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 세상 밖으로 (3) >
***
“엄마, 아빠.”
“응? 왜 그래, 아들?”
이제 네 살이 된 여동생 유진에게 밥을 먹이던 엄마도, 딸을 보며 웃던 아빠도 화들짝 놀라 진혁에게 고개를 돌렸다. 돈가스 사태가 촉발한 7일 전쟁 이후로 웬만해선 먼저 입을 열거나 말을 꺼내는 일이 없던 아들이었기에.
“저 다음 주에 시합 있어서 태양중학교에 가요.”
“왜? 이번엔 무슨 경시대회니?”
아빠 손광연은 또 상장이 늘겠구나, 생각하며 물었다.
모든 과목에 우수해서 수학, 과학, 미술, 음악, 컴퓨터까지. 나가는 대회마다 상을 휩쓸어오는 아들이었다. 진혁의 부모님은 아들의 참가 과목이 궁금할 뿐, 결과는 궁금해하지 않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육상대회 있어요.”
“흐하하하하!”
아빠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닌가? 수학, 과학에 미술, 음악으로 모자라 이제 육상대회라니. 너무나.
기뻤다.
“장하다! 우리 아들!”
“호호, 아빠를 닮아서 다 잘하나 봐요.”
엄마의 1순위는 언제나 남편인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도 슬쩍 남편을 치켜세우다니. 열세 살에 이미 엄마만큼 키가 커버린 아들을 보며 진혁의 부모는 행복감에 젖었다.
“그래, 뭐 필요한 건 없고?”
그래서 불렀습니다, 아버지.
역시 아빠는 진혁의 생각을 읽는 재주가 있는 사람 같았다.
“운동화요.”
“오, 그렇지. 스파이크화 필요하겠네?”
손광연은 상식과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었으니. 단거리 육상에 어떤 신발이 필요한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훌쩍 커버렸지만 여전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들인데 신발 가게인들 못 사줄까.
“그거까진 필요 없고요. 지금 있는 운동화는 모래땅에서 좀 미끄러워서요.”
선수도 아닌데 굳이 스파이크화까지 필요할까 싶었다. 김영태 선생과 기록 측정할 때도 발 디딜 때마다 약간씩 미끄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찝찝한 기분이 싫어 접지력 좋은 운동화를 생각했을 뿐이었다. 기왕 나가는 대회 후회없이 치르고 싶었다.
“그래. 내일 아빠랑 사러 가자. 요즘은 아식스나 라피도가 좋은가?”
어찌된 영문인지 진혁보다 아빠가 더 신나 보였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인가, 하고 진혁은 생각했다. 이전 생에서 부모가 되어 보지 않았기에 어떤 기분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아빠가 좋아하시니 나도 기분 좋네.’
축구나 야구 같은 운동이었다면 다친다며 못하게 말렸을까? 물론, 가까운 곳에 그런 운동부가 있는 학교도 없지만 진혁은 부모님 마음이 궁금하다.
운동하는 아들 좋아하시면 씨름이라도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태양군은 씨름으로 유명했다.
***
읍내의 태양초등학교.
“김영태 선생. 내일이 군 육상 대표 선발인가?”
“네, 교감 선생님.”
“마라톤은 도 대표가 우리 학교에 있고, 단거리도 우리 학교에서 나오겠지?”
땅덩이가 넓은 서해안 인접 지역인지라 도처에 학교와 분교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인구는 소재지인 읍내에 모여 살았으니. 당연히 학생의 수도 태양초등학교가 월등했다. 학생이 많다는 것은 곧 가능성을 의미했다. 재능있는 선수 배출의 가능성.
“한 명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단거리는 행정구역별로 두 명씩 출전한다. 그 두 명은 기록으로 뽑는데, 기록경기이기에 심판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고, 학교에서 힘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이는 제 학교 학생이라고 특별히 발탁할 수가 없다는 뜻이었으니.
“한 명만? 왜? 어디 두각을 보이는 학교가 있나?”
김영태가 교감 선생에게 기록지를 내밀었다. 총 16명의 선수가 군 본선에 올라와 있었다. 100미터 기록순으로 정리한 명단이었는데 그중 최상단에 있는 학생의 이름이 눈에 익다.
“손진혁?”
이마가 훌렁 까지고 나까무라처럼 눈이 찢어진 교감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손진혁? 경시대회 그 손진혁?”
“예. 맞습니다.”
“뭐? 십이 초 일이? 이거 중학교 기록 아냐?”
다나까처럼 눈썹이 없는 교감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김영태가 작은 소리로, 그러나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중학교에서도 쉬운 기록은 아니지.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일단 아무 말이나 뱉고 보는 교감의 말버릇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상사라고 김영태는 들이받지 않았다.
“두 번 쟀습니다.”
김영태는 더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짧게 답했다.
“트랙이 짧았던 거 아냐?”
“끝나고 한 번 더 재봤습니다. 100미터 맞아요. 운동장은 제법 크더라고요.”
