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 새로운 세상 (2) >
아이들에게 욕설을 하고 손찌검을 했다는 말에 엄마는 숟가락 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빠의 얼굴도 무섭게 굳었다. 홍기준이 처음 찾아왔던 날보다도 눈빛이 형형했다.
“차 번호 적어뒀어요.”
쪽지를 받아든 손광연이 전화기 있는 곳으로 가 점잖게 앉았다.
아빠가 여기저기 전화를 걸기 시작했기에 진혁은 귀를 쫑긋 세웠다.
어디에, 누구에게 거는지 호기심이 동했다.
“가용한 서장님, 안녕하셨습니까. 손광연입니다. 최근에 저희 동네에-.”
경찰서장, 그렇지. 도움이 될 거야. 수화기 너머로 호들갑 떠는 경찰서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꽤나 반가운 모양이다. 그런데 이름이 특이하네. 사용이 가능하다는 뜻인가.
“어-, 기준이냐? 처랑 수정이는 잘 지내고? 그래, 그래. 별일 없지? 요즘 내가 말야-.”
홍기준 아저씨에게는 왜 하는지 모르겠지만 분한 마음 하소연하는 데는 친구만 한 존재가 또 없겠지.
“송태근 의원댁 맞습니까? 아, 의원님. 손광연입니다.”
국회의원쯤 되면 발이 넓겠구나.
아빠의 통화가 길어질수록 진혁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고 엄마의 표정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그런데 군수랑 농협장한테는 왜 전화하시는 거지?’
누구에게 전화를 하는지 들었지만 통화 내용은 자세히 듣지 못했다. 아빠의 전화하는 스타일이 그랬다. 인사할 때는 크고 활달하게, 용건은 차분하고 조용하게. 아빠는 절대 흥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망둥어와 참새 잡을 때는 빼고.
“대대장님 안녕하셨습니까.”
으응?
군대라도 동원하시려는 건가?
아빠는 이상한 사람이다.
언제 저런 인맥을 쌓았을까.
점점 밝아지는 아빠의 표정을 보며, 진혁은 뚱뚱보가 조만간 지명수배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식탁 밑으로 주먹을 꾸욱 쥐어봤다. 부서질 듯 단단하게 쥐어졌다. 낮에 뚱보를 들어 올리지는 않았지만, 쉽게 들어 올릴 수 있을듯했다.
친구들과 팔씨름조차 하지 않을 만큼 조심하며 지내느라 힘을 쓰지 않았는데. 그래서였을까, 힘이 너무 강한데도 모르고 살았다. 아홉 살에 맷돌을 아무렇지 않게 들고 칡뿌리를 통째로 뽑았을 때도 의심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나도 참 둔하지. 힘 조절하는 연습도 해야겠네.’
꾸득-.
관절에 아무런 마찰이 느껴지지 않는데, 주먹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
손광연이 기어이 운전대를 잡았다.
태양초등학교에 계주 연습을 하러 가는 날이었다.
“아빠, 저 혼자 버스 타고 다녀도 되는데요.”
“괜찮아. 아빠 차 타면 버스보다 편하고 빠르잖아.”
그렇긴 하지요.
포장된 도로를 달리는 승용차의 속력과 안락함을 버스에 비할 순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아빠 차는 최고급 아니던가.
‘아빠 잘 둬서 호강하는구나.’
혈연에 의해 마땅히 누리는 것이라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한 번 잃었었기에 당연한 호사라 여기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팔을 뻗어 공기를 잡는 진혁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시속 80키로로 달리는 차에서······ 물을 뜰 때처럼 손을 바가지처럼 오므려서 공기 저항을 느끼면.’
서울 유부녀 최미경이 알려줬었다.
B컵 므야므야를 만지는 느낌과 비슷하다고.
그러고 보니 그 친구는 왜 그런 걸 알려줬을까.
혼자 사는 놈 불쌍하다고 가상체험이라도 하라는 배려였을까.
‘이건 도대체······.’
환하게 웃던 진혁의 얼굴이 맹구처럼 일그러졌다.
알려준 대로 해봐도 이 느낌이 그 느낌인지 알 수가 없는 까닭이다.
언제 만져 봤어야······.
*
학교 운동장에 고급 승용차가 들어서자 김영태와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시골 학교에 다니는 녀석이 그런 차를 타고 올 거라 꿈에도 예상 못한 탓이었다.
“스파이크 챙겼니? 운동복은? 차비는 있어? 핫도그도 사 먹고 친구들이랑 떡볶이도 먹고 와.”
아빠가 아니라 엄마 같다.
손광연은 기어이 진혁의 주머니에 만 원짜리를 네 장이나 찔러주고 차를 돌렸다. 떡볶이를 인당 만 원어치나 먹으라는 뜻일까.
