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 세상 밖으로 (2) >
***
우편물을 정리하던 서무실장이 뭔가를 발견했다. 실장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한 명뿐인 서무직원이었다.
체육관련 공문이었기에 유일한 체육선생인 박재승을 찾았다.
“박재승 선생님, 공문이 왔는디유?”
“어디 봐유.”
부리부리한 눈매의 초콜릿 광대근을 가진 박재승 선생이 보기 드문 우편물에 관심을 보였다. 야만전사 같은 외모와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말투였다.
“뭐라는 소리유 이게?”
“이이, 이게 그러니께 뭐여, 그······. 5월이 충청남도 소년체전을 허는디-, 군을 대표헐 선수를 뽑을라니께 운동부가 웂는 시골 핵교이서두 선수를 보내라-, 그 말이구먼 이게.”
“운동부가 웂는디 뭔 선수를 보낸대유? 씨름부두 웂구, 축구부두 웂구.”
“육상은 혼자서두 허니께유-.”
“평범헌 학상덜뿐인디 누굴 내보낸대유?”
“평범헌 애들헌티두 기회를 주겄다는 소린디 누굴 내보내든 뭔 상관여어?”
까닭 없는 소리 허구 있어. 박재승이 웃으며 말했다.
“이이-, 그 누구여 걔. 공부 잘허구 키 큰 애 내보내먼 되겄네. 회장 말유-.”
“걔빼끼 웂지 뭐.”
손진혁.
모두가 아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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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초중순이면 봄볕과 온기 낙낙한 해풍을 받고 삘기가 올라온다. ‘띠’라는 풀의 어린싹이다. ‘삐비’라고도 불리는 이 싹 안에는 부드럽고 달큰한 맛이 나는 하얀 속살이 숨어 있다. 군것질거리를 손쉽게 접하게 된 지금도 시골 아이들에게는 반가운 봄 손님이었다.
‘엄마랑 유진이 줘야지.’
매일같이 뛰어다니는 진혁도 삘기가 올라올 때면 걸어서 집에 간다.
매의 눈으로 길가와 논둑을 샅샅이 훑는 거다. 초록색 갑옷 안에 꼭꼭 숨어 새하얀 속살을 숨긴 녀석들을 사냥하며.
집중하면 삘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아직 여러 풀싹이 돋지 않은 시기. 거뭇한 땅과 갈색 풀, 그리고 초록색 싹이 선사하는 색채 대비 덕분이었다.
“진혁아, 많이 뽑았어?”
저 과도기 청소년 최미경이 또 시작이다.
진혁의 손에 한 움큼 들린 걸 뻔히 보면서도 묻지 않나. 사냥감을 포착한 개똥지빠귀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은 연신 삘기를 질겅거리며.
머리에 바가지 쓰고 산딸기 따던 버릇 어디 안 간다.
도시에서 태어났다면 껌을 씹었을 거야. 진혁도 질세라 눈을 마주 가늘게 떴다. 그러나 눈싸움으로 최미경을 이길리 없다.
‘에휴-, 오늘도 털리겠네.’
누구보다 빠른 진혁이지만, 최미경의 턱은 진혁의 손보다 빠르다.
뽑는 속도보다 먹어치우는 속도가 빠르다는 뜻이다.
순순히 삘기를 상납하며 진혁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 어린이는 과도기가 지나면 소로 변하는 건 아닐까.
“절반만 줘. 유진이 준다며.”
아이고, 너그러우셔라. 다 뺏지 않는 걸 보면 최미경은 역시 좋은 친구다.
뭐, 다른 친구가 달라고 했어도 줬을 거다. 애들 아닌가.
‘어른이 양보해야지.’
채흐응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몸을 사려야 하는 이유도 있다. 결과가 나오려면 한 달 이상 걸린다고 했다. 남의 똥쓰를 줬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길 바랄 뿐.
진혁은 마중 나온 장군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 집에 도착했다.
삘기를 껍질째 물로 헹궜다. 속살은 껍질 덕분에 깨끗하겠지만 혹시 모르니 동생을 위해 씻는 거다.
평상에 앉아 하나씩 껍질을 벗겨 동생에게 건넸다.
처음에는 입에 넣어주려 했는데 조금 컸나 보다. 유진이는 제 손으로 적당한 크기로 똑똑 끊어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진혁은 동생이 천재일 거라 생각했다. 다른 아기들은 통째로 집어넣고 주먹으로도 밀어 넣지 않던가. 그러다 목도 막히던데 유진이는 깍쟁이처럼 조심조심 먹었다. 단물만 먹고 뱉었지만, 아무튼 오빠 눈에는 천재성으로 비쳤다.
아기에게는 위험할 수 있다던 엄마도 유진이가 먹는 모습을 보고는 아기답지 않다며 놀라는 눈치였다.
유진이는 달큰한 맛이 좋은지 오빠를 보며 웃어주는 걸 잊지 않았다.
