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 세상 밖으로 (4) >
“푸화아-!”
폐 가득 가두었던 공기를 힘껏 뱉어내며 무릎을 끌어올렸다.
육상을 따로 배울 기회도, 연습할 시간도 없었다.
그러나 진혁은 자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장군이와 달리기 시합을 했고, 호전적인 오골계 닭 존슨에게 돌을 던지고 도망치는 놀이를 했었으니. 오골계에게 엉덩이를 쪼이며 연마한 순간 폭발력이 화려하게 빛을 발했다.
김은정네 도사견이 목줄을 끊고 달려들었던 때도 떠올려봤다. 쇠사슬을 끊고 최미경에게 돌진하던 도사견과, 혼백이 빠져나간 것처럼 하얗게 질렸던 최미경. 진혁은 저도 모르게 돌을 던져 도사견의 어그로를 가져왔었다.
물리면 죽는 그 순간을 떠올리니 다리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습후습후-.”
이전 생에 우사인 볼트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인상 깊게 봤었다. 과거에는 ‘겨우’ 100미터를 달리는 것이니 호흡을 참는 주법도 있었으나 현대 육상에서는 신선한 산소 공급을 위해 호흡을 빠르게 가져간다는 내용.
진혁은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볼을 팽창시켰다가 홀쭉하게 만들기를 반복했다. 머리가 약간 띵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팔과 다리에는 힘이 넘쳤다. 그렇게 몇 걸음이나 달렸을까. 이제야 발동이 걸렸는데 결승선이 코앞이다.
“푸후우-!”
가슴을 쫙 펴서 내밀며 두 팔을 날개처럼 뒤로 뻗었다. 스포츠 하이라이트 보니 육상선수들은 다들 이렇게 하더라.
차칵-!
차칵- 차카칵-.
네 명의 선수가 모두 결승선을 통과했다.
감독관은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1등과 2등의 거리 차가 큰 탓이었다. 선수간 실력 차가 큰 단거리 예선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4조는 뭔가 이상했다.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한 선수가 너무 빨랐다.
감독관 뒤에서 대기하던 기록원이 채근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감독관님, 기록 불러주세요.”
“예? 아, 예! 기록 부릅니다. 1등부터요-.”
결승선에 있던 감독관이 순서대로 기록을 불렀다.
먼지가 들어갔는지, 아니면 충격을 받은 탓인지 눈앞이 흐릿했다.
눈을 뻑뻑 비빈 후 스톱워치를 확인했다.
“1등 기록은-.”
“네에-.”
받아 적으려던 기록원이 멈칫했다.
고개를 들어 감독관을 바라봤다. 감독관도 기계적으로 기록을 읊다가 그제야 자기가 읽은 숫자가 이상했는지 재빨리 스톱워치를 확인했다.
‘12초 09?’
오랫동안 많은 학교를 찾아다니며 모래땅에서 주력 측정을 해왔다.
처음 보는 기록이었다.
재빨리 왼손에 든 파일에서 선수 정보를 확인했다. 예선기록은 12초 12. 예선 기록은 오차가 클 수밖에 없다. 그나마 시비가 없는 이유라면 동일한 기록관이 측정했기 때문이랄까.
‘예선 기록도 준수하네.’
1등으로 들어온 선수의 신발을 살폈다.
평범한 운동화였다. 육상선수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2년 정도 꿇은 앤가?’
체격이 너무 좋지 않은가.
아니, 그럴리 없다. 대회 참가 기준은 학년이 아닌 연령이다. 이미 손진혁의 생년월일을 확인한 터였다.
학교 이름을 확인해봤다.
‘어동초등학교?’
어디 있는지 듣도 보도 못한 학교 이름이다.
뭔가 수상하지만 수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는 수상한 선수였다.
“감독관님, 그 선수 뭐 문제 있어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감독관을 향해 태양초등학교의 김영태 선생이 아는 체를 했다. 여러 차례 대회를 치르며 안면이 익은 사람이었다. 김영태는 손진혁의 선수 정보란에 감독관의 시선이 너무 오래 머문다고 생각했다.
진혁의 질주를 지켜본 다른 학교의 교사들도 기록이 궁금해 몰려왔다.
진혁의 선수 신상정보를 재확인한 감독관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아뇨······. 뭐, 평범하네요.”
이번에는 감독관과 김영태, 둘 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범하다는 말이 이렇게 이상한 말이었던가?
이상하지 않은 말인데 이상하게 들렸다.
***
굳이 승부나 기록에 연연하지 않았다. 재미있어서 달렸고 다른 선수들과 함께 뛴다는 것이 진혁을 더 즐겁게 만들었기에. 그저 달렸을 뿐이다.