‘울 아빠 경제관념 무엇······.’
500원 한 접시면 대식가 손진혁도 허기가 가시고 천 원어치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데. 왕뚱땡이 핫도그가 100원이다.
그래도 흐뭇해서 진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진심으로 눈물 나네.’
삶이 바뀌어도 너무 바뀌지 않았나.
원래 이랬어야 할 삶이었다. 진혁이 바꾼 것이 아니다.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진혁은 그렇게 생각하며 새로 사귄 어린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친구라고 하기엔 아직, 뭔가 낯설었다.
김영태 선생이 진혁을 반겼다.
“진혁이 스파이크 챙겨왔니?”
“넵.”
육상용 스파이크화는 낯선 듯 낯익었다. 발볼에서 암벽등반용 릿지화나 축구화와의 착화감이 느껴졌다. 저렴한 신발이지만 발을 안정적으로 잡아주니 금세 적응했다.
‘발 앞쪽으로만 걷게 되네.’
축구를 할 때도, 달리기를 할 때도 진혁은 앞발로만 뛰었었다. 뒤꿈치가 땅에 닿는 법이 없었던 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렇게 달리는 게 스피드를 폭발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바통을 그냥 주는 게 아니야! 이렇게 푹! 훅! 다음 주자 손에 밀어 넣는 거다!”
김영태는 시범을 보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육상 지도교사로서 그 어느 때보다 의욕이 넘쳤다. 다름 아닌 손진혁의 존재 때문이었다. 육상 단거리에서 1초는 엄청난 거리 차이를 불러온다. 그런데 진혁은 다른 아이들보다 1초 이상 빠르다. 진혁이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빨랐던 박지범이 겨우 1초 차이를 낼 뿐이었다.
‘계주에서 잘하면 입상도 가능하겠어.’
배턴 터치만 원활히 이뤄져도 2, 3초 차이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초등부 계주였다. 파란색 태양군 유니폼으로 환복한 손진혁을 보며 김영태가 눈을 빛냈다.
신장이 165센티미터.
6학년 씨름부 선수들 중 간혹 180도 넘는 학생이 있지만 육상을 하는 녀석 중에는 보기 드문 큰 키였다. 게다가 김영태가 알기로 진혁은 전문적으로 운동을 하지도 않았다. 타고난 신체조건이라는 감탄 외에는 할 수 없었다.
‘몸을 미국에서 만들어 왔나?’
칼 루이스를 떠올리게 하는 삼각근은 이미 육상 단거리를 위해 태어난 남자라고 외치는듯했고, 쩍 갈라진 대퇴근은 야생마를 떠올리게 했다. 아시안게임 200미터에서 금메달을 따낸 장재근의 허벅지가 연상됐다.
“진혁이 혹시 중량 운동 같은 거 하니?”
“아뇨.”
달리기랑 철봉, 윗몸일으키기 같은 것만 하는데요. 팔굽혀펴기도 하고요.
성장기에는 웨이트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진혁은 이전에도 혼자 운동하며 이런저런 서적과 영상을 탐독했기에 숙지하고 있던 터였다.
‘전생보다 키가 컸으면 좋겠어.’
과거에도 진혁의 키는 평균을 훌쩍 넘었다. 한창 클 때 잘 먹었다면 더 컸으리라 생각했다. 옛날 사람 치고 키가 큰 부모님을 보면서 말이다.
“그래, 중량은 하지 말고 자기 체중만 이용하는 운동만 하는 거야. 알았지?”
“네.”
김영태의 애정 어린 조언이었다.
기초 체육 불모지인 한국. 초반의 폭발적인 스타트와 종반의 지치지 않는 스퍼트를 제대로 살린다면 100미터 충남 대표도 불가능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물론, 합성트랙에서도 좋은 기록을 낸다는 전제하에서.
그건 그렇고.
진혁은 김영태와 대화를 하며 오랜 의문을 꺼내 들었다.
‘왜 체육 선생들은 꼬툭튀 츄리닝을 입는 걸까?’
예나 지금이나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었다.
체육 담당 교사이니 운동복 차림인 건 그렇다 치고, 왜 쫙 달라붙는 바지를 입는 걸까. 그것 때문에 한창 예민할 시기인 여학생들이 체육 시간에 시선 처리가 어렵다는 걸 알까?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거겠지. 응큼한 사람들 같으니.’
한국 남자의 꼬부심을 누가 말릴 수 있을까. 진혁조차 이전 생에 대중목욕탕에 갈 때마다 스스로 자랑스러워했었다. 아무도 안 쳐다보는데. 그리고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한숨이 나왔다.
‘헛살았어.’
***
업무를 보던 홍기준은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어, 그래. 광연이구나! 웬일이냐, 이 시간에?”