인구가 없다뿐이지, 땅은 많은 게 시골 학교다. 땅이 많으니 운동장이 넓을 수밖에. 운동장 한편에 소도 몇 마리 어슬렁거리더라.
김영태는 다시 한번 손진혁의 기록을 확인했다. 분명 제 손으로 적은 수치인데도 머리로는 도무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였다.
「12초 12」
전문 트랙에서 스파이크화를 신고 출전하는 선수가 보이는 기록이었다. 그것도 전국규모 대회에서.
“내일 우리 학교에서 진행하나?”
“태양중학교에서 합니다.”
군 대표를 선정하는 본선은 중등부 선수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진행한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나눠서 진행하기 번거로우니 몰아서 하는 거다. 그게 편하니까. 대개의 일 처리가 그런 식이었으니, 학생들의 컨디션보다는 원활한 행정처리를 위한 안배가 우선이었다.
교감 선생은 아쉬움에 쓴 입맛을 다셨다.
경시대회를 휩쓰는 데다 달리기까지 잘한다는 괴물 같은 초등학생을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교장 선생님이 전학시키려고 애를 쓰셨다던데.’
기껏해야 초등학교인데 학생 스카우트가 말이 되느냐 할 수도 있겠지만 학생의 성적이 곧 학교의 성적이다. 온갖 경시대회 수상 경력이 쌓이면 교육청에서 학교를 보는 눈도 달라진다. 학교가 유명해지면 학생들이 모여들고 학생이 늘면 지원 예산도 증가한다. 씨름부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렇듯 모든 학교 행정은 학생의 성적, 학생을 유치한 학교의 실적에 맞춰져 있었다.
아무튼 태양초등학교의 손진혁 전학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으니.
학생이 거절했다. 학생의 부모는 자식 의견이 중요하다며 일언반구 대꾸도 없었고.
태양초등학교는 3년간 온갖 경시대회 최우수상을 배출하지 못했다. 어동초등학교라는 변두리 시골 학교의 학생 한 명이 휩쓸어 갔기 때문이다.
스즈키처럼 날카로운 눈매의 교감 선생이 진혁의 본질을 꿰뚫는 말을 중얼거렸다.
“괴물 같은 놈······.”
***
분명 봄인데. 가을이라 해도 믿을 만큼 하늘이 푸르렀다. 플라타너스 나무는 벌써 어른 머리통만 한 이파리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전 생에서 진혁이 그토록 좋아했던 나무다. 아름드리나무가 언제나 그늘을 만들어 제 몸을 가려줬기에 진혁은 그림자처럼,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지낼 수 있었다.
곧 있을 체육대회를 앞두고 새로 정비해서 태양중학교의 운동장은 깨끗했다. 뭐, 모래땅이라는 건 같았지만.
진혁은 운동장 구석의 씨름부 연습장을 서성였다.
‘여기쯤이었지.’
체육대회 때마다 타이어를 깔고 앉아 책을 보던 곳.
소풍이나 수학여행 때면 혼자서 씨름 훈련용 튜브를 당기며 시간을 보내던 곳이다.
점심시간마다 앉아 시간을 보냈던 그네가 봄바람에 흔들거렸다.
열세 살인 지금의 진혁보다 왜소한 중학생 손진혁이 거기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네에 앉아있는 모습.
진혁은 조심스럽게 그네 줄을 잡았다. 천천히 뒤로 당겼다가 놓았다.
중학생 손진혁이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에 그려진 시퍼런 멍과 생채기에, 현재의 진혁은 심장 어림에 멍울처럼 흉터가 만져졌다.
‘그때의 너는 얼마나 무서웠니. 얼마나 외롭고 배고팠니. 응? 진혁아.’
이제 행복한데, 평생 소원이었던 가족을 다시 만났는데.
상처는 아물어도 영혼에 남은 흉터는 지워지지 않는 것인가.
진혁은 제 과거가 존재하다 사라진 그네에 가만히 앉았다.
앞을 보고 나아가야 한다고들 말한다.
어떤 이는 뒤를 돌아보며 반성해야 발전할 수 있다고도 했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다만 진혁은 전진본능에만 충실한 존재는 올무에 걸린 야생짐승뿐이라고 생각했다. 덫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닫고도 전진할 수밖에 없는 본능. 그리하여 결국 숨통을 스스로 옥죄어야 하는 슬프고 어리석은 운명.
‘과거의 기억이 없었다면 엄마, 아빠도, 유진이도 구하지 못했겠지. 장군이도 살아있지 못했을 테고.’
백치처럼, 새로 쓰는 도화지처럼 과거의 악몽을 되풀이했을 거다.
현생이 만족스럽다고 잊히지 않는 과거를 억지로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혁은 과거의 생채기가 아려도 곱씹으며 살기로 했다. 그저 안아주듯 가만히 가슴을 문질러 예전의 손진혁을 위로했다.
‘넌 내가 책임질 흉터다.’
너 역시 나였다.
***
한창 성장기였는데 배를 곯는 날이 많아 씨름부를 기웃거렸었다. 씨름부는 저녁 훈련이 끝나면 고기 회식을 시켜주는데, 진혁은 씨름부에 가입해서라도 고기가 먹고 싶었다.