어릴 때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허구한 날 뛰어다닌 것이 빛을 보는 것일까. 아니면 원래 달리기에 소질이 있는데 옛날에는 잘 먹지 못하고 힘이 없어서 어릴 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것일까.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때는 제법 힘이 붙었고, 특전사에 입대해서는 강철 근육을 만들었었다. 그 몸이 전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했었지.
진혁이 허리에 손을 얹고 잠시 옛 생각에 잠겼을 때, 감독관의 진행 안내가 들려왔다.
“30분 후 결승 진행합니다. 손진혁, 박지범, 염병택, 조슬찬. 이상 네 명.”
한 번 더 뛰어야 한다. 진혁은 손목과 발목에 힘을 빼고 가볍게 털며 출발지점으로 걸었다. 호명된 다른 선수들도 그 뒤를 따랐다. 한 친구가 진혁의 옆으로 다가왔다.
“와-, 너 겁나 빠르더라!”
염병택이라는 아이였다. 진혁을 제외한 세 명은 모두 파란색 유니폼을 입었는데, 유니폼 상의에 흰색으로 ‘태양’이라고 마킹되어 있었다.
과거에 같은 학교를 다녔으니 낯이 익을만한데, 학생도 많고 학급이 많아서였는지 기억이 날 듯 말 듯 가물가물한 얼굴이었다.
“손진혁이다.”
진혁이 손을 내밀었다.
염병택이 어색한 눈빛을 띄더니 이내 진혁의 손을 잡았다. 하긴, 초딩들이 초면에 악수하며 통성명하는 것도 우습겠지. 그래도 이만한 인사법이 없지 않겠나.
“나는 박지범이야.”
“반갑다. 나는 조슬찬이여.”
다른 아이들과도 악수를 나누었다.
결승 진출자들은 땅바닥에 털버덕 앉아 휴식을 취했다.
‘내가 머물던 시대의 초등학교 선수들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트랙을 걸으며 다리를 풀거나, 전담 코치가 옆에 붙어서 뭉친 근육을 주물러줬으려나. 진혁은 서로 어깨와 다리를 풀어주는 태양초등학교 아이들을 보며 자신만 혼자 왔음을 깨달았다. 그러다 누군가의 크고 억센 손이 어깨에 내려앉았다.
“우리 진혁이가 달리기도 이렇게 잘허는 줄 물렀네이-. 쫌 쉬었다가 한 번 더 뛰고 선생님이랑 짜장면 먹으러 가자이-?”
“네.”
순박한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
예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손길이다. 시험 점수가 잘 나왔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준 선생님은 있었지만, 달리기 한 번 했다고 마사지라니. 죽었다 깨어나니 대우가 달라지는구나.
“다리는 괜찮은 겨?”
“네. 쌩쌩해요.”
늘 하던 달리기다. 전력 질주 한 번에 피로가 쌓이는 느낌은 없었다. 호흡마저 금세 안정되지 않던가. 그래도 진혁은 종아리와 허벅지를 두 손으로 마사지했다. 팔과 어깨를 이리저리 움직여 상체 스트레칭도 빼놓지 않았다.
‘명상도 하고 호흡도 해야지.’
가부좌는 필요 없었다.
급히 호흡을 하느라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공기를 내보냈다. 그리고 천천히 새 공기로 채웠다. 그러자 허리부터 올라온 전율이 가슴과 목을 거쳐 뺨을 간질였다.
태양초등학교 아이들은 진혁에게 뭔가 말을 걸어 보려다가, 진혁을 보호하는 박재승 선생의 눈에서 알 수 없는 살기를 읽고는 눈을 돌렸다. 그 나이에 어른을 대한다는 게 가뜩이나 쉽지 않은데, 시골에서 온 저 아저씨는 월남전 참전 용사처럼 얼굴까지 시커멓다.
‘코치가 저렇게 무서우니께 쟤가 저렇게 잘 뛰는 모양여-. 얼마나 조뺑이를 쳤겄어?’
조슬찬이 수군거리자 다른 두 아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을 향해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다 진혁의 평범한 운동화를 보고는 아연실색했다.
태양초등학교 선수들은 모두 스파이크화를 신고 있었다.
***
평범하게 결승 경기를 마쳤다.
“단거리 대표는 손진혁과 박지범. 400미터 계주는 염병택, 조슬찬까지.”
진혁의 결승전 기록은 12초 05.
비공식이었으나 충남 초등부 신기록이라고 했다. 아직까지 12초의 벽을 깬 선수가 없다는 말도 감독관은 덧붙였다.
태양초등학교 에이스라는 박지범의 기록이 13초 03이었으니, 진혁이 얼마나 빠른지 알 수 있었다. 다른 선수들은 한참이나 앞서가는 진혁의 등을 보며 이를 악물고 뛰었으리라. 엉덩이를 봤으려나. 세 명의 닭 존슨.
