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 새로운 세상 (3) >
***
삑-!
허리에 타이어를 매달고 배턴을 주고받는 연습이 계속되었다. 허리와 배, 다리 근력을 향상하고, 비교적 느린 속도로 배턴을 주고받는 훈련이었다. 배턴을 넘겨주는 동작, 받는 타이밍이 몸에 익을 때까지. 계속.
“힘들어도 숙달시켜야 해! 기본이 제일 중요한 거야! 계주의 기본은 바톤 터치다!”
김영태가 매서운 눈으로 선수들의 자세를 훑었다.
삑-.
파파팟-!
호각 소리가 울리면 선수들의 팔이 허공을 가른다.
터욱-.
배턴을 놓는 것이 아니다. 다음 주자의 손에 적당한 힘으로 밀어주는 것이다. 다음 주자는 전방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제자리 달리기를 반복하다가 손바닥에 단단한 막대기가 느껴지면 강하게 움켜쥐었다.
삑-!
“슬찬이! 배턴 받으면서도 무릎 차올려야지! 가만히 서 있지 말고!”
그래야 곧바로 튀어나갈 수 있다. 드래그 레이스의 자동차가 중립에서 엔진 RPM을 올리듯 다리를 놀리는 거다. 아이들은 평소 볼 수 없는 체육 교사 김영태의 열정적인 모습에 내심 놀라며 훈련에 집중했다.
삑-!
“아악-!”
조슬찬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슬찬이! 왜그래!”
“조슬! 괜찮냐?”
갑자기 들린 외마디 비명에 김영태 선생이 놀라 달려갔다.
조슬찬의 앞 주자 염병택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친구를 살폈다.
대회가 1주일 앞이다.
부상이라도 입는다면 계주는 포기해야 한다. 대회 규정상 예비선수라는 안배는 없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부상으로 다른 친구들까지 출전을 못하게 된다면 조슬찬이 얼마나 위축될까. 아이의 비명을 듣는 순간 김영태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다.
땅을 짚었던 조슬찬이 일어서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서운한 감정이 한껏 드러난 얼굴이었다.
“아이고오-, 힘들어서유. 선생님, 살살 좀 하자구유-.”
“으하하하하-! 조슬 또 엄살이었어.”
“아이고, 이늠 시키. 이제 6학년이라고 선생님을 놀리냐!”
조슬찬의 구수한 사투리에 아이들이 웃으며 호흡을 고르는 동안, 김영태는 화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곤 자신도 허허 웃어버렸다.
삑-! 삑-!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슬찬의 쇼는 효과를 보지 못했다. 삼촌처럼 웃던 김영태는 더욱 가열하게 휘슬을 불어댔다. 얼마나 열심히 불었는지 호루라기에서 침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더 빨리! 배에 힘주고! 어깨 펴!”
훈련이 끝났을 때, 아이들은 모두 퍼져 버렸다.
육상부 훈련은 재미없고 힘들기로 악명이 높다. 허리는 끊어지고, 허벅지는 터지고, 심장은 쥐어짜는 듯 아픈 훈련. 타이어를 끌고 운동장을 달리는 훈련이 재미있으면 얼마나 재미있겠나.
진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 애들은 체력이 부실하구먼?’
아이들에겐 힘들다 해도 매일 먼 거리를 뛰어다니고, 스스로 운동 프로그램까지 진행하는 진혁에게는 우스운 훈련이었으니. 진혁은 육체적 동년배들과 어울려 땀을 흘리는 자체가 즐거울 뿐이었다.
“스타트는 지범이, 2번 병택이, 3번 슬찬이, 4번은 진혁이로 가자.”
“네.”
어차피 그 순서에 맞춰 훈련을 해왔다. 대회를 앞두고 한 번 더 확인을 하는 차원이었다.
“고생들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이들이 교사에게 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광경도 이색적이었다. 군대처럼 박력 넘치면서도 표정은 아이답게 밝았다.
진혁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고도 신선했다.
‘재밌는 세상이다.’
점심시간 직후부터, 오후 5시까지.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 두 번의 계주 훈련이 끝났다.
허리에 타이어 매달고 배턴 패스만 연습하는 게 무슨 계주 훈련이냐 할 수도 있지만, 김영태와 태양초등학교 선수들에게는 가장 진지한 훈련이었다.
‘아쉽네. 훈련 동료들이 있으니 재밌었는데.’
스파이크에 노랗게 앉은 흙먼지를 떨어내며 진혁이 입맛을 다셨다.
***
벼농사를 짓는 농촌에서는 5월 초에 모내기를 한다.