홍기준은 제 목소리가 너무 컸음을 깨달았다. 그만큼 예상치 못한 친구의 전화가 반가웠다. 서로 업무 시간을 존중해야 한다며 낮에는 통화하기 어려운 친구인데. 기이한 일이었다. 사과의 뜻으로 부서원들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고는 빙글 돌아앉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친구가 호들갑을 떨었다.
- 으하하! 우리 아들이 말야-.
코로 한숨을 뿜어낸 홍기준은 지그시 눈을 감고 청취모드에 들어갔다.
아들 없는 놈 서러워 살겠나. 전화만 하면 아들 자랑이다.
“오, 그래? 육상 대회에 나간다고? 못하는 게 없구나? 싸움도 잘하더니-.”
- 싸움? 무슨 소리여? 우리 아들이 누구랑 싸워?
“아하하, 말이 헛나왔네. 오골계랑 노는 거 생각나서 그랬다.”
홍기준은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훔쳤다.
볕 잘 드는 사무실에 있어서 그런지 괜히 땀이 났다.
커피를 타온 직원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하고 통화를 이어갔다.
“그래, 도 대회에서 우승하면 뭐 있나?”
- 우승은 무슨······. 지역을 대표해서 나가는 데에 의의가 있는 거지. 사실 상처 받을까 걱정이다. 쟁쟁한 선수들 틈에서 경쟁하면 벽을 느낄 텐데 말이다. 우리도 경험한 거 아니냐?
홍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광연과 함께 했던 대학 생활을 떠올리면서였다.
대학에 진학하는 자체로 성공을 의미하던 시대를 살았으나, 국내 최고 대학이라는 간판은 캠퍼스의 낭만을 즐길 여유를 주지 않았다. 함께 붙어다니던 친구 덕분에 홍기준도 공부에 매달렸고.
덕분에 유세라를 소개받았으니 이제와 생각하면 백 번 잘한 일이었다.
‘광연이는 장학금을 위해서라도 더 공부에 매진했지.’
손광연은 자신 때문에 누군가는 장학금을 받지 못할 거라며 안타까워했다. 누구보다도 형편이 어려웠던 주제에.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가정을 꾸려 전원생활을 하는 친구가 이제야 평화를 찾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행스러운 감상이었다.
- 그런데 말이야, 지도교사 말로는 우승도 가능한 기록이라고는 하는데 내가 뭘 아나. 혹시라도, 그 뭐냐······ 어허헛.
“짜식 아쉬운 소리 못하는 건 여전하네. 나한테는 해도 된다. 계속 육상하고 싶어 하면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 묻는 거 아니냐?”
수화기 너머 손광연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 역시, 내 친구는 너밖에 없다.
“당연한 소릴 하고 있어. 알아볼 테니 잘 키우기나 해. 애들 방학 때 보자.”
- 그래, 고맙다. 일 봐라.
“너도 몸좃-.”
-뚝.
“하, 이 시끼······.”
홍기준은 전화를 먼저 끊어보질 못했다.
다음번엔 반드시 선공을 하겠노라 맹세하며 문밖으로 보이는 신입사원에게 손짓을 했다.
“민용락 씨?”
“예! 부장님!”
“내가 일전에 부탁한 거 준비됐나요?”
“대한민국 학원 체육 관련 보고서 말씀이시죠?”
홍기준이 씨익 웃었다.
인사부 서류 심사에서 탈락한 사람을 이름만 보고 데려왔는데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일머리가 상당하다.
‘병역 면제자라고 떨어뜨리다니······.’
홍기준이 고개를 저었다.
한 줌도 되지 않는 권력으로 패악질을 부리는 것들을 조만간 모조리 물갈이하리라 마음먹으며.
민용락은 즉시 책꽂이에서 보고서를 빼냈다.
홍기준 부장은 신기한 사람이다.
과장으로 온지 얼마 안 되어 부장이 됐다는 말은 들었다. 상무를 거치지 않고 사장으로 발령이 날 거라는 소문도 돌고 있다.
‘회장님 사위니 그럴 수 있지만.’
다들 ‘미스터 민, 미스 리’라는 호칭을 사용하는데 홍기준 부장은 정답게 이름을 부른다. 젊은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듣기 나쁘지 않았다.
민용락 사원이 노란색 파일 커버가 덮인 서류 뭉치를 들고왔다.
“여깄습니다!”
“오케이, 땡큐-.”
서류를 펼친 홍기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때를 기다렸던 사람이 짓는 회심의 미소처럼 보였다.
‘뭘 하든 내가 도와주마.’
제대로.
넌 하고 싶은 거 하며 행복하게 살아라.
‘뱁새들은 황새를 욕하지 않지.’
이해하지 못할 뿐.
슬슬 움직일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