‘다른 사람과 함께 뛰니 나도 더 빨라지는 것 같네.’
그 사람의 주력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고. 진혁은 러닝메이트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이미 최종 4인의 기록이 나왔음에도 결승을 한 번 더 하는 이유도 그와 다르지 않았으니. 가장 잘 뛰는 네 명을 붙여 기록을 더 뽑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기준 기록을 통과하지 못하면 도 대회에 나갈 수 없으니까.
초등부 시합이 끝나고 중학교 선수들의 경기가 이어졌다.
첫 번째 조 경기를 지켜본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무려 세 살이나 많은 선수들인데, 배울 것도 없었고 자신보다 빠르지도 않았다.
태양초등학교 체육 교사인 김영태가 진혁을 찾았다.
“계주 연습을 해야 할 텐데, 매주 금요일 오후에 태양국민학교로 올 수 있겠니?”
“네.”
어쩐 일로 진혁이 대답을 했지만,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최미경 어린이가 봤다면 잘했다며 엉덩이를 두들겼겠지.
슬슬 관광지 개발붐이 불고 있었다.
도로는 몇 년 사이 몰라보게 확장 및 포장되었고. 진혁의 마을에도 버스가 하루 여섯 대나 배차되었다. 동네 친구들은 모두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하게 됐으니 진혁은 그 변화를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물론, 진혁은 여전히 뛰어다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제 30분 정도 버스를 타면 읍내에 나올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개인 연습도 해야 할 텐데.
러닝메이트가 없어서 좀 아쉽다. 최미경 어린이나 육성찬 깐돌이는 동기부여가 없는지 달리기를 싫어하는 거 같았다.
‘장군이 녀석이 빠르긴 한데 반칙을 너무 많이 해.’
힘에 부친다 싶으면 논밭을 가로지르고, 낑낑거리며 다친 척을 하다가 걱정되어 달려가면 냅다 튀곤 한다.
페어플레이 정신 따위 개밥에 말아먹은 녀석 같으니.
아무렴, 시고르자브종에게 스포츠견십을 기대하긴 어렵겠지.
‘양아치.’
장군이는 별명이 많다.
***
짜장면. 이전 생에는 고등학교에 가서야 친구가 사준 덕에 맛볼 수 있었다. 여섯 살 때도 엄마 손을 잡고 시장에 왔다가 먹어보긴 했지만, 다락방에 살 때는 얻어먹기 힘든 음식이었다.
“우리 진혁이 곱빼기 먹을쳐?”
박재승 선생의 히죽거리는 웃음도 정이 들려 한다. 웃으니까 하얀 치아와 대비되어 얼굴이 더 검게 보여 무서운 얼굴인데, 푸근한 성격이라는 걸 알게 되니 그마저도 정다워 보였다.
“전 보통이면 돼요, 선생님.”
“왜애-, 등치두 큰 눔이 한창 클 쩍인디 많이 먹으야지이-.”
“그럼 곱빼기 먹을게요.”
선생님의 호의가 고마워 선뜻 곱빼기를 주문했다.
중국집 안에 진동하는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오늘만을 기다렸다는 듯 위장이 시위를 했다. 당장 불맛이 배고 돼지기름과 춘장이 어우러진 짜장면을 넣어주지 않으면 뱃가죽을 찢고 나가겠다며 아우성쳤다.
쯔럭쯔럭-.
젓가락이 짜장면 위에서 춤을 췄다.
윤기가 흐르다 못해 찬란해 보이기까지 하는 면발과 양념이 섞이고.
쭈루룩-.
‘크으-, 끝내주는구먼!’
몸이 달라서 그런가? 성인일 때 먹던 맛과 너무도 판이했다.
쩝쩝쩝-.
입가에 양념이 묻거나 말거나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
“진혁이, 여기 다꽝도 먹어이-?”
“웨-.”
입안 가득 짜장면을 넣고 대답했다.
진혁의 집은 지역 어디를 가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부자다. 그런데 진혁이 읍내 학교로의 전학을 거부했기에 계속 시골에 살았고. 엄마가 읍내에 나오는 걸 두려워하는 탓에 이런 외식은 쉽게 할 수 없었다.
‘너무 맛있다.’
엄마 한유영의 음식 솜씨가 좋았기에 외식에 대한 욕심이 생기지도 않았지만, 이전 생에 혼자 살며 얼마나 질리도록 식당밥을 먹었던가. 그런데 이제 생각이 바뀌었다. 마시듯이 짜장면을 밀어 넣으며.
‘이제 유진이도 짜장면 먹을 수 있으려나?’
부모님도, 여동생도 함께 나와 시장도 구경하고 소풍도 가고 싶다. 혼자만의 시간이 많아 저만의 세상에 갇혀 살았던 손진혁, 이제 가족과 함께 나오고 싶어졌다.
세상 밖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