기상과 일조량, 평균기온에 맞춰 4월에 하는 지역도 있고, 볍씨 품종에 따라 시기를 정하기도 한다. 손으로 모내기를 할 때는 더 늦게 했었는데, 기계식 이앙법이 완전히 자리 잡은 후에는 이상저온현상만 없으면 모내기 일정을 매년 비슷하게 가져갔다.
“오빠랑 아빠 계신 곳 가볼까?”
“까요, 까요.”
유진이의 된소리에 진혁은 저도 모르게 다리를 오므렸다.
안 까도 된다니까 그러네. 중얼거리며.
‘아오, 트라우마.’
동생 유진을 품에 안고 논으로 향했다. 장군이가 졸랑졸랑 뒤를 따랐다.
따스한 봄볕, 논의 뻘과 물 냄새를 싣고 불어오는 봄바람이 기분을 설레게 만들었다.
‘옛날엔 몰랐어. 이렇게 좋은 냄새였구나.’
오빠 품에 안겨 새까만 눈을 굴려 세상을 구경하고, 보드라운 손으로 오빠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동생이 행복감을 더했다.
“에헤헤-.”
이제 네 살이 된 유진이는 모든 게 신기한지 흙덩이를 가지고 놀다가, 막대기를 쥐고 여기저기 쑤시기도 했다. 딸랑이 달린 머리끈으로 사과 꼭지처럼 묶은 머리가 귀엽다.
손광연은 나무판으로 종이 뭉치 같은 것을 받쳐 들고 다니며 뭔가 적거나 체크할 뿐, 직접 논에 들어가지 않았다. 동네 이웃들은 그런 손광연을 처음에 이상한 눈으로 봤었다.
- “워째 농사꾼이 넘한티 일을 다 시킨대유?”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으나 그들의 속마음은 달랐다. 농사꾼이 농사는 짓지 않고 돈 아깝게 사람을 부린다는 뜻. 손광연도 그들의 속내를 모르지 않았으나 그저 웃을 뿐이었다. 손광연은 가족이 먹을 작물에만 직접 손을 대고 나머지 논밭은 사람을 사서 썼다.
“진혁아, 아빠가 왜 이렇게 농사를 짓는지 아니?”
신나게 뛰어놀다가 봄볕에 잠든 딸 유진이를 업고 집에 가며 아빠가 물었다.
“사람 사서 쓰는 거요?”
“그래. 동네 아저씨들이랑 아줌마들은 아빠를 이상하게 보잖아.”
곧 모든 농촌이 그렇게 변할 거예요. 아빠처럼 땅부자라서 사람 사서 쓰는 건 아니지만, 일할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된답니다. 하지만 아빠가 왜 이렇게 농사를 짓는지도 알 것 같네요. 아빠는 경영을 하는 거잖아요.
이렇게 대답할 순 없고.
“엄마랑, 저랑, 유진이랑 시간을 더 많이 보내시려고 그러시는 거 같아요. 농사일에 지치면 피곤해서 그러지 못하잖아요.”
진혁은 다른 집의 친구들을 떠올리며 대충 둘러댔다. 다른 집 아이들은 오죽하면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이 ‘농사일 거들 때’라고 말을 할까.
“정확해.”
엥?
소 뒷다리에 쥐 잡는다더니.
“아빠는······ 가족이 없었어.”
“······.”
쉽게 들을 수 없는 아빠의 가족사가 나올 것 같아 진혁은 숨을 죽였다. 평소에도 넌지시 물으면 둘러대거나 딴소리를 하는 아빠였기에.
자세한 설명이 나오기를 기대했으나 아빠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 식구들과 이렇게 사는 게 너무 좋아.”
진혁을 보며 손광연이 씨익 웃었다.
손광연은 저수지를 끼고 바다를 두르고 있는 논과 산, 밭을 한 바퀴 훑어보았다. 소금 냄새와 뻘 냄새가 진동하던 간척지에 빈손으로 흘러들어온 지 14년. 20만 평 가까운 땅이 자신의 수중에 들어왔다.
“경영이라는 말 들어봤지? 아빠는 경영을 하는 거야.”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 봐, 내 생각이 맞지’ 하는 눈빛으로.
“시간과 자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해야 해. 그리고 실무는 잘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거지. 아빠가 트랙터를 사서 직접 몰면 인건비를 아끼겠지만, 트랙터를 구입하기 위해 큰돈을 써야 하고, 이 많은 논밭을 일구기 위해 온종일 매달려야겠지. 아빠는 대략적인 농사 스케줄과 투입할 인력, 기계만 계산하면 돼.”
돈이 있으니까.
그 돈을 모으기 위해 맨손으로 악착같이 살았으니까.