“이히-.”
아직 유치도 아직 다 나지 않은 동생인데. 눈이 사라지도록 웃으며 잇몸 미소를 지으니 진혁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기들 이렇게 웃는 걸 일컬어 엄마는 못난이 웃음이라고 했다. 정말 못난이처럼 웃는데, 세상에서 가장 예쁜 못난이다.
진혁도 덩달아 못난이가 되어버렸다.
“느허허허허-. 유진아, 맛있어?”
유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앉은 채 엉덩이로 바운스를 탔다. 정말 신나고 기분이 좋을 때 보여주는 동작이었다. 그 리듬을 따라 진혁도 속이 울렁거렸다. 슬프지 않은데도 가슴이 찡하다니. 진혁으로서는 참으로 낯설고 신기한 현상이었다.
‘천천히 컸으면 좋겠다.’
어린아이로 돌아온 후, 진혁은 시간이 지루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런 동생과 함께라면 시간이 아무리 느리게 흐른들 어떠랴. 가족이 함께 있으니 이대로 시간이 멈춘대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유진아, 춥다. 이제 집에 들어가자.”
“녜-.”
동생을 번쩍 안아 들고 집에 들어섰다.
어느 집인지 멀리 빈 밭에 콩깍지 태우는 냄새가 구수하다.
***
한 해 농사의 본격적인 시작을 앞두고 손광연은 시간을 쪼개 쓰고 있었다.
주판알을 튕기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장부에 뭔가를 적었다. 뭐라뭐라 중얼거리며.
‘바둑 두자는 말씀도 안 하실 정도면 집중력이 엄청나시구나.’
진혁의 눈에 비친 아빠는 일 자체를 즐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깨너머로 훑어본 장부에는 논과 밭 마지기 수, 필요한 장비 대수, 투입할 인력과 날짜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으앗! 쉬 마려워! 싼다아아앗! 갈!”
“······.”
엄마가 안 계실 때면 사람이 확 변한다.
아빠가 오두방정을 떨며 후다닥 화장실로 달려간 사이, 진혁은 장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혹시라도 착오가 있다면 넌지시 묻는 척하며 바로잡아줄 요량이었다. 아무렴, 무릇 회귀자라면 지식을 활용해 과거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배웠다.
진혁의 자만이었다.
손광연은 평범한 농부가 아니었다.
‘아빠 문과였던 거 맞아?’
자기도 문과였던 건 생각도 않는 진혁이었다.
과거 세인중공업에 근무하며 공사계획과 진도표를 비교하여 공정관리를 하고, 공정률을 산출하던 업무를 했었다. 토목, 건설, 기계, 전기 등 공사 간 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율하여 일정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하는, 공사현장의 보이지 않는 손 역할이었다. 현장에 따라서는 가장 힘 있는 실무자이기도 했다. 권한으로 스케줄 변경을 할 수 있으니.
‘나도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복잡한 공사 계획을 농사일에 그대로 대입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나, 아빠가 짠 계획은 완벽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과거의 기상정보까지 준비해 만약의 변수에 대비한 주석도 달려 있었으니. 누가 농사를 이렇게 기획의 수준으로 올려서 수행할 수 있을까.
‘아깝다.’
농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골에서 썩기 아까운 인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런 수준이니 부농이 되었을 것이고.
‘여긴 계산이 살짝 안 맞네. 아빠가 써둔 산식에 의하면 인부가······.’
촤아-.
화장실에서 영농 천재가 손 씻는 소리가 들렸다.
진혁은 재빨리 지우개로 지우고 수치를 다시 기입했다.
잠시 후 손광연이 휘파람 불며 너스레를 떨었다. 손을 탁탁 털면서였다.
“휘이-. 역시 내 계획은 완벽해!”
진혁도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에 사소한 오차는 있어도 아빠는 크게 조언이 필요 없는 사람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회귀했음에도 재능과 지식을 발휘할 곳도 없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니.
진혁은 발톱이나 마저 깎기로 했다.
‘내성적인 내 발톱. 한 번 뽑으면 이쁘게 나려나?’
위험한 상상을 하며.
***
다음날, 3교시에 박재승 선생이 진혁을 운동장으로 불러냈다.
운동복 차림의 30대 중반과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영태 선생이네?’
모를 수가 있나. 과거에 읍내 태양초등학교로 전학 후 체육시간마다 본 사람인데.
박재승 선생이 설명했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우리 진혁이가 달리기 좀 허야겄다. 제일 잘 뛰니께잉?”
청바지에 남방 셔츠를 입고 뛰어도 되려나. 뭐, 늘 이러고 뛰어다니니 관계는 없겠지. 진혁이 박재승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야, 진혁아. 자, 봐봐이-. 저기 뵈는 슨생님이 깃발을 올리먼 출발허는 겨. 알었지? 사내새끼가 떨지 말구! 심호흡 혀, 심호흡!”
