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는 평범하게 살기로 했더-27화 (27/338)

# 27 < 새로운 세상 >

***

진혁은 박재승 선생과 헤어지고 혼자 어딘가로 향했다.

뉴서울다방. 서울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데 간판이 저랬다.

여전히 1층에 옷가게가, 2층에 다방이 있었다. 그 다방 내부에 방 두 개 딸린 살림집이 있는데 작은 방에 진혁이 살던 다락방이 붙어있었다.

‘내가 여길 왜 왔냐.’

여섯 대의 빨간색 스쿠터가 있어야 할 곳에는 세 대뿐. 이름이 택트였던가. 세 대는 배달 나간 모양이다. 이 시간이면 부동산이나 당구장이겠지.

가만히 서서 다방을 살피는 진혁이 이상하게 보였는지 시장 상인들의 눈길이 쏠렸다. 또래에 비해 크다 해도 다방을 이용할 나이도 안 된 아이가 저러는 모습이 이상했으리라.

저들은 진혁을 모른다.

상인들은 진혁을 처음 보지만 진혁은 그들을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었다.

‘다 아는 얼굴이구먼.’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한때 10년을 넘게 살았던 곳이 이제는 낯선 공간이 되어 있지 않은가. 가슴 속 가장 어두운 곳에 곰팡이처럼 도사린 그림자가 봄볕에 분해되는 기분이었다.

‘자유.’

비로소 자유를 얻은 자의 회심의 미소가 진혁의 입가에 걸렸다.

다방에서 태양초등학교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걷지 않아 발길을 잡아 세우는 곳을 만났다.

태양당약국. 이윤경이라는 친구의 부모가 하는 곳이다. 전생의 고등학생 진혁에게 고백을 했던 아이. 이윤경은 진혁의 완곡한 거절에 눈이 시뻘게져서 돌아갔다. 진혁은 미안해하지 않았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고 기억할 거리도 아니었다. 이윤경 때문에 이곳에 온 게 아니다.

약국 옆에 치킨집이 있다.

링스치킨. 영업 전인데도 치킨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음-, 스멜-.’

그렇게나 맛있다던데, 초등학교 시절 매일 가게 앞을 지나며 냄새만 맡았다. 맛을 보게 된 건 스무 살이 넘어서였다.

‘우성이랑 승훈이랑 맥주 마시러 왔었지.’

아직 영업 전이어서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진혁은 작은 목표를 세웠다.

‘중학교 오면 치킨 사다가 가족들이랑 먹어야지.’

엄마랑 아빠도 좋아하실 거야.

제 손으로 번 돈으로 가족들과 뭔가 나누는 평범한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

모처럼 읍내에 나오니 뻘에 갇혔던 어두운 과거가 잠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으나 흔들리거나 우울감에 빠지지 않았다. 이제 모두 없는 일이 되어버린 과거다.

브랜드 스포츠용품점을 기웃거리다가 다른 가게도 구경했다.

‘옛날이라 그런가 나익키도 아다디스도 다 촌스럽네.’

슬레진저는 정말 오래된 상표구나.

“집에 가자.”

터미널로 발길을 돌렸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차부약국 간판이 보였다.

건물 외벽에는 겨울바람에 펄럭이던 현수막 대신 매끈한 석재가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너무 깊이 생각에 빠졌던 탓일까, 눈부신 빛에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진혁이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앗! 그냥 정거장에서 타면 되는데.”

세 정거장 거리를 걸어왔다.

시골 완행버스를 타는 게 너무 오랜만이다.

‘아, 븅신.’

***

말 배우는 속도가 제법 빠른 유진이였다.

진혁은 마당에서 동생을 안고 가족 이름을 가르쳤다.

“아빠 손광연.”

“아빠 똥강강-!”

“엄마 한유영.”

“엄마 한우엉-!”

“오빠 손진혁.”

“오빠 똥징역-!”

아, 유진아.

진혁이 서운한 눈으로 동생을 보았다.

이름 가르치려다 마음에 상처만 입었다.

그래도 오물오물 따라 하는 동생이 너무 예쁘다. 엄마를 쏙 빼닮아 요정처럼 생긴 데다 아홉 살이나 차이나는 여동생이 예쁘지 않으면 이상한 거지.

“오구구구국 이뻐라 우리 애기!”

“아까깍! 까르르륵!”

볼을 부비자 유진이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시합 덕분에 평소보다 일찍 집에 왔더니 엄마는 유진이를 맡기고 아빠가 계실 논에 가셨다. 어차피 일은 인부들이 다 할 텐데 얼마나 붙어계신 게 좋으면 그러실까. 솔로 인생 진혁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참말로 좋을 때여-.”

진혁이 내놓을 수 있는 비평은 그것뿐이었다.

부우웅-.

집으로 오는 차 소리가 들렸다.

최근 들어 외지인의 방문이 잦다.

‘또 땅 보러 온 사람들인가?’