“때마다 사람을 사기 위해 큰돈을 쓰니까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아까워 보이겠지. 그 돈이 아까워서 직접 농사를 짓는 거고.”
그러다 골병이 들고.
힘들어서 결국 포기하고 농촌을 떠나는 거다.
“아빠는 사람을 사서 쓴 덕분에 방송대 다니며 농사 공부도 하고, 농촌지도소 찾아다니며 작물 재배법도 익힐 수 있었어. 읍내 부동산에 나가 어디에 좋은 땅이 나왔는지, 어디가 땅이 싼지 알아볼 수 있지. 이렇게 진혁이랑 이야기도 하고, 바둑도 두고.”
대낮에 동생도 만들고, 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게 가장 좋은 점인데 차마 아들에게 자랑할 소재는 아니니까. 글짓기 소재 투척할 때가 아니면 손광연도 지킬 건 지킨다.
‘아빠는 진정 천재시구나.’
타고난 사업가이거나.
한국대 경영학과를 나왔다더니 그냥 공부 머리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이런 아빠를 이전 생에는 너무나 허무하게 잃고 슬픔 속에 살았었다.
‘감사합니다.’
진혁은 누군지도 모르는, 자신을 돌려보낸 존재에게 마음속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절대 허투루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시 주어진 소중한 인생이니까. 가족을 위해 살겠노라, 아빠 등에 업혀 잠든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맹세했다.
“아빠, 바둑 둘까요?”
“좋지. 몇 점 깔아줄 거니?”
너무나 당당하게 접바둑을 요구하는 아빠였다.
기가 막혀 할 말을 찾지 못한 진혁이 아빠를 응시하니 웬 하수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기대감 어린 그 눈빛이 몹시도 간절하다.
“승부에 접바둑이 어딨어요?”
“아이-, 진혁아아-.”
근엄했던 아빠는 간데없고 촐랑이만 남았다.
망둥어를 무서워하지만 좋아하고.
참새를 두려워하면서도 맛있다며 침을 흘리고.
진혁과의 맞바둑을 힘겨워하면서도 함께하는 자체로 행복해하는 아빠였다.
“아이, 참-. 진혁아아-. 한 점에 만 원씩 쳐줄게-.”
등에 업힌 유진이 머리가 달랑거리도록 손광연은 아들의 꽁무니를 졸졸 따랐다.
‘오늘은 져 드릴까? 근데 지는 방법을 모르는데.’
평범하게 살기 위해 배워야 할 게 많은 세상이다.
느허허헛-.
진혁이 의뭉스러운 웃음을 던지며 속도를 올렸다.
누군가 함께 달리니 그저 좋아서.
***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우리 아들. 엄마랑 아빠가 안 가봐도 돼? 멀미약 안 먹어도 되려나?”
“유진이도 보셔야죠. 여기서 공주까지는 멀잖아요.”
언제 이런 사랑을 또 받을 수 있을까.
몸은 이미 중학생을 넘어서고 영혼은 40년을 넘게 살았는데. 부모님 눈에는 아직도 어린아이였고. 진혁도 부모님의 사랑이 싫지 않았다. 아니, 전생에 받지 못한 사랑이 진혁을 행복하게 했다.
오늘도 진혁의 아빠는 어김없이 운전대를 잡았다.
대회가 열리기 전날이 되어 태양초등학교로 집결하기로 한 날이다.
“진혁아, 즐기고 와.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우리 아들 잘 뛰는 건 알겠는데 선수도 아니고 잘하면 얼마나 잘하겠니. 아빠의 눈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리고 지갑을 꺼냈다.
“친구들이랑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아빠가 지폐를 주셨다. 지난번에 주신 것도 그대로 남았는데. 조금만 더 모으면 귀한 MTB 자전거도 살 수 있겠다. 괜히 코끝이 찡해진 진혁이 차에서 내려 가방을 멨다.
드르륵-.
떠나는 아빠 차를 향해 허리를 숙이는데 뒤에서 승합차의 슬라이딩 도어가 열렸다. 이어 염병택이 목청을 키웠다.
“진혁아-!”
웬 회색 승합차가 학교 운동장에 서 있나 했더니. 대회를 위해 태양초등학교에서 빌린 것이었다. 친구들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몇 번 어울린 적도 없는데 이렇게나 반가워하는 녀석들을 보며 어릴수록 친구를 빨리 사귄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진혁이가 조수석에 타라.”
에이스를 위한 김영태 선생님의 배려였다.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자 진혁을 태운 승합차가 공주공설운동장을 향해 출발했다.
드디어 내일.
도 대회를 겸한 전국소년체전 대표 선발전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