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 세상 밖으로 >
***
“처음 뵙겠습니다. 6학년 담임을 맡은 최응묵입니다.”
와하하-!
선생님이 어색하게 웃었고, 아이들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중간에 전학생이 한두 명 섞이고 전근을 오는 교사가 있기는 했다. 그래도 서른 명인 학급 인원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2학년, 4, 5, 6학년까지. 네 번이나 같은 분이 담임을 맡게 됐다.
옛날엔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강제로 읍내 학교로 전학을 갔던 진혁으로서는, 학급이 하나인 이 시골 학교에서 초등과정을 마치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회가 남달랐다.
“자, 반장을 뽑아야지? 반장 하고 싶은 사람 손 들어볼까?”
역시나, 손을 드는 학생은 없고 모두 손진혁에게 시선을 보냈다.
‘숙명인가.’
아이들과 선생님의 기대 때문에 항상 반강제로 반장을 맡아야 했다. 학기마다 반장을 바꾼다더니 바꿔주지도 않았다. 친구들은 그냥 진혁이가 하면 안 되냐고 선생님한테 매달리다시피 했다. 도대체 왜 하기 싫어하는 걸까.
차려, 선생님께 경례. 시골 학교 친구들은 그 구령을 하는 것조차 부끄러워했다.
얕게 한숨을 쉰 진혁은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손톱으로 책상만 긁었다.
그런데 그때 진혁의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손을 들었다.
최미경 어린이였다.
최미경의 팔촌 종조부 뻘이라는 최응묵 선생님이 반색했다.
“오-, 미경이 반장 해볼래?”
“부반장이요.”
에라이. 진혁은 들리지 않게 한탄했다.
어느덧 초딩 티를 벗은 최미경이 진혁을 보며 씨익 웃었다.
뛰어난 전투력으로 손진혁 옆자리를 원천봉쇄하는 이 어린이 때문에 손진혁은 다른 짝꿍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럼······. 반장은 손진혁, 부반장은 최미겨-.”
“저두 부반장 할래유!”
“저요!”
“나도 할랴!”
“스생님! 저두유!”
갑자기 부반장 선거 입후보가 과열 양상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인원이 30명인데 부반장 후보가 열 명이 나왔다.
최응묵 선생이 30센티 플라스틱 자를 대고 생명력 없는 빛깔의 4절지를 쭉쭉 찢었다. 그리고는 맨 앞자리 학생에게 나눠주니 물 흐르듯 종이가 뒷자리까지 전달되었다. 6년째 그리 사는 아이들이니 기계보다 기계적이었다.
“인원이 너무 많고, 서로 훤히 아는 사이에 공약 발표 같은 요식행위는 생략하자.”
와하하-.
교실이 한바탕 뒤집어졌다. 부반장이 공약이랄 게 있겠나. 어차피 공약을 내걸어도 이행하지 못할 게 뻔하거늘. 보통은 반장 선출을 위해 투표를 하기 마련인데, 반장을 고정해두고 부반장을 뽑기 위한 이색적인 투표가 진행되었다.
“이번에 2등 하는 친구는 2학기 부반장 하자. 종이 아껴야지.”
와하하-.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에 접어들어서일까, 선생님의 한마디마다 아이들의 웃음이 터졌다.
최미경이 15표로 부반장이 되었다. 아무래도 여학생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따른 것 같았다. 6표로 2위를 차지한 육성찬은 2학기 부반장이 되기로 했다.
“그럼 학생회장도 손진혁······.”
최응묵 선생님이 수첩에 메모하며 중얼거렸다.
그 소리에 뚱하게 앉아있던 진혁이 고개를 들었다.
맙소사. 학급이 하나여서 6학년 반장이 학생회장까지 해야 하는구나.
그래도 진혁은 잠자코 있었다. 어차피 하는 일도 없다. 학생회 간부니 뭐니 해도 그냥 초딩일 뿐이다. 21세기의 초등학교였다면 뭔가 했으려나.