서울에서, 인근 도시에서 돈 있는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시세의 몇 배를 쳐주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마다 진혁은 결사반대를 외쳤다. 아이의 반대를 아버지가 귀담아듣는 것도 어불성설인 세상이랄 수 있겠으나 손광연은 진혁의 비범함을 익히 알고 있었고, 자신도 매매 의사가 없었기에 거래가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가장 먼저 땅을 보러 왔던 절친 홍기준도 매매 절대 금지를 외치지 않았던가. 땅을 사고 싶다던 사람이 돌변하니 이상했지만 누구보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절친이었기에 손광연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하여, 외지인들은 아무런 수확 없이 돌아가야만 했다.

경기도 번호판이 달린 세단에서 정장 차림의 남자 두 명이 내렸다.

홀쭉이와 뚱뚱이.

카악- 퉤. 가래침을 뱉은 뚱땡이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야, 집에 니들뿐이냐? 아빠 좀 나오라고 해.”

평화가 순식간에 깨졌다.

진혁이 눈썹을 무섭게 일그러뜨렸다. 유진이에게 담배 연기가 갈까 몸을 돌리면서였다.

‘이 자식이?’

아빠를 맡겨두기라도 한 것처럼 내놓으라는 투 아닌가. 순박한 시골 아이일 거라 생각하며 대놓고 무시하는 것이겠지만 정도가 지나쳤다.

게다가 진혁의 영혼은 어린아이도 아니다.

진혁은 심장 언저리가 답답하고 숨쉬기가 거북했다.

‘허어-, 감히 누굴 함부로 나오라 마라 하는 거야?’

말이라도 예의 바르게 했다면 공손히 응대했을 텐데. 이놈들은 첫 단추를 지랄 맞게 꿰었다.

진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어른이라도 있다면 도와주셨을 텐데. 시선이 머무는 곳에 사람으로 보이는 물체는 없었다.

뚱땡이가 눈을 부라렸다.

“야, 어른이 말하는 거 안 들려?”

들려. 그러니까 소리 지르지 마. 가뜩이나 돼지 멱따는 소리 같은데 듣기 불편해. 어린놈의 자식이 싸가지없이. 진혁은 속으로 으르렁거렸다.

옛날 사람들이라 이러는 것이 아니다. 진혁은 21세기 서울에서도 이런 싹수없는 중개인들과 자산가를 많이 봤더랬다. 그래서 90년대 초에 이런 놈팽이를 보는 것이 새롭지도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진혁이 아니었다.

“으애애앵-.”

으르르-.

갑작스런 고함에 유진이가 울음을 터뜨리고 장군이가 이를 드러냈다.

빠득-!

부서질 듯 이를 악물었다. 감히 내 동생을 울리고 장군이를 화나게 하다니.

진혁은 오빠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유진이를 평상에 살며시 내렸다.

평상에 뛰어오른 장군이가 유진이 옆에 바짝 붙어 뺨을 핥으며 달랬다.

애먼 놈이 화풀이하듯 집을 둘러보며 뚱뚱보가 한마디를 더 뱉었다.

“애새끼들만 남기고 어딜 간 거야?”

애새끼들이라니. 지금 유진이에게까지 욕을 한 건가?

마치 머릿속에 붉고 검은 물감을 뿌린 듯 정념이 혼탁해졌다.

펄펄 끓는 물을 끼얹은 듯 머리가 뜨겁고 지끈거렸다.

치솟는 분노에 숨이 컥 막혔다.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진정할 필요를 느꼈다.

진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화를 꾹꾹 누르며 겨우 입을 뗐다.

“······안 계신데 그냥 가지······.”

“허! 그냥 가지?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따악-! 뚱땡이가 진혁의 머리를 후려쳤다.

반말처럼 나온 혼잣말, 진혁은 뚱땡이의 심정도 이해하는 바였다. 손이 보였으나 피하지 않았다. 아프지도 않았다. 단지 기분이 더러울 뿐.

‘그쯤 했으면 가라.’

진혁은 뚱땡이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대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장군이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으르르-, 알알알!

장군이가 뚱땡이에게 덤벼들었다. 족제비처럼 잽싼 움직임이었다.

하나 기겁한 뚱땡이의 발길질이 더 빨랐다. 장군이의 턱을 걷어찬 것이다.

“저리 가! 이런 개새끼가-!”

깨잉-.

그때였다.

“컥!”

진혁이 뚱땡이의 멱살을 잡아 비틀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움직임이었다.

‘용서 안 해.’

이모부의 발에 차여 죽었던 장군이를 떠올리고 말았다.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자에게 베풀 관용 따위는 없다.

진혁은 속으로 무수히 욕설을 퍼부었다.

서서히 손아귀에 힘을 가했다.

“감히 우리 가족에게 손을 대······?”

진혁의 잇새로 으르렁거리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컥컥-!”