“네.”
어찌된 셈인지 진혁보다 박재승 선생님이 더 긴장한 얼굴이었다.
진혁은 아무렇지 않은데.
지역 예선. 각 학교별로 선수들의 100미터 기록을 측정하는 것으로 예선이 시작되었다. 어차피 모든 학교가 전용 트랙이 없는 모래 운동장이기에 조건은 비슷하다. 그리고 군 예선을 주최하는 학교의 육상부 교사가 모든 학교를 방문하며 기록을 체크하기에 분쟁의 소지 또한 없었다.
군 예선을 주관하는 학교의 체육 교사 김영태는 손진혁의 폼이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초등학생이 아닌 중학생으로 생각될 만큼 키가 컸고 몸매는 균형이 잡혀 운동선수로 보였기 때문이다.
‘별일이네. 이런 시골에 저런 애가 있어?’
그렇다고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지역 내의 유망주에 대해 모두 알고 있는 김영태였다. 재능이 있는 학생이었다면 자신이 모를 리 없다. 어디까지나 주최측 요청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하는 측정일 뿐이었다.
진혁이 엄지와 검지를 벌려 출발선에 댔다. 원래는 총소리를 듣고 출발해야 하지만 편의상 깃발로 신호를 주기로 했기에 고개를 들고 전방을 주시했다.
‘긴장은 옛날에도 안 했어.’
팍-!
깃발이 올라가고.
푸확-!
진혁의 발이 매섭게 땅을 박찼다.
두두두두두-!
김영태는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완벽한 자세였다.
명치까지 올리는 무릎과, 가슴 높이까지 올라오는 팔꿈치. 단거리를 위해 계산된 듯한 보폭까지. 거기다 말이 달리는 듯한 소리는 어떻고.
두두두- 찰칵-!
지축이 가까이에서 울릴 때 스톱워치가 눌렸다.
후우웅-.
한차례 바람이 지나갔다.
12초 52.
‘말도 안 돼!’
제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기록이었다.
청바지에 펄럭이는 남방을 입고 있는데. 신발도 평범한 운동화다. 불편해서라도 나오기 힘든 기록. 아니, 초등부에서는 전국대회 결승에서나 나올 수 있는 기록이었다.
“얘야, 한 번만 다시 할 수 있을까?”
“네.”
숨차 하는 기색도 없이 진혁이 출발선으로 돌아갔다.
사뿐사뿐 뛰는 걸음이 가벼웠다.
‘타이머가 잘못된 걸 거야.’
김영태가 급히 몸을 돌려 뒤에 있던 젊은 선생을 보았다.
그 동작이 워낙 빨라, 멍하니 있던 젊은 남자가 움찔 놀랐다.
“이철민 선생, 기록 좀 같이 재 줘.”
“네, 선생님.”
교차 검증. 김영태는 보조를 위해 동행한 교생 실습생 이철민에게 크로스 체크를 요청했다. 그러나 스톱워치의 문제는 아닐 터였다. 이미 전자시계와 비교하며 테스트를 했기에. 김영태도 기기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실제로 빠르긴 했어.’
출발선에서 자세를 잡고 자신을 노려보는 진혁과 눈이 마주쳤다.
움찔-. 김영태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초등학생이 100미터 구간을 전력 질주하면 심한 경우 구역질까지 한다. 물론, 평소 운동을 하지 않는 아이들의 경우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하여 100미터 달리기는 학생 보호를 위해서라도 곧바로 반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김영태는 다시 보고 싶었다.
‘몸부터 괴물 같잖아.’
가끔 그런 초등학생이 있다.
중학교 운동부 수준의 몸을 갖춘 아이. 또래 아이들에 비해 폭발적인 근력을 자랑하는 아이.
뜻밖의 인물이 선사하는 긴장감에 김영태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진혁은 진혁대로 묘한 흥분감에 사로잡혔다.
운동회 때나 체육 시간에는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적당히 뛰었지만, 기록을 위해 달린다는 뜻밖의 도전이 천재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이거 재밌네?’
두근두근-. 이번엔 스타트할 때 미끄러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모래가 너무 미끄럽다.
출발선에 손을 대고 고개를 들어 전방에 시선을 고정했다.
팍-!
깃발이 올라갔다.
파파팟-!
1차 도전으로 몸이 풀린 진혁의 다리가 더 힘차게 땅을 박찼다.
모래가 튀고 먼지가 일었다.
두두두두두-!
후웅-. 거센 바람이 지면에서부터 상승기류를 만들고 올라왔다. 더벅머리 김영태의 머리카락이 멋대로 헝클어졌다.
찰칵차칵-. 스톱워치가 늦게 눌린 감이 있었다.
스톱워치를 확인한 김영태와 이철민의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눈빛을 읽은 그들은 알 수 있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거짓말.’
열세 살.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