어쨌든 전생에 치열하게 회사 업무를 볼 때와 비교하면 시골의 학교생활은 레크리에이션에 가까웠다. 손사래 치며 거부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뜻이었다.
“진혁이는 4월에 충남 수학, 과학 경시대회 준비 좀 하고?”
네.
드디어 평범한 6학년 생활이 시작되었군.
경시대회는 옛날에도 빼놓지 않고 출전해 줄곧 읍내의 태양초등학교에 최우수상을 안겼었다. 두 번째는 더 쉽다.
짝-!
최미경이 진혁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갈겼다.
“야! 손진혁 너어-는, 어떻게 된 놈이 선생님 말씀에도 대답을 안 하냐?”
최미경 어린이의 잔소리도 시작되었다.
진혁은 얼얼한 어깨를 쓸었다.
최미경 어린이 손이 아주 야무지구나.
반사적으로 출수할 뻔했다.
***
어디 박혀 있는지도 모르는 학생 수 115명의 작은 시골 학교에 현수막이 걸렸다.
〈경! 6학년 손진혁 충남 수학•과학 경시대회 최우수상 축!〉
〈경! 어동초등학교 충남 수학•과학 경시대회 3연패 축!〉
오늘도 어김없이 가장 먼저 학교에 도착한 진혁은 학교 진입로와 정문에 펼져진 현수막에 눈길을 줬다. 4학년 때부터 매년 참가한 경시대회.
이전 생에는 학교 이름만 달리해서 읍내의 태양초등학교에 플래카드가 걸렸었다.
훅- 불어온 봄바람이 야릇한 냄새를 실어왔다. 모내기를 앞두고 논에 친 퇴비 냄새였다. 소똥 바람을 받아낸 현수막이 한차례 펄럭였다. 그와 함께 진혁의 안 좋은 기억도 되살아났다.
...
〈경 〇〇고등학교 손진혁 한국대학교 법학과 수석 입학! 축〉
세상을 알고, 대응법을 알았다면 일찌감치 홀로서기에 도전했을 텐데, 겁 많고 어리숙한 아이였다. 중학교 때는 학교 도서실의 책을 외우다시피 하며, 석간신문을 돌리며, 친구 집을 기웃거리며. 어떻게든 다락방에 늦게 돌아가기 위해 애썼다.
마땅히 갈 곳 없던 인간의 귀소 본능 때문에도 그러했지만, 한 장밖에 없는 가족사진을 몰래 보던 것을 이모가 빼앗아 꼭꼭 숨겨두는 바람에 진혁은 다락방을 벗어날 수 없었다.
다락방을 벗어나기 위해, 양부모의 가족과 떨어지기 위해 기숙사가 지원되는 다른 지역의 명문 사립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저 플래카드가 걸린 후, 진혁보다 세 살 많은 양모의 둘째 딸이 속옷 차림으로 다락방을 찾았었다. 진혁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여자를 밀치고 뛰쳐나왔다. 눈여겨 봐둔 서랍을 뒤져 가족사진을 찾아낸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낡은 가방을 메고 터미널로 달렸다. 다락방과 영영 작별한 날이었다.
차부약국이라는 간판 밑에 쪼그려 앉아 밤을 지새웠다. 아이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진혁의 머리 위로, 비바람의 괴롭힘에 신음하는 현수막이 펄럭였다. 그러나 어찌나 강하게 잡아맸던지 세차게 울부짖으면서도 끝내 떨어지지 않고 버티었으니.
〈경 〇〇고등학교 손진혁 한국대학교 법학과 수석 입학! 축〉
진혁은 저 길다란 인쇄천처럼 죽지 않고 살아남으리라 다짐했었다.
...
“후우우-. 생생하구먼.”