“아이고! 야! 야! 학생! 참아라!”

홀쭉이가 달려와 진혁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진혁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거 놔. 이 뚱보 목젖 뽑히는 꼴 보기 싫으면.”

평생 사용할 일 없던 말이 진혁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진혁의 눈을 마주한 홀쭉이가 저도 모르게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서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정확히 장군이 똥 위였다.

“꺽-, 꺽······.”

뚱보는 옷깃에 목이 졸린 채 몸이 들려 까치발을 설 지경이 되었다.

기껏해야 열다섯 중학생으로 보이는데 무슨 팔 힘이 이렇게 무섭단 말인가. 씨름으로 유명한 동네라더니 씨름하는 녀석인가. 뚱뚱보는 창피함은 뒷전, 바지가 따뜻하게 젖는 걸 느꼈다.

뚱보의 눈동자가 하늘을 향해 돌아가자 진혁이 손을 풀었다.

마침내 진혁의 손에서 해방된 뚱보는 숨을 몰아쉬며 시골의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쉬었다.

“끄으으-, 꺼으흐-.”

진혁은 바닥에 주저앉은 뚱뚱보를 미동도 없이 내려보았다.

내 가족을 업신여기거나 함부로 입에 담는 놈은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양아치 놀이를 하려 드느냐. 속으로는 무수히 많은 말을 하고 있었지만, 진혁은 입 밖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불청객을 노려보는 것으로 축객령을 대신했다.

“장군이 괜찮아?”

아팠을 곳을 쓰다듬자 장군이가 진혁의 손을 핥았다. 심하게 차이지 않았는지 멀쩡해 보였다. 장군이가 다친 곳 없이 무사하다는 안도감에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후아, 놀랬네.’

놈들이 다시 찾아와 아빠에게 항의를 하든 말든 관심 없다. 아니, 다시 오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단단히 혼내주리라 마음먹었다.

가족을 업신여기는 말을 들었을 때와 장군이가 차였을 땐 그리도 쿵쾅거렸는데. 폭력적인 행동을 했음에도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이건 좀 의외네. 너무 많이 맞고 살아서 폭력에 무뎌진 건가?’

황급히 차에 올라 떠나는 놈들을 보며 진혁은 생각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달리기를 하며 틈틈이 예전에 익힌 무술을 사용해봤었다. 신기하게도 몸이 기억하고 있었기에 다시 수련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진혁은 유진이를 안아 들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다른 이웃의 시선은 감지되지 않았다.

본인도 놀랄 만큼 갑작스러운 행동이었다.

‘최선의 선택을 한 거야.’

어쩌면 자기만족일지 모른다.

따지고 보면 말 한마디 무례하게 했다고 죽이려 든 것 아닌가.

잠시 후회가 되었으나 부끄럽지는 않았다.

모르는 행인보다 내가 키우는 강아지가 더 소중한 법 아니던가. 그런데 낯선 자가 가족을 모욕하고 소중한 친구를 걷어찼으니. 진혁은 같은 일이 반복돼도 똑같이 대응하겠다 마음먹었다.

‘가족을 건드리는 놈은 가만두지 않는다.’

그리 다짐하며 몸을 돌려 동생을 안았다.

“유진이, 오빠 때문에 무서웠어?”

“오빠, 오빠.”

세상 물정 모를 여동생이 진혁의 뺨을 쓰다듬었다.

유진이의 얼굴을 보며 내심 안도했다.

특별히 놀라지는 않았는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진혁은 유진이가 방금 전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기를 바랐다.

오빠의 뺨을 마구 일그러뜨리며 즐거워하는 동생을 꼭 끌어안아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빠가 미안해.”

후회는 없으되 제 처신 때문에 평화에 금이 가는 기분, 진혁의 마음에 그늘이 졌다.

‘너무 혼란스럽다.’

이제야 인간 세상을 제대로 배우는 느낌이었다.

한때 저 자신만 챙기면 되었던 진혁에게는 이 또한 새로운 세계였다.

***

손진혁은 아직 어리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넓지만 아직 아이다. 어린이날 과학상자 5호를 선물 받는 어린이다. 아무튼 그렇다.

‘아이가 사고를 쳤을 땐 부모님 뒤로 숨는 거야!’

스스로 모든 난관을 헤치고 성공의 계단을 오를 수 있는 건, 돌볼 사람 없고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하는 사람일 거다. 전생의 자신처럼.

한참을 고심하던 진혁은 당당하게 아빠 등 뒤로 숨기로 결정했다.

“아까 낮에 논에 가셨을 때요······.”

저녁을 먹으며 낮에 있던 일을 꺼냈다.

폭력을 사용했다는 말은 뺐다. 스스로 비겁하게 느껴졌지만 엄마가 놀라지 않도록 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그래서 뚱뚱보의 무례한 언사에 대해서만 세세하게 말했다.

엄마와 아빠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뭐어-?”

“내 이놈들을 당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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