물론 거부당했다.
- “너는 몸이 너무 잘다. 깡도 없어 보이고.”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학부모 후원. 운동부에 가입하려면 학교나 교육청의 지원금만으로는 부족했으니. 특히나 유명한 씨름부 덕분에 강원도와 제주도에서도 유망주가 전학을 오는 태양중학교는 학부모들의 지원이 빵빵했다. 씨름 코치와 감독들은 뒷돈을 받아 고급 승용차를 사기도 했다. 코치와 감독은 진혁에게서 그 어떤 후원도 기대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신우성은 식육점집 아들, 이승훈은 어촌계장 아들이었지.’
이전 생에 씨름으로 학교의 이름을 드높였던 친구들이다. 이변이 없는 한 중학교에 진학하면 그 친구들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
운동하느라 학업에 소홀할 수밖에 없어 진혁이 그들의 공부를 많이 도와줬었고, 녀석들은 친구가 없는 진혁을 병풍처럼 보호했다. 씨름부에서 나온 간식도 챙겨줬다. 신우성과 이승훈과는 사회에 나간 후에도 우정을 이어갔다.
내년이면 중학교에 진학한다. 진혁은 친구들을 다시 만난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뛰었다. 옛 기억과는 별개로, 부모님을 무사히 구한 이후 슬픔은 저만치 밀어낸 지 오래였다.
***
주섬주섬-.
“야, 손진혁. 떨지 말고, 이이? 총소리 들리먼 냅다 뛰는 겨. 알었지이?”
“네.”
인솔 교사로 온 박재승 선생이 진혁의 셔츠를 반바지 속으로 넣어 입히며 말했다. 코흘리개 어린 아들 챙기는 아빠의 모습 같아서 진혁이 피식 웃었다.
소년체전 출전이라니.
비록 예선일 뿐이지만 그마저도 어동초등학교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여, 박재승이 긴장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목소리마저 떠는 박재승 선생을 향해 야무지게 대답한 진혁이 대기 구간으로 들어갔다.
“3조 준비.”
16명이 네 명씩, 네 개조로 예선을 진행했다.
1차에서 기록으로 4명을 선발하고 30분 휴식 후 결선을 치른다. 최종 4인은 무조건 체전에 참가한다. 2명은 단거리 대표로, 나머지 2명도 계주 주자로 참가하게 되는 것이다.
학교에서 급히 준비해준 분홍색 반바지와 유니폼이 낯설다.
진혁은 박재승 선생이 팽팽하게 집어넣은 셔츠를 바지 밖으로 조금 꺼내 헐렁하게 만들고 앞 조 아이들의 출발 준비 자세를 유심히 지켜봤다.
‘아, 그렇지. 체중이 앞으로 쏠리도록 숙이는 게 좋겠지.’
이전 생에도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기에 스포츠 중계 하이라이트를 즐겨 찾아봤더랬다. 총소리가 울리고 경주마처럼 뛰어나가던 흑인과 백인 선수들의 폭발력, 터질듯한 허벅지와 볼륨 주사를 놓은듯한 삼각근. 그에 매료되어 얼마나 운동을 했던가.
“4조 준비.”
비록 그런 선수들처럼 전문 트랙에서 달리는 건 아니지만, 진혁은 자신이 육상선수가 된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시골 중학교의 텅 빈 계단식 콘크리트 구조물은 올림픽 주경기장으로 변했고, 빈틈없이 자리한 관중이 보내는 응원의 함성이 들리는듯했다.
“제자리에-.”
앞 조 아이들을 관찰하며 익힌 대로 미리 자신에게 맞게 조절한 스타팅블록에 발을 얹었다. 그리고 손을 적당히 벌려 출발선 안쪽에 붙였다. 바닥에 댄 무릎을 찌르는 모래 알갱이가 신경 쓰이지만 참기로 했다.
자리를 잡은 아이들은 옆 레인에 슬쩍 눈길을 줬다.
진혁은 시선을 느끼고 눈이 마주친 아이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아이는 이상하리만치 깊은 진혁의 눈동자에 당황하면서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선수들이 준비를 갖추자 다음 신호가 떨어졌다.
“차려어-.”
선수들이 일제히 다리를 폈다.
다리를 펴니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스타디움의 관중들이 숨을 죽였다.
긴장되는 건 아닌데.
꿀꺽-.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후웁-풉.
숨을 들이쉬고, 3분의 1만 내쉬다가 멈췄다.
이제 곧 총이 울리리라.
“고개 숙여-.”
누군가 총을 본 모양이다.
경기 룰에 익숙지 않은 아이들에게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었다. 진혁도 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었기에 비난할 마음은 없었다.
“차렷-.”
파울 아닌 파울에 의해 다시 준비 신호가 내려졌다.
후웁-.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조차 흐르지 않는 듯한 고요가 찾아왔다.
짜아악-!
종이 화약 격발음이 대기를 찢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