악마 같았던 그 사람들도, 추위에 벌벌 떨던 기억도 현수막 하나가 마중물이 되어 생생하게 재생될 줄이야.
아마 그날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터미널까지 쉬지 않고 달렸었지.’
비바람을 뚫고 달리며 얼마나 큰 해방감을 맛보았던가.
어쩌면 그날의 일을 계기로 달리며 살아있음을 느끼고, 자유를 만끽했는지도 모른다.
사색에 잠긴 진혁을 여러 앳된 목소리가 건져 올렸다.
“손진혁 안녕?”
“회장 엉아 안녕.”
“진혁 오빠 안녕?”
그래, 친구들도 어서 와라.
등교 시간이 가까워지고 작은 단층짜리 학교가 아이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진혁은 여전히 마음속으로 대답 후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줬다.
최미경이 다다다 달려와 진혁의 옆에 붙었다.
함께 걸으려니 뒤에서 아이들이 재잘거렸다.
“저 오빠는 저렇게 말이 없는데 어떻게 회장을 하는 거야?”
“저 엉아는 진짜 사나이니께 말을 안 해두 다른 엉아들이나 누나들이 말을 잘 듣는 거여.”
“넌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회장 오빠랑 친해?”
“그럼. 저 엉아가 작년이 쭈쭈바두 사줬어-. 겁나 친허지이-.”
그랬던가.
진혁은 고개를 돌려 그 친구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의미를 던질지 모르는 일이니까. 아주 무더웠던 작년 여름, 100원짜리 딸기맛 쭈쭈바를 운동장에서 놀던 동생들에게 사준 기억은 있다.
마치 제 자랑이라도 들은 듯 최미경이 갸륵한 미소를 지으며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진혁아, 너 그거 가져왔어?”
그거? 상당히 포괄적인 대명사로구나.
그거라······, 오늘 미술 만들기 준비물은 우유팩 씻은 거랑, 가위, 스카치테이프, 색종이. 내일 있을 음악 준비물 리코더와 트라이앵글도 가져왔다. 일기도 썼고 도시락도 챙겨왔지.
“······ 특별한 착오는 없는 것 같다.”
뭐라는 거야, 이 애늙은이가.
최미경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그거 해왔냐고.”
진혁이 입을 앙다물고는 콧구멍으로 거세게 숨을 쉬었다.
뇌에 산소를 공급할 필요를 느낀 탓이다. 도대체 왜 대명사를 남발하는 걸까. 뭐, 불가피한 상황에서 가끔은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구체적 표현이 필수라고 생각했다.
과거에 팀원을 질책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보고나 회의 시에 불명확한 어휘를 남발하는 직원이었다.
- “이 차장님, ‘부분’이라는 표현 때문에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히 와닿지 않습니다. 디테일한 설명이 어렵습니까?”
- “아, 그 부분이 그러니까······ 제 말씀드리는 부분은, 고객이 원하는 이런 부분을 위해 이런 부분을 프로세스화 하는 부분으로, 고객의 그런 클레임적인 부분이나, 회사 이미지 부분에서도- 긍정적인 부분이-.”
-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건 모르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팀장조차 설득하지 못하는데 무슨 수로 경영진 승인을 얻어 프로젝트를 관철할 겁니까?”
잠시 머리가 찌릿거렸다. 지나치게 꼰대처럼 굴었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너무 독하게 몰아붙였다는 미안함과 함께 기계처럼 딱딱하고 융통성 없이 살았던 자신을 반성했다.
‘이 차장님 암 쏘 쏘리.’
나이도 진혁보다 두 살이 많았던가.
아무튼, 답답해하거나 추궁하기 전에 정확히 뭘 뜻하는지 물어봐야겠다. 그리 다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의 영혼이 잠시 외유를 나간 사이, 최미경은 제 이마를 짚었다.
