었다.
한때 박지범의 들러리 선수였던 염병택, 첫 출전인 조슬찬은 육상 유니폼을 입은 여학생들의 자태를 감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야아-, 쟤덜은 도시 사는 애덜잉가 살결이 뽀얗다잉-.”
“슬찬아, 저 여자애 되게 이쁘다아-.”
“으디여, 으디?”
“저기, 쟤. 봉은국민학교.”
“야! 병택아 인마! 저건 선생님이잖여! 아무 여자나 보고 침 흘리먼 안 되능 겨! 너 그러다 클나!”
“아, 이제 보니까 김 양 누나랑 닮았네.”
좋을 때다.
진혁도 인생 1회차를 평범하게 보냈다면 저 친구들과 함께 입을 벌리고 있지 않았을까. 아마 그랬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친구들이 너무 귀엽다.
‘저 정도면 이쁜 건가······.’
도저히 모르겠다.
엄마나 홍수정 전무에 비하면 그냥 직립보행하는 인간 같은데.
슬쩍 보고는 스트레칭에 집중하기로 했다.
함부로 쳐다보고 그러면 클난다고 조슬이 그랬어.
‘호르몬 때문인가.’
점점 또래와 습성이 비슷해지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