이놈은 도대체가 뭘 물어보면 녹슨 경운기처럼 삐그덕거린다. 아빠는 농기구가 삐걱대면 망치로 막 때리던데. 손진혁은 몸이 돌덩이라 때리면 손만 아프다.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휴-, 됐다. 그냥 은정이한테-.”
“그게 뭐지?”
“응?”
“내가 몰라서 그래. 미경이가 말하는 그거라는 그게 뭐지?”
최미경 어린이가 주위를 살피더니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마치 봉숭아학당의 맹구 같았다.
“채흐응봉투.”
아, 또 뭐라고.
아침에 잘 준비해왔다. 집을 새로 지어 입식 생활을 하니 푸세식 화장실에 신문지 깔고 일을 볼 필요가 없어 좋았다. 아주 쾌적했지. 진혁은 신문물이 선사한 상쾌한 아침을 아련하게 회상했다.
그런데 깔끔떨고 부끄러움 탈 열세 살 과도기 어린이가 그런 걸 왜 묻는 걸까. 유독 진혁 앞에서는 털털하게 구는 최미경 어린이라지만 이건 좀 뭔가······.
“진혁아, 나 있지······.”
최미경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겁먹은 토끼처럼 여전히 두리번거리며.
“조금만 나눠주면 안 돼?”
이 과도기 청소년 미쳤나 봐.
최대한 올려 뜬 눈꺼풀로 진혁이 경이감을 표현했다.
살다살다 똥쓰를 나눠달라는 애를 다 보네. 개냐. 장군이도 그런 요구는 안 해.
“안 돼? 깜빡하고 물을 내려버렸어.”
아, 최미경 어린이네도 푸세식이 아니지. 납득 가능한 이유였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만회할 기회를 얻어야 한다. 한창 민감한 시기에 여러 친구들 앞에서 망신살 뻗치게 할 순 없지. 최미경 어린이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이며 명색이 소꿉친구 아니던가.
최미경 어린이가 상처받을까, 진혁은 애써 미소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거······, 봉투 주련?”
“고마워.”
진혁의 마음이 바뀔세라 최미경이 가방을 뒤적였다.
플라스틱 필통이 달그락거리길 잠시, 안에서 하얀 종이봉투가 나왔다.
외모만큼이나 똑소리나는 필체로 쓴 ‘최미경’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먼저 교실에 가 있도록 해.”
최미경 어린이에게서 채흐응봉투와 성냥을 받아 운동장 구석으로 향했다.
생식도 하지 않고 불량식품도 먹지 않아서일까, 진혁은 한 번도 구충제를 받은 적이 없다. 아마 최미경도 그 사실을 잘 아는 까닭에 부탁했을 테고.
‘살다살다 별짓을 다 하네. 똥을 기부하게 될 줄이야.’
그것도 여자아이한테.
이쪽 저쪽 다 합치면 거의 반백 년을 살았는데. 중얼거리며 진혁이 걸음을 옮겼다. 운동장 구석에 도착해 부스럭부스럭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이걸 다시 뜯으려니 속이 영 좋지 못하다. 아침밥도 두 그릇이나 먹었는데.
그때였다.
진혁의 고막에 오묘하고 신묘한 사운드가 감지되었다.
“흐끄으-으흐흥-흐냐으나응-.”
바로 근처의 야외 화장실에서 누군가 낑낑대는 소리였다.
오호라, 바람직한 어린이 하나가 아침부터 학문에 힘쓰는 모양이구나.
하-흡- 숨을 깊이 들이쉰 다음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코를 단단히 틀어쥐고 폐를 잠근 채였다. 3분은 거뜬하게 숨을 참을 수 있는 진혁이다.
“앙에 눙궁싱밍깡?”
“흐끄으-, 회장?”
안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응답했다.
진혁의 코맹맹이 소리마저 알아듣는 친구라니, 하늘이 도우셨도다.
‘옳거니.’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맞춤한 시간과 장소에 귀인이 있지 않은가.
이 또한 기